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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오후, 셰어는 함대에게 다음과 같은 문장을 포함한 성명문을 내놓았음.
'Deutschland und unser Kaiser über alles!'
'독일과 황제 폐하 만세!'
그리고 직후 빌헬름 2세로부터 축하 전보를 받게 되었음.
'나는 우월한 적에게 맞서 스스로를 증명해낸 나의 함대가 자랑스럽다.'
독일의 공식 성명은 스카게라크 해전에서의 승리에 대해 발표했지만, 발표문에서 '승리'라는 표현 대신 '성공적인 교전'이라는 단어를 썼음.
'지난 오후부터 한밤까지, 스카게라크와 혼 리프 사이에서 격렬한 해전이 벌어졌으며, 아군은 성공적 성과를 거두었다.
현재 알려진 바에 따르면, 영국 전함 워스파이트, 순양전함 퀸 메리와 인디패티거블이 격침되었으며
또한 아킬레스급 장갑순양함 2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기함 터뷸렌트, 네스토르, 어캐스타, 다수의 어뢰정-구축함과 잠수함 1척도 격침되었다.
주간 및 야간 전투간 많은 영국 전함들이 우리 측의 포격과 뇌격에 피해를 입었다.
특히, 전함 말보로가 뇌격 당한 것은 포로에 의해 확인되었다.
몇몇 아군 함선들은 가라앉은 영국 함선들의 승조원들을 구출했으며, 그들 중 인디패티거블의 생존자는 단 2명 이었다.
우리 측 피해로는 경순양함 비스바덴이 주간 교전간 적의 포격에 격침당했으며, 야간에 폼메른이 뇌격에 당했다.
실종된 프라우엔로프와 귀항하지 않은 몇몇 어뢰정들의 현황은 불명이다.
대양함대는 오늘 낮에 항구로 귀환했다.'
성명문에서 독일 전함과 순양전함들이 입은 막대한 피해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음.
독일 전역은 축제 분위기에 빠졌고, 언론들은 '독일의 트라팔가'를 찬양하고 있었음.
이러한 보도들은 순식간에 전세계로 퍼져나갔고, 다들 영국 해군이 패배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음.
빌헬름 2세는 6월 5일에 기함 SMS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쎄에 승함하여 연설을 했고,
같은 날 오후에는 병원들을 방문해 직접 부상자들을 위로했음. 부상자들에는 제3전함전대장 파울 벤케 소장도 포함되어있었음.
독일 제국의 제후들도 위문에 나섰는데,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올덴부르크 대공, 작센 국왕, 바이에른 국왕도 함대를 방문했음.
셰어와 히퍼는 귀족 작위를 제안 받았고, 셰어는 거절했지만 히퍼는 바이에른 막스 요제프 군사훈장을 받아 '프란츠 리터 폰 히퍼'가 되었음.
그리고 둘다 독일의 최고 훈장인 푸르 르 메리트 훈장을 수여받았고, 셰어는 중장에서 대장으로 진급했음.
영국 해군성은 독일의 발표를 접하고 아직 바다에 있던 젤리코에게 영국 측의 피해 확인을 위해 무전을 보냈음.
젤리코는 자신의 보고가 외부에 공표될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앉았기에, 솔직한 답변을 보냈음.
그 사이에 영국에서는 해전에 대한 독일의 보도가 퍼지기 시작했고, 각종 루머들이 떠돌기 시작했음.
HMS 밸리언트에 탑승했던 존 크로포드 소위는 대중들의 반응에 충격을 받았음.
'"야, 너네는 니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긴 아냐? 우리가 왜 해군을 위해 세금을 내는지 알긴 해?"'
"이봐요, 우리는 방금 전투를 치르고 왔다고요!"
"그래, 참 대단한 전투다. 독일놈들이 니들을 때려눕혔잖아, 안그래? 신문으로 다 봤어!'"
해군성의 대응은 6월 2일 19시가 되어서야 나왔는데, 영국 해군성의 첫번째 공식 발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음.
'5월 31일 오후, 유틀란트 해안에서 해전이 벌어졌다.
영국의 선봉은 4척의 고속전함들의 지원을 받은 순양전함 함대와 몇몇 순양함, 경순양함들이 맡았다.
이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안좋은 시계를 등에 업은 독일 함대는 우리 함대와 긴 교전을 벌이는 것을 회피하고, 우리 전함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은채로 항구로 돌아갔다.
순양전함 퀸 메리, 인디패티거블, 인빈시블, 그리고 순양함 디펜스와 블랙 프린스가 격침당했다.
무력화된 워리어는 승조원들에 의해 자침되었다.
구축함 티퍼레리, 터뷸렌트, 포츈, 스패로우호크, 아르덴트가 격침 된 것으로 파악되며 나머지 6척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그 어떤 영국 전함과 경순양함도 침몰하지 않았다.
적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최소 한 척의 순양전함이 가라앉았고 다른 한 척은 큰 피해를 입었다.
전함 한 척은 야간중에 우리 측 구축함에 의해 가라앉은 것으로 보고되었다.
경순양함 2척 또한 무력화 되었고 침몰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투 중 손실된 적의 구축함들의 정확한 양을 파악할 수는 없지만 상당한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측된다.'
독일과 마찬가지로 영국측 성명문에서도 '승리'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음.
그리고 이상하게도 순양전함 손실에 대해서는 '큰 피해'를 입었다고만 쓰지않고 자세히 기술한 반면에,
독일 측 손실에 대해서는 그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고 썼음.
윈스턴 처칠의 사촌인 셰인 레슬리는 해군성의 발표에 대해서
'너무나도 중립적이어서 무슨 천왕성에서 발표한 줄 알았다' 고 비판했음.
영국 국민들은 독일과 해전이 벌어진다면 당연히 왕립해군이 압도적으로 승리할 것을 기대했음.
북해의 제해권은 여전히 영국에게 있고, 이를 재확인하기 위해 영국 함선들이 전투 현장에 다시 갔다 왔던 사실은 사람들에게 와닿지 못했음.
6월 3일은 국왕 조지 5세의 생일이었는데, 젤리코는 함대를 대표해서 축하 메세지를 보냈음.
조지 5세는 젤리코와 해군 장병들을 치하하면서도 독일 함대가 빠져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유감을 표시하는 애매한 반응을 보였음.
해군성의 2차 발표에서는 독일 측의 피해를 증가시켰는데,
'3척의 순양전함 중 한 척은 폭발했고, 한 척은 무력화 되었으며 다른 한 척은 심각한 피해를 입은 것으로 관측되었다.
독일 경순양함 1척과 구축함 6척이 가라앉았다. 독일 전함 3척에 대한 계속된 명중탄이 관측되었다.' 라는 그나마 좀 더 자세한 내용이 추가되었음.
젤리코는 해군성의 성명에 불만을 드러냈고, 영국 정치가들도 대중과 소통하는데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음.
해군성은 글 하나는 잘 쓰는 윈스턴 처칠을 불렀고,
'영국의 해상 우위는 변함 없으며, 젤리코와 비티를 좌절시킨 것은 나쁜 날씨와 밤의 도래, 적의 퇴각이었다'고 는 글이 게재되었음.
처칠은 글을 쓰기 위해 전투에 대한 광범위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는데,
그러자 영국 언론들은 자신들이 처칠과 달리 전투에 대한 정보에 대해 얻을 수 없는 것에 대해 불평하기 시작했음.
6월 5일 해군성의 세번째 발표가 게재된 후, 해군성은 순양전함 3척의 손실에 대한 것과 같은 기밀 자료를 제외하고,
언론인들에게 해전에 대한 자료를 공개해버렸음.
당연히 젤리코는 크게 놀라면서 불평했고, 해군성은 다시 검열을 재개했음.
이런 검열의 극과 극을 오가는 행위는 언론계의 젤리코의 적대세력을 화나게 만들었음.
6월 7일에는 독일 측이 SMS 뤼초의 상실을 인정했지만, 하필이면 허버트 키치너 원수가 6월 5일에 독일 잠수함이 설치한 기뢰로 사망한 소식이 전해지면서
왕립 해군에 대한 신뢰도는 훼손되었음.
그렇지만 사람들은 점점 영국 해군의 우위는 손상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아갔고,
중립국들이 유틀란트 해전을 바라보는 시각도 변해갔음.
젤리코는 '처음에는 패배한 것처럼 보더니, 이제는 제2의 트라팔가로 여긴다'면서 불평했음.
밑줄은 젤리코가 직접 원문에서 강조한 부분임.
젤리코는 유틀란트 해전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해서 7월 6일에 이를 발표했지만,
솜 전투가 시작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은 대륙에서 나오는 어마어마한 사상자에 집중되었고,
유틀란트 해전은 대중들의 관심에서 빠르게 사라져갔음.
여론전 추, 마지막 연재글은 총정리?
이런것도 기록화가 다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