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8월 1일,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 폴란드 국내군이 도시 곳곳의 독일군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하면서 마침내 바르샤바 봉기가 시작되었다.

7월 29일부터 소련군의 포성이 도심까지 들려오기 시작했고 창공을 가로지르는 소련 공군 또한 날마다 증가했다.

국내군은 소련군의 바르샤바 진주가 임박했다 판단한다. 독일군은 완전히 무너진 것처럼 보였다. 그 무엇도 ‘바그라티온 작전’을 막을 수 없어보였다.


하지만 바르샤바 봉기는 파국으로 마무리되었다. 소련군은 결국 바르샤바에 들어오지 않았다. 독일군은 도시 전역에서 지독한 학살극을 벌였고,

국내군과 바르샤바 시민들은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결국 짐승처럼 도살당했다. 히믈러의 명령에 따라 도시는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그런데 이 역사의 비극에서 소련군이 정확히 어떤 역할을 수행하였는가에 대해선 상당한 논란이 존재한다.

폴란드를 위시한 서방측에서는, 소련군이 반소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을 독일군의 손으로 쓸어버리기 위해 바르샤바 점령을 고의적으로 지연했다 주장한다.

이들에 의하면 소련군은 바르샤바에 들어오지 ‘않았다.’


러시아 측의 주장은 다르다. 이들에 따르면 당시 소련군은 바르샤바를 해방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독일군이 마침내 기진맥진한 소련군 공세를 격퇴했고, 이제 독일군 전력은 그 어떤 지원시도도 격퇴할 수 있을 만큼 강해져 있었다.

그들에 의하면 소련군은 바르샤바에 들어오지 ‘못했다.’







사실 이 논란에 대한 해답은 간단히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정확히 알 수 없다.’



현재로썬 당시 소련군의 정지이유가 순수한 군사적 이유였는지, 아니면 어떤 정치적 목적이 있었는지, 혹은 둘 모두인지 확답할 수 없다.

결론을 한가지로 정확히 못 박기엔 소련 측 문서자료, 근거가 너무나도 부족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공개된 자료들을 분석하며 당시 바르샤바를 둘러싸고 벌어진 상황을 최대한 유추해보는 정도뿐이다.


우선 붉은 군대가 군사적 이유 때문에 바르샤바로 가지 못했다는 주장의 근거는 충분하다.

7월 27일 로코소프스키가 지휘하는 1 벨라루스 전선군 좌익에 위치한 소련 2 기갑군이 스타브카 명령에 의거, 바르샤바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프라가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800여대에 달하는 소련 기갑차량이 바르샤바를 거쳐 발트해 해안까지 진출하기 위해 북으로 돌격하고 있었다.

그런 이들을 2개 독일 사단이 가로막는다. 여기서 소련군을 저지하지 못하면 독일군 전선이 다시금 붕괴할지도 모르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소련군의 진격은 계속되었다. 그들은 7월 31일, 프라가에 도달한다. 그러나 이제 늘어난 보급선으로 인해 소련군 전차들은 탄약과 연료가 부족한 상태였다.

그리고 8월 1일, 독일군이 박박 긁어모은 모든 예비대를 쏟아 부어 역습에 나섰다.

4개 기갑사단 270여대의 전차가 2 기갑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격렬한 전차전이 시작되었고, 승리의 여신은 독일군의 손을 들어주었다.



1944년 7월 18~31일, 2 기갑군의 바르샤바 공세



2 기갑군의 일부 부대가 포위섬멸 당했고 3 기갑군단의 전선은 20km 가량 밀려났으며, 소련군은 끔찍한 손실을 입었다.

7월 22일만 해도 810대에 달했던 2 기갑군 기갑전력은 8월 4일 263대까지 줄어든다. 이들은 결국 8월 5일 전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당시의 격렬한 전투와 급박한 전황을 미루어보면 소련군은 적어도 처음에는 정말로 바르샤바를 점령하려 했던 것 같다.

2 기갑군의 진격속도는 너무 빨랐다. 제대로 된 정찰조차 수행되지 않았고 첩보, 측면은 물론 보급마저 신경 쓰지 않았다.

폴란드 내 저항운동을 눈엣가시로 여겼던 스탈린이 최대한 신속하게 바르샤바를 점령, 이들이 미처 움직이기 전에 선수를 치려했을 가능성이 있다.


소련군이 국내군보다 먼저 바르샤바를 차지하고 싶어 했던 것처럼, 국내군 또한 소련군보다 먼저 바르샤바를 해방하고 싶었다.

소련군이 곧 들이닥치리라 판단한 국내군 수뇌부는 8월 1일 봉기를 시작한다. 하지만 그들이 바르샤바를 장악하기 위해 시가전을 벌이는 동안,

도시 바깥에선 소련군이 독일군의 역습에 포위당하고 있었다. 크게 한방 먹은 소련군은 결국 멈춰 섰고, 곧 2개 소총군단이 전선을 강화하기 위해 배치되었다.

그들은 며칠에 걸쳐 도시 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관찰했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았다.



1944년 8월 1~4일, 바르샤바 전차전




그러나 이것으로 전 전선의 전투가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1 벨라루스 전선군의 우익은 계속해서 진격하고 있었다.

이들은 바르샤바 남부 마그누세프 교두보를 방어하는데 집중하고 있었고 역습을 걸어오는 독일군에 맞서 8월 중순 내내 전투를 벌였다.

나머지 좌익 또한 부그 강을 건너 미래 공세를 위한 교두보를 만들기 위해 분투 중이었다.

그들이 마침내 부그 강을 건넌 건 거의 한달이 지난 9월 3일의 일이었고 이후 3일 만에 나레프 강 또한 돌파했다.


결국 9월 이전까지 바르샤바 정면의 소련군은 독일군을 돌파해 바르샤바를 구원할 여력이 없었다.

이후라고 해도 바르샤바를 향한 공세는 상당규모의 전력 재배치를 요구했을 것이며, 희생이 큰 시가전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사실 소련군, 독일군, 폴란드군 모두가 당시 전황에 있어 유사한 의견을 공유한다.

당시 소련군에겐 군사적으로 바르샤바를 점령할 능력이 없었다고 판단한 폴란드 국내군 내부 인사들의 증언이 존재한다.

스탈린 또한 8월 9일, 폴란드 수상 미코와이지크와의 대화에서 자신은 소련군이 바르샤바를 6일에는 점령할 수 있을 줄 알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프라가 지역에 투입된 독일군 예비 기갑사단이 소련군을 격퇴하고 말았다. 독일군 또한 1944년 8월 첫 주, 소련군의 진격을 막아선 건 자신들이었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1944년 8월 5일~10월 30일 중부전선



하지만 소련군, 정확히는 스탈린에게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다는 근거 또한 상당하다.



국내군은 이미 8월 초부터 로코소프스키와 접촉하기 위해 전령을 보내거나 무선통신을 시도했다.

그러나 모든 시도는 일선 부대의 소규모 반응 정도를 제외하면 사실상 무시당했다. 소련군은 봉기가 진행되는 동안 어떠한 공군, 포격 지원도 제공하지 않았다.

바르샤바 봉기 즈음이면 독일 공군은 동부전선의 제공권을 빼앗긴 지 오래였다. 1944년 7월 폴란드의 6 항공함대가 보유한 항공기는 고작 252대에 불과했다.


그러나 소련군은 보급선이 길어져 보급충원이 부족한 취약 일선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봉기 기간 바르샤바 지역에 대한 공군활동을 중단했고,

덕분에 독일군 스투카가 바르샤바 상공을 누비며 국내군에게 마음껏 급강하 폭격을 가할 수 있었다.

소련군 전투기가 바르샤바 상공에 모습을 드러낸 건 9월 10일이 되어서였다.

그들은 그날 5기의 독일기를 격추했고 소련 지상군은 다시금 독일군을 공격, 사흘간의 전투 끝에 프라가를 점령한다.


이제 국내군과 소련군은 비스툴라 강을 끼고 600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고, 소련의 지원을 받는 폴란드 인민군이 프라가에 배치되었다.

마침내 9월 13일, 폴란드 인민군 1, 2군이 비스툴라를 건너 바르샤바로 돌입했다.

그러나 이들은 ‘아군’ 소련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했고 결국 열흘 만에 다시 비스툴라를 건너 철수해야 했다.

소련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사실 로코소프스키는 8월 8일,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을 통해 그달 25일이면 1 벨라루스 전선군이 도시를 목표로 새로운 공세를 시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를 허가하지 않았다.

8월 20일 시작될 발칸공세를 위해 이 이상 전력을 분산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의견이 존재한다.


하지만 스탈린이 봉기를 대하던 태도는 국내군을 바라보는 그의 인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스탈린은 폴란드인들의 봉기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이는 7월 말 런던 임시정부 총리 미코와이지크가 외교관계 개선을 위해

모스크바에 방문했을 때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미코와이지크가 그에게 봉기 개시를 알리며 도움을 요청했을 때 스탈린의 첫 반응은 부정이었다.

이후 국내군이 정규 무전방송을 시작하며 봉기 사실을 만천하에 공개하자, 그는 봉기를 폄하하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봉기를 일으킨 폴란드인들을 “멍청한 모험주의자들” 그리고 “한줌의 범죄자들”로 치부했다.


한편 서방 연합군은 국내군을 최대한 지원하기 위해 바르샤바에 대한 항공보급을 계획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연합군 비행장에서 바르샤바까지는 상당한 거리였고, 우크라이나의 소련군 비행장에서 재보급을 받지 못하는 경우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8월 20일 영국 정부의 요청은 거부당했고 이미 소련군 비행장을 이용하고 있던 미국 항공대 또한 폴란드로의 출격은 금지 당했다.





결국 영국공군은 8월 내내 이탈리아 비행장을 통해 최소한의 보급만을 제공할 수 있었고,

무리한 거리 탓에 그들의 희생 또한 컸다. 영국공군 조종사들은 심지어 소련군 대공포와 전투기가 그들의 임무를 방해했다는 증언을 남기기도 했다.

계속된 연합국의 압박 끝에 스탈린은 결국 그들의 소련 비행장 이용을 허가한다. 그러나 이는 9월 10일이 되어서의 일이었다.

봉기의 기세는 이미 꺾인 지 오래였고, 항공보급이 더 이상 봉기의 성패를 좌우할 수 없는 시점이었다.


이때쯤 되면 바르샤바 시가지의 국내군 점령지는 너무 비좁았다. 투하된 보급품이 올바른 국내군 위치에 제대로 안착하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스탈린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소련공군은 그제서야 2주에 걸쳐 약간의 보급품을 투하했다.


스탈린이 바르샤바 국내군에 대한 외부 지원을 차단했다는 문서 증거 또한 존재한다. 8월 23일 폴란드 내 소련군에게 내려진 명령에 의하면,

그들은 점령지 내에서 ‘해방’된 폴란드 국내군 병력이 바르샤바로 향하지 못하게 통제해야 했다.

그들은 억류당하고 무장해제 될 것이었으며 바르샤바 봉기에 그 어떤 도움도 제공해선 안됐다.





결론적으로 보면, 소련군은 바르샤바를 원했으나 점령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도시를 지원할 필요성 또한 느끼지 못했다.

비스툴라에서 겪은 뜻밖의 지연은 결과적으로 스탈린의 정치적 의도와 맞아떨어졌다.

독일군이나 폴란드 국내군이나 스탈린에게는 똑같은 방해물이었다.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우는 폴란드인은,

독일군만큼이나 소련군에게도 반기를 들 수 있었다. 방해물들이 서로 알아서 죽고 죽이는 건 오히려 고마운 일이었다.


스탈린은 이미 그만의 작은 꼭두각시, 루블린 위원회를 보유하고 있었고 소련군은 폴란드 인민군을 지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런던 임시정부와 폴란드 국내군에 비해 그 규모도, 대중적 지지도 비교할 수 없었다.

전후 폴란드에 소련의 질서를 부여하고 싶었던 스탈린에게 반소 민족주의 세력은 분명한 위협이었다.

결국 폴란드는 그의 전리품이었고, 그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었다.


때문에 봉기를 다루는 그의 태도는 지극히도 비협조적이었다.

만약 봉기를 주도한 것이 인민군이었다면 스탈린의 태도는 상당히 달랐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결국 봉기를 일으킨 건 국내군이었다.

스탈린은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더욱 격렬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이들 또한 그렇게 하도록 강제함으로써 끝내 정치적인 승리를 거머쥐었다.





자료출처:

germany and world war ii volume viii: Eastern front 1943-1944 by Karl Heinz Frieser


warsaw 1944: Poland’s bid for freedom, by Robert Forczyk


bloodlands: Europe between hitler and stalin by Timothy Snyder


The soviet-german war 1941-45 myths and realities, by David M. Glantz


the soviet union and the establishment of communist regimes in eastern europe, 1944-1954: a documentary collection by Leonid Gibianskii


The Warsaw rising of 1944, by Jan M. Ciechanows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