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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폴란드도 기병하믄 좀 힘좀 쓰지~)
다. 전략적 목표에 대한 대규모 기병 운용
적군 기병의 또 다른 중요한 기병 운용 방식은, 기병을 대규모로 조직하여 전술 임무뿐만 아니라 전략적인 목표를 타격할 수 있는전략기병(strategicheskaia kavaleriia)으로 활용하는 방식이었다.
전략기병에 의한 대규모 습격은 철도 등의 교통 요지나 보급창과 같은 전략적 요충지를 목표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본대의 상급 작전과의 공조를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자연히 작전기동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적군은 별동 기병여단, 기병사단, 기병군단, 기병군 등 다양한 규모의 전략 기병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특히 제1기병군과 같은 군(armiia) 규모의 기병대는 적군기병의 전략 기동에서 중요한 자원이었다.
‘마몬토프 습격’에 대응하기 위해 적군 지휘부는 1919년 11월 초 라트비아 보병사단과 V.K. 프리마코프(Vitalii Markovich Primakov)가 지휘하는 1개 기병사단83)으로 구성된 별동 기동부대를 남부전선에 파견하였다. 11월 2일 라트비아 보병 사단이 백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자, 프리마코프의 기병사단이 그 돌파지점으로 신속하게 진입해 나흘 동안 백군을 몰아붙였다.
작전의 최초 7시간동안 프리마코프의 기병사단이 이동한 거리는 약 125km에 달했다. 4일 뒤인, 1919년 11월 6일 프리마코프는 쿠르스크 지역의 파테즈(Fatezh)에 주둔하고 있던 데니킨 군대의 후위를 공격하였고, 이 작전의 결과 백군은 최소 120km 이상 후퇴하였다.
1919년 11월 14일에 프리마코프는 데니킨의 백군 주요 보급기지와 철도가 위치하였던 전략적 요충지인 우크라이나의 리보프(L’vov)를습격하여 15일 이를 탈환하고 장갑열차 5대를 노획했다. 리보프습격으로 백군의 방어선은 150km 이상 뒤로 밀려났다.
프리마코프는 위의 대규모 기병습격에 대해 내전 이후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내전에서 적군과 백군의 후방 모두 매우 취약하였다. ... 이러한 상황에서 기병은 쉽게 적진 후위를 파고들 수 있었다.
적 후방에 대한 지속적인 교란활동뿐만 아니라 적 후방에 대한대규모 습격이 발생하곤 하였다.”88) 프리마코프는 보병과의 공조를 통한 대규모 기병습격을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하였다.
“전투 첫째 날에 보병이 적의 제1선을 돌파해 적 종심을 파고들면, 이 돌파를 통해 기병은 제1선에 밀집해있던 적 병력의 방해를 받지 않고기동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 후에 기병은 적의 통신망과보급기지와 후방을 맹공격할 수 있었고 결국에는 퇴각하는 적과 교전을 벌였다."
"환언하면, 기병습격이란 전투를 연속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전략기병은 적 종심에 대한 타격을 통해 적의 지휘와 통제를 교란하고 적의 사기를 꺾어놓는 돌격대의 역할을 수행하곤 하였다. 이러한 전략기병의 대표적인 예가 부됸니의 제1기병군이었다. 제1기병군은 적 정면에 대한 공격을 회피하고 양익으로 또는빈틈을 통해 적의 측면으로 이동하였다.
일단 적 측면이 노출되거나 와해되고 나면, 이에 대응할 예비 병력이 없는 적은 자연스럽게진영 전체의 노출을 피할 수 없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전투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 때 기병은 적의 통신선이나 교통요지를 공격함으로써 신속하게 초기의 승기를 이어가고 적의 저항을 분쇄할 수있었다.
(뽈갱이넘들이 기병으로 방구좀 뀐다면서?)
이러한 작전들 중 가장 의미 있는 작전은 폴란드군에 맞서 1920년 6월과 7월 사이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들이었다.
당시 캅카스 전선에서 남서부전선으로 배치된 제1기병군은 이 두달 동안 키예프를 탈환하고 폴란드군을 우크라이나에서 몰아내기위한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작전 개시 당시, 제1기병군은 기병1만 8,000명, 대포 52문, 기관총 350정, 장갑열차 5대, 1개 장갑차량 분견대, 항공기 8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폴란드 제3군은 넓은전선에 전 병력을 얕게 배치해놓았다. 즉, 폴란드군은 예비부대가 필요할 수 있는 기동전의 가능성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적군 기병은 이런 식으로 배치된 폴란드 제3군을 손쉽게 제압하였다. 제1기병군은 6월 첫째 주 폴란드군 방어선을 돌파한 뒤 베르디치우(Berdychiv)에 대한 기병습격을 개시하였다. 이 작전에서 제1기병군은 적군 제12군과의 공조를 통해 폴란드군을 포위하고자 하였다.
다음 한 달 동안 제1기병군은 리우네(Rivne) 인근에서격전을 벌였고 7월 4일에 우회 기동작전으로 리우네를 점령하였다. 본대로부터 별다른 보급 없이 약 43일 동안 진행된 이 작전은 보병과의 제병협동작전 속에서 적군이 어떻게 대규모 기병 운용으로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1920년 백군을 격퇴하기 위한 마지막 작전에서, 당시 남부전선사령관 M.V. 프룬제(Mikhail Vasil’evich Frunze) 또한 적군기병을 전략기병으로 운용하였다.
프룬제는 먼저 제2기병군에게 드녜프르 강을 도하하는 백군 기병의 습격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린뒤, 제1기병군에게 크림반도 북쪽에 주둔하고 있는 브랑겔 휘하의백군에 대한 포위 기동전을 펼치라고 지시하였다.
제1기병군의 포위 기동이 무위로 돌아가자 프룬제는 남부전선 예하 제6군의 보병병력으로 브랑겔 군 정면에 대한 또 다른 공격을 시도하는 동시에적군 기병에게 후면에서 백군의 전열과 보급기지에 대한 습격을 명령했다. 결국 브랑겔 군대의 전선을 제6군이 돌파하자, 프룬제는패주하는 브랑겔 군대를 추격하기 위해 재차 제2기병군을 투입하였다.
(폴스카넘들 로오오드 타찬카 맛 쬐끔만 보그라 ㄲㄲ)
폴란드군 총사령관 J.K. 피우수트스키(Jozef Klemens Pilsudski)또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초기에는 여타 군사지휘관들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내전에서 나타난 기병운용에 회의적이었다. 적군 지휘부에서 복무하고 있던 구(舊) 제국군 장교출신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제1차 세계대전의 전투 경험에 집착하고 있던 그에게 “유목민방식으로 기병을 운용”하는 것은 오래된 ‘타타르의 원정’을 떠오르게하는 해프닝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이후 피우수트스키는 대규모 전략기병에 의한 기병습격의 영향력에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최악의 상황은 기병습격의 영향력이 전선 그 자체에서보다 전선을 넘어, 즉 후방에서도 감지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몇 번이고 계속해서 심지어 전선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후방지역에서도 그리고 종종 상급 부대의 사령부에서도[기병 습격의] 극심한 공포가 감지되었다. 계속해서 이 공포는 점점 더 심하게 퍼져 나갔다. [...] 이 새로운 종류의 전투수단, 즉부됸니의 기병습격은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우리에게 유례가 없는이상한 전투 방식이었으며 믿기 어렵고 대응할 수 없는 성격의 힘이었다.”
(짧게 말하면 고-병이었던 기병을 우리 쏘비에트가 기병-붐을 다시 일으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거지~)
4. 맺음말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더 이상 가치가 없다고 여겨졌던 기병은 러시아 내전 동안 완벽하게 부활하였다. 군마와 인원이 부족했던 적군은 비교적 신속하게 백군 기병에 맞설 적군 기병을 형성하였으며, 적군 기병은 단시간에 전술적 군사 조직(소규모 파르티잔부대나 소대 혹은 중대규모의 부대)에서 상급 조직(별동 기병연대, 여단, 사단과 군단)으로 발전하였다. 내전 이후 적군의 많은 군사이론가들이 인정하였듯이, ‘마몬토프 습격’으로 대표되는 백군의 기병운용이 기병의 중요성을 재확인시켰으며, 적군 지도부가 이러한 경험에 큰 영향을 받았음 또한 사실이다.
비록 적군이 백군보다 뒤늦게 기병의 중요성을 인식했을지라도, 백군이 내전 초기에 보여준 대규모 기병대를 이용한 기병습격은 이내 적군에게서도 찾아 볼수 있었다. 적군은 이에 더 나아가 기동을 화력과 결합하거나 보병과의 공조 등을 통해 제병협동에 대한 의미 있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러시아 내전에서의 적군 기병운용은 기병의 ‘부활’이상을 의미하였다. 적군 기병은 러시아 내전의 특성과 현대전의 기술적 변화에 적응한 새로운 형태의 군사력이었다.
이를 통해 볼 때, 러시아 내전 이후 적군 내에서 군부 엘리트층을 형성하게 될 기병지휘관들은 적어도 도검류와 기마돌격에만 집착하던 구태의연한 ‘전술 기병적’ 사고방식을 가진 인물들이 아니었다. 이들 지휘관들에게는 보병을 포함한 여타 병과와의 공조, 화력에 기반한 하마전투, 기동력과 화력의 결합, 대규모 기병의 전략적목표에 대한 습격, 장갑차량과 같은 새로운 기술의 수용 등에 대한거부감이나 심리적 장벽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그들이 백군과의 전투를 통해 이러한 특징들을 구현해낸 당사자들이었기때문이다. 이는 내전 이후 적군 내에서 벌어진 장차전의 성격이나군사교리와 관련된 논의들이, 새로운 군사기술과 장비의 도입을 놓고 ‘보수적’인 인물들과 ‘혁신적’인 인물들 간의 갈등이라는 단순한틀보다는 보다 다층적인 측면 속에서 존재하였음을 의미한다. 향후연구는 이러한 다층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적군 기병의 등장과 그 운용은 단지 러시아 내전 시기에 국한된 주제가 아니다. 러시아 내전의 특성과 기병 운용이라는 객관적 요소 외에도, 지휘관들의 개인적 혹은 집단적 특성이라는 주관적 요소도 향후 적군의 전략과 전략 문화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는 내전 초기의 기병 형성이 중앙의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선 지휘관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파르티잔 지휘관들에의해 자체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중앙으로부터의 명령이나여타 지원 없이 전선에서 자체적으로 인적-물적 자원을 조직하여백군에 대항하였던 이들 파르티잔 지휘관들은 기병이 적군 내에서공식적인 병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내전 당시의 전공으로 내전 이후 군사교리와 군사조직에 큰영향을 행사하게 될 군부 엘리트로 성장하게 된다.
지휘관들의출신성분과 교육배경 그리고 지휘관들 내에 존재했던 인적 네트워크에 대한 분석이, 소연방의 당-군 관계뿐만 아니라 러시아 내전이후 그리고 독소전을 거쳐 냉전시기에 이르는 기간에 소연방 군부가 보여준 일종의 ‘전략문화’를 감지할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가 될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제언해 본다.
(完)
1줄요약: 소비에트 적군이 1차대전후 고-병이었던 기병을 살리고 기병-붐을 일으켰다
이렇듯이 언젠간.. 기병-붐은 온다!
괜히 스키타이 유목민이 아녀
기관총에 갈리고 무한궤도에 갈리고
기병-붐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