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민공화국과 그 창시자격인 여운형에 대한 미군정의 첫 인상.그리고 해방 직후 조선의 "최고권력자"가 되었던 여운형의 행보.

"항복 소식을 듣자마자 모든 조선인들은 조국 독립을 그때부터 사실로서 체감하게 되었다. 그들이 확인한 카이로선언의 번역문은 아마도 일본으로부터 들어왔을 것이고, ‘적절한 때에(in due course)’라는 표현은 ‘아주 금방(very soon)’ 혹은 ‘단시일에(in a few days)’로 표현되었다. 교육받은 조선인들도 번역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해방으로 인한 활기가 실제 상황과는 조응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해 가능한 이 환상은 일본인들 스스로가 특정한 행동을 통해 고조시킨 것이다. 같은 해 초에 조선총독부는 저명한 두 조선 민족주의자 여운형(呂運亨)과 안재홍(安在鴻)을 매수하려했다. 이들을 설득해서 친일 단체를 만들려고 한 것이다. 조선총독부 엔도(遠藤柳作) 정무총감이 다시 이런 단체를 만들려는 시도를 한 것은 항복이 발표되었을 때, 아마도 8월 16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송진우(宋鎭禹)를 포섭하려 했던 첫 번째 시도가 실패한 후 엔도는 여운형을 다시 한번 더 찾은 것이다. 여운형에게 접촉한 이유는 여운형이 어느 정도 진보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고, 당국이 문제를 일으킬까 두려워했던 조선인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여운형은 다섯 개의 조건을 내걸었다. 이를 보장해준다면 평화와 질서의 유지를 돕기 위한 연대를 형성할 것에 동의하겠다는 것이었다. (1) 3달치의 식량을 보장해 줄 것, (2) 정치범을 석방할 것, (3) 언론과 연설의 자유를 보장할 것, (4) 질서 유지를 돕기 위한 학생 동원을 방해하지 않을 것, (5) 일본인들은 여운형의 활동을 방해하지 않을 것. 엔도 정무총감이 이 조건에 동의하자,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를 발족했다. 여운형의 지지자들은 확실히 공산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었다. 기구의 명칭은 여러 차례 바뀌었고, 마침내는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이 되었다. 총독부는 이 기구에 많은 기부금을 주었고(아마 2천만 엔 정도), 공중집회를 열 수 있는 권한을 주었으며, 공공 기관과 시설들을 사용하고, 일본 비행기를 이용해 방방곡곡에 선전용 전단을 뿌릴 수 있게 해 주었다. 조선총독은 건국준비위원회에 미국이 조선을 점령하지 않을 것이고, 소련이 조선반도를 독점할 것이라고 알렸다.
여운형은 언론과 라디오의 통제권을 넘겨받았다. 그는 건국준비위원회가 질서 유지에 책임을 질 것이고, 정부의 모든 주요 기능을 맡을 것이라고 국민들에게 방송했다. 그 후에는 조선 청년들로 3개의 단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들 중 일부는 일본군에서 막 돌아온 자들이었고, 또 일부는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특수 경찰로 배치되었다. 많은 지역에서 정규 경찰의 권한이 이 젊은 친구들에게 넘어갔다.
8월 15일 직후 경찰들은 많은 ‘예비’ 검거를 실행했다. 예비 검거는 과거에 해외에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위험하다고 여겨졌던 조선인들에게 집중 되었다. 여운형의 첫 번째 행보 가운데 하나는 모든 정치범을 석방시키는 것이었다. 서울지역에서 석방된 재소자 총 수는 일부 탈옥한 범죄자를 포함해서 약 1만 명 정도로 보고되었다. 재소자들은 조선의 다른 지역에서도 다음과 같은 이유로 석방되었다. 예를 들어 조선의 남쪽 지역에서는 간첩 혐의로 5년 형 중에서 3년 이상 복역한 선교사들이 다른 정치범들과 함께 석방되었다."

미 군정 하지의 조선인민공화국에 대한 평가.

"조선에 진주하기 이전에,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의 조직이 만들어졌다. 조직의 이름과 활동은 이 단체가 정당이라기보다 정부가 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지도자들은 조선인들에게 조선인민공화국이 그들의 새 정부라는 말을 퍼뜨렸음을 나타낸다 … 이 집단은 지지자들 가운데 여러 해 동안 끊임없이 일본 통치에 대항해서 싸워온 많은 애국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애국자들의 목적은 비난의 여지가 없는 훌륭한 것이었다. 그러나 단체가 성립되고 기능을 하는 동안에 조선인민공화국이 조선을 통치한다고 많은 조선인들을 오해하게 만들었다."

조선인민공화국은 그들이 통치하려고 하였고 그것을 준비하였지만 미 군정은 그들을 정당의 수준으로만 보았다.통치자는 미 군정이었던것이다.

미 군정은 건국준비위원회의 후신이라고도 볼수 있을 조선인민공화국은 오직 "정당"이라고 보았고 나름 구성되었고 중앙,지방에서 어느정도는 돌아가던 정부로서의 그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 정통성 있는 정당으로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인민공화국은 (8월 중순의 며칠 동안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구성한 정부를 지속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미 군정에 반하는 많은 방해 공작을 시행하였다.
8월에 인민공화국은 다음과 같은 결정을 수립한 바 있다."

" 이러한 일반원칙들은 27개의 세부 정책으로 구체화되었다. 인민공화국이 한국의 공식 정부 행세를 하면서 미 군정에 방해하지 않았다면 문서로 나타난 정책들만으로는 인민공화국을 공공의 적으로 여길 수 있는 요소가 전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인민공화국은 정당이라기보다는 정부로서의 역할을 강조하게 됨에 따라 이러한 원칙들은 더욱 더 언급되지 않았다. 아마도 지나치게 세부적인 정강이 주변의 지지를 약화시킬 것으로 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9월 중순에 이르러 인민공화국은 지방에 까지 하부 단체를 조직하였다. 전형적인 단체 중의 하나가 급진적인 학생, 폭력배, 그리고 범죄자들로 구성되어 가능한 수단들로 무장한 “치안대”(Student Public Peace Body)였다.법질서를 따르려는 많은 한국인들은 소위 공공 치안을 유지한다고 자처하는 정치 집단들이 해체되지 않는 한 한국의 정치적인 문제의 평화적인 해결은 영원히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한국인들의 두려움은 ‘치안대’가 해산되면서 사실로 확인되었다. 인민공화국의 지원조직인 부산의 치안대가 9월 28일 해산되었을 때 257정의 소총, 3정의 산탄총, 그리고 14정의 권총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인민공화국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던 인정되지 않은 단체들이 정부의 기능을 담당하려고 시도한 사례는 너무 많았다. 가장 유명한 사건들은 각 도의 정부 기능과 관련해서 나타났다. 따라서 지방의 각 도에서 발생한 현상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구체적인 설명을 할 것이다."

"조선인민공화국"역시 미군정의 통치와 방식에 반발을 표하면서 자신들은 정통성있는 "정부"라고 생각하였다.

"여운형 지도 아래의 인민공화국이 공공연한 반란 행위까지는 시행하지 않았지만 지속적으로 비판적이었으며 골치 아픈 존재였다. 인민공화국은 미 군정의 희망을 무시하였다. 인민공화국은 1946년 3월 1일에 국민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다른 당과의 협조보다는 자신들의 확장에 더욱 몰두하였고, 결정적으로 11월 20일~23일의 3일 간의 회담에서 인민공화국의 명칭에서 “국”을 제외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조선인민공화국은 미군정이 바라보기에도 영향력과 잠재력이 있는 단체인것은 인정되기도 하였다.

" 인민공화국이 잠재력을 가진 단체라는 점을 의심할 수 없었던 것은 미 군정의 고문이던 언더우드 박사(Dr. H. H. Underwood)의 설명에도 잘 나타났다. 광복 이전에도 한반도에서 거주했던 언더우드 박사는 여러 차례 지방을 돌아보고 “인민공화국”이 38도선 이남의 전 지역에서 가장 활발하고 강력한 조직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와 반대로 한민당은 “대부분의 지역에서 빈약하거나 불충분하게 조직”되어 있었고, 농민들에게 토지를 무상으로 분배하거나 노동자들에게 공장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등의 매력적인 대안이 없는 것으로 보였다. 미 군정 공보과(Office of Public Opinion)의 라하트(W. F. La Hatte) 소령은 12월에 지방을 돌아본 후 언더우드 박사의 이와 같은 의견을 공식적으로 확인하였다. 라하트 소령은 "인민공화국“의 조직력이 점점 강해지고 있고 모든 수준에서 정부의 조직을 갖추고 있으며, 그 어떤 당도 인민공화국과 공존하기 힘들다고 설명하였다. 미 군정이 이들 당을 도와주는 방향으로 관여하지 않는다면 이들 당들은 번창하기 힘들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조선인민공화국을 미군정이 꺼림직하게 바라본 이유중 하나는 그들은 "좌익세력"이라고 평가하였기 때문이었을수도 있다.

" 좌익 세력으로는 여운형이 주도하는 조선인민당(the Kroean People's Party, Chosun Inmin Dang), 남한의 백남순과 북한의 김두봉이 함께 지휘하는 조선신민당(the Korean New Democratic Party, Chosun Sin Min Dang) - 원래 이 조직은 연안 독립동맹(the Yenan Independence Alliance, Dok Lib Dong Maing)의 서울 지부였다가 나중에 변경되었다 -, 그리고 박헌영과 이관술이 지휘하는 조선공산당(the Korean Communist Party, Chosun Kongsan Dang)이 있었다.
이 세 단체는 모두 1945년 8월에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정부 조직으로 결성한 조선인민공화국(the Korean People's Republic, Chosun Inmin Kongwha Kook)을 지지하였다. 조선인민공화국은 국내에 부재중인 이승만과 김구를 각각 명목상 대통령과 내무상에 선정하였다. 하지만 두 사람이 모두 자신들에게 주어진 직위를 거부하였으며, 그 결과 1946년 1월 10일에 두 사람 모두 “축출(expelled)”되었다. 조선인민공화국을 지지했던 세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전적으로 보유하고 있던 정부의 권위를 빼앗기 위해서는 “공화국(republic)”이 가장 적합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여운형은 불행하게 끝난 이 공화국의 초창기를 이끌었던 실질적인 지도자였다. 하지만 그는 1946년 3월에 스스로 지도자의 지위를 포기했는데, 왜냐하면 미 군정이 조선인민공화국의 존재와 활동을 지속적으로 거부함에 따라 사실상 이 조직이 정치적으로 무능해졌기 때문이다. 여운형의 뒤를 이어 허헌이 조선인민공화국의 활동을 이끌었다.
1946년 2월 15일에는 조선 민주주의 민족전선(the Korean Democratic People's Front, Chosun Min Choo Choo Ooi Min Chok Chern Sawn)이 조직되어 좌익 세력의 거점이었던 조선인민공화국을 신속하게 계승하였다. 조선인민공화국의 지도자였던 허헌이 새롭게 결성된 조선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주도하였다."

" 1945년 11월 12일 여운형이 좌익 계열의 조선인민당을 창당하였는데, 이 정당은 기존에 조선인민공화국이 각 지역에 설치하였던 인민위원회의 구성원을 모두 당원으로 흡수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조선인민당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었다. “조선인민공화국을 통제하던 주요 통치 조직이 변화될 수 있도록 구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 정당에는 인민위원회의 구성원 대부분이 가담했으며, 또한 공산주의 협력자들이 주도하는 프로그램은 최소만 포함되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이것이 조선인민공화국의 조직인지 조선인민당의 조직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려진 바 없다. 그러나 최근에 발생한 몇 가지 사건을 근거로 판단할 때, 공산주의자들이 조선인민공화국과 조선인민당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장악하려 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반박하기 힘들다. 1946년 1월에 하지 장군이 미 국무부에 보고한 상황 분석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인민당에 대해서 말하자면, 국무부는 이 정당을 공산주의적 요소가 전부가 아닌 자유주의자를 대표하는 정당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평가이다. 현재의 공산주의자들은 1945년 11월 24일에 내가 보낸 전문(TFGCG)에서 기술된 것보다 훨씬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 여운형의 측근이 증언한 바에 따르면, 현재 여운형과 허헌은 조선인민당에 대한 지도력을 공산주의 세력에게 상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이 정당의 명목상 지도자로 남아있으며, 아마도 정치 생명이 끝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실질적으로 당권을 장악하고 있는 세력과 결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현재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의 묵인 아래 대중적이며 ‘자유주의적 성향’의 조선인민당을 앞세우고 있으며, 그 뒤에서 자신들은 폭력과 테러를 정치 도구로 이용하며 활동하고 있다. 또한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여 여운형을 제거하지는 않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 여운형은 당 내부를 제외하고는 지지 세력이 없는 상태이지만 자기 스스로 지도력을 포기할 생각은 없는 것 같다.”"

글에 나오듯 국무부는 여운형/조선인민당을 자유주의 세력으로 바라본듯 하지만 미 군정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미 군정이 조선인민공화국을 반대하고 그들의 세력이 약해짐으로 조선인민공화국은 거의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