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장군 일대기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일어섰다. 공산당이 국민당을 밀어내고 중원을 차지했다. 그러나 대륙은 원체 크고 넓었다. 건국 선언에도 大一統(대일통)은 미완이었다. 특히 서남부 내륙이 그러했다. 운남성에는 여전히 중화민국을 받드는 세력이 있었다. 93사단과 237사단을 주축으로 한 소위 '국민당 잔군'들이다. 그들에게 베이징은 아득한 곳이었다.

인민해방군이 남진하여 이들과의 격전 끝에 쿤밍(昆明)을 장악한 것은 1950년 1월이었다. 항복을 거부한 일부는 남하하여 버마(미얀마)의 정글로 숨어들었다. 항일 전쟁기 미국이 중(화민)국의 물자 보급을 도왔던 '버마 로드(Burma road)'가 국민당판 '대장정'의 피난길이 되었다. 갓 독립(1948년)한 버마는 잔군들이 불편했다. 그러나 항일 전쟁과 국공 내전으로 단련된 그들의 전투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

잔군들은 버마의 만사(Mansa, 孟薩)를 국민당의 '옌안(延安)'으로 삼고자 했다. 이름도 거창했다. 雲南反共救國軍(운남반공구국군)이라 개칭했다. 와신상담의 기회는 때 이르게 찾아왔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신중국이 참전했다. 서남부에 배치되었던 인민해방군이 대거 북진했다. 군사력의 공백이 생겨난 것이다.

운남성 탈환과 대륙 수복, 대역전의 틈이었다. 국민당과 미국도 기민하게 대응했다. 대만(타이완)은 전술 훈련을 담당할 교관을 파견했다. 사상 교육을 담당하는 反共抗俄大學(반공항아대학)도 세웠다. 抗日(항일) 이후의 抗俄(항아)를 선전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소련의 괴뢰라고 가르쳤다. 중국의 내부 정보에 굶주리던 CIA(미국 중앙정보국)는 구국군을 낙하산 부대로 훈련시켜 내륙으로 침투시켰다. 그래서 1952년까지 총 7차례 운남성 공격을 감행했다. 1953년 한반도의 휴전 협정에도 불구하고, 서남부 전선은 총성이 멈추지 않았다.

구국군은 갈수록 세를 더했다. 버마와 태국 산악 지역에 살고 있는 소수 민족들도 끌어들였다. 중국인과 아시아 제민족 연합이라는 명분 아래 東南亞人民反共聯軍(동남아인민반공연군)을 결성했다. 곤혹스런 버마 정부는 국제 사회에 호소했다. 유엔 총회에서 중화민국을 꼬집어 지목했다. 버마의 영토 주권을 침해하고 있으니, 잔군을 철수시키라는 요구였다. 당시 중화민국은 엄연히 유엔 상임이사국의 하나였다. 세계 5대국의 체통이 달려 있었다. 장제스는 운남반공구국군의 해산을 선포했다. 그러나 시늉뿐이었다. 약 1만 명에 달하는 정예 부대는 남겨 두었다. 자신의 명령을 어긴 불복자들은 어찌할 방도가 없다며 발뺌했다.

그러나 미국은 국제 사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55년 반둥회의 이래 탈식민의 물결을 거스를 수 없었다. 직접 장제스에게 완전 철군을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대만에 대한 군사, 경제 원조를 중지하겠노라 으름장을 놓았다. 결국 1961년 두 번째 철군이 단행되었다. 이번에는 대규모였다. 대만에선 대대적인 '귀국' 환영 행사가 열렸다. 그럼에도 여전히 일부는 남았다. 그들에게 대만은 낯선 땅이었다. 歸國(귀국)이 아니라 歸鄕(귀향)을 꿈꾸었다. 결국 중화민국 군적 자료는 소각시켰다. 잔군은 이제 '고군(孤軍)'이 되었다. 타향을 떠도는 무적자(無籍者)였다.




버마서도 쫓겨난 이들은 다시 산을 타고 넘었다. 그리고 정착한 곳이 마에살롱이었다. 그 4000명의 군인과 식솔들을 이끌었던 이가 바로 단장군, 뚜안시원(段希文)이었다.

그러나 거처가 마련되었다고 해서 생계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국민당의 지원마저 끊어진 마당에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그래서 피난길을 상로(商路)로 전환시켰다. 버마와 태국의 국경 무역을 중계했다. 상품은 단연 아편이었다. 해발 1800미터의 고산 지대라 양귀비를 재배하기에 적격이었다.
단장군은 이렇게 강변했다. '우리는 공산주의 원수와 계속 싸워야 한다. 싸우기 위해서는 군대가 필요하고, 군대는 총이 필요하다. 총은 돈이 있어야 하며, 이 산지에서 돈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아편뿐이다.' 그리하여 버마, 태국, 라오스의 강줄기가 만나는 골든트라이앵글(Golden Triangle)은 냉전기 동남아 아편 무역의 허브가 되었다.

생계책을 세웠다 해도 무적자의 신분은 불안한 것이었다. 태국 정부 또한 공짜로 망명지를 제공하지 않았다. 이들을 태국의 반공 작전에 투입키로 했다. 버마를 접경한 북부 산악 지대는 태국 공산당의 거점이었다. 신중국을 추종하는 '붉은 화교'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을 토벌하는데 전직 국민당군의 복수심을 활용키로 한 것이다.

1970년 12월 단행된 대규모 토벌 작전에도 이들이 맨 앞자리에 섰다. 5년간 지속된 토벌로 1000명 이상의 빨치산을 소탕했다. 태국이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베트남 전쟁에 깊숙이 개입했고 신중국이 북베트남을 지원하고 있었던 사정까지 고려한다면, 태국 북단에서도 동남아의 좌우 대결로서 유사-베트남 전쟁이 진행되고 있던 것이다.

완전 진압은 1982년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태국 정부는 상찬을 표했다. 덕분에 한반도나 베트남, 중국처럼 태국이 분단되는 것을 막았다는 것이다. 국왕이 직접 노고를 치하하며 태국 국적까지 부여했다. 마침내 합법적인 주거의 권리를 얻은 것이다. 이로써 운남에서 버마로, 태국으로 이어진 피난과 유랑 생활도 마감할 수 있었다. 총을 내려놓고 차를 재배했다.

-유라시아 견문, 이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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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단장군 묘역과 본인.


태국 북부 국경지대에는 국민당군의 후예들이 마을을 이뤄 살아가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