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medhist.or.kr/upload/pdf/kjmh-26-2-265.pdf
이주연·조영수 <태평양전쟁기 산토 토마스 수용소 포로들의 생활과 건강 - 맥안리스의 <<마닐라에서의 전쟁 일지(1941~1945)>>를 중심으로>, <<의사학>> 26-2 (2017·8)
<일본군은 조선인과 대만인 포로감시원 수천 명을 동남아시아의 포로수용소에 배속시켰다. 그 중 태국, 버마, 자바의 군인포로수용소에서는 포로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켰다. 얼마 후 필리핀 바탄 지역의 '죽음의 행진'과 군인포로수용소의 참상에 대한 국제적인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자 일본은 동남아시아의 포로수용소보다 생활여건이 나은 조선의 경성과 인천 포로수용소를 국제적십사자위원회에 공개(1942.2)하여 국제 여론을 되돌리려 하였다. (중략)
태평양전쟁기 필리핀과 중국의 포로수용소에는 조선에서 강제로 추방된 서양인 선교의사와 치과의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일본군의 포로 신분으로 의사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 중 맥안리스와 부츠라는 두 명의 선교치과의사가 수용소 생활과 진료에 대한 사적인 기록을 남겼다. 맥안리스(John Albert McAnlis)는 마닐라의 산토 토마스 대학교 민간인 포로수용소에서 지낸 39개월을 전쟁일지로 남겼다. 부츠(John Leslie Boots)는 '산토 토마스 수용소'와 '상하이 애쉬 수용소(Ash Camp)' 생활을 수필로 남겼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될 무렵 맥안리스는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치과학교실에서 20년(1921-1941) 근무한 후 일본 경찰들에게 스파이로 몰려 필리핀 선교부로 옮긴 상태였다. 부츠 역시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1921-1939)와 베이징협화의학원 치과학부(1939-1941) 근무를 마친 후 일본의 귀국 명령에 따르던 중이었다. 이들은 전쟁 발발로 불가피하게 포로가 되었다.> (266-268쪽)
<각주6 : (전략) 맥안리스는 산토 토마스 수용소 생활(1942.1.5-1945.2.23) 후 1945년 3월 30일 미국에 도착하였다. 그는 1946년 8월 1일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패서디나에서 개인 치과의원을 운영하면서 패서디나 웨스트민스터 북장로교와 연합하여 한국을 돕는 '남캘리포니아 한국 클럽'을 조직하고 자신들을 'Koreaites'라 불렀다.> (268쪽)
<일본 군정청은 필리핀 국민의 민심을 얻고자 필리핀에 '위성 괴뢰 정부'를 세웠다. 일본이 군사통수권을 쥔 상태에서 라우렐 대통령이 선출되고, 1943년 10월 '필리핀 제2공화국'이 출범했다. (중략) "아무도 필리핀 공화국 탄생에 열광하지 않는다. 왜 필리핀에서 메이지 유신을 기념하는가?" (1943.11.8)> (2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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