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출처: 구범진,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역시 나룻배 수준의 작은 배들을 타고 강화도로 건너간다는 작전의 수립 자체가 염하수로의 물리적 해양환경에 관한 정보의 사전 입수를 전제로 한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사실 실제 도해 과정에서 청군은 그들이 사전에 정보를 입수했다고 전제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태를 보였다. 작전 당일 아침 청군은 일찌감치 도해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배도 바다에 띄웠고 홍이포도 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당장 도해를 개시하지 않았다. 11시~ 11시 30분까지 기다렸다.
염하수로에서는 판옥선 함대의 작전 기동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군사 지식이 이미 17세기초 "주사를 잘 아는" 무장들 사이에 널리 공유되고 있던 상식이었음을 알려준다. 이로부터 설사 무장이 아닐지라도 수심이 얕고 조수 간만의 차가 큰 서해 연안에서 어업에 종사하던 뱃사람이라면 염하수로에서는 판옥선처럼 큰배의 기동이 어렵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으리라고 간주할 수 있다.
 
"호인으로 향화한 사람들"이 4도,즉 황해ㆍ 경기ㆍ 충청ㆍ 전라의 서해 각 지역에서 어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배가 무려 200척을 넘을 정도로 많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여기서 "호인으로 향화한 사람들"이란 당시 조선에서 '향화호인'이라고 부르던 자들로, 조선에 귀화하여 살고 있던 여진인들을 가리킨다.
 
향화호인 귀순 사건의 주인공은 여천과 마푸타라는 "와르카"사람들이었다. 17세기 후금 ㅡ 청에서는 두만강 유역 및 그 지역의 여진인을 '와르카'라고 불렀는데, 원주지를 떠나 조선 남부로 이주한 향화호인들 또한 여전히 '와르카'라고 불렀다.
조선땅 어디에 살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천과 마푸타가 성인 남성만 해도 총 273 명에 달하는 153호의 향화호인을 이끌고 병자호란 당시청군 군영에 스스로 귀순했으며, 홍타이지는 두 사람의 무리를 각각 정황기 만주와 정홍기 만주의 니루로 편성하여 여천과 마푸타 가족에게 두 니루를 관리하는 정4품의 좌령 관직을 세습하도록 했음을 알 수 있다. 홍타이지는 또한 그들의 정착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세습 작위까지 수여했다.
결국 아르진과 설러의 작전 지역은 남양으로 비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여천과 마푸타의 조선 내 거주지 역시 남양 일 수밖에 없다. 즉, 청 측과 조선측 기록은 모두 경기 남부 연해 지역인 남양에서 향화호인의 이반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는 셈이다.
 
병자년 십이월 21일 향화호인 여천과 마푸타가 조선을 이반하여 청군에 귀순했다. 또한 십이월 27일 남양부를 습격하여 윤계등이 조직 중이던 근왕병을 섬멸한 청군은 여천과 마푸타로부터 관련 군사정보를 입수하여 출격한 아르진과 설러의부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여천과 마푸타는 남양부 관내에 살던 향화호인이자 뱃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강화도 작전에 쓴 작은 배들이 종래 청에서 만들지 않았던 제삼의 선종이었음을 암시한다.
이 대목에서 남급이 <강도록>에서 강화도 작전 당시 청군의 배를 "자피선"이라고 기록한 사실이 눈길을 끈다."자피선"의 사전적 의미는 '짐승 가죽으로 만든 여진인들윽 작은 배'이다. 아마도 조선을 두만강 유역과 만주 동부ㆍ 북부의 흑룡강ㆍ 송화강 유역에 살던 '동여진' 또는 '동해여진'의 배였을 것이다.
'흑룡강 모델'의 "비선"은 강화도 작전 당시 수심이 얕고 조류가 빠른 염하수로에서 대단한 기동성을 발휘했다.그렇다면 청군의 정보원이 된 뱃사람은 염하수로의 특성뿐만 아니라 '흑룡강 모델'의 배가 염하수로에서의 작전에 최적이라는 점까지 알려주었다고 추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이는 다시 청군의 정보원이 조선인은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양 땅에 살던 여천과 마푸타는 자기정체성 여하에 관계없이 향화호인들이 옛날부터 쓰고 있던 '흑룡강 모델' 선박의 특징과 장점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강화도 작전에서 쓸 '흑룡강 모델'의 배를 만드는데 실무자로서 직접 관여했거나, 또는 적어도 '흑룡강 모델'의 배라면 염화수로를 건너 강화도에 무사히 상륙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낸 장본인이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리고 두 경우 가운데 어느 쪽이득 간에, 당시 팔기만주 안에는 '흑룡강 모델'의 배를 몰며 생업에 종사하던 동해여진 사람들로 조직된 니루가 적지 않게 존재했다. 병자호란에는 니루마다 32명씩의 갑병이 참전했으므로, 당시 청군 진영에는 '흑룡강 모델'의 배를 만들 수 있는 인력도 충분했다.
경기 남부 연해 지역의 남양에 살던 여천과 마푸타가 청군에 귀순했고, 이들의 안내로 청군은 남양부를 기습했다. 또한 두 사람은 청군의 강화도 작전 입안ㆍ 감행을 가능하게 만든 정보의 제공 자이자, 청군의 강화도 작전과 가도 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선박 건조의 '숨은 공로자'로 추정되는 것이다.
한줄요약: 서북방은 이괄의 난 투항자들이 바다는 향화호인들이 맵핵 켜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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