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뤼베르크, 로스토크 폭격 이후 독일은 보복으로 '베데커 공습'이라고 영국 언론이 지칭한 폭격을 시작한다. 유보트 생산기지, 폭격기 공장만을 집중 폭격한 영국과 달리, 독일은 아무런 군사시설이 없지만 역사적 가치가 뛰어난 도시들을 줄지어 폭격했는데 그 모습이 베데커 출판사의 영국 여행 가이드북을 따라 폭격하는 것 같다고 붙인 이름이다.
이 폭격이 시작됨에 따라 재미있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지금까지 가장 격렬한 폭격 대상이었던 런던에 소재한 런던정경대의 교수 및 학자들은 중요한 문화 유산이 몰려 있지만 군사적 가치는 전혀 없는 케임브리지에 피난을 와 있었던 것이다. 공습이 시작되자 케임브리지에 머무르는 사람들은 공습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조를 짜 야간에 옥상에 올라가야 했다. 세인트폴 대성당의 사례를 통해 옥상에서 불타는 파편을 조기에 삽으로 걷어내서 처리하면 오래된 건축물이라도 큰 피해를 보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고로 고전파 경제학을 대표하는 런던정경대의 경제학자들이 케인즈주의로 대표되는 케임브리지의 경제학자들과 함께 한 방에서 생활하고 한 조로 행동해야 했던 것이다.
이들 간에는 교수,펠로,대학원생을 가리지 않고, 또 서면과 현실을 가리지 않고 난투와 비방이 오갈 정도로 심한 앙숙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계기는 런던정경대의 로빈스가 편집 주간을 맡고 있던 '이코노미카'에서 런던 정경대의 초청을 받은 풋내기 교수 하이에크가 케인즈의 저작 '화폐 이론'을 다소 공격적으로 비판한 것을, 케인즈가 자신의 책을 방어하는 대신 매우 모욕적인 언사를 동원해 하이에크의 '가격과 생산'을 공박하여 답한 사건이었다. 이것은 당시 영국 학계의 관습에서 크게 어긋나는 것이라 큰 논란이 되었으며, 심지어 케임브리지의 동료였던 피구도 케인즈를 비난할 정도였다. 이렇게 촉발된 논쟁 이후 둘은 편지로, 학술지로 여러 매체를 경유해서 다퉜고 그를 추종하는 학자들 간에서도 비슷한 논쟁이 일어났다. 이러한 일련의 대결 이후 케인스와 하이에크는 영국 경제학에서 최대의 라이벌로 여겨지게 되었다.
나치가 공습을 시작함에 따라, 이 둘이 함께 삽을 걸머지고 킹스 칼리지 예배당의 옥상에 올라가 밤을 지새우게 된다. 이 둘은 그때도 험악했을까? 놀랍게도 둘은 매우 화기애애했다. 심지어 케인즈는 이 숙적이 자신의 방 옆에 투숙하기를 청할 정도였다.
왜냐면 그 둘은 모두 전체주의를 크게 경멸했기 때문이다. 케인즈는 종종 본색을 숨긴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아왔고, 하이에크는 민주주의를 불신하는 시장만능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둘은 사상의 초기부터 극단주의를 배격하고 있었다. 케인즈는 파리 강화 조약에서의 부당한 경제 제재가 야기할, 민주정을 마비시킬 거대한 복수심과 그 복수심이 초래할 전체주의 세력을 경고했다. 하이에크는 집산주의가 불러올 자유의 마비와 그 공백을 파고들 전체주의 세력을 경고했다. 세간의 인식과 다르게 당시 허용되는 경제학의 양 끝에서 끝까지, 독재가 발 붙일 공간은 없었던 셈이다.
이 기묘한 동거는 전후 양측이 크게 화해하고 대타협을 이루는 데 나름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적의 적은 나의 친구로군요 ㅋㅋ
ㅎㅎ
ㅋㅋㅋ
둘 다 그 주장하능 것이 무책임한 극단성 제거였으니 해법 문제에서 불구대천이겠죠.
독일은 왜 군사적으로 가치가 덜하고 역사적으로 가치있는 데를 노려서 폭격했음?
케인주의자가 되건 고전파가 되건 걔들은 내 머리 위에는 폭탄을 떨구지는 않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