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http://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no=146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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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러시아 내전에서의 기병 운용


 러시아 내전은 기병의 전쟁이었다. 1919년 7월경 데니킨 예하 백군의 전 병력이 볼가 강 유역에서 갈리시아까지 길게 늘어진 전 선에 포진해 있었을 때 그 수는 10개 군단, 총 11만 명의 병력이었 다. 당시 적군의 보고에 따르면, 이 11만 명의 병력 중 약 5만 8,000명이 기병이었다. 1919년 5월 21일 로스토프의 벨리코크 냐제스키(Velikokniazheskii)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백군의 P.N. 브랑겔(Petr Nikolaevich Vrangel’)은 2만-2만 5,000명으로구성된 기병 연대 36개를 배치하기도 하였다.


적군 기병 비율도 백군에 비해 낮은 수치이기는 했으나 결코 적지 않았다. 소비에트 -폴란드 전쟁이 한창이었던 1920년 10월 15일 당시 적군이 전선 에 배치한 총 병력은 40만 명에 달했는데, 이 중 7만 2,000명이 기병이었다.


따라서 기병 대 보병의 비율은 약 1 대 5.5이었다. 적군 지휘부가 여전히 기병 창설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을 때인 1918년 말에, 적군 내 기병 대 보병의 비율이 1 대 9 정도였음을 감안한다면, 이 수치상의 차이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러시아 내전에서의 기병의 의미는 단순히 수치상의 문제로만 그치는 것은 아니었다. 기병은 러시아 내전에서 군사적 효용성을 입증하였 다. 한때 기병의 가치에 가장 회의적이었던 트로츠키마저도 백군 기병의 전략적 운용으로 인해 남부전선이 붕괴될 시점이었던 1919 년 6월 레닌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면서, 기병의 가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기병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는 승패가 기병의 손에 달려 있다는 점만 깨달으면 된다.”


 적군 기병은 전술적 측면에서, 적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 화력 과 기동을 결합하여 측면 우회기동이나 적 후방 침투를 수행하였 고, 전략적 측면에서, 이전의 전술적 임무를 넘어 대규모 기병을 이용한 전략적 목표에 대한 습격을 통해 기병 운용의 성격을 근본 적으로 변화시켰다. 


요컨대, 러시아 내전에서의 적군 기병 운용의 핵심은 첫째, 기동과 화력의 결합, 둘째, 보병과의 공조, 셋째, 전 략 목표에 대한 기병의 대규모 운용으로 정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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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기동과 화력의 결합 


어떤 이는 기병이 러시아 내전에서 부활했다는 사실 때문에, 적 군이 러시아 내전에서 기마전투(騎馬戰鬪)에만 집착하고 돌격만을 일삼는 과거의 전투방식을 유지하였을 것이라고 오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군 기병 운용에서 가장 중요했던 특징은 기병의 기동 성과 습격 그리고 화력을 결합하고자 했던 시도였다. 적군과 백 군의 기병 모두 구(舊) 제국군으로부터 파생하였으나, 전투 방식과 그 운용에서는 큰 차이를 보였다. 


백군 기병은 화기를 이용한 하마 전투(下馬戰鬪)를 기피했던 반면, 적군 기병은 화력과 기동을 결합 한 전투 방식을 선호하였다. ‘마몬토프 습격’으로 유명한 마몬토프 도 “극히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하마전투를 허용하겠다는 명령을 내렸다.  제1기병군 제4기병사단의 참모장이었던 I.D. 코소고프 (Ivan Dmitrievich Kosogov)에 따르면, “기병 ‘돌격’에 대한 숭 배와 ‘도검류’에 대한 선호, 그리고 화기에 대한 혐오가 돈 코사크, 쿠반 코사크 그리고 백군 기병의 주요한 특징이었다.”


 구(舊) 제 국군 육군 소장이었으며 백군으로 내전에 참전하였던 A.K. 켈쳅스 키(Anatolii Kiprianovich Kelchevskii)가 보기에도 코사크 기병은 선천적으로 하마전투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하마전투를 어떻 게 수행해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듯했다. 이러한 성격의 주된 원인 을 켈쳅스키는 퇴각에 실패해 적에게 붙잡히게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한 코사크 병사는 켈쳅스키에게 이렇 게 말했다.


 “말을 타지 않고 보병처럼 싸운다면 내가 아무 힘도 없 는 아낙네가 된 것처럼 느껴진다.


이에 반해, 전선 전면에서 중(重)기관총과 야포를 이용한 집중 포화로 엄호를 하는 동시에 기병이 적의 후면이나 측면을 습격하는 전술이 적군 기병이 보여준 전형적인 전술이었다고 코소고프는 술 회하였다.70) 어떤 경우에는 기관총 사격과 포격만으로도 적군 기 병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도 하였다.


 “종종 일제 엄호사격만으로 적들은 전투 불능이 되었고, 우리 기병은 뒷마무리만 하면 되는 경 우도 많았다.”


기병이 투입되기 전부터 시작된 기관총과 야포를 이용한 일제 사격은 특히 부됸니가 지휘했던 제1기병군의 전형적인 공격 방법이었다. 켈쳅스키는 자신의 적이 펼치는 전술을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그들[두멘코와 부됸니]은 기병전의 본질과 전투 심리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기병전 수행 방식 에 몇몇 중요한 수정을 가하였다.” 적군 기병의 전투 방식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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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적군 기병]은 수 개의 ‘전방 선견대’에 의한 대담한 정찰을 도입하였다. 보통 백군은 1개 기병중대로 이루어진 소규모 정찰대를 보내는 반면에 적군은 여러 방향으로 2개 기병중대 심지어 3개 기병중대 규모의 정찰대를 운용하였다. 또한 이들 정찰대에는 많은 수의 타찬카(tachanka)가 배치되었다. 대규모 기병과 타찬카를 통해 적군 기병 정찰대는 정찰 임무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종종 적의 소규모 부대나 정찰대를 격퇴할 수도 있었다. 


[...] 강력한 정찰 부대와 함께, 두멘코와 부됸니는 수 개의 연대급 혹은 여단급 규모의 부대로 구성된 선봉 부대의 보호 하에 본대를 이끈다. [...] 원거리 포격 후, 본대는 많은 수의 야포와 타찬카에 설치된 기관총 혹은 2-4대의 장갑차량을 이용하여 우리 전선을 공격한다. 이들의 화력에 의해 백군 기병 선봉은 와해되기 시작한 다. 대포와 기관총을 퍼붓는 동안, 보통 [적군] 기병사단의 선봉 연대들이 광범위한 전선에 전개하여 우리 선봉 부대를 가차 없이 공격한다. 


[...] 백군이 진퇴양난에 빠져 후퇴할 때면 그들[두멘코와 부됸니]은 수십 베르스타(주:러시아의 거리단위)를 맹렬히 뒤쫓는다. 처음에는 몇몇 연대에서 임시로 선발된 기병대가 장갑차량과 함께 백군을 추격하였지만, 이후에는 장갑차량을 장비 한 별동 기병중대들이 백군을 추격한다. 추격은 한 방향, 또는 종종 두 방향에서 이루어지는데 때때로 그 거리가 70 베르스타에 달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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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력과 기동을 결합하는 문제에 있어서, 적군 기병은 거의 모든 군사적 상황에서 기병대와 함께 작전을 할 수 있는 강력한 기동 장 비인 ‘타찬카’를 이용하였다.


보통 말 세 필이 끌던 타찬카는 농가 에서 사용하던 수레를 개조한 이동장비로, 중(重)기관총과 탄약 그 리고 세 명의 인원(마부, 기관총 사수, 보조 사수)을 싣고 다녔다. 기관총은 후면이나 측면을 향해 발사가 가능하게끔 고정되어 있었 다. 도로가 없어도 신속한 이동이 가능했기 때문에 장갑차량의 운 용이 불가능하였던 지역에서 타찬카는 진가를 드러냈다. 


이런 식으 로, 엄청난 무게와 크기 때문에 그때까지 방어 무기로만 운용되었 던 중(重)기관총은 기병 공격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또 한 타찬카는 아군 퇴각시 이를 엄호하는 역할을 맡기도 하면서 적 군 기병의 기마전투와 하마전투 모두 용이하게 하였고, 때때로 기 병끼리 교전을 벌이는 경우에 타찬카와 기관총의 지원은 기마포병 의 지원임무와 유사한 역할을 하였다. 적군은 기동성을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기병의 화력을 높이는 방 법을 통해 많은 전과를 올렸다.


 예를 들어, 1919년 초 백군에 의해 교착상태에 있던 남부전선에서 당시 제10군 지휘관이었던 예고로 프는 두멘코에게 예하 기병의 화력을 높이기 위해 일종의 기관총 기동돌격대를 창설하라고 명령했다. 이 별동부대는 타찬카에 장비 한 중(重)기관총 16정을 장비하고 있었고, 나중에 이 부대에 2개보병대대가 합류하면서 부대원은 1,600명에 달하였다.74) 타찬카와 기관총 기동돌격대 등을 통해, 기병의 원초적인 약점이었던 화력의 부족을 보병 수준의 화력으로 상승시키고 이를 기병의 장점인 기동 력과 결합하여 기마-하마전투를 펼칠 수 있었다. 


또 다른 사례로 크림 반도를 놓고 1920년 11월 11일 우크라이나의 카르포바 발카 (Karpova Balka)에서 치러진 전투를 들 수 있다. 1920년에 편성 된 제2기병군(Vtoraia konnaia armiia)은 기관총을 탑재 한 250대 이상의 타찬카를 동원하여 I.G. 바르보비치(Ivan Gavrilovich Barbovich)가 지휘하는 백군 기병을 공격하였다.


 기마전투와 돌격에 치중하던 백군 기병은 적군의 화력으로 인해 엄 청난 사상자를 내면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우크라이나 본토와 크림 반도를 잇는 페레코프 지협에 대한 백군의 공격은 무위로 끝났다.




나. 보병과의 공조 


적군의 각 기병사단들은 일반적으로 기관총을 장비한 타찬카를 50-75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또한 각각 기관총 18대를 보유한 1,000-1,500명으로 구성된 보병대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어쩌면 기병부대 내에 보병이 배치되었다는 사실이 논리적 모순으로 보 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강력한 보병의 존재는 기병의 기동을 위한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기병부대에 배치된 보병부대는 종종 기동 을 수행하는 기병이 보다 효율적으로 망치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적을 한 자리에 고정시켜 놓는 역할, 즉 모루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가령 적이 기병의 기동을 저지한다면, 보병부대가 적을 한 지 점에 고착시키는 동시에 기병은 적을 우회하여 기동을 계속 지속하 는 식이었다. 문제는 보병과의 공조가 기병의 기동력을 손상하지 않은 조건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였던 방법이 타찬카를 보병의 이동수단으로 활 용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한때 적군으로 내전에 참전하였던 N.I. 마흐노(Nestor Ivanovich Makhno)의 보병 분견대는 수일 동안 쉬지 않고 하루에 100km를 기병부대와 함께 이동할 수 있었 다. 이러한 기동력을 이용하여, 마흐노는 1919년 9월 키예프 인근 에서 수행한 작전에서 11일 만에 약 600km를 이동하여 백군 후위 를 공격할 수 있었다.


 결국 타찬카를 보병의 이동수단으로 사용 한 것은 기병과 속도를 맞추고 적시에 기병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 었다. 보병과의 협동을 통해, 기병의 기동이 촉진되고 기동의 모멘 텀이 유지되었다. 이를 위해 보통 각각의 보병대대는 약 200여 대 의 타찬카를 보유하고 있었다.


타찬카에 탑승한 보병의 경우 일 반적으로 하루에 60~100km를 이동할 수 있을 정도로 기동성이 높았다. 한때 제10군 사령관이었으며 1919년 10월부터 남부전선 사령관 으로 근무하고 있던 예고로프는 ‘마몬토프 습격’이후 대규모 기병을 이용한 작전에 관해 예하 기병 지휘관들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다.


 “나는 충격집단 지휘관들에게 다음과 같이 분명히 명령한다.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적의 전선을 돌파하려 하지 말고, 병력을 집중하여 적 주력의 양익을 공격하라. 모든 성 공은 오직 대규모 습격과 기동에 의해서만 일궈낼 수 있음을 명심 하라. 특히 대규모 기병대를 적의 양익에 집중시키는 동시에 반드 시 보병과의 공조를 통해 적 기병의 측면과 후위를 공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적군 기병이 보병과의 공조 속에서 화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전술을 펼치게 되면서, 내전 초반 적군에 대해 압 도적으로 우위에 있었던 백군 기병의 전투력은 약화되기 시작하였 다. 러시아 내전의 양상이 기병간의 전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염두에 둔다면 이는 곧 백군 전체의 전투력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계속)


1줄요약: (ㅡ)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