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에 썼던 글의 수정보완입니다.
일본이 개항한 메이지 시대부터 일본은 프로이센에게 꽃히기 시작합니다. 특히 당시 보불전쟁으로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화려하게 무너트리고 독일 제국을 세웠고, 보불전쟁 당시 일본에서 파견된 관전무관들은 몰트케의 사령부에서 엄청난 감명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메이지 정부는 프로이센군에 군사고문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했고, 이에 몰트케는 클레멘스 멕켈 소령을 일본으로 파견해 줍니다. 멕켈은 일본 육군대학의 교관으로 초빙되어 고위 장교들을 교육했고, 이 과정에서 교관 이상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멕켈은 일본군을 "아시아의 프로이센군"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여 일본 육군의 편제, 교리, 교육, 조직을 프로이센식으로 만들라고 조언했고, 프로이센식 국민개병제와 철도를 통한 병력 수송체계 건설을 조언했습니다. 일본 육군 수뇌부는 멕켈의 조언을 거의 수용하였습니다. 일본군은 독일군의 임무형지휘를 "독단전행"이란 이름으로 자기화하려 했고, 독일군의 여단-연대급 임시편제인 전투단 개념도 지대 편제로 자기화하려 노력했습니다. 사실상 프로이센/독일은 일본군의 "스승 나라"가 된 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독일식 체제로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군을 이기면서 일본 육군이 독일에 가진 찬양은 공고화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1914년에 일본이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독일에 선전포고를 할 때 육군 내에서 반대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때 군의 원로가 된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영일동맹이 중요하다지만 독일에게 원수진 것도 없고 서로 이익이 상충되지도 않는데 전쟁을 할 이유가 없으며, 독일군의 막강함으로 미루어 볼때 독일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은데 잘못하면 일본도 패전국으로 전락할 것이라며 대독 선전포고를 반대했습니다. 야마가타를 비롯한 원로들에게는 막강한 프로이센-독일군의 이미지가 이미 공고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영일동맹의 준수와 독일령 칭다오를 비롯한 독일 식민지의 정복이 일본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의견이 더 우세해 일본은 결국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게 됩니다.
1914년에 일본군은 독일령 칭다오를 공격해 점령합니다. 이 과정에서 독일군 포로들은 놀라울 정도로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습니다. 일본 본토에 분산수용된 독일군 포로들은 가혹행위를 겪지 않았을 뿐더러 포로수용소장들의 재량에 의해 자유롭게 외출하여 현지인들과 어울리는 생활이 보장되었습니다. 심지어 수용소 인근의 학교들에서는 독일군 포로들을 초빙해 독일식 체조를 학생들에게 가르쳐주고, 독일군 포로들은 일본의 주짓수를 배워가는 등의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군이 얼마나 독일을 워너비로 여겼는지 알 수 있는 단편입니다.
게다가 서부전선에 파견된 일본군 관전무관들은 황당하게도 아군인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아닌, 엄연히 적국인 독일군에 감정이입을 하는 행태를 보여주었습니다. 일본 관전무관들은 독일제국은 황제의 이름아래 군민이 일치단결하였기 때문에 강력한 전투력을 보여주고 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헤이한 민주주의 때문에 국론이 분열되어 전투력이 약했다는 보고서를 본국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독일식 방법을 택하고 덴노를 중심으로 하는 군국주의 체제를 수립한 자신들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독일이 패하자 이들은 독일이 이럴 리가 없다며 멘탈붕괴를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군은 독일의 패전원인이 군국주의 체제의 문제가 아닌 군국주의가 헤이해져서 후방의 소요사태가 일어나 독일이 패한 거라는 아전인수격 해석을 내려버리고 자신들이 틀렸음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특히 전후에 일본의 로망을 자극한 것은 탄넨베르크 전투였습니다. 일본군은 독일의 지정학적 상황에서 어느 정도 동질감을 느꼈습니다. 독일은 서쪽의 영국과 프랑스, 동쪽의 러시아에 둘러싸인 형국이라 더 이상의 팽창이 불가능했고 국력이 약해지면 국가 생존도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본군도 북쪽의 러시아/소련과 바다 너머에 식민지들을 가지고 있는 영국과 미국, 그리고 당장은 분열되어 있지만 강력한 잠재력을 갖춘 중국에 자신들이 독일처럼 에워싸여 있다고 보았습니다. 특히 일본은 소련, 영국, 미국보다 산업 생산력이 더 취약했고, 1차 세계대전으로 장차전이 물량전으로 갈 것이라는 전망이 강해지자 일본이 이를 감당할 수 없기에 불안감은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상황에 독일의 탄넨베르크 전투처럼 소규모 전력으로 적의 대규모 전력을 섬멸한다는 건 그야말로 모범 사례였습니다. 독일은 프로이센 때부터 그러한 지정학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프리드리히 대제 대부터 작전술적, 전술적 기동전에 목숨을 걸었고 이를 통해 보불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군사적인 단기 결전으로 정치경제적 열세를 극복한다는 사상과 행동은 일본에게 더 없이 매력적인 것이었고 이는 일본군의 독일군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수많은 일본 장교들이 독일의 승리의 결정판이라고 여긴 탄넨베르크로 성지순례를 갔고 소규모 전력으로 대규모 전력을 상대할 수 있다는 일명 '탄넨베르크 정신'이 대세가 됩니다.
그리하여 독일군은 일본군의 영원한 워너비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이러한 독일 찬양은 상당한 짝사랑이었습니다. 정작 당대의 독일인들은 일본인을 "날생선을 먹는 황인종 야만족" 정도로 치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치 집권 초기에는 이러한 인종주의가 더 강화되어 독일에 체류하는 일본인들은 대놓고 인종차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치가 일제와 방공협정을 맺고 동맹관계가 되자, 나치는 일본인을 게르만 민족과 동일한 상무정신을 가진 "준아리아인"으로 띄워주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나치즘의 인종주의 때문에 길 가던 일본 외교관이 나치당원에게 더러운 동양인이라고 뺨을 맞는 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일본 본토에서 알려지지 않았고 (알려져도 검열했겠지만) 일본의 독일 애호와 찬양은 계속되었으며 독일군은 영원히 멋진 존재로 전후 여러 매체에 반영되게 되는 것입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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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 「일본 육군의 '대전의 교훈' 형성 과정과 스토리텔링」, 『스토리&이미지텔링』,제6집 (2013년 12월)
설인효, 「군사혁신(RMA)의 전파와 미중 군사혁신 경쟁: 19세기 후반 프러시아-독일 모델의 전파와 21세기 동북아 군사질서」, 『국제정치논총』제52권 3호 (2012년 9월)
이경분, 『나치 독일의 일본 프로파간다』(제이앤씨, 2011)
정구철, 「한국 학교체육에 내재된 군사주의적 특성형성에 관한 연구」,『한국체육학회지』제38호 (1999년 5월)
쿠로노 타에루, 『참모본부와 육군대학교』(논형, 2015)
하정열, 『일본의 전통과 군사사상: 일본자위대의 뿌리를 찾아서』(팔복원, 1999)
후지와라 아키라, 『일본군사사: 上, 戰前篇 』(제이앤씨, 2013)
독뽕은 만악의 근원
원조 독뽕
혐성은 영길리에 독뽕이라니....혼절 - dc App
한국인-일본인-독일인의 관계를 내선일체-준아리아인으로 규정하고 자신을 아리아인이라고 주장하는 또라이들이 생길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겠지
예전에 학교에 있을때 전시때 신문자료중에 롬멜 전과 나온 기사있던데 "귀축영미를 농락하는 전설의 귀(귀신)장군" 하면서 후장빠는걸 보고 쪽본의 독뽕이 지랄맞구나 싶었음.
짝사랑 독뽕.... - dc App
요즘도 일본이 독일을 유독 좋아하고 한국 밀리터리 판도 독일에 우호적이었던 걸 생각하면 이런 의식이 영향을 줬을까요?
뭐 일본의 경우에는 2차대전 때 그 친구들 소시지 먹었으니 알거 같긴 하다만...
아무레도 군사 관련 취미가 형성된 기원이 일본에서 건너온 프라모델로 잡을 수 있기 때문에 영향이 있었을 거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