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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전, 소련 군대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고, 전쟁포로를 뒤로 남겨둔 채 말이다. 그들 중의 몇 사람은 이후 고국으로 귀환하기 전에, 이 땅에서 살았다.다음은 “아프간”이라 불리는 알렉세이의 사례이다.
러시아 모스크바 – 코메르산트 블라스트 지 KOMMERSANT-VLAST 보도…
해질 무렵, 우리는 오트라드니에 도착했다. 갑자기, 도로의 양쪽으로, 사마라 지방 [모스크바의 남동쪽] 의 스텝이 펼쳐졌다. 읍내에 가까워지자, 군데군데 균열이 나있는 4층 건물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이 건물들 한 곳에서 “아프간”이라 불리는 알렉세이가 산다. 우리는 그의 이웃, 베라와 대화를 나누었고, 그녀는 우리에게 그가 살고 있는 곳을 가리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와는 다른 용감한 사람이죠. 그는 아침부터 밤까지 열심히 일합니다. 그는 그의 가족과 집을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알렉세이는 시장에서 신발을 파는 일부터 시작했다 ; 현재, 그는 택시운전을 한다. 그가 아프간에서 돌아오자, 그의 친척들이 그에게 15만 루블을 모아주었고, 이것으로 그는 살아가는 밑천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가 탈레반 포로였을 때, 그의 부모님이 돌아가셨죠. 당시에, 모든 사람이 그가 살해 당했다고 믿었죠. 그의 아파트는 그의 친척에게 상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가 돌아왔죠. 그는 다른 집을 얻었지만, 너무 작았고, 임대 였습니다.”라고 그의 이웃이 설명해 주었다.
알렉세이 올레닌이 우리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20년을 보낸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밤색 머리,푸른 눈동자,스웨터에 청바지 차림의, 그는 평범한 오트라드니 사람 같다. 그는 그의 부엌에서 차를 만들어 내오고, 그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1981년 3월 31일, 그는 오트라드니와 부모님을 떠나, 보충대에 입대했다. 6월 16일, 그는 아프가니스탄에 도착했고, 기계화 부대에 배치를 받았다.
“우리는 바그란 주의 보급기지에서 근무했다. 소련에서 온 신병에게, 우리는 보급품을 나누어 주었다. 오랫동안, 나는 기지를 떠나지 않았다. 그곳에는, 타지크스탄, 우즈베키스탄 출신 병사들이 있었고, 그들은 작전에 나서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차량들을 고장 내고는 했다. 하지만 우리 러시아인들은 이런 일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라고 그가 회고했다.
그의 첫번째 영외 임무는 무사히 끝났다 : 수송품을 카불로 전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두번째 영외 작전이 마지막이 되었다. “ 1982년 11월 10일, 브레지네프가 사망한 날이었다. 우리는 카불에 있었고, 차량을 물건들을 내렸다. 그리고 우리는 빨리 기지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밤에, 우리 수송대는 살랑 고원에 다다랐다. 올레닌의 트럭이 정지했다. “나는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우리는 고원을 통과 중이었고, 나는 참을 수가 없었고, 밑에는 찻집이 보여서, 나는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트럭에서 내렸다.”
하지만, 무기를 든 8명이 곧 그를 포위했다. 그는 그들 중 한명을 제압하려 했지만, 주먹질 세례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만약 내가 한 놈을 쓰러트렸다면, 나는 아마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께서는 다른 역사를 결정하셨다.” 그들은 그를 무장해제하고, 그를 때려 눕혔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산으로 끌고갔다. 몇 일 뒤, 다른 포로 한명이 왔고, 그는 아프간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곧 처형되었다. 이후 2주 동안, 올레닌은 탈출을 시도했지만, 번번히 잡혔고, 몰매를 맞았다. 이윽고, 총사령관이 왔다. 그는 수피 푸아인다 무하마드라 불리는 흰 머리의 늙은 남자였다. 그는 포로를 살려두라고 명령했다. 올레닌은 이후 이 이유를 알게 되었다 : 포로가 있는 무자헤딘 부대가 존경을 받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알렉세이는 이 부대와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
“수피 푸아인다는 이 지역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아들이 하나 있었고, 이름은 모하마드 아샤라프 였고, 카불 대학을 다녔으며, 영어를 약간 구사했다. 초반에, 그는 나의 유일한 대화상대방이었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이들의 언어를 익히는데 성공했다.” 산에서 두 달을 보낸 후, 알렉세이는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아무도 이를 강요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라마툴라 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이렇게 6년이 흘렀다. 그의 부대를 위해, 알렉세이는 삽질을 하고, 포탄들을 운반하고, 땔감을 구했다. 다른 4명의 포로가 이 부대에 잡혀왔고, 이 중에 루리 스테파노프가 있었고, 그는 알렉사이의 친구가 되었다. 모두가 탈출을 꿈꾸었지만, 그들은 24시간 감시 중이었다. 어느 날, 수피 푸아인다 가 그들에게 러시아 군대가 아프간에서 철수했다고 알려주었다. “그때, 나는 이제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곧 카불에서 사절이 한명 와서,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이 포로들의 머리 하나 당, 교환조건으로, 무기와 돈을 제공하겠다고 알려왔다. 놀란, 모하마드가 그에게 반문했다 : “어떻게 그들이 너의 머리를 원할 수가 있지, 네가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있는데도 말이야?”
“나는 우리 정부가 내가 죽었다는 것을 아는 쪽을 선호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모든 포로들은 조국의 배신자들로 간주되었다. 그날, 나는 내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자각했다.” 소련군의 철수는 상황을 급격히 변화시켰다. 무자헤딘은 산에서 내려와 마을에 정착했고, 포로들은 사령관들의 집에서 기거했다. 그들은 우리들이 밭에서 일하도록 시켰고, 밀농사를 졌다. “당시, 농민들은 밀과 채소만을 재배했다. 양귀비 재배 문화를 도입한 것은 바로 탈레반들이었다.”라고 이 옛 포로가 확인해 주고 있다.
수피 푸아인다는 곧 자기 부대를 자기의 고향인 풀리 쿠므리 로 데려갔고, 이곳에서 그는 이 포로들을 더 이상 감시하지 않기 위해, 포로들을 결혼시키기로 결정했다. 한 아버지가 알렉세이에게 딸을 주었다. “그녀는 15세 였다. 우리는 약혼했다. 나는 이제 러시아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렉세이가 틀렸다. 바로 그 순간, 러시아가 포로의 석방을 요구했다. 한달 후, 파키스탄 당국의 협조하에, 도스톰 장군이 그의 마자르 샤리프 궁에서 올레닌,스테파노프 와 그들의 친지들과의 상봉을 주선했다. “나를 보자마자, 어머니가 울음을 터트렸다. 우리는 곧 파샤와르로 보내졌고, 우리는 파키스탄 정보당국의 한 장군에게 인계되었다. 거기서 우리는 베나지르 부토 궁으로 다시 인계되었고, 부토는 파키스탄과 러시아의 우호를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에게 각각 3천 달러씩 주었고, 우리를 러시아 외교당국에 넘겼다.
이렇게, 199'4년 5월, 올레닌은 귀국했다. 하지만, 충격이 엄청났다. 뉴스와는 멀리 떨어져 살아온 터라 [ 그가 파병되고 , 귀국 하는 사이, 소련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는 차라리 포로 생활이 정상적인 생활보다 단순하고, 더 좋다는 인상을 받기까지 했다. 6개월 동안, 그는 나르게즈의 가족, 그의 약혼녀 생각을 멈출 수 없었고, 그가 어떤 이유에서든 그들을 떠났다는 것이 그들을 배신한 것이 아닌가라는 자책감마저 들었다.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젊은 여성들을 소개해 주었으나, 그는 결국 아프칸의 그의 약혼자를 찾으로 다시 떠나기로 결심하기에 이른다. 어머니에게 작별인사를 하면서, 이제 그녀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 까지는 알지 못했다.
페샤와르에 도착하면서, 그가 다시 포로가 될 위험은 없었다. : “나는 자유인으로 돌아왔고, 나는 이 지방의 관습을 알고 있었고, 나는 이곳 사람들이 나에게 어떤 나쁜 행동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알고 있었다.” 그는 도스톰 장군에게 갔고, 그는 이 여행의 목적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친구로 환대했고, 그의 결혼식을 위해 돈을 주기까지 했다. 일단 결혼을 한 이상, 그는 그의 아내 식구들에게, 그는 아내를 데리고 러시아로 돌아가겠다고 알렸다. 하지만, 그것에서의 일들을 정리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려는 순간, 탈레반들이 권력을 장악했다. 영사관이 폐쇄되었고, 국경도 봉쇄되었다. 귀국할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 올레닌은 새로운 삶을 다시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돈을 빌려, 길거리에 작은 상점을 열었다. 한달에 300달러를 벌어, 그는 아내와 처가를 먹여 살렸다. 부부는 딸,자스민 을 낳았다. 이곳에서, 모든 사람이 라흐마툴라[알렉세이의 세례명]가 러시아 사람인 것 조차 잊었다. 그는 악센트없이 이곳의 다리 어를 구사했고, 다른 아프간 사람들 처럼 생활했다. 2004년, 탈레반 정권이 붕괴된 지 3년후, 국제 군인협회 러시아 지부가 그의 존재를 파악했다. 그는 다시 귀국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는 그는 이 나라에서 1년을 더 살았다. 그는 이 단체가 아프간에 있는 소련 병사들의 유해를 발굴하는데 협조했다.
이제 알렉세이는 46세 이다. 그는 아프간식 수염을 없애고, 무슬림 복장을 버리고 유럽식 옷을 입지만, 과거 라흐마룰라 시절의 그의 면모들은 여전히 남아있다. 많은 아프간 사람들 처럼, 그는 검소하다. 그는 소식을 하며, 술은 거의 마시지 않는다. 또한 그는 미국인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미군들이 아프가니스탄에 단지 마약 생산을 근절하기 위해 침공했다고 믿지 않고, 미국만의 이해를 추구하기 위해 침공했다는 점을 알고 있다. “미군 헬기들은 무고한 가난한 농민들의 양귀비 밭만을 태울 뿐이고, 전쟁시절의 사령관들의 드넓은 밭들은 손대지 못하고 있다. 미국인들은 이 나라를 정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에 15만명 이었고, 이 숫자가 줄지 않았다. 아프간인들은 산악의 주인들이고, 산악에서 이들을 굴복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도 이 사실을 깨닫는데, 무려 20년이 걸렸다.”
알렉산더 올레닌의 현재모습과 아프간 생활시절의 사진
2004년 올레닌은 가족과 모두 러시아로 귀국할 수 있게됨.
책임감 있는 모습 멋지네
그래도 나름 해피엔딩이네..
중간에 국제 군인협회는
https://en.m.wikipedia.org/wiki/World_Veterans_Federation
여기인가
맞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