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들의 대회장은 언제나 시끄러운 법이다.
특히나, 당원을 위시한 모든 인민들은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조합주의자들의 정당의 대회장은 더욱 시끄럽다.
연례적인 회합이 아니라 소위 '중대 발표'를 전달하기 위한, 특별한 회합이라면 더더욱 시끄럽다.
젊은 무정부주의자, 중년의 조합주의자. 심지어 늙은 극단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까지 모두가 이곳에 모여있였다.
이러한 소란과 토론, 논박이나 궤변의 시간은 곧 단상 위로 사회당의 열두 대표중 하나인 케네스 에버라드 위원이 올라오자 멈추어졌다.
모두가 나이든 위원의 입을 지켜보았다.
위원의 말은 처음에는 지극히 평범한 인사와 자유에의 동경으로 가득찬 서론이었다. 모두가 평등하고, 모두가 자유로운 세상. 미개와 무지를 몰아내고 마침내 찾아올 이성의 시대를 향한 이상이 케네스 위원의 달변을 통해 아름답게 가공되어 모두에게 전해졌다.
한 20분 즈음. 젊고 혈기넘치는 당원들이 슬슬 이 '형식적이고 귀족적인 수사로 점철된 서론'에 대해 불만을 품으려는 찰나에 케네스 위원은 절묘하게 본론으로 넘어갔다.
"...사회당의 대표들은 7일간의 회의끝에 앞으로의 향방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위원은 여기서 잠깐 말을 멈추었다. 그가 말을 멈춤과 함께, 대회장은 완전한 침묵으로 물들었다.
"작금의 현실을 미루어보아, 오랜 노선에 대한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다는것에 대표들 모두가 동의했습니다. 이에 따라, 부패한 자본가들의 나라이자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알레이온 공화국의 온 대양에 뻗친 마수를 걷어내기 위하여..."
이쯤에서 사실상 적국으로 넘어와 또다른 조합주의의 동료들과의 화합을 꽤하던 CGT 소속 연맹원들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국제주의를 지향하는 조합주의자들의 대회장에 있어서, 적어도 아직까지 특정 국가를 비난하는 말은 없었던것이다. 모든 국가들을 아우르는 '봉건적 국가체계 그자체'라면 모를까.
"잠깐이나마 위기에 처한 우리의 조국을 위하여 투쟁하기로 결의하였으며, 동시에 전쟁기간동안, 그리고 향후에도 충돌을 초래할 폭력 노선 역시 화합을 위해 배제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정적.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케네스 위원은 서둘러 대회장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얼마안가서 웅성임이 퍼져나갔고, 곧 폭발적인 고함이 되었다.
과격한 파벌에 속한 당원들은 거의 발광하듯이 소리를 질러대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결정은 혁명을 배반하는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세계 노동자 연대의 위대한 이상을 '조국'이라는 미명하에 분쇄해버렸으며,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 획득 수단을 '화합'이라는 단어를 통해 격하시켰을뿐.
"이 배반자들! 수십년동안 투쟁해온 이유인 조합주의를 배반하는 귀족들의 개들!"
"전쟁은 피할수 없으며, CGT의 동맹 파업도 기대하기 어렵다! 일단 알레이온인들을 거꾸러트린 후에 우리 조국에서 조합주의를 이룩해야한다고, 이 철부지들아!"
"너희들은 국왕과 그 주변의 간신에게 우리 모두를 팔아먹은거야!"
"무엇을 위해 애국자를 자처하는거지? 전쟁중에 피를 흘리는것은 프롤레타이트뿐이야!"
"철부지라고? 그 철부지들이 투쟁하여 여기까지 온것도 모르나? 여기서 멈추면 끝이다!"
"우리들의 조국은 적들로 둘러싸여있고, 위기에 처하여있다. 일단, 조국을 구해야한다. 그다음이 조합주의다!"
"무산계급에게 조국은 없다고, 이 멍청이들아! 있다면 조합주의 조국뿐이지! 너희들은 국제 노동자 연맹과 노동계급 그자체를 배반한거야!"
"네놈들은 노동자 계급의 배신자들이야!"
"덜떨어진 이상주의자놈들!"
"이 결정이 없었으면 네놈들 때문에 우리가 파멸했을거라고! 아직도 경찰서에 화염병을 던지고 국왕 암살 기도나 하며 지하에 숨어있는 길이 혁명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하나?"
"추밀원과 민의회에서 자리를 얻어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하는것이 훨씬 더 쉬운 길이라고! 정말로 폭력 혁명으로 이 거대한 나라를 뒤엎을 수 있다고 생각했나?"
"대신 돼지같은 귀족놈들의 권리는 훨씬 더 크게 보장해주는것에도 동의하겠지! 네놈들은 우리 계급을 배신한거야!"
"혁명을 배반한 수구파놈들!"
정적으로 뒤덮였던 대회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사회당의 대표들은 대회장을 빠져나갔다. 당 수뇌부의 결정이 번복되는 일은 이제 없을것이다.
"비밀 경찰에게 얼마나 받아 쳐먹은거냐, 이 사생아 새끼들아!"
짧게 깎았다가 대충 자라나 귀 밑에 닿은 부스스한 검은 머리가 돋보이는 여성당원이었다. 아리아나 브레너. 극단주의 그룹 안에서 여성해방을 주창하던 주목받던 청년 당원이던 그녀는 이 말을 마치자 마자 대회장을 박차고 나갔다.
그리고 그녀가 시발점이었던듯, 사회당 수뇌부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못한 수많은 원칙주의자들과 극단주의자들이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대부분은 아무 말도 없이 씨근대며 나왔지만, 몇몇은 그녀와 비슷한 논조의 비난을 퍼부으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모든 인민들을 대표한다던 사회당의 대회장엔, 온건주의자들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신문들은 하나같이 사회당의 전향을 대서특필했다. 국왕은 사회당의 간부들과 만나 악수를 나누었으며, 치하의 말을 건네었고, 추밀원에도 그들의 자리를 마련해주겠노라 하교했다. 왕궁에 초대해 식사를 같이 한것은 덤이었다.
노동자들과 함께 파업 현장에 나가던 중년의 당원들, 숯검댕을 묻히고 망치를 높이 들던 자들은 이제 정장을 차려입은채 추밀원 의사당의 푹신한 의자 위에 앉아 온건 노선을 주창했다.
이 전향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자들, 대회장에서 박차고 나온자들은 온건파와 연을 끊으며 사회당 역시 박차고 나갔다. 그들은 '세계 노동자 연대 델러드 지구당'을 결성했고, 폭력 노선과 반전이 확고한 당론임을 천명했다.
그러나, 원칙주의자들의 발버둥이 무색하게도, 전국에 내려진 2단계 동원령은 예정대로 수행되었으며, 전시 노동 시간 연장령 역시 큰 반발 없이 받아들여졌다. 이미 사회당이 거의 대부분의 연합왕국 내 노조들을 장악하고 설득해버렸기 때문일것이다. 진정한 조합주의의 계승자를 운운하던 극단주의자들과 원칙주의자들의 말에 따라준 노동자들은 몇 되지 않았다.
어쨌건 궐기한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과 최저 임금 보장, 그리고 전쟁 반대를 주장하며 사회당원들과 경찰들, 그리고 고용주들에게 애를 먹이기 위해 노력했다.
사회당은 옛날의 동지들을 극좌 모험주의자라고 규탄하며 왕실과 협력했다. 전쟁이 코앞에 다다른 지금에 와서 초를 칠수는 없는법이었기에, 그들은 왕실을 뒤엎을 혁명의 거름으로 써야했을 비밀스런 민병대들을 동원해 델러드 지구당의 당원들과 지지자들, 그리고 동조 파업 분자들을 사냥했다. 지구당원들은 이에 지지않고, 화염병을 공공건물에 던지고 거리를 조그만 전쟁터로 만들며 맞섰다. 조합주의자들끼리의 총질이었다.
경찰들은 이 와중에서 조합주의자들이 줄어든다는것에 매력을 느꼈는지, 큰 개입을 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정부와 협력하고 있는 사회당쪽에 확실히 기울어서 무기를 지원하고 필요하다면 병력도 지원해주긴했으나, 적극적인 행위는 없었다.
그리고 파업은 한달을 채우기 직전이 되었다.
왕실과 귀족들은 확실히 초조해졌다. 사회당원들도 덩달아 초조해졌다.
드워프들은 국경에 8만의 병력을 증원시켰고, 고텐하펜 항에선 공화국의 대양함대가 출격하여 에네데 만을 순회하고 있었다.
또한, 수십만의 연합왕국의 청년들이 국경 주변으로 빠르게 실어날라졌고, 탄약과 총검을 지급받았다. 그러나, 파업들은 이러한 일련의 작업의 속도를 느리게 만들었다. 소모는 폭증했으나, 생산은 오히려 대폭 하락했다.
이는 아주 좋지 않았다. 국가의 명운이 걸린 일 아니던가. 만만찮은 적들이 문 앞에 와있는 와중에 내부의 소동은 있을수가 없을것이다.
국왕은 파업을 이끌어나가는 공화국의 간첩들과 그에 선동된 극단주의자들을 체포할것을 명령했다.
적지 않은 숫자의 경찰 간부들이 즉결 처분권을 부여받았다.
이는, 국왕의 명령으로부터 며칠 되지 않은 시절의 이야기이다.
"피곤해보이는군요, 동지."
"그래보입니까?"
CGT의 파견 연맹원, 아리스티드 기욤은 지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는 새벽 내내 단 열다섯명의 노동규찰대와 함께 일터로 나오려던 사회당 간부들과 노동자들을 저지했다. 중간중간엔 총성도 오갈정도로 험악한 저지였다.
"미안하군요."
간신히 어깨에 닿은 흑발. 화약가루와 석탄가루로 거뭇거뭇해진 피부. 사회당의 마지막 대회장에서 가장 먼저 자리를 박차고 나갔던 젊은 무권위주의자, 아리아나였다.
"미안할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브레너 동지. 조합주의자들에게 조국은 없습니다. 그런고로, 같은 나라를 두었다고 여겨지는 사람의 배반과 동지 사이엔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지요."
"어쨌건 저지하지 못했으니까요."
약간의 명성만 있다뿐 영향력과는 거리가 먼 청년당원이 입에 담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글쎄요..."
기욤은 확실히 지쳐보였다.
"그럼, 이만 교대하지요."
팔에 맨 붉은 완장이 유독 탁해보였다.
"눈이라도 붙여보아야겠군요.."
기욤은 낡은 갈리시아제 전장식 라이플을 아리아나에게 건네주었다. 신식무기라면 열을 올리는 알레이온 장교단이 본다면 비웃을정도로 구닥다리 라이플. 그러나 그들에겐 이것도 귀중했다.
"동지의 라이플입니다만?"
아리아나는 라이플을 손으로 살짝 밀쳤다.
"자는 사람에겐 라이플은 필요없지요. 그리고 적어도 제 생각으론, '제'물건은 없습니다. 모든 노동자들의 소유물은 있지요."
"사상 차이?"
"그런가보네요."
어쨌거나, 기욤은 정통적 알레이온계 조합주의자였고, 그녀는 극단주의자이자 페미니스트요 무권위주의자였으니까. 그녀는 사유재산을 약간이나마 인정하자는 축에 들었다. 복잡하여 잘 모르겠지만, 비슷한 느낌을 주고, 그러나 확실히 다른 사상들을 품는 사람들이었다.
기욤은 라이플을 그녀에게 안겨주었다. 아리아나는 감사의 표시로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망치와 철봉을 든 노동규찰대가 지키고 있는 공장의 정문으로 나아갔다.
공장 근교의 파출소에 극단주의자들의 화염병이 날아든 이래로, 지크하트 왕실의 수사슴 표장을 단 경찰들은 무장한 사회당원들과 함께 시내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공장 주변에도.
아리아나는 노동규찰대원들을 보았다. 너덜너덜하고 지친 노동자들. 차라리 파업을 중단하는게 현명한 선택이지 않았을까 하고 의심하는 피곤한 사람들. 얼마나 파업을 지속시킬 수 있을까.
그녀도 마찬가지로 의심에 차게 되었고, 지친 눈으로 조용한 공장 밖 거리를 보았다. 꼬박 일주일간 총성이 오갔기에, 인기척은 거의 없었다.
일자리로 돌아오려는 사회당계 노조의 노동자들은 라이플이 무서워서인지 돌아오지 않았으며, 가끔 보이는것은 사회당 소속의 민병대나 왕실에 충성하는 경찰들이었다.
그렇게 우두커니 밖을 바라보며 세시간 가량을 버텼다. 가끔은 쉿쉿 소리를 내는 총탄이 그들의 몸 주변을 흝고 지나갔지만, 맞추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들의 대응 사격 역시 마찬가지로, 사람을 죽이지 못했다.
그들에겐 무의미한 순간이었다. 파업은 불완전하게, 반쪽짜리로 지속되고 있을 뿐이었다.
배가 아주 많이 고파질 즈음에야 공장의 화로에서 대충 구운 감자와 고구마가 그들에게 주어졌다. 고작해야 한사람당 하나씩. 아리아나는 가장 작은것을 골랐다. 씹을때마다 석탄가루임이 분명한 꺼끌꺼끌한 무언가가 그나마 남아있는 구운 감자의 풍미를 흩트렸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공장의 정문을 지켰다.
기욤과 몇몇 노동규찰대원들이 다시 정문으로 돌아올 즈음에서야 변화의 기미가 보였다.
하얀 깃발을 흔들면서, 경찰의 간부들과 군 장교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양복을 멋들어지게 빼입은, 이곳 공단을 도맡은 헤슬&퐁크사의 간부가 틀림없는 사람도 있었다.
"쏘지말아요, 동지들. 협상단입니다."
*
"일자리로 돌아오는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되오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아리아나는 용케도 극단주의자답지 않게 존대어들을 생략하지 않고 말했다. 상황의 불리한것과 유리한쪽의 심기를 건드리는것은 좋지 않다는것 정도는 알았으니까.
"당신들은 투항하고 순순히 체포에 응해야 한다, 라는 가장 까다로운 조건은 말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반대로군."
에버라드 경감이 턱짓으로 지구당원 몇몇을 가르켰다.
"체포면, 죄목은?"
"불법 무기 소지죄, 반역죄, 국가내란죄, 손괴죄. 확실한것만 이정도."
아리아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말도 안되는 소리들뿐이군요."
"선택의 여지가 있습니까?"
에버라드는 허리춤에 찬 권총을 툭툭 두드렸다.
"곧 전쟁이 벌어질것일 참입니다.. 나라의 젊은이들이란 젊은이들은 다 전선에 나가고 있으며, 그렇기에 석탄 한덩어리 총탄 한발이 부족한 시대라고."
"그러면 더더욱 파업을 강행해야겠군요. 왕과 귀족들의 전쟁놀이에선 노동자들만 죽어나갈뿐이니. 그렇게 해서라도, 전쟁은 막겠습니다."
카슬하드 경감은 기가찬다는듯 혀를 찼다.
"이 시국에 헛소리는..."
"경감님...!"
카슬하드에게 딴지를 건것은 헤슬&퐁크의 협상 대표 찰스 데번셔였다. 그로서는 이렇게 투닥대며 낭비하는 시간을 최대한 아껴 공장을 정상화하고 돈을 벌어야 했으니, 괜한 막말로 협상이 틀어지는 씨앗을 뿌려대는것만은 막아야 했다.
"아, 으흠."
카슬하드 경감은 데번셔 부장의 언질에 목을 가다듬으며 입을 다물었다.
"이봐."
협상단중에서 가장 선임자라고 볼 수 있는 에버라드 경감이 낮게 말했다.
"218만이다. 218만. 남방 전역에 87만. 북방 전역에 64만. 예비대로서 67만. 파업이 지속되면, 이들도 개죽음을 당할 수 있다고."
그는 이제 인내심이 사라져버린듯, 거의 이를 악 물고 존대어들도 생략하며 말했다."
"어찌되었건."
아리아나는 그것은 아무렇지도 않다는듯 말했다.
"우리는 우리의 노선을 지킬것입니다."
"허."
여태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노딩턴 소령이 콧방귀를 뀌었다. 이해가 되지 않을터였다.
"고집 부리지 않는게 좋을텐데."
"수도의 공안수사국 뱃지를 달고 계시다면 우리가 어떻게 나올지 다 알고 있으실텐데."
노동 규찰대원중 한명이 말했다.
"... 그렇다면 좋다.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군."
에버라드는 차갑게 대답하며 의자를 뒤로 끌었다.
"겨... 경감님!"
데번셔 부장은 당황하여 에버라드를 바라보며 뭔가 말하려고 하였다.
"파괴된 시설은 궁내부에 청구하시오. 국왕 폐하께서 파업으로 피해를 입은 기업들은 내탕금으로 보상해주겠다고 약속하셨소."
그러나 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전시에 보상금이 제대로 지급되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바보이다.
"국왕 폐하가 보증하셨소."
그러나 이 시국에 경찰 간부와 장교 앞에서 국왕의 약속을 거짓되었다고 단정지어버리는것은 더 바보일것이다.
"... 이런."
어쩔수가 없다. 데번셔 부장 역시 제복을 입은자들을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투항의 기회는 아직 남아있다. 내일 아침까지는 기회를 주지. 공장은 덜파괴되면 덜파괴될수록 좋으니까. 그러나 그 이후는..."
에버라드 경감은 그 말을 남기고 회의실에서 사라졌다. 다른 협상단원들은 그 다음이었다. 다들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어쩌지요?"
노동규찰대원중 하나가 말했다. 정말로 궁금해서보다는, 불안감의 발로일것이다. 이미 모두가 어떻게 될지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지켜야죠, 동지. 우리의 원칙을 지켜야죠. 우리의 신념을 지키고."
"죽는다면..."
아리아나는 그 노동규찰대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두려우시다면, 가도 좋아요, 동지. 모두가 죽을 필요는 없어요."
"동지는요?"
"저는..."
아리아나는 말끝을 흐렸다.
"혁명이 배반당하는 시대에, 누군가는 원칙을 지키려다 죽었다는 사실이 필요해요. 누군가는...."
그녀 역시,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다.
*
아리아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모두는 아니더라도, 많이 죽었다.
신식 라이플과 총검으로 무장한 병사들은 틈도 주지 않고 들이닥쳤다. 아침까지 기회를 주겠다는 말은 대충 던진 거짓말이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일개 경감의 약속은 굳이 윗선에서 지켜줄 필요를 못느꼈을지도.
각목이나 구식 머스킷 권총을 들고 덤비던 노동규찰대원들을 쏘아 죽였다. 또는 찔러죽였다. 그들은 신화에 나오는 악의 군단처럼, 포로따위는 필요없다는듯이 그저 달려들었다.
기욤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죽었을것이다. 더 나쁜 경우에는, 붙잡혔을것이다. CGT의 연맹원인게 밝혀졌다면 아주 높은 확률로 병사들은 생포하려 들었을것이다. 그 경우에는... 연합왕국의 산업을 마비시킨 공화국의 선동자 간첩으로 몰려, 넒은 왕국 어디에나 있는 공개 처형장에서 갈기갈기 찣겨죽을것이다.
그녀의 주변에는 서류 몇상자와 방금전까지 피를 뿜어내다가 죽은 파업 노동자의 시체만이 있을 뿐이었다.
혼자. 그래, 철저히 혼자였다.
손에 남은것이라곤 기욤에게 넘겨받은 구닥다리 전장식 라이플과 리볼버에 조그만 수류탄. 그리고 감자 반조각. 그나마 위안인것이라면, 이곳은 서류 창고였고, 매우 좁다란 문과 문 바로 앞의 계단이 있으며, 어설프게나마 엄폐할 종이뭉치들도 많았다는것 정도뿐이었다.
달카닥.
문이 열렸다.
그녀는 라이플을 거머쥐었고, 쏘았다. 탕, 하는 소리가 나자마자 사람에서 시체로 변해버린 병사가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그 다음에도 누군가가 들어오려하자, 그녀는 이번에는 리볼버를 들었다. 좋다고 말할수는 없는 사격실력이었지만, 거리가 너무 가까웠기에 상관없었다. 또다시 병사 두명이 시체가 되어 계단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 안에 있나?"
"아리아나 브레너! 드레스테베 공단 조합의 임시 위원장이다!"
"허. 구면이군. 난 카슬하드 경감이다."
"난 지금 수류탄을 들고 있다! 들어온다면 터트리겠다!"
"뻔한 협박이야, 브레너양."
카슬하드 경감은 조롱이라도 하는듯, 유서가 꽤 깊은 존칭을 붙여가며 아리아나를 불렀다.
"그러지말고 이리 나와."
"....."
경감은 문을 톡톡 두드렸다.
"살아야 그 잘난 조합주의를 살릴 기회라도 있지 않겠나? 사회당에라도 다시 들어가던가."
무의미한 말이었다. 경감 자신도 무의미한 말임을 알것이다. 국왕은 이미 파업의 주동자들을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었다. 조롱의 의도가 다분했다.
"..."
대답은 없었다.
"좋아! 이봐, 병사들! 마법 전담 하사관 불러와서 이 빌어먹을 문을 틀어막아. 공기가 못들어가게 틈도 없이 틀어막아! 수류탄 터져도 별일 없게 방어진도 설치하고!"
이곳에 진입할때 설계도쯤은 챙겨왔다. 배수구도 환풍구도 없는, 서류 보관고라기에는 조금 멍청한 방에 틀어박혀있는것이 바로 저 멍청한 조합주의자 철부지였다. 문만 완전히 밀봉한다면, 굳이 쏴죽일 병사들을 들여보내지 않고서도 숨이 막혀 죽을것이다. 방금전 들여보낸 병사 셋이 좁디 좁은 문간에서 죽어버렸다는것을 생각해보면, 확실히 현명한 방책이었다.
".... 망했네."
아리아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아니, 사실 망했다고 할것도 없지. 목적은 결국 원칙을 지키기 위해 죽은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역사에 박아넣는것이었으니까. 그것이면 족하다.
이런 시대에, 원칙주의자가 죽지 않으면 누가 죽어야 하는가.
그녀의 생각엔, 그러했다. 의미있는 죽음이겠지.
그래도 숨이 막혀서 켁켁대다 죽는것은 그리 좋지 않은 모양새일것이다. 고통스럽기도 할것이고. 그녀는 수류탄을 꺼내들었다. 순식간에 찢겨져 죽을테니 아프지 않을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그녀는 끈을 잡아당겼다.
후둑, 하는 소리를 내며 낡고 누런 끈이 풀려나왔다.
그러나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수류탄은 터지지 않았다.
"... 뭐야."
이런걸 흔히 불발탄이라고 하던가. 하긴, 모양과 보관상태로 보아서는 지난번의 아벨란 전쟁때 생산되었을법한 수류탄이었으니 터지지 않을법도 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천천히 리볼버를 위로 치켜들었다.
뜬금없게도, 눈물이 살짝 흘렀다. 숨도 턱 막혔다. 산소가 많이 부족해서는 아닐것이다. 그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으니까.
왜 갑자기 눈물이 나는걸까. 배반당하고 뒈져버린 혁명에 대한 애도? 아니면 그냥 여기서 죽어버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애도? 두려움?
이제와서 후회해봐서 바뀌는건 없다는것을 그녀는 매우 잘 알았다. 애초에, 적어도 이성적으로 그녀는 후회하지 않았다.
낡은 리볼버의 방아쇠가 천근과도 같이 무거웠다.
탕.
카슬하드 경감은 잠깐 깜짝 놀랐다. 시체의 얼굴을 확인하던 귀찮은 작업을 하다가 갑자기 뒤에서 총성이 들린다면, 그것이 자신을 향한것이라고 착각할수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곧 그는 그 총성이 벽을 몇개쯤 뒤에 두고 있다는것을 깨닫았다.
그리고 곧 방금전의 대화릘 기억해내어 일단 마음의 안정을 찾았으며, 곧 총성의 원인을 금방 짐작해내었다. 아마도 자살일것이다. 산소가 거의 떨어져가는 와중이었을테니.
그는 시체들의 얼굴을 확인하는 작업에 다시 들어갔다. 얼마 걸리지 않을것이다.
*
오늘은 드레스테베 공단에 있어서 꽤 영광스러운 날이다. 개전한지 8주가 지났고, 공화국군은 마레트선을 포기하고 패주하고 있었다. 또한, 연합왕국의 수많은 공단중에서 가장 높은 생산량을 올린것도 바로 이곳이었다. 태자의 방문이 예정되어 있었고, 노동자들에게는 궁내부에서 직접 지출한 돈으로 꽤 비싼 음식들이 제공되었으며 보너스가 지급되었다.
가까워 보이는 승전과 두둑한 포상들은 노동자들을 들뜨고 활기차게 만들었고, 동시에 이곳에서 언제 파업이 있었냐는듯 평화로워보이게 만들었다.
굴뚝에서는 짙은 연기가 뿜어져나왔고, 기계들은 활기차게 돌아갔다.
많은 사람들이 불과 반의 반년전까지 계속되고 있었던 파업이 존재하지 않았다는듯 굴었다. 철부지 대학생들 몇이 '최후의 극단주의자들'의 흔적을 찾겠답시고 몇번 공단을 들쑤신것만 빼면 극단주의자들의 흔적은 - 혁명을 배반하지 않겠다던 원칙주의자들의 마지막 단말마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것 같았다.
사회당의 온건주의자들은 전쟁에 열렬히 찬동하며 노동자들에게서 전쟁채권 구매를 유도했고, 케네스 에버라드 위원은 이제 추밀원 총서기가 되어 조합주의의 불씨를 이어가고 있다고 자화자찬하고 있었다.
남기게 된것은 많지 않았다.
너무 너무 잘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