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no=1896905
이 글 보고 대충 적음.
결론부터 말하면 유엔군 북진 실패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문제들이 차곡차곡 쌓인 결과물이지 국군 2군단이 평양 레이스가 가담해서가 아님.
우선 중국은 10월 19일, 평양이 함락되던 날 6.25전쟁에 개입하기로 결정하여 22일까지 중공군 제38, 39, 40, 42군이 한반도로 진입했음. 또한 제50, 66군은 10월 말까지 한반도 진입을 준비했음. 11월 초 한반도에 전개된 중공군의 규모는 6개 군(군단), 18개 보병사단, 3개 포병사단이었음.
애당초 중국은 유엔군이 38선을 넘을시 참전하겠다고 위협하였던만큼 이런 상황을 제때 예측하지도, 대비하지도 않은 유엔군 사령부와 한미 수뇌부에 그 책임이 있음.
근데 보니까 혹자는 국군 2군단이 평양 방면으로 진격로 틀지 않고 쭉 북진했으면 중공군 개입이 차단되었을 거라고 말하는데
위에 내가 쓴 거 복기해보자. 중공군의 한반도 진입은 19일의 일이었음. 그리고 정일권으로부터 2군단에 평양 공격 명령이 내린 건 13일임.
일주일 안으로 곡천에서 만포까지 진격하라? 38선 넘어서 곡천까지 오느라 소요된 시간이 2주 남짓이었는데?
무슨 군화 보급도 끊겨서 맨발로 북진하는 국군 1군단 꼬라지를 재현하고 싶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그 시점에서 미 8군은 미 10군단 덕분에 보급이 뻗기 직전이었음.
10월 26일부터 미 10군단은 원산에 상륙했음. 맥아더의 구상은 원산을 점령해 항만으로 활용하는 겸 평양을 옆에서 찔러 북한군의 남은 허리를 자르겠다는 것이었으나 문제는 이들이 기뢰 작업으로 인해 해상 대기 하느라 상륙 작전이 개시되었을 땐 이미 국군 1군단이 원산을 점령한 뒤였음.
즉 미 10군단은 북진이 시작되고 원산에 상륙할 때까지 유휴전투력이 되어버렸음. 근데 여기서 따질 문제는 유휴전투력이 아니라 유엔군에게 있어 부산항만큼 중요한 인천항이 이 작전으로 엿되었단 거임.
당시 인천항은 조수간만의 차가 있었고 항만의 규모도 그리 크지 않았지만 북진하는 유엔군에게 보급 물자 꽂아주기 딱 좋은 위치에 있었거든?
헌데 원산 상륙 부대를 인천항에서 승선시키기로 결정하면서 인천항의 보급 물자 하역 작업은 얼마 동안 중단되었음.
미국에서 일본으로, 다시 한반도로 온 보급 물자들이 인천항에 쌓인 상황에서 이걸 치우고 해병들을 상륙선에 태우고, 그러면서 상륙 부대가 쓸 물자도 선적하는 상황이었으니 인천항은 말그대로 마비 상태가 되었단 거임.
오죽하면 항만 밖에서 따로 선적을 해야 됐을 정도였으며 비행기편으로 일본에서 김포비행장으로 보급물자를 보낸 뒤, 이를 인천항으로 보내 선적시키는 보급선 개꼬이는 상황이 펼쳐졌음.
그 사이 미 8군은 어찌되었느냐? 총알이고 기름이고 간당간당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네 공간사에서가 아니라 미국 공간사에서 원산 상륙 작전을(반드시 미 8군의 대안을 소개하며) 호되게 까는 이유가 바로 병력을 몇 주 동안 유휴전투력으로 만들어놓고는 얻은 건 없고 오히려 보급에 훼방만 놓았기 때문임.
그냥 미 8군 제안대로 미 10군단을 중부전선에서 올려보냈으면 적어도 그 보급만은 개판내지 않았을 거다.
혹 그러면 부산항에서 육로를 통한 보급은 어떠냐고 할 수 있는데, 거 2대전 유럽 전선 꼬라지처럼 부산항에서 북한 지역까지 올라가는 동안 보급부대는 전방에 전달할 기름을 자기네들이 소모하고 있었음. 거기다 한반도의 지랄맞은 하천들을 건너기 위해 필요한 교량들은 남북한 양 측이 사이좋게 폭-파시켰으므로 복구부터 해야 되는 상황이었으며, 철로 역시 미 공군이 지워버리신 덕분에 쓸 수 없었음. 군데군데 암약한 게릴라들의 위협도 있었고.
참고로 중공군 1차 공세가 종료되고서도 북한 지역의 철로는 완전히 복구되지 않았을 걸?
그럼에도 국군 2군단이 1군단처럼 맨발로 북진하는 투혼을 보이며 만포에 부대를 전개시켰다고 가정해보자.
수적 우위를 달성했는가? -> X
보급이 제대로 되고 있는가? -> X
주변 부대와의 횡적 연결이 이뤄졌는가? 즉 우회 기동을 저지할 수 있는가? -> X
이걸 막을 수 있다고? 그랬으면 덕천-영원 전투의 2군단도 멍청하게 공격만 하다 당한 게 아니라 중공군의 우회 침투를 확인하고 급편 방어로 전환하였으므로 공세를 저지할 수 있었다 하는 거랑 같음. 하지만 현실은 중공군 침습 저지 실패하고 군단이 개박살 ㅅㄱ
차라리 국군 2군단으로 평양 북방에서 북한군 퇴로 차단 왜 하지 않았냐 따지는 게 일견 타당할 거임.
그리고 뭐 북진 작전 중에 국군 2군단만 뻘짓하고 있었냐 하면 그것도 아님.
앞서 언급한 미 10군단의 원산 상륙 작전이 수 개 사단을 유휴전투력으로 만들었다고 까이는데 미 8군 역시 평양 레이스 과정을 보면 갑갑한 꼬라지가 펼쳐짐.
일단 38선 넘어서 금천에서 미 1기병사단은 신편 배치된 북한군을 상대로 섬멸은 했으나 적의 강력한 저항이 준비된 기동로로 공격을 시도했다가 5일을 까먹었고, 사리원에서 미 1기병사단과 미 24사단이 불필요한 진격 경쟁을 벌이다가 팀킬까지 벌였음. 그 과정에서 24사단은 예비로 전환, 유휴전투력화 되었음.
미 24사단은 평양 전투 때까지도 유휴전투력이었다.
국군 1사단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북한군의 저항이 덜했기 때문에 신속히 진격할 수 있었는데 이쪽 역시 평양 입성에 눈이 멀어버렸는지 중간에 끼어든 7사단 8연대와 으르렁거린 건 둘째치고 길 잃고 뱅뱅 돌았으며, 결정적으로 적의 퇴로를 방치해버렸음. 그래도 백선엽이 이쪽 지리를 알고 있었으니 도하라도 쉽게 했지...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훨씬 더 어이가 빠지는 상황에 연출됨.
평양 레이스 과정에서 각 부대들은 무질서한 진격으로 인해 교통 정체를 거듭한데다, 앞서 언급했듯 팀킬 사례가 벌어지기도 했으며, 장병들에게 쓸데없는 소문이 퍼지면서 진격 경쟁만 불이 붙었음.
상층부, 그러니까 맥아더나 트루먼은 전쟁이 곧 끝날 거라 생각해버린 나머지 추가 병력 증원을 하지 않고 군수물자, 특히 동계 피복 보급을 줄이려 했음. 중공군 개입 가능성? 알게 뭐임, 식으로 처리하고 있었단 거지.
비록 평양 입성 이튿날 공수전투단을 동원해 숙천-순천 공수작전이 펼쳐졌으나 벌인 자원과 수고에 비해 적은 성과를 얻었음. 북한군의 꽁무니를 너무 늦게 찔렀거든.
이 정도면 북진은 이기기 위한 레이스가 아니라 지기 위한 레이스에 가까운 정도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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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덕천 방면을 맡고 있던 6사단이랑 8사단도 팽덕회 함정에 걸려 모조리 갈려나간 마당에 7사단이 평양으로 방향 틀었다고 달라지나 게다가 7사단도 6사단이랑 8사단이 갈려나간 바로 그 위치에 있었는데
산악전 댓글 관리해라
워메 귀신같이 산악전이;;;
10월 1일과 3일 주은래가 38선 넘으면 가만있지 않을거라는 메세지를 날렸지만 당시 분위기가 낙관적이라 그랬는지 가볍게 씹어버렸음
역시 보고씹은 맥아더 딸랑이새끼는 병신이 맞다 - 시진핑김정은개새끼
엌ㅋ념글추천막타 내가 그 글쓴이인데, 해당 글에서 대표적으로 2군단 평양레이스를 쓴 거지 그 글 쓰기 전에 관련글에 단 글에서 원산상륙은 지적한 바 있음. 그리고 북한군 퇴로 차단 얘기도 내 글 짤방에 유재흥 군단장 회고로 그대로 나오고
"평양이 처음에 우리 제2군단 작전 구역 내에 들어있지 않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도 쭉쭉 올라가서 적의 퇴로를 차단할 생각이었지 평양을 점령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런데 위도 상으로 평양근처까지 진격했을 때 정일권 참모총장이 직접 일선에 나와 제2군단은 빨리 평양을 점령하라고 합디다."
https://m.dcinside.com/board/war/1896884
평양레이스
쓰기 전에 바로 전에 쓴 글인데, 짤방보면 이해할 수 있을 듯? 2군단 선봉을 맡은 6사단이 초산에 도달한 게 10월 26일인데 중공군 주력이 도하해서 들어온 게 10월 19일. 중부전선에서 북상하던 2군단이 평양으로 대우회하는 삽질 없이 며칠이라도 빨리 올라갔더라면
1차 공세 때 그렇게 어이없이 통수 쳐맞고 강 남쪽으로 밀리거나, 2차 공세 때 짱38군이 미8군의 우선을 맡은 2군단을 우선사단부터 까고 들어와서 전면패주시킨 건 못하지 않았겠냐는 거임. 사실 덕천-영원 전투에서 주공 쳐맞은 2군단이 작살난 데는 1차 공세 때 아예 소멸되다시피한 6사단이 예비로 돌려져서 군단 예비병력이랄 게 없었던 게 큰데
8사단과 같이 중부전선에서 북진하고 있던 7사단이 급거 좌회전하여 평양 방면으로 돌려지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국경선 레이스였다 한들 6사단이 홀로 포위되어 구출작전 한 번 못 해보고 녹아내리지는 않았을 거란 말임. 6사가 선봉에 섰어도 8사단과 함께 7사단이 군단 작전구역에서 북진하고 있었더라면 하고 말임
그리고 군단장 증언대로 정-떡인 상부 명령 때문에 생각지도 못하게 2군단이 평양으로 틀게 된 걸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 평양 따고 들어간 7사단 뿐만 아니라 군단 우선사단으로 원산 부근에 있던 6사단조차 평양 점령을 받고 양덕 성천까지 진격한 상태였음
https://m.blog.naver.com/steelgun/40178357170
10월 15일부터 19일까지 4일을 평양 진격하는 데 날린 셈인데 이후 8사단은 다시 우회전해서 개천-희천 만포선 라인을 따라서 강계-중강진으로 진격하게 됨. 원산에서 평양 바로 옆 강동까지 똥개훈련 안 하고 바로 강계-만포, 중강진으로 갔으면 최소 3~4일은 아꼈을 거고 7사단이 사실상 미1군단 예비병력화 되는 불상사는 없었을 거라 이거지
8사단도 개삽질한 셈이고
https://m.blog.naver.com/steelgun/40178361123
1. 국군 6사단이 초산으로 더 신속히 진격하였다면 중공의 작전지도 결심은 더 빨리 방어에서 기동전으로 변했을 것임. 중공군 1차 공세만 하더라도 청천강 이북 지연전이 불가능해지자 국군 2~3개 사단을 섬멸하는 기동전으로 전략을 변경한 결과였거든. 앞서 말했지만 2군단 단독으로 압록강변에 도달하더라도 오히려 중공의 전략에 말려드는 꼴이었고, 진정한 1차 공세의 목표를 달성시켜줬을 거임.
중공군의 1차 공세 계획만 보더라도 국군 2군단의 6, 8사단만 노린 게 아니라 여차하면 국군 1사단마저 섬멸코자 했으며 실제 15연대가 좌우로 공격을 받는 등의 상황이 전개되자 미 1기병사단이 급히 구출해야 했었음. 만일 7사단이 영변으로 가지 않고 2군단을 후속하여 예비대로 투입되었다면 중공군은 그냥 미 1군단 상대로 유인견제만 적당히 날리면서 국군 2군단을 더 우회 포위했겠지.
2. 국군 7사단이 동평양으로 가서 시간을 낭비하는 바람에 미 1군단에 지원배속되었다는 주장은 처음 듣는데 이건 미 1기병사단을 미 8군 예비로 돌렸기 때문에 대신 국군 7사단을 미 1군단 예비로 돌린 거 아니었던가? 운산에서 국군 1사단을 지원한 미 8기병연대는 전투 전 탄약을 반납한 상황에서 다시 지급받고 투입되어야 하는 상황이었으며, 미 10군단 역시 전후 처리 준비를 한답시고 부대 철수를 준비하고 있었음. 애당초 추수감사절 공세를 준비하는 동안 맥아더는 이미 전쟁이 끝났다고 떠들어대고 있었던 상황.
초산 온정리에서 6사단이 녹아내린 게 중공군이 판 함정인 줄 모르고 압록강까지 닥돌했다가 후방에서부터 쳐맞고 퇴로 차단되어 포위섬멸당했기 때문인데 애초에 2군단이 편제 유지하고 올라갔으면 6사단 혼자 녹아내릴 일이 없었다고 봄 이건 생각의 차이일 수 있는데
되려 국군 7사단이 미 1군단에 지원배속되었다가 급히 국군 2사단으로 원대복귀 하면서 미 8군 동측방에 발생한 거대한 공백지대를 견제하는 역할을 맡았고, 이어진 개천-비호산 전투에서 미 8군 동측방을 노린 중공군 38군의 노림수를 저지하였음. 만일 국군 2군단 전체가 1차 공세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면 개천-비호산 전투는 더욱 어려워졌을 거임.
위에서 언급했듯이 7사단 뿐만 아니라 6 8사단까지 2군단 전체가 평양진격 명령 때문에 평양방면으로 기동하다가 다시 중부로 틀어올라가던 상황에, 7사단 뺏겨서 예비사단도 없이 좌익 6사단으로 초산→삭주(수풍댐)까지, 우익 8사단으로 만포→중강진까지 담당하게 하던 상황이니 1차공세 때 괴멸된 거지
7사단이 개천-비호산 전투에서 1차적으로 적을 저지하긴 했는데 이미 2군단 특히 6사단은 전멸되다시피 한 상황이라.. 2차 공세 때 2군단이 붕괴된 것도 제대로 된 예비대 없이 덕천 7사단, 영원 8사단 전선이 깨지니까 패주한 거잖아 1차 공세 때 패잔병이 됐던 사기 문제도 있고
6사단을 7사단이 구원할 수 있다 치더라도 문제는 보급임. 초산, 온정리의 6사단이 중공군에 포위되고 연대, 대대 단위로 각개격파되는 동안 보급선은 당연히 끊겼으므로 공중 보급에 기대야 했었는데 아마 연대에 보낸 보급 중에 포탄은 수백 발이었던가? 이걸로는 언발에 오줌 누기고, 솔직히 고수방어를 한다 치더라도 스탈린그라드 재현임. 동시기 국군 1사단과 미 기병연대를 구원하기 위해 동원된 고사포단은 1만 발 이상을 소모하고도 미군 대대 구원 포기했단 걸 상기하면 그보다 화력 수준이 열화된 국군이 과연 어떻게 포위망을 뚫고, 구출할 지 모르겠다.
그러니 추수감사절 공세가 개까이는 거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음. 아니면 부대 증원 끊지 말고 좀 계속 올려보내던가. 하다못해 본문에 언급한 미 10군단을 놀리지 말던가... 지기 위한 레이스라고 표현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음. 사방에 질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즐비했으니까.
6사단 7연대가 초산 압록강변 도달한 게 10월 26일인데 평양쪽으로 우회하느라 까먹은 4~5일만 먼저 올라갔어도 중공군이 저렇게 완벽하게 함정 파놓은 데로 걸려들어가지 않았을 거라니까? 스탈린이 공군 지원 안 해주면 못 들어간다고 모택동이 뻐기다가 참전 최종 결정난 게 10월 8일이고 짱깨 본대 도하가 10월 19일임
평양으로 안 돌고 2군단이 원래 계획대로 그 시기에 이미 희천 → 강계 → 만포 루트 타고 있었으면 중공군이 적유령이 이미 다 땅 파놓고 기다리는데 범아가리로 들어가는 일은 없었을 거라는 게 내 생각임
거 국군 2군단이 중공군 막으려 압록강변으로 질주하려 해도 본문에서 이미 지적했듯 미 8군 맛탱이 간 보급 상태였으니 전투지속이 가능할지도 모르겠거니와(21일에는 이미 4개 사단, 1개 연대가 전개) 마오랑 펑더화이는 이미 북한군이 반격이고 지연이고 말아먹고 줄행랑치는 꼬라지 보고 전략방어 대신에 유인과 기동전을 결정했는데 국군 2군단이 먼저 초산이든 만포든 온다? 그러면 그냥 자기네 결심 앞당겼을 거라고 썼잖냐. 아예 개입 결심까지 앞당겼을지도 모르지. 중국 애들이 대만, 일본, 한국, 미국 등 언론 보도 보면서 유엔군 진격 상황 귀동냥 하고 있었거든.
https://m.blog.naver.com/steelgun/40178357170
6사단이
진격하는 꼬라지 보셈 적 소탕이고 뭐고 없이 그냥 다 비켜 무조건 전진 전진 하다가 나중에 통수 쳐맞은 건데, 그게 평양 선제점령 명령 때문에 대우회하느라 낭비한 시간 벌충하려던 것도 있다니까?
그 당시 짱깨들이 개입 결과를 알고 있던 것도 아니고, 미국 ㄷㄷㄷ 하던 새끼들이 소련 공군 지원 믿고 참전하기로 한 건데 스탈린이 공군 못 보내준다니까, 그럼 우리도 참전 못 합니다! 하고 뻐기다가, 스탈린이 "그럼 만주에 김일성 망명정부 세워라"고 압박하니까 참전으로 내몰리게 되는 건데 어떻게 지 혼자 먼저 들어가...
이미 유엔군이 죄다 연대 단위 각개약진 경쟁하는 상황에서 6사단 혼자 그랬던 것도 아닌데, 어떤 근거로 속도 벌충이라고 하는 거임?
그래서 원래는 10월 15일에는 본대가 도하하기로 되어있었던 거 소련이랑 입씨름하느라 10월 19일로 밀린 건데... 진즉 만포 근처까지 밀었으면 한반도로 소리없이 진입하는 게 불가능했겠지 아니면 주공을 만포선이 아니라 서부전선 미24사단쪽을 정면으로 받던가 했어야할 거고
그러니까 국경선까지 경주는 결정된 거라 치고 서로 먼저 도착하려고 레이스 뛴 거라면 평양쪽으로 안 돌고 원래 계획대로 올라갔으면 며칠은 벌었다니까?
링크 가서 결과 파트도 보셈
https://m.blog.naver.com/steelgun/40178361123
10월 9일까지 저우언라이가 스탈린이랑 회담하면서 그 문제로 씨름하고 있었지만 중공 내부에선 전날에 이미 한 번 개입 결정을 내렸었고, 비록 소련의 지원 여부로 2차례 연기되었으나 최종적으로 13일에 개입이 결정되었음. 그리고 애당초 중공의 개입을 결정한 배경은 유엔군의 38선 북진이었으므로 국군이 실제보다 한중 국경에 이르려고 했다면 스케쥴도 그만큼 당겨졌겠지. 중공 본대를 엄호하는 정찰대, 선견대는 12~16일 도하 예정이었거든.
그 15일 도하 시도는 선견대 얘기다. 그리고 평양 입성 당시 미 24사단은 유휴전투력이 되어버렸는데 아마 미 1군단 얘기하는 거지?
10월 19일, 중공군이 본격적으로 압록강을 건너 북한으로 진입하기 시작하였고, 중공군은 구성-오로리 선에 방어선을 구축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미 UN군이 오로리로 진격중인 상황이었기에 중공군은 작전을 바꾸어 기습공격으로 나섰다.
구성~오로리는 청천강선에 중공군이 형성하려던 방어선이었는데? 위에 썼지만 21일엔 이미 만포 포함 4개 사단 전개되었다고 했잖어.
그리고 어째 댓이 도돌이표 되는 것 같은데 다 좋다 쳐도 보급 문제 어쩔꺼냐고 내 세번째 얘기하는 것 같다. 거 나는 점심 지나면 루팡질 불가능이라 일단 여기까지 하겠음.
네 말대로 2군단 진격이 더 빨리 이뤄졌으면 중공군 주공을 맡은 38군도 6사단을 유인 섬멸하는 대신에 바로 기동전을 실시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런다고 2군단이 실제 궤멸된 것처럼 작살났을까? 니가 얘기한대로 7사단이 개천비호산 전투에서 적군 저지 성공했고 포로가 되셨던 분들 얘기 보면 중공군은 국군보다도 더 병신 상태였는데?
덕천 전투에서 중공군의 포로가 되었던 이기봉씨(당시 7사단 직할대 야전공병대 통신병=하사·예비역중위)의 증언 동안 끌려 다니면서 우리와 교전한 중공군 정체를 대충 알았어요.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는 그들 병력규모나 무장이 형편없었어요. 구구식과 삼팔식 소총을 많이 갖고 있는데 낡은 것들이예요. 60㎜박격포도 조준경이 망가져 목측으로 쏘고요.
국군이 지나온 지 얼마 안 되는 후방 곳곳에서 중공군이 나타나 치안리를 습격하고 보급로를 끊는다는 소문이 납디다. 그러나 『소수의 낙오병들의 짓이려니』하고 국군의 상하가 별로 신경을 안 썼어요. 좀 있으니까 후방의 포진지가 크게 얻어맞고 보급로가 아주 끊겼다고 지휘관들이 당황해하는 거예요.
이어 영원에 진입했던 8사단 21연대가 중공군의 기습으로 김영노 연대장이하 여러 장교들이 실종되는 등 결딴이 났어요. 살아남은 21연대장병들이 후퇴해오고 중공군대부대가 정면으로 공격하는 바람에 재 북진하던 2군단은 와르르 무너져 버렸어요. 중공군의 유도전술에 그대로 말려든 거지요.
https://news.joins.com/article/1299720
내
얘기는 2군단이 삼각편제 군단으로 뒷통수 안 털리고 맞붙었으면 온정리 전투부터 덕천 영원 전투까지 계속 개박살났겠냐? 하는 거임. 동일한 맥락에서 예비사단 갖춘 2군단이 중공군보다 먼저 올라갔으면 보급선이 차단되지도 않았을 거고.최소 군단 수준까지는 보급이 됐겠지
그리고 원래 평양으로 돌려지기 전까지 중부전선의 2군단은 좌선에 7사단, 우선에 6사단을 두고 8사단이 중앙에 배치된 상태였음. 북진 도중에 교차가 이뤄졌을지 모르지만 그런 일이 없었다면 정예로 평가받던 6사단이 멋 모르고 초산까지 닥돌했다가 포위망에 걸려서 녹아내리는 일은 없었을 걸?
발렸으면 걍 인정하고 가면 되지 존나 주절주절 구차하게구네
58.238 근거 들고 와서 낄 거 아니면 꺼져 병신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