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rning of D-Day from an LST,” painting, watercolor on paper, by Mitchell Jamieson, 1944 (88-193-HI).
H-Gram 031, Attachment 1
Samuel J. Cox, Director NHHC
June 2019
(노트:이 H-gram은 노르망디 상륙의 전체적인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동원된 군함의 대다수는 병력과 마찬가지로 영국군이였습니다. 영국군, 캐나다군, 미군, 특히 오마하 해변의 군인들이 보여준 극도의 영웅적인 행보를 손상시킬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 H-gram은 연합군이 프랑스에 공격을 가한 오버로드 작전의 상륙단계인 넵튠작전중의 미 해군의 작전들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당시의 교리에 따라 육군 지휘관들이 그들의 병력을 상륙시킬때까지는 해군 지휘관들이 지휘를 맡았기에 넵튠작전은 해군 작전입니다.)
1944년 6월 5일, 날씨로 인해 하루가 지연된 다음날, 255척의 소해함(대부분은 영국군)들이 상징적인 표식으로서 폴란드군 구축함 ORP 슬라잭(망명 폴란드 해군에 영국이 대여해준 영국군 구축함; 폴란드는 나치독일이 처음으로 공격한 국가였다.)이 선두에 선채로 남부 잉글랜드의 항구에서 출항했다. 이 소해함들은 영불해협에 독일이 광범위하게 부설한 기뢰지대를 제거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 여기에는 접촉식 기뢰와 자기감지식 기뢰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일부는 정교한 대 선박 능력과 기타 기만능력을 갖춘것도 있었다. 소해함들은 영불해협에 부설된 많은 독일 기뢰를 무력화하여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나 여기에는 독일이 6월보다 일찍 침공이 일어날것이라 예상해 많은 기뢰들이 가라앉도록 설정되었던것에도 도움을 받았다. 또한 독일군은 바닥에 가라앉은채로 충분한 크기의 배가 위를 지나갈때까지 기다리다가 폭발하도록 하는 신형 "오이스터" 압력기뢰를 많이 부설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수중에는 수천개의 독일군 기뢰가 부설되어 있었다. 1700시에 미군 소해함 오스프리(AM-56)가 기뢰에 접촉했으며 전방 엔진실에 큰 구멍이 뚫려 승조원 6명과 함께 침몰했다. 이것이 연합군의 프랑스 공격인 오버로드 작전의 상륙단계인 넵튠작전의 첫번째 손실이였다.
1942년부터 43년 사이에 미영의 군 지도자들간의 아주 가끔은 잔인하게 이루어진 논의와 독일군이 소련을 전쟁에서 탈락시킬 위협(그리고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이 전쟁에서 이탈하겠다는 위협)끝에 연합군은 마침내 1944년에 프랑스 북부를 침공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를 위해 필요했던 대규모의 병력 증강과 물류 집적은 1943년과 44년에 미영 해군이 독일 유보트에 대항해 거둔 판정승 덕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
프랑스를 공격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장소는 영불해협의 가장 짧은 지역이자 독일과 최단거리를 자랑하는 파 드 칼레였다. 이곳은 또한 항구로서 추가적인 이점이 있었다(또한 수세기전에 해협을 건너 공격을 이뤄낸 전통적인 장소였다). 문제는 이 점을 독일또한 알았기에 이 지점을 상당히 공들여 요새화 했으며 프랑스 해안의 이 지역에 부대를 주둔시켰다는 것이였다. 대신에 연합군은 노르망디에 상륙하기로 결정했으며 독일군에게 파 드 칼레가 상륙지점이라고 확신을 주기 위해 전사상 가장 거대한 기만작전(포티튜드 작전)을 실행했다.
노르망디는 파 드 칼레만큼 요새화 되지 않았기에 연합군의 상륙목표로 선정되었으나 독일 잠수함 공격에 노출되지 않고 비스케이 만이나 브리트니처럼 많은 연합군 지상발진 항공기의 항속거리 바깥이 아니며 이 두 장소처럼 독일 과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르망디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데 특히 항구가 없다는것이 가장 큰 문제였기에 연합군은 상륙후 빠르게 서쪽의 셰르부르를 점령하거나 동쪽의 르 아브르를 점령해야 했다. 또한 노르망디의 해변은 조수간만의 차가 컸으며 해류가 강하고 악천후가 빈번했다.
결국 광범위한 정보수집 후에 연합군은 5개의 해변을 선택했다. 여기에는 거의 밤인 시점에 이루어진 미 육해군 연합 상륙 정찰 및 습격대 운용과 영국의 X급 소형 잠수정 정찰, 광범위한 항공 정찰(기만을 위한 많은 비행도 이루어졌다), 무전 정보( 독일 육군과 공군의 에니그마 기계 코드는 해군의 것만큼 해독이 어렵지는 않았다), 독일 점령하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보고가 포함되었다. 미영 폭격기들은 일반적으로 연합군의 손 끝이 될 노르망디 지역의 폭격을 피하고 대신 프랑스 내의 중요한 철도차량기지와 통신선에 폭격을 가해 많은 프랑스 민간인들을 대가로 상륙시의 독일군의 대항을 방해하고자 했다.
선택된 해변들은 코드네임을 받았는데 서쪽에서 동쪽으로 유타,오마하,골드,주노,소드였다. 유타와 오마하는 미군에 배정되었고 주노는 캐나다군에 배정되었으며 골드와 소드는 영국군에 배정되었다. 해상에서는 미군 상륙부대와 함께 작전중인 영국군 함정과 영국-캐나다 상륙부대와 함께 작전중인 미군 함정이 있었기에 이러한 구분은 명확하지 않았다. 5개의 해변중 오마하는 방어에 매우 유리한 지형으로 인해 가장 힘들것으로 분명히 예상되었으나 실패할 경우 유타해변의 미군과 동쪽의 영국과 캐나다군 사이에 너무 큰 간격이 생기며 유능한 독일군이 이곳을 이용할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독일의 방어
사실 미 해군은 독일의 방어 전략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독일의 지휘 체계는 이곳으로 들어가기에는 너무나도 복잡했다(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큰 문제중 하나일 뿐이였다). 그러나 북아프리카에서 유명한 "사막의 여우"(훌륭한 병참가가 아닌 훌륭한 전술가)인 야전원수 에르빈 롬멜은 연합군의 침공으로부터 프랑스 북부를 방어하고 그의 상관인 룬트슈테트 야전원수와 전장을 혼란스러운 방식으로 공유할 책임이 부여되었었다. 롬멜은 연합군의 공중우세때문에 상륙이 실패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해변에서 막아내야 한다는 결론을 냈다. 이는 기동기갑부대를 강조하며 룬트슈테트가 선호하는 독일의 교리에 어긋나는 것이였다. 룬트슈테트의 계획은 연합군이 해변에 상륙하는것을 허용한뒤 그들이 계속해서 작전 가능한 위치에 오기전에 강력한 기갑공세로 분쇄하는 것이였다.
롬멜은 기동 기갑전에서 명성을 얻었으며 그러한 전술의 이점을 잘 알고 있었으나 열린 공간에서 기동중인 전차가 연합군의 항공력에 취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전차를 후방의 기동예비로 남겨두지 않고 해변에 가까이 배치하고 싶었다. 룬트슈테트는 해변 근처에 위치한 전차가 연합군 해군의 포격에 취약하다고 반박했으며 독일군의 기갑부대를 동원한 반격이 미 해군의 포격에 무력화된 시칠리아의 젤라와 이탈리아의 살레르노에서의 전훈을 인용했다. 히틀러는 두 작전안을 사이에 두고 모호한 태도를 취해 롬멜은 해변에서 멀지 않은곳에 주둔할 약간의 기갑부대를 받았으며 룬트슈테트는 내륙 깊숙한곳에 위치한 기동예비대로 많은 전차를 받았다. 상륙이 시작되었을때 양측은 모두 옳았다:롬멜의 전차들은 미영 해군의 포격에 격파당했으며 룬트슈테트의 전차들은 연합군 공군에 격파되었다.
해변 교두보에서 연합군의 상륙을 물리치기 위해 롬멜은 가장 효과적인 무기가 지뢰라고 결정했다. 프랑스 해안 전체에 걸쳐 거대한 요새가 건설되었으며 이 프로젝트는 "대서양 방벽"으로 불리며 독일의 선전에 의해 난공불락으로 과장되어서 알려졌다. 요새화는 인상적이였으나 파 드 칼레 지역을 제외한 지역은 해안을 따라 얇게 건설되어진 상태였다. 롬멜은 대서양 방벽이 전함포 사격에 무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으며(많은 요새가 전함포 사격을 잘 견뎌냈음에도 불구하고) 해변장애물을 건설하고 기뢰를 부설하는데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바다에 수천개의 기뢰를 부설했으며 해변을 따라 수백만개의 지뢰를 매설하였다. 연합군 함선에 있어 가장 치명적이였던 것은 소해 작전에 들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뢰였다.
1944년에 연합군은 프랑스전역의 제공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살아남은 독일 공군 전투기들은 독일에 하루종일 이어지는 연합군 전략폭격을 막아내는데 전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오버로드 작전동안 독일 공군이 이룬 유일한 업적은 야간 전투기를 동원해 이미 소해된 지역에 압력기뢰를 부설한 것 뿐으로 이 압력기뢰들은 "모든 배는 단 한번 소해함이 된다" 개념을 제외하고는 썩 좋은 소해법이 없어 이러한 개념하에 소해를 진행해야만 했다. 수많은 연합군 함선들이 이들 기뢰의 희생양이 되었다. 단 두대의 항공기만이 디데이와 그 다음날 노르망디 해안에서 날아올랐으며 수천발의 대공포 사격이 날아들었으나 한발도 맞지 않아 대공포의 낮은 명중률을 보여주었다.
독일 해군은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에서도 좋은 위치를 점하지 못했다. 그곳에는 소수의 독일군 순양함과 구축함만이 남았고 연합군의 공군력에 맞서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독일 해군의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여전히 유보트였다. 대서양 연안의 요새화된 시설에 주둔중인 유보트는 36척이 있었으나 새로운 스노클 장치(잠수함이 잠수해 있으면서 스노클만 수면위로 올려 배터리 충전이 가능함)가 장착된 9척만이 끝없이 이어지는 연합군의 항공 엄호와 상륙부대에 수반하는 수많은 호위함들을 뚫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약 30척가량의 독일군 S 보트(슈넬보트-연합군은 E 보트로 이름지음)들이 어뢰로 무장한채로 프랑스 북부 해안의 항구들에 주둔중이였으며 노르망디 해안 서쪽의 쉘부르와 동쪽의 르 아브르의 항구에도 주둔중이였다. 르 아브르에 주둔한 부대는 더 큰 몇척의 어뢰정(미군 호위구축함과 유사함)도 있었으며 수많은 기뢰전용 함선들도 있었다(약 40척). 북부 프랑스의 독일 해군의 방어(해군 해안포와 해변의 대공포도 포함)는 독일 서부 해군그룹의 사령관인 테어도르 크랑케 제독의 지휘하에 있었다.
연합군과 조직
연합군 상륙부대의 규모는 다른 자료들마다 다른 규모로 나타나고 있는데 어떤 크기의 함만을 계산하는가와 디데이에 있었던 배들만 계산하는가 아니면 해협을 건너서 병력을 증원하고 보급을 지원한 배들을 모두 계산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물에 뜨는 모든것들을 계산할 경우(다른 배들에 실려가는 상륙정도 포함해서) 작전 전 기간동안 작전에 투입된 함과 정의 수는 6천척을 초과한다. 해군 전투함들은 284척으로 훨씬 적다. 여기에는 전함 6척과 (미군 3척 영국군 3척) 두척의 영국 모니터함(15인치 포),순양함 23척(미군 순양함은 3척뿐이다), 약 110척의 구축함(34척은 미군 구축함), 추가로 다양한 프리깃, 코르벳, 소형함들이 있다.
상륙에 투입된 상륙부대는 229척의 전차 상륙함(LST), 다양한 버전의 전차 상륙정(LCT) 911척(LCT(A) 장갑 버전 포함), 200척의 다양한 보병 상륙정(LCI),36척의 로켓 무장 상륙정(LCT(R)),481척의 "마이크 보트"로 알려진 기계화상륙정(LCM),1500척 이상의 미국인 설계자와 제작자의 이름을 따 "히긴스 보트"로 알려진 차량과 보병 상륙정(LCV)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수량은 자료별로 다르지만 매우 많이 있었다는것은 확실하다) LCVP는 상륙의 기본 장비로 30명의 공격 병력과 두명의 장교를 수송했으며 승무원으로는 해군 요원 셋이 탑승하거나 많은 경우 해안경비대 인원이 탑승했다(정장과 기관총수).
연함군 조직의 꼭대기에는 연합군 원정부대의 최고사령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이 있었다. 지상군 총사령관은 영국 장군 버나드 몽고메리였으며 해군 총사령관은 왕립해군의 버트램 램지 제독이였으며 특별히 만들어진 지휘함 HMS 랑스에 탑승하고 있었다. 해군부대는 경순양함 HMS 스킬라에 탑승한 영국해군 소장 필립 비안이 지휘하는 동부 테스크포스와 중순양함 USS 어거스타(CA-31)에 탑승한 알란 G. 크릭 소장이 지휘하는 서부 테스크포스(TF-122)로 나뉘어진 상태였다. 상륙에서 미 지상군 최고 사령관은 오마르 브레들리 장군이였으며 어거스타에 크릭과 함께 탑승중이였다. 동부 테스크포스는 영국과 캐나다 병력이 상륙하는 골드,주노,소드 해변의 상륙을 실행했으며 서부 테스크포스는 유타와 오마하 해변에서의 미군 상륙을 실행했다. 서부 테스크 포스는 두개의 주요부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상륙부대 O (TF-124)가 오마하 해변에서 상륙을 실행할 부대였고 상륙부대 U (TF-125)는 그동안 유타해변에 상륙을 실시했다. 후속부대 B는(TF-126) 양측 해변 모두에 후속부대로 대기중이였다.
상륙부대 O는 상륙지휘통제함 USS 안콘(AGC-4)에 승함한 존 헬 소장의 지휘를 받았으며 또한 안콘에는 미 육군 5군단 사령관인 레오날드 지로우 소장과 미 제1보병사단장인 클리언스 R 휴이버 소장이 탑승중이였다. (오마하 해변의 첫 상륙은 제1보병사단 16 보병연대와 제1보병사단에 임시 배속된 29 보병사단 116 보병연대가 실시했다.)
O 부대를 위한 포격 부대는 전함 텍사스(BB-35)에 탑승한 칼톤 브라이언트 소장의 지휘하에 있었으며 이 부대는 또한 미해군에서 가장 오래된 전함 아칸소(BB-33)와 왕립해군 경순양함 HMS 글래스고와 HMS 벨로나,자유프랑스 경순양함 조르주 리게스와 몬드칼름,미군 구축함 8척과 영국 구축함 3척이 포함되어 있었다.O 부대는 또한 소해부대를 보유중이였으며 4개의 강습 부대와(LST와 다양한 상륙정으로 구성) 호위부대 (포격부대에 소속된 구축함들이 포함됨),근접포격부대(건보트처럼 무장한 상륙정으로 구성),장거리 해안 지원그룹,미 해군 제 6,7 전투 폭파부대가 포함된 해안 분견대도 보유중이였다.
상륙부대 U는 미 해안경비대 운용 상륙지휘 및 통제 구성 공격 수송선 USS 베이필드(APA-33)에 승함한 돈 P. 문 소장의 지휘를 받았다. 베이필드에는 또한 미 육군 7군단 사령관인 J. 로우톤 콜린스와 미 제4보병사단장 레이몬드 바톤 소장도 탑승중이였다. 제 4사단은 유타 해안에 첫 상륙을 실시할 예정이였다.(또한 베이필드의 부 포술장 로렌스 베라는 나중에 뉴욕 양키스 매니저 "요기" 베라로 알려졌으며 4 보병사단장 대리인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아들인 시어도어 루스벨트 주니어 준장은 유타 해안으로 향하는 첫번째 상륙제파의 첫번째 보트에 탑승했으며 한달뒤에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사후에 명예훈장이 추서되었다.)
U 부대를 위한 포격부대는 중순양한 투스칼로사(CA-37)에 탑승한 몰톤 데이요 소장이였다. 이부대는 또한 진주만에서 생존한 전함 네바다(BB-36)와 신형 중순양함 퀸시(CA-71),영국 모니터함 HMS 에레버스,영국 중순양함 HMS 호킨스,영국 경순양함 HMS 엔터프라이즈와 HMS 블랙프린스,미군 구축함 8척,미군 호위구축함 두척,왕립 네덜란드 해군 건보트로 구성되었다. 거기에 더해 U 부대 또한 소해부대를 보유중이였으며 두개의 강습부대와 하나의 호위부대(USS 와드(DD-139)의 함장이였으며 일본군 항공공격이 있기 전에 일본군 소형 잠수정을 진주만에서 격침시켰던 윌리엄 아우터브릿지 대령의 지휘하에 있었다),장거리 해안 지원부대,제 2 해군 상륙대대와 해군 전투 폭파부대로 구성된 해안 분견대를 보유중이였다.
해군 전투 폭파부대(NCDU)는 디데이 상륙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며 높은 손실률을 보였다. 175명의 NCDU 병력중 오마하 해변에서 31명이 사망했으며 60명이 부상당했고 유타 해변에서는 4명이 사망했으며 11명이 부상당했다. NCDU 부대는 노르망디 상륙에서 보여준 영웅적인 모습에 대통령 부대 표창을 수여받았다.
드레퍼 카우프만 소령의 지휘하에 1943년 말에 처음 창설된 NCDU 부대는 일반적으로 미 해군 토목 대대소속 장교 한명과 다섯명의 병사로 구성되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해군 공병대에서 자원한 이들이였으며 일부는 해병대와 육군 전투공병대에서 자원한 이들이였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7명이 운용하는 LCRS 접이식 보트에서 내려 작전했으며 많은 기록에서 그들을 "개구리"라 불렀으나 노르망디에서는 유틸리티 장비를 착용한채로 보트에서 작전했다. 노르망디 상륙때는 34개 NCDU가 영국에서 조직되었다.
넵튠작전동안 NCDU는 세명의 수병이 증강되었는데 그들은 해변의 수많은 독일군 장애물들을 날려버리기 위해 설계된 폭발물이 담긴 가방을 추가로 소지했다. 또한 노르망디에서 NCDU는 다섯명의 미 육군 전투공병들과 함께 갭 공격 팀(GAT)을 구성했다. 계획상으로는 첫번째 상륙제파가 상륙한뒤 5분후에 2차 상륙제파가 상륙할 예정이였으며 그때 GAT는 후속 상륙선들이 상륙할 수 있도록 해변을 정리하는것을 시작할 예정이였다. 해군 병력들은 장애물들(대부분은 지뢰가 설치되어 있었다)을 바다쪽으로 치울 예정이였으며 그동안 육군은 장애물들을 육지쪽으로 치울 예정이였다. 육해군 GAT 요원은 서로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서로의 훈련을 모두 받았으며 디데이에서 종종 수행되었다. 해상 상태와 혼란으로 인해 일부 GAT 인원은 공격을 진행할 보병들의 첫 제파가 도착하기도 전에 오마하 해변에 도착했으며 동일한 운명을 맞이했다. GAT 인원 대다수는 해변에 도달하지 못했다.
육군은 두개의 특수공병여단을 오마하 해변에 배치했으며 유타에는 하나의 특수공병여단을 배치했다. 해군은 차례로 각 육군공병여단에 하나의 해군 상륙대대를 배정하였다. 제2 해군 상륙대대는 유타 해변으로 향했으며 제6,7해군 상륙대대는 오마하로 향했다. 대대의 목적은 좌초된 상륙정을 조종하고 해안장애물을 제거하며 신속하게 해안을 조사한뒤 지도를 그리며 손상된 상륙정을 수리하는 것이였으며 의료지원부대와 통신부대도 보유중이였다.
상륙에서의 사상자 수치는 매우 높을 것으로 예상되었으며 (실제 수치보다 매우 높음), 부상자는 해군이 주로 돌보는 것으로 처리되었기에 광범위한 준비가 이루어졌다. 해군 군의관과 의무병들은 제2,6,7 해군 상륙대대에 배속되었으며 상륙 초기제파와 함께 해안으로 향했다. 시간은 금이였는데 스스로 이동이 불가능한 부상자들은 밀물이 들어오면 해변에서 익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였다. 노르망디는 부상자들이 처음에 살아남기 위해 적에게 더 가까이 가야하는 드문 경우였다.
많은 LST와 LST, 공격수송선들은 부상병들을 돌보기 위해 특별하게 구성되었다. 미군 LST 144척중 106척이 추가적인 의료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중 54척은 돌아오면서 200~300명의 부상자를 수송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일반적인 승조원과 장비외에도 이 LST들은 147개의 병상이 있었으며 의무 인력으로 두명의 해군 군의관, 한명의 육군 군의관, 두명의 육군 수술실 요원, 40명의 해군 의무병들이 있었다. 해변과 LST에서의 해군 의무팀은 신속했으며 많은 생명을 구해냈으며 그 대가는 참혹했다. 오마하 해변에서 해군 군의관 3명이 사망했으며 의무병 30명이 사망했다. 유타 해변에서도 군의관 한명과 의무병 7명이 사망했다. 해군 의료병력들은 두개의 해군 십자장을 수훈받았으며 다섯개의 은성훈장과 12개의 훈공장,23개의 동성훈장도 수여받았다. 육해군 의무병들은 "용감한 이들중 가장 용감한 이들"로 알려졌는데 의도적으로 독일 저격수의 표적이 되거나 독일군이 제압사격을 가하는 곳에 계속해서 뛰어들었다.
해군 해안 포격유도부대는 한명의 해군 장교와 한명의 육군 포술장교, 한명의 통신병으로 구성되었으며 해군 포격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상륙 초기제파와 함께 해변으로 향했다. 이들 중 일부는 새벽 직전에 독일군 방어선 뒤편으로 82공수와 101공수부대와 함께 낙하했으며 최소 한개의 팀이 프앙테 뒤 오크로 육군 레인저와 함께 올라갔다. 이 팀들 대다수는 해안에 도달하지 못했는데 오마하 해변에 도착한 팀은 엄청난 적 사격에 제압당했으며 대부분의 무전기가 파도속에 쓸려가거나 그들의 운용병들이 사망해 지원 포격함들과 무전 접촉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공수부대와 함께 강하한 팀들은 수많은 장거리 함포 사격지원을 받을 수 있었으며 일례로 순양함 퀸시의 포격이 치명적인 독일군 88mm 대전차포를 완전히 날려버렸다.
왕립 해군 시파이어 4대 비행대대(왕립공군이 통제하는 해안 비행장에서 작전함)와 왕립 공군 스핏파이어 5개 비행대대와 머스탱들은 항공 포격 관측을 상륙기간동안 수행했다.이 항공기들은 한쌍으로 작전을 수행했으며(한기는 관측,한기는 독일군 전투기로부터 엄호) 스핏파이어의 짧은 항속거리로 인해 릴레이로 작전을 수행해야만 했다. 미군 전함과 중순양함에 탑재된 관측/정찰기는 독일군의 공습과 대공포 사격에 취약하다고 판단되어 내려졌다. 그러나 해군관측 비행대대 소속 조종사 17명이 자원해서 스핏파이어 Mk. V를 조종하는법을 빠르게 배웠으며 서둘러 조직된 VOS-7 (미 육군 항공대 67 정찰비행단에서 훈련 시켜줌)에 배속되었다. VOS-7의 조종사들은 1944년 6월 6일에 약 200회(한 자료는 191회,한 자료는 209회) 전투출격해 미군 해안 전역에서 포격 관측임무를 수행했다. 이것은 처음에는 구름으로 덮인것과 연기와 안개로 인해 심각하게 힘들었다. VOS-7의 스핏파이어 9기가 격추 당했으며 투스칼로사의 조종사 한명이 스핏파이어가 대공포에 격추되었을때 사망했으며 다른 조종사들은 모두 살아남았다. VOS-7 파일럿 7명이 독일 전투기를 만났으나 살아남았다. VOS-7의 조종사들은 9개의 수훈비행십자장을 수여받았으며 11개의 항공장을 수여받았다. VOS-7은 상륙 직후 바로 해산되어 가장 짧은 시간동안 존재한 미 해군 비행대대로 남았으며 유일하게 영국군 스핏파이어로 비행한 해군 비행대대가 되었다.
넵튠작전의 시작
연합군의 상륙은 원래 1944년 6월 5일로 예정되었으나 기상예보가 좋지 않았다. 6월 6일에 날씨가 충분히 좋아진후 6월 7일 이후에 다시 악화될 가능성이 있었고 조수의 상태로 인해 상륙이 5-7일 사이에 진행되지 않으면 몇주를 더 연기해야 하기에 독일군이 작전의 실제 목표를 알아낼 가능성이 높아졌다. 일부 독일 지휘관은 실제 목표를 알아내기 시작한 상태였기에 군사상 가장 중대한 결정중 하나에서 아이젠하워 장군은 6월 6일의 불확실한 일기예보를 보고 "좋아,갑시다."라는 말을 하면서 도박수를 던졌다.
거대한 연합군의 무적함대는 남부 잉글랜드 전역의 항구에서 출항하여 "피카델리 서커스"로 불린 소해 지역을 통과한 뒤 해협을 건너 목표 해변으로 향했다. "고속"로는 전투함들에 할당되었고 "저속"로는 느린 상륙함들이 할당되었는데 이 길은 모두 거친 바다로 인해 타격을 받았기에 사실상 연합군 상륙부대 전체가 뱃멀미에 시달렸다. 소해함과 호위하는 구축함들을 가장 먼저 따라간것은 각각 4대의 전차를 탑재한 LCT 제파였다. 전차에는 물위에서 항해할수 있게 해주는 듀얼 드라이브(DD) 시스템과 전차를 물에 뜨게 해주는 팽창식 측판이 장착되어 있었다. 이것들은 영국의 호수에서 테스트 할때는 잘 작동했으나 약 9인치 밖에 되지 않는 건현으로 인해 오마하 해변의 좋지 않은 해상 상태에서 탱크가 죽음으로 가는 덫이 되었다. 수륙양용 탱크의 아이디어는 LCT가 해변에서 약 2.5마일 떨어진 해상에서 전차를 발진시키는 것이였고 함정들은 해변에서 손상되거나 손실될 위험 없이 돌아가서 더 많은 전차를 가져 올 수 있다는 것이였다. 시간이 되자 전차들이 물로 뛰어들었고 첫 보병제파가 상륙하기 5분전에 해변에 도착할 예정이였으나 해상 상태와 적으로 인해 한대도 살아남아서 접촉하지 못했다.
LCT를 따라서 추가적인 상륙정들이 자체 동력과 자체 동력을 갖춘 "라이노" 바지선에 탑승해 따라왔는데 LST와 공격 수송선과 같은 상륙함들은 1,089척의 "히긴스" 보트를 다섯개의 상륙해안에 첫 공격을 가하기 위해 수송중이였다. 소해함들은 6월 5일 오후와 5-6일 밤에 그들의 임무를 마쳤다. 0230시에 포격부대가 소해완료 구역의 지정된 위치에 도달했다. 전함과 중순양함들은 닻을 내렸으며 소해되지 않은 구역으로 표류하는것이 독일 해안포대의 공격보다 더 위험했기 때문이였다.
포격부대는 6척의 전함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미 해군과 왕립 해군 모두 기뢰가 많으며 좁은 해역에는 전함을 투입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영국군은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1차대전기 구형전함인 HMS 워스파이트와 HMS 라밀레즈를 투입했으며 두척 모두 이전의 전투에서 입은 피해를 완전히 복구하지 못한 상태였다.(워스파이트는 이탈리아 살레르노에서 독일의 무선 조종 폭탄에 명중하였으며 라밀레즈는 마다가스카르에서 일본군의 소형 잠수정에 뇌격당했다.) 더 새롭과 더 강력한 HMS 로드니(1941년에 독일 전함 티르피츠를 격침하는데 도움을 줌)는 중대한 기계적 고장으로 인해 1944년 6월 7일까지 복귀하지 못한 상태였다.
미군은 영국군과 비슷한 입장을 취했다. 세 전함 모두 1차대전기 전함으로 전함 아칸소(12인치포 12문)는 해군에서 가장 오래된 전함으로 약간의 개장만을 받았으며 텍사스(14인치포 10문)가 약간 더 새것이였다. 네바다는 1941년 12월 7일의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때 스스로 좌초되었으며 인양되어 수리를 받으면서 현대화 개장을 받은 상태였다. 미군은 중순양함을 단 세척만 투입했으며 1930년대에 건조되어 낡은 어거스타와 투스칼로사(8인치포 9문)와 전쟁 발발후 새롭게 건조된 발티모어급 중순양함 퀸시(8인치포 9문)를 투입했다(퀸시라는 이름은 전대 퀸시가 1942년 8월에 사보섬 해전에서 침몰하면서 이어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영국 해군이 상륙을 지원하기 위해 전함과 순양함을 제공한다는 합의가 미국과 영국사이에 있었다. 그러나 렘지 제독이 계획을 세우면서 왕립 해군이 제공가능한 것보다 더 많은 전함이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영국군은 영국 북부에서 노르웨이의 피요르드에 있는 전함 티르피츠가 튀어나올 경우에 대비해서 강력한 전함전대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사실이 아니였다). 아이젠하워장군이 렘지의 요구를 지지해 주었고 해군참모총장인 어네스트 J. 킹 제독이 합동참모부에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그의 대리인인 찰스 M. "셰비" 쿡 소장을 영국으로 보냈다. 쿡은 크릭 소장(U부대의 포격부대의 지휘관)의 대리인인 존 헬 주니어 소장과 열띤 논쟁을 벌였다. 헬은 킹 참모총장이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위해서 적절한 화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이게 말이 되냐"고 말했다. 쿡은 헬의 발언과 어조가 무례하다고 생각했으나 논쟁이 가라앉자 킹은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 전함 세척, 중순양함 두척과 구축함 20척을 추가해주었다(미군 구축함 수는 거의 34척으로 늘어났다).
동원 선박 수 보면 장대하다 정말
장문의 정보글 개추, 정말 양질의 글인데 너무 길어서 추천이랑 댓글이 없는건가 ㅋㅋㅋ
독일군 노르망디 방어 계획이 두가지로 갈린 것도 웃기지만 두쪽 다 박살났다는 게 가장 큰 웃음포인트인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