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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으로 해가 뜨는 대일본제국만 파산했던 것이 아니다. 해가 지지 않는다 했던 대영제국 또한 저물어갔다. 민주주의 대 전체주의의 대결이었다는 기왕의 지배 서사로는 포착되지 않는 지점이다. 비중으로 따지자면 대영제국의 몰락이 더 크다고도 할 수 있다.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인도는 승자 편에 서 있었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 소식에 환호했다. 6년 전쟁을 마감한 것이다. 애초 원해서 참전한 것이 아니다. 인도 총독부의 일방적 발표에 따른 것이었다. 1939년 9월 3일이었다. 일요일 하고도 저녁 8시 30분. 라디오를 통해 긴급 성명이 발표되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콜카타도 델리도 아니었다. 총독이 여름 휴가를 나던 산골 별장에서 별안간 발표한 것이다. 독일과의 전쟁에 들어간다는 소식이었다. 물론 유럽의 정황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인도는 대영제국의 일부, 아니 중추였다. 단 한 명의 인도인과 단 한 차례의 상의도 없이 인도 역시 전쟁의 화마 속으로 휘말려 들어간 것이다.

1939년 당시 인도군은 20만이었다. 1945년에는 250만이 되었다. 유명무실했던 공군도 300명의 장교와 9개 비행부대를 보유한 대군으로 성장했다. 해군 또한 2000명에서 3만 명으로 확대되었다. 전투함과 잠수함도 보급되었다. 총력전 체제에 총동원되었다.

이들이 인도만 보위한 것도 아니다. 해외 파병이 더 많았다. 서쪽으로는 아리비아 해와 홍해, 지중해를 건넜다. 동쪽으로는 벵골 만과 남중국해를 지났다. 그래서 종전 소식을 접한 인도 군인들은 북아프리카와 남유라시아 도처에 깔려 있었다. 홍콩, 싱가포르, 말라야, 미얀마, 이라크, 이란, 시리아, 이집트, 튀니지, 시실리, 로마에서 독일과 일본의 패망 소식을 접했다.

실제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지중해 일대는 '인도군의 호수'라고 빗대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북아프리카, 동아프리카, 남유럽, 중동에 이르기까지 인도군이 파병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대영제국의 깃발 아래 전투를 수행한 이의 8할이 인도군이었다. 그래서 무슬림 출신들은 승전 포상을 겸하여 인도로의 귀환 길에 메카 성지 순례를 갈 수 있는 특혜를 누리기도 했다.


이병한 "유라시아 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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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이탈리아 로마"로 진군하는 "인도군".

당시 인도총독부는 250만명의 대군을 지휘하고 있었고, 영국군 전투의 8할이 이 인도군에 의해서 치러졌다.

인도총독부는 사실상 런던으로부터 독립성을 가진 아제국으로 중동 지역에 일상적인 해외파병과 주둔을 하고 있었고, 이라크 이란 등의 정부에 간섭했다.

또한 잉글랜드 연합 왕국과 별도로 국제연맹에 '인도제국'의 이름으로 가입한 창립국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