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소위 인민의 봄은 유럽에만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19세기에 발생한 다른 많은 서양의 개념처럼 프랑스식 혁명도 금세 전 세계적 현상이 되었다. 영국제국 전역, 실론, 기아나, 자메이카, 뉴사우스웨일스(오늘날의 캐나다 속 영국령 영토), 오렌지 리버 소버린티(과거 남아프리카 오렌지 강과 바알 강 사이의 작은 국가), 펀자브, 반디멘스랜드(오늘날의 오스트레일리아 태즈매이니아 섬)까지 소요가 일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욱 놀라운 사건은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에서 일어났다. 영국 식민지들과 달리 그곳에서는 급진적인 정치적 변화가 대도시 혁명 정부를 뒷받침하고 있었다.

이는 모두 프랑스 제국주의의 가장 독특한 특징, 바로 시들지 않는 혁명적 특성을 잘 나타내준다. 영국제국은 본래 보수적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관리자들은 각 지역의 특권층을 믿게 되었고, 꼭두각시 같은 족장과 마하라자를 통한 간접 통치에 점점 익숙해졌다. 그러나 프랑스는 여전히 자유, 평등, 박애가 나폴레옹 법전과 나폴레옹의 또 다른 작품인 통조림과 함께 전 세계로 수출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다른 모든 유럽제국처럼 프랑스도 노예제도를 기반으로 해외 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1848년 프랑스에 새로 확립된 공화정부가 서아프리카의 세네갈을 포함해 프랑스제국 전역에서 다시 한 번 노예제도 폐지를 선언했다. 영국은 이미 15년 전에 이러한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노예제 폐지는 프랑스령 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이 혁명의 1단계에 불과했다. 새로 자유인이 된 사람들은 투표권을 얻을 것이라는 사실도 선포되었다(이 점은 영국 식민지와 달랐다). 프랑스제국 전역에 보통 선거권이 도입되어 거의 모두가 아프리카인이나 메티스(원주민과 유럽인의 혼혈)였던 유권자(백인은 전체의 1퍼센트에 불과했다)들이 1848년 11월 선거에서 투표권을 행사했고, 그 결과 프랑스 의회에 입성할 최초의 유색인이 선출되었다. 비록 파리로 대표를 파견할 권리는 1852년 나폴레옹 3세가 철회하여 1879년까지 회복되지 않았으나, 식민지 네 곳(생 루이, 고레, 뤼피스크, 다카르)의 지방 의회는 계속 보통 선거권 원칙을 바탕으로 구성되었다. 아프리카 역사상 최초의 다인종 민주 의회는 당시 생 루이라는 식민지 수도에서 소집되었다.


당대 사람들은 이것이 얼마나 큰 변화인지 알고 있었다. 생 루이를 방문한 영국인은 이렇게 썼다. "의회를 방문한 사람이라면 흑인 의장이 유럽인 의원에게 시끄럽다며 정숙을 요구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 흑인 의원들은 세네갈의 관리들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영국 식민지라면 세네갈에서 원주민들이 유럽 관리들에게 가하는 공격 같은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31) 영국인의 시각에서는 영국 본토 사회처럼 제국에서도 계층 질서가 지켜져야만 했다. 가장 꼭대기에 여왕이자 여황제 빅토리아가 있었다. 4억 명에 이르는 그녀의 백성은 그녀 바로 아래부터 가장 천한 캘커타의 푼카 왈라에 이르기까지 정교한 지위 사슬에 따라 각자 위치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제국은 달랐다.


1848년 혁명가들 눈에 비친 식민지 백성들은 최대한 빨리 프랑스인으로 탈바꿈 시켜야 할 대상이었다. 당시 표현으로 아프리카인들은 '동화되어야' 했다. 동시에 프랑스인 관리와 아프리카 여성 사이의 결혼(메티사주)도 널리 장려되었다. 이렇게 진보적인 제국주의는 1854년 세네갈 총독이 된 전직 군인 루이 페데르브(Louis Faidherbe)로 상징된다고 할 수 있다. 페데르브는 생 루이에서 새로운 다리, 도로, 학교, 부두 건설 및 수도 공급 공사를 감독했고 강을 따라 움직이는 정기 연락선 도입을 주도했다. 세네갈 전역에 해방 노예들을 위한 '자유의 마을'이 세워졌다. 1857년 페데르브는 세네갈인으로 구성된 식민지 군대를 창립하여 아프리카 군인들을 계약 고용된 군사 노동자에서 제대로 된 보병으로 탈바꿈시켰다. 원주민 족장들의 아들들을 위한 학교도 세워졌다. 페데르브 본인도 15세 세네갈 소녀와 결혼했다.


총독 임기 말년, 페데르브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의도는 순수하고 숭고하다. 그리고 우리 대의는 정당하다." 물론 그의 임무는 단순히 원주민들을 개화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1857년 그가 선언한 바에 따르면 그들의 '목표는 최대한 적은 비용으로 나라를 지배하고, 무역을 통해 최대한 이익을 얻는 것'이었다.(34) 그는 내륙으로 프랑스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아카시아 나무 수액으로 만드는 아라비아고무와 땅콩 무역에서 아프리카 원주민의 힘을 약화시킴으로써 세네갈의 경제 발전을 이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를 위해 페데르브가 쓴 전략은 펠루 폭포 아래 메딘에서 시작하여 세네갈 강을 따라 프랑스 요새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연히 내륙을 지배하던 권력자들과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와알로의 트라자 무어족, 남쪽의 카요르, 그리고 니제르 중부의 이슬람 통치자들이자 훗날 가까운 말리에 투쿨로르 왕국을 세운 엘 하지 우마르탈(El Hadj Umar Tall)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러나 이 아프리카 경쟁자들은 점점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1857년 프랑스군이 레부공화국을 전복하고 수도 응다카루를 다카르(오늘날 세네갈의 수도)라는 새로운 식민 도시로 바꾸어버렸다. 오늘날 이 도시 중심에는 총독의 흰색 관저부터 넓은 페데르브대로까지, 그리고 신선하고 향기로운 바게트 빵을 파는 불랑제리부터 카페오레를 파는 파티세리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식민 정책 비전을 기념하는 상징물들이 남아 있다. 프랑스화 과정을 공식화하기 위해 국가 전체가 아롱디스망(군), 세르클(군), 캉통(면)으로 나뉘었다. 1865년 페데르브가 임기를 마쳤을 때쯤엔 프랑스인이 생 루이 주변을 거닐면서 자기 국가가 이룩한 것을 뿌듯하게 바라볼 수 있을 정도였다. 노예 시장이었던 곳은 자랑스러운 프랑스 문화의 전진 기지가 되었다. 과거 제국주의의 희생자였던 사람들은 투표할 수 있는 권리와 국가를 위해 무기를 들 의무를 지닌 시민으로 변모했다. 언론인 가브리엘 샤름(Gabriel Charmes)은 이렇게 표현했다.

종교적 맹신과 약탈만이 존재했던 이 거대한 땅에 프랑스가 평화와 무역, 관용을 가져왔다면 누가 이를 권력의 오용이라 비난할 수 있겠는가? ··· 수백만 명에게 문명과 자부심을 가르쳤으니 프랑스는 자부심으로 가득할 것이다.(36)

31 R. L. Buell, The Native Problem in Africa(1928), Crowder, Senegal, p. 23에서 인용34 Cohen, Rulers of Empire, ch. 136 Conklin, Mission, p. 13.





『CIVILIZATON: The West and the Rest』(니얼 퍼거슨 씀) 한국어판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