"벌써 26년이 지났구먼. 하기야, 그동안 별별 일이 다 있었지."
이반은 반쯤 축 늘어진 몸을 가눠서 그래도 의자에 걸터앉았다. 사람들은 그를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닌 이상 존칭으로 부르지 않는다. 그나마도 이반이라는 이름이 한 나라 사람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흔했기 때문이다. 이번 이야기에서도 그의 이름을 알려주진 않을 것이다. 딱히 특이한 인물도 아닌, 평범한 '로스케'이기에.
이반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키의 반만 한 냉장고에서 싸구려 보드카 1병을 꺼냈다. 이 중독성 있는 액체가 없었다면 그는 진작에 화병으로 세상을 하직했을 것이다. 뚜껑을 따서 병째로 한 모금 마신 다음, 뭔가 볼 게 없나 싶어 90년대에나 볼법한 구형 브라운관 TV를 켰다. 잠깐 지직거리는 잡음이 났고, 갈색 머릿결의 여자 아나운서가 화면에 나타났다. 그가 즐겨 보는 러시아 1채널이었다.
"또 골골거리는 대머리 노인네 얘기만 하는군."
어제부터 국영방송에서는 푸틴의 대선 출마를 주요 소식으로 내건 상태였다. 하지만 부정투표가 공공연하게 자행되는 선거 자체가 별다른 의미가 없었으며,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가 당선되지 않으리라고 믿는 사람은 1명도 없었다. 정 열세에 몰린다면 2011년 하원 선거에서 그랬던 것처럼 투표율을 조작해서라도 그가 당선될 것임을 그는 확신했다. 어차피 자기 외에는 이 나라를 이끌어 갈 수 없다는 아집에 가득 찬 인간이니 신경 쓰지 말자고 그는 생각했다,
"어으.... 벌써 취하는데."
고된 노동으로 몸이 혹사당한 탓인지 평소에 잘 취하지 않던 그도 약간의 취기를 느꼈다. 몸도 뜨뜻해지고 머리도 뜨뜻해진 이반은 갈아치울 때가 됐는지 연신 삐걱대는 창가로 갔다. 군대 시절에는 애증의 대상 그 자체였던 눈이, 전역한 지 한참 된 지금은 도리어 약간 낭만적으로 보였다. 그는 마음속으로 연인과 함께 눈이 쌓인 거리를 정답게 걷는 모습을 상상했지만, 현실 속의 그는 전형적인 40대 노총각이었다. 이반은 흰색 페인트를 칠한 것처럼 새 해얀 눈에 덮인 건물을 보다가, 우연히 일찍 들어선 대형 크리스마스트리를 발견했다.
"뭣이여? 지금은 성탄절이 아닐 텐데.... 아, 이런. 다른 나라 놈들 성탄절은 이때 즈음이었지."
이반이 사는 곳에는 내국인들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수의 외국인들이 다양한 목적으로 와서 살고 있었다. 이반은 그런 사람들을 볼 때면 자국민들도 떠나는 나라에 뭣 하러 외국인들이 오나 이상하게 여겼다.
"그땐 모든 게 잘될 줄만 알았는데...."
이반은 창고에 처박아 뒀던 당원증을 꺼냈다. 그는 아는 사람 사이, 혹은 홀로 생각에 잠길 때 나라 꼴 얘기가 나오면 그는 어김없이 26년 전의 '성탄절' 다음 날을 떠올리곤 했다.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경직되고 꽉 막힌 사회가 아니었다. 말마따나 수십 년 동안의 압제가 막 사라진, 말 그대로 '변혁의 물결'이 들이닥치던 시절이었다.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서 지금까지 하지 못한 말들을 홍수처럼 쏟아내기 시작했다. 한동안 금서로 지정되었던 책들이 이때를 틈타서 출판되었다. 사람들이 지금까지 겉으로나마 믿어오던 이념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외국에서 온 새로운 이념을 믿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게 바뀌던 시대였다.
발단은 그날 아침이었다. 10대 후반의 혈기 넘치는 소년이었던 이반은 번개같인 아침을 해치우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가 뒤통수를 억센 손으로 붙잡고는 집에 하나밖에 없는 라디오 앞으로 끌고 갔다.
'어머니, 갑자기 왜 그러세요? 사샤랑 약속 있는데.'
'이놈아! 지금 그딴 약속이 중요한 게 아니란다. 심각한 일이야.'
자세한 전후 사정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의 어머니가 무슨 나라 잃은 사람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는 것만 간신히 떠올릴 수 있었다. 끌려간 라디오 앞에서는 털털한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속보입니다. 오늘부로 벨라베자 조약에 따라 소비에트 연방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후의 대책에 대해선 보리스 옐친 대통령은 더 느슨한 체제인 독립국가연합 간의 협의를 통해 결정하겠다고 발표했으며......'
머릿속에 친구들과 싸돌아다니는 것밖에 없었던 그 시절의 이반에게 있어서는 어머니의 행동이 이상하게 보였다. 그냥 없어지면 없어지는 거지 뭐 달라지는 게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반 또래 아이들은 공산당을 틀니나 딱딱거리는 영감들의 집단이라고 생각한 지 오래였다. 더해서 그는 연방 해체의 영향에 관해서 전혀 몰랐다. 그냥 원래 있던 나라가 사라지고 내 나라가 들어서는 수준이구나, 싶었다.
'결국, 이 꼴이 났구나. 옐친 그놈이 일을 냈어....'
고위 장교던 이반의 아버지는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그는 부모님이 왜 저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몇 번이고 말을 걸어봐도 장례식에 간 사람처럼 꺼이꺼이 통곡만 하길래 멋대로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바깥의 풍경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지 미친 사람처럼 소리 지르며 돌아다니는 이상한 사람들이 많았을 뿐이었다. 그들이 내뱉는 소리도 각양각색이었다.
'옐친을 지켜라! 달러에 조국을 팔아먹은 고르비는 꺼져라!'
'모두 마음껏 자유를 누리십시오!'
'공산주의자들을 재판정에 세워라! 공산당을 타도하라!'
'만세! 만세! 우리가 이겼다!'
'이 빌어먹을 인간들은 뭣 하러 떼 지어 나와서 길이나 막는 거야..'
이반은 좋게 말하면 순수했고, 나쁘게 말하면 무식했기 때문에 그 말을 모조리 무시하고 사람들의 거대한 무리를 힘겹게 헤치고 지나갔다. 그때 이반의 머릿속에는 '사샤랑 빨리 만나야 하는데....'나 '노인네들 결정에 뭘 저리 야단법석을 떠는지 모르겠네'로 가득했다. 그러나 군중의 규모는 상상 이상으로 컸고, 그들에게 치이다 보니 원래 있던 곳과는 다른, 전혀 엉뚱한 곳에 와 버렸다.
'망할 좆빨이 새끼들!'
이반은 멀어져가는 군중에게 욕을 한번 갈겨준 다음 건들거리는 걸음걸이로 자주 가봐서 익숙한 공산당 지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오늘따라 더럽게 재수 없는 날이란 생각이 들었다. 일어나자마자 어머니와 아버지는 펑펑 울지를 않나, 사람 떼에 휩쓸리지 앟나, 나라 하나 없어졌다고 별벌 호들갑을 다 떤다고 이반은 마음속으로 불평했다. 그러는 와중에 이반의 마음 한구석에는 왠지 모를 불안감이 스멀스멀 생겨났다. 그가 살면서 유용하게 써먹는 몇 안 되는 과학적 법칙 중 하나가 '작용에는 반드시 반작용이 존재한다'였다. 노턴인지 누턴인지 모를 사람이 고안한 그 법칙이, 이상하게도 지금 떠올랐다.
나라가 망하면 반드시 그 여파가 있을 것이다. 그럼 그게 무엇인가? 노는 쪽에 특화되어 있던 이반의 뇌 속 처리장치로는 답을 알아낼 수 없었다. 물론 이반이 알아내지 못해도 머지않아 그는 다른 방법으로 답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일련의 사태로 인해 복잡해진 머릿속을 뒤로하고 이반은 이왕 이렇게 된 거, 평소 아버지와 알고 지내던 2등 서기장에게 뭐라도 얻어먹으려 발을 따르게 굴렀다. 대략 100미터쯤 떨어진 곳에 보이는 공산당 지부는 오늘따라 유독 한산해 보였다. 원래대로라면 저곳에 근무하는 사람들 외에도 당성 타령하며 뻔질나게 드나드는 이들이 많아야 할 터였다. 그러나 지부 앞에는 산처럼 쌓여 있는 뭔가를 치우는 늙은 청소부 1명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저 시뻘건 수첩 같은 건.... 당원증 같은데.'
이반은 그제야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부모님이 언제나 가지고 다니라고 신신당부를 하던 그 당원증이 헌신짝처럼 버려졌다. 머리에 든 지식이 별로 없는 이반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평소대로라면 어딘가로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갔을 것이다. 하물며 그 옆에는 마르크스와 레닌의 저서가 차곡차곡 쌓여서 쓸쓸히 눈을 맞고 있었다. 거기에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지부 입구는 쇠사슬과 자물쇠고 굳게 잠긴 상태였다. 그는 이런 부조화를 견딜 수 없어 늙은 청소부에게 달려갔다.
'할배, 여긴 왜 이 꼴이 된 거예요? 여기가.. 그, 공산당 지부 아니었나요?'
'서기장이라도 찾으러 왔니? 그렇다면 너무 늦었단다. 이 지부는 어제 자로 폐쇄됐어. 고르바초프도 사임했고, 연방도 해체됐으니 더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진 게지.'
노인의 한숨 섞인 대답을 듣고서 이반은 어제 들었던 라디오 방송의 내용을 힘겹게 떠올렸다. 어떤 사람이 연설하는 걸 내내 틀어준 적이 있었는데, 고르바초프의 목소리였다. 그는 연설 내용을 되새겨 봤다.
'친애하는 인민, 동포 여러분. 독립국가연합이 결성되었으므로 저는 이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대통령직을 사임하겠습니다. 저는 원칙에 따라 결정을 내렸습니다. 저는 연방 국가들의 독립과 주권을 지지합니다. 동시에 저는 이 나라의 통합과 보전을 지지합니다. 하지만 그 발전은 다른 길로 가 버렸습니다. 이 나라를 해체하고, 나라를 통치하지 못하도록 하는 쪽으로 말입니다. (중략) 물론, 피할 수 없는 실수가 있었고, 저희가 한 많은 일이 더 잘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만간 저희의 노력은 결실을 볼 것이고, 저희는 번영하고 민주적인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저는 모든 사람이 최선을 다하길 바랍니다.'
이반은 몰랐다. 고르바초프의 사임이 사실상 연방 해체의 신호탄이었다는 것을. 그는 몇 분 동안이나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그동안 자신이 추구해 왔던 가치가 부정당하는 걸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반도 그중 하나였다. 며칠 전만 해도 그를 친절하게 맞아주던 이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어디로 갔는지 말도 해주지 않았다.
'나라가 망한다는 게, 이런 거였어?'
이반은 지부의 붉은 벽에 스프레이로 써진 글자를 하나하나 읽어봤다.
'공산주의의 숭고한 이상은 피투성이다. 이건 사기다.'
'당신네의 시대는 이제 끝났어! 지금은 당신네가 해온 일의 책임을 져야 할 때지!'
'이제 너희들이 수용소로 갈 차례다!'
모든 게 한순간에 뒤바뀌고 있었다. 겉으로나마 믿던 이념이 송두리째 사라졌다. 마음 속에 쌓인 건 많았지만, 그걸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이반은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당연히 그는 답하지 못했다. 도리어 혼란스러움만 가증될 뿐이었다. 늙은 청소부는 그런 이반을 이상하게 여기고는 물었다.
'당원증 반납하러 온 게냐? 여기에 두어라. 어차피 내가 치워야 할 것들이니.'
노인은 쓰레기처럼 방치된 당원증 더미를 가리켰다. 이반은 당원증이 든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으려고 하다가 관뒀다. 이걸 버린다면 뭔가 소중한 걸 잃을 것 같았다.
'아니요. 계속 가지고 있을 거예요.'
이반의 대답에 노인은 의외라는 듯이 웃었다.
'그래, 가지고 있거라. 내가 살아있을 땐 불가능하겠지만, 언젠가 사람들이 다시 공산당을 찾을 때가 있을 게야. 그때가 온다면, 너같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서겠지.'
과거의 이반은 늙은 청소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이렇다 할 만한 아무 생각도 없이 멍하니, 하염없이 달렸다. 철거되는 레닌과 스탈린의 동상을 봤다. 땅에 처박힌 낫과 망치 모양의 조형물 앞에서 하염없이 우는 노파도 봤다. 식료품점으로 가서 정신없이 음식을 챙기는 여자도 봤다.
그는 집 앞에서 지쳐 쓰러질 때까지 정신 나간 이처럼 달렸다. 명확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달리고 싶었다.
'그땐 그랬지.... 아까웠어.'
이반의 성탄절에 대한 짧은 추억은 이걸로 끝났다. 연방 해체 이후 일어난 일들을 본다면 아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지나가 버린 일은 되돌릴 수 없지 않은가. 겨우 그 정도에 무너졌다면, 겨우 그 정도인 거다.
그는 먼지가 폴폴 쌓인 창고에 당원증을 던져넣었다.
ㅠㅠ - dc App
필력 ㅎ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