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1943년 과달카날 전투에서 최종적으로 패배한 일본군은 패배를 거듭하고 있었음. 뉴기니에서는 더 이상의 공세를 중단하고 미군을 막아내기에도 급급한 상황이었고, 남동태평양 제일의 거점 라바울도 내년까지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태였음. 마리아나 제도와 캐롤라인 제도, 쿠릴 열도와 서부 뉴기니아, 그리고 버마를 잇는 '절대국방권'을 설정하여 이 방어선에서 장기전 태세를 갖춘다고는 했는데 만약 이 방어선조차 뚫린다면 동남아의 자원 지대와 일본 본토를 잇는 해상 교통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고, 이는 일본의 전쟁 수행에 큰 지장을 줄 것이었음



1943년 9월 대본영이 설정한 절대국방권. 사실상 동부 뉴기니랑이랑 남동 태평양 버리고 남은 영토에서는 끝가지 버티자는 거였음


이런 배경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해상 교통로의 대안으로 싱가폴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중국을 거쳐 조선과 일본으로 이어지는 육상교통로를 확보하자는 '대륙타통작전'이었음.


사실 대륙타통작전이라는 개념은 이전부터 있었는데, 1942년 말부터 1943년 여름까지 참모본부 철도과에서는 동아시아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동아시아 종관 철도 건설을 연구하여 기술적으로는 가능하다는 결과를 내놓았고, 참모본부 작전과에서 1943년 1월, 약 5년 간을 목표로 하는 전쟁 지도요강에서도 대륙타통작전이 언급되기도 하였음. 다만 절대국방권 설정 시점에서 대본영은 중국 대륙에서는 "현재 점령 지역의 안정화를 위해 노력하고 대적 압박을 강화한다."라는 기존의 방침이 계속 유지되었고, 오히려 절대국방권 유지를 위해 중국에서 병력을 차출해가려고 까지 했었음. 그러나 이후 대본영은 중국 대륙에서 대규모 작전을 실시하기로 입장을 선회하는데, 이 때 등장한 인물이 핫토리 다쿠시로 대좌임.



1939년 노몬한에서 말아먹은 핫토리 아조시는 이후로도 승진을 거듭하여 1943년 10월에는 참모본부 작전과장으로까지 승진했고, 같은 날 라바울로 날아가 남동태평양 전선을 시찰한 후 대륙타통작전을 실시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는데, 여기서 잠깐 그의 발언을 인용해보자면 다음과 같음


"절대국방권 확보의 구상을 기반으로 하여 전반적인 전국의 지도는 척척 진행되고 있으나 일본으로써는 언젠가는 공세를 통해 결전에 임할 필요가 있다. 공세를 취할 있을 때는 각종 관점에서 보면 쇼와 21년(1946년) 정도일 것이다. 이 즈음 일대 공세로 나가기 위해서는 동쪽에서는 최대한 태평양의 섬들에서 적들의 진격을 저지하고, 서쪽에서는 중국 대륙을 개통하여 확보하고 남방에 대한 교통을 확보하는 형세를 만들어야만 한다. 북, 중, 남중국 지역의 서로 고립되어 있는 중국 전선을 개통하여 서로 연결되게 만들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연결되는 것은 매우 방대한 작전이지만, 그 지역에 공군의 기지도 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으니 쇼와 18(1943)년 중에 실현되어야만 한다. "


이후 11월 초 상관인 스기야마 참모총장으로부터 정식으로 의뢰를 받아 핫토리 아조시는 본격적으로 대륙타통작전의 연구에 나섰음. 또한 이 아조시 발언 중에서 '미 공군의 기지'라는 부분이 언급되듯이, 미 공군도 대륙타통작전이 수립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되었음


중국에 주둔한 미 공군은 날로 증강되어 1943년 11월에는 전투기 160기, 폭격기 70기 도합 230기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역시 증강되어가는 중국 공군과 합세하여 실 가동 기체 100여 기에 불과한 일본 항공세력을 쉴 새 없이 두들기고 있었음. 이런 압도적인 제공권 아래 중-미 연합공군은 양쯔강과 동중국해를 항해하는 일본 선박에 대해 공격을 감행해 이들에 의해 피해가 점점 누적되어 가고 있었음



중국의 배치된 미군 B-25H형은 기수에 장착된 75mm 포와 수많은 기총으로 선박 공격에 효과적임이 입증되었음.


여기에다 미국이 B-29를 곧 실전에 배치할 것이라는 정보가 들어오자 대본영의 똥꼬는 타들어 갈 지경이 되었음. 대본영은 1943년 여름부터 본격적으로 B-29의 생산에 들어가고, 1944년 봄여름에는 200~400여 대가 생산되어 실전에 배치될 것이라 예상했음. 이 B-29들의 유력한 기지 후보 중 하나로 중국 대륙이 지목되었고, 히말라야를 거쳐 중국으로 보내지는 항공 연료의 양이 계속 증가하는 것도 대본영의 의심을 부채질했지


또 중국 동남부 푸젠성 지역에 미군 잠수함 기지가 있다는 정보도 돌고 있어서 아예 이 골칫거리들을 한 방에 처리하자는 생각으로 대륙타통작전은 계획되었음.


구체적 작전 검토 개시


11월 한 달 동안 참모본부 안에서 검토를 거친 대륙타통작전 계획은 11월 28일 지나파견군에게 전달되었는데 대략적인 개요는 다음과 같음


1. 1944년 6월 초(늦어도 7월), 우한 지역에서 8개 사단, 광둥 지역에서 2개 사단,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2개 사단으로 공세를 개시한다. 그리고 아오한(粤漢)철도와 샹구이(湘桂) 두 철도를 개통하기 위해 우한 지역에서 남부 중국으로, 이어 헝양 주변에서 중국 서남부 및 북부 인도차이나까지 관통하여 육지로 연결되는 회랑을 완성한다. 작전 기간은 약 4개월로 할 예정이며, 항공지원은 약 2개 비행사단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 작전을 '토'호 작전으로 칭한다.


2. 이어 1944년 11월 초 중국 북부에서 3개 사단, 중부에서 3개 사단을 가지고 징한 철도의 개통을 도모한다. 이 작전을 '고'호 작전이라 칭한다.


3. 이 작전의 목적은 아오한, 샹구이 및 남부 징한 철도를 개통하여 남방 지구와의 철도 연결을 꾀함과 동시에 철도 주변에 위치한 적 비행장을 공격하여 중국에 주둔한 미 공군의 본토 공습을 저지함에 있음. 또한 적 비행장 파괴작전 범위에 중국 동남부(푸젠 성 등)의 미군 기지도 포함시켜 이들에 의한 동중국해에서의 아군 선박 손실을 막아야 함. 이에 더해 미 잠수함 기지를 파괴하여 그들의 활동을 봉쇄하여 동중국해의 해상교통 안전을 확보한다.


또한 이 작전을 위해 그동안 태평양 방어를 위해 중국에서 병력을 차출하던 것을 중단하고 다른 곳에서 병력을 보충해주기로 약속했음



지나파견군은 12월 7일 나름대로의 연구를 마친 후 12월 7일 '대륙종관철도작전 지도 방안'을 대본영에게 발신하였음. 내용을 짧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음


1. 상계(샹구이) 제1기 작전


6월 초, 제11군(5개 사단)으로 둥팅호(洞庭湖) 서쪽 지역에서, 제13군(3개 사단)으로 웨저우 지역에서 공세를 개시하여 적의 제6전구와 제9전구의 주력을 격멸하고 헝양(衡陽) 이북의 요충지를 공략한다. 주요 작전 기간은 약 1개월 반으로 할 예정이다.


2. 경한(징한) 작전

7월 초 제12군(3개 사단 및 1개 전차사단)으로 신샹(新鄕) 남쪽의 황허 강 근처에서 공새를 개시하여 제1전구의 주력을 격멸하고 남부 징한 철도의 요충지를 공략한다. 주요 작전 기간은 1개월 반으로 할 예정이다.


3. 상계 제2기 작전

대략 9월 초 즈음 제11군으로 헝양 부근에서, 제23군(2개 사단)을 광둥성 서쪽 지역에서 시장강을 따라 공세를 개시하고, 인도차이나 주둔군(2개 사단)으로 인도차이나에서 공세를 개시하여 적의 제4전구를 격멸하고 미군 비행장이 있는 구이린, 및 류저우를 공략한다. 주요 작전 기간은 2개월로 할 예정이다.


4. 상계 제3기 작전

12월 즈음 제11군의 2개 사단이 헝양 부근에서, 제23군이 광둥성 북쪽 지구에서 공세를 개시하여 적의 제7전구를 격멸하고 남부 아오한 철도의 요충지를 확보한다. 작전 기간은 약 1개월로 할 예정이다.



사실 저 사진에는 오류가 있음. 사진에는 Zhengzhou(정저우), Kaifeng(카이펑)이 일본군 점령지역이라고 되어있는데, 사실 두 도시 북쪽 황허 강을 사이로 대치하고 있어서 저 두 도시를 점령하는 것이 이치고 작전의 시작이었음.


쉽게 말해 참모본부에서 작성한 계획에서 제 중국군 주력인 6, 9 전구 섬멸작전도 좀 넣고 구체적인 실행부대도 넣고 자기네들 부대 아닌 남방군 소속인 인도차이나 주둔군도 끼워넣어서 만든 계획이었음.


또 미 잠수함 기지 파괴 작전은 정보가 확실하지도 않고 다른 작전들이랑 같이 실행하기에는 무리일 것 같아 폐기되었고 이후 12월 14일,이 계획을 기반으로 지나파견군과 참모본부에서 협의를 거쳐 전반적인 작전 명칭을 '이치고 작전'이라 부르기로 합의하였음.


이렇게 잘 나가보이던 이치고 작전 계획도 슬슬 반대에 부딪히기 시작했는데, 육군성 군사과에서는 태평양 전선은 한시가 급한데 별로 급하지도 중국에서 뭔짓을 하는 것이냐며 반대했고, 육군 수뇌부의 항공 관계자들도 태평양 전선에서 지구전을 펼치고 반격에 나서기 위해서는 항공 전력을 아껴야 한다며 이 작전에 반대했음


그러나 핫토리 아조시를 위시한 참모본부 작전과는 12월 24일 '토(虎)'호 연습을 진행하였음. 핫토리 아조시가 주재한 이 연습에서 이치고 작전의 가능성과 필요성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았고, 연습 둘째 날 벌어진 워게임에서는 태평양에서 1943년 말 형성된 전선이 1944년 말까지 유지되어 1944년 임팔 작전과 이치고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고, 심지어 1945년에는 각 전선에서 제한적인 공세를, 1946년에는 전면적 공세에 나설 수 있다는 결과를 내놓았음.


이치고 작전 자체에 대해서는 일본군 24,000명이 손실될 때 중국군은 거의 160,000명이 손실될 것이라고 보아 이치고 작전으로 인한 소모는 크지 않을 것이라 주장하였음.

그러나 정작 미군 비행장이 밀집한 중국 동남부에 대한 계획은 거의 언급되지도 않았고, 막강한 미 공군 때문에 제공권을 상실한 상황에서 정말로 저런 교환비를 낼 수 있는 것인지, 만약 원난성에 주둔한 중국의 정예부대 Y군이 이치고 작전 도중 투입된다면 이에 대한 대책은 있는 것인지,와 같은 질문에 대답하지 못해 이 '토'호 연습으로 반대파의 기를 눌러 육군의 대부분을 이치고 찬성파로 돌리게 만든다는 참모본부의 계획은 실패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