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왕국과 달리) 치스라이타니엔에는 공식 언어가 없었으므로 의회 운영에 쓰이는 단일 공식 언어도 없었다. 독일어, 체코어, 폴란드어, 루테니아어, 크로아티아어, 세르비아어, 슬로베니아어, 이탈리아어. 루마니아어, 러시아어가 모두 허용되었다. 하지만 통역사는 제공되지 않았고, 독일어로 말하지 않는 연설의 내용을 기록하거나 감시하는 장치가 없었으며, 독일어가 아닌 언어의 연설을 기록하려면 의원이 자기 연설의 번역문을 의회에 직접 제출해야 했다. 이런 이유로 가장 변변찮은 분파의 의원일지라도 한 줌의 동료들만 알아듣는 말로 길게 연설하는 방법으로 달갑지 않은 안건 발의를 저지할 수 있었다. 그가 발의한 안건에 관해 연설하는지 아니면 자기 민족의 방언으로 긴 시를 낭독하는지 알기가 어려웠다. 특히 체코인 의원들은 의사 진행 방해 전술로 지나치게 남용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치스라이타니엔 의회는 관광 명소가 되었고 특히 방청석에 난방을 하는 겨울에는 빈의 행랑객들로 붐볐다. 한 베를린 기자가 비꼬듯 말했듯이 빈의 극장 및 오페라하우스와 달리 의회 회기 입장료는 무료였다.[저자 주: 의원들의 고약한 언동을 지켜본 사람들 중에 떠돌이 청년 아돌프 히틀러가 있었다. 체코인 의원들의 의사 진행 방해가 절정에 달했던 1908년 2월부터 1909년 여름까지, 히틀러는 방청석에 자주 나타났다. 훗날 그는 이때의 경험으로 젊은 시절에 가졌던 의회제에 대한 동경을 '치유했다'고 주장했다]
-크리스토퍼 클라크 씀, 이재만 옮김, 《몽유병자들: 1914년 유럽은 어떻게 전쟁에 이르게 되었는가》 133-134쪽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정치적 풍파는 겉보기만큼 뿌리가 깊지 않았다. 분명 간헐적인 민족 분쟁(예컨대 1908년 류블랴나에서 일어난 폭동. 또는 프라하에서 체코인과 독일인이 주기적으로 벌인 싸움)이 있었지만 당대 러시아 제국이나 20세기 벨파스트에서 경험한 폭력의 수준에 근접한 적은 없었다. 치스라이타니엔 의회의 풍파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불치병보다 만성질환에 가까웠다. 정부 업무는 1867년 헌법 제 14조에 규정된 국가긴급권을 발동하여 언제든 임시로 수행할 수 있었다. 더욱이 서로 다른 종류의 정치적 갈등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서로를 상쇄했다. 1907년 이후 사회주의자들, 자유주의자들, 성직 보수주의자들, 기타 정치집단들 간의 갈등은 오스트리아 군주정에 호재였는데 그런 갈등이 민족 진영들 안에서도 벌어졌고 그리하여 정치적 원칙으로서 민족주의의 독성을 약화시켰기 때문이다. 복잡한 세력 구도의 균형을 잡아 안정된 다수 정당을 유지하는 것은 기지와 융통성, 전략적 상상력이 필요한 복잡한 과제였지만, 1914년 이전 오스트리아의 마지막 세 수상인 베크와 비네르트, 슈튀르크의 경력은 (비록 때때로 체제가 고장 나긴 했지만) 그 과제를 해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합스부르크제국은 전전 마지막 10년 동안 현저한 경제성장과 그에 상응하는 전반적인 번영을 경험했다(당대의 오스만제국과, 아울러 정치체가 붕괴한 또 다른 대표적 사례인 1980년대 소련과 대비되는 중요한 점이다). 관세동맹을 적용받는 광대한 제국의 자유시장과 경쟁은 기술 진보와 신제품 도입을 자극했다. 이중군주국의 엄청난 규모와 다양성은 효율적인 운송 기반시설과 고품질 서비스, 지원 부문으로 뒷받침되는 협력 산업들의 정교한 네트워크를 신설 공장이 활용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유익한 경제적 효과는 특히 헝가리왕국에서 뚜렷이 나타났다. 1840년대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제국의 식량 저장고였는데, 오스트리아로 수출하는 물품의 90퍼센트가 농산물이었다. 하지만 1909~1913년 헝가리의 산업 수출량은 44퍼센트 증가했으며, 동시에 오스트리아-보헤미아 공업지대에서 값싼 식품에 대한 수요가 꾸준히 늘어나고 합스부르크 공동 시장이 루마니아, 러시아, 미국과의 경쟁으로부터 보호해준 덕에 헝가리 농업 부문도 상당히 건강한 상태로 생존할 수 있었다. 경제사가들은 이중군주국 전체가 1887~1913년에 '산업혁명' 또는 자립적 성장을 경험했다는 데 동의한다. 이는 경제성장의 일반적인 지표들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 1881년부터 1911년까지 선철 소비량이 네 배 증가했고, 1870년부터 1900년까지 철도망 역시 네 배 증가했으며, 유아사망률이 감소했고, 초등학생 수도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를 뛰어넘었다. 전전 수년간 오스트리아-헝가리, 특히 헝가리는(연평균 성장률 4.8퍼센트)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 중 하나였다.
《타임스》의 통신원으로 빈에서 오랫동안 체류한 헨리 위컴 스티드Henry Wickham Steed 같은 비판적 관찰자마저 1913년 "오스트리아 내 인종 투쟁"은 본질적으로 현존 체제 안에서 관직의 지분을 차지하기 위한 분쟁이라고 인식했다.
언어 투쟁의 본질은 그것이 관료의 영향력을 둘러싼 싸움이라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치코인, 루테니아인, 슬로베니아인, 이탈리아인이 주장하고 독일인이나 폴란드인, 기타 인종들이 경우에 따라 반대한 대학이나 고등학교 신설 요구는 잠재적 관리들을 배출할 새 기관을 설립해달라는 요구다. 그러고 나면 의회 정당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서 인재들을 관직으로 끌어올릴 것이다.13
게다가 (적어도 치스라이타니엔에서는) 민족들의 권리 요구를 더 수용하는 정책이 느리지만 확실하게 추진되었다. 1867년 기본법은 치스라이타니엔 내 모든 민족과 언어의 평등을 공식 인정했다. 또 일군의 판례법이 축적되어 대타협 입안자들이 예상하지 못한 문제들에 해결책을 제공했다. 이를테면 보헤미아의 독일인 구역들에 사는 체코인 소수집단을 위한 언어 조항이 마련되었다. 합스부르크제국의 마지막 평화로운 시기 내내 치스라이타니엔 당국은 소수민족의 요구에 부응하여 체제를 계속 조정했다.
(중략)
국가는 억압 기구가 아니라 (또는 대체로 억압기구가 아니라) 강한 애착을 불러일으키는 활기찬 실체, 사회적·경제적·문화적 이해관계의 중재자였다. 합스부르크 관료제는 유지비가 많이 들었다(1890~1911년에 행정부 지출액이 366퍼센트 증가했다). 그러나 제국의 대다수 주민들은 합스부르크 국가를 질서 잡힌 정부의 혜택, 즉 공교육, 복지, 공중의생, 법치, 정교한 기반시설 유지 등과 연관 지어 생각했다. 합스부르크 정치체의 이런 특징들은 군주국이 소멸한 이후 사람들의 기억 속에 크게 자리 잡았다. 1920년대 후반에 작가 (그리고 공과대학 졸업생) 로베르트 무질Robert Musil이 평화로웠던 마지막 해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을 회상하며 떠올린 심상은 "정돈된 강처럼, 선명한 서지로 만든 군용 리본처럼 뻗은 (...) 넓고 번창하는 하얀 도로들, 행정부의 종이처럼 하얀 팔로 영토를 포옹하는 도로들"이었다.22
마지막으로, 대다수 소수집단 활동가들은 합스부르크 국가의 집단 안보 체제로서의 가치를 인정했다. 당시 소수민족들 사이에(예컨대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에서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 사이에, 또는 갈리치아에서 폴란드인과 루테니아인 사이에) 발생하던 격한 분쟁과 종족들이 뒤섞여 정착한 여러 지역을 감안하면, 새로운 민족 독립국을 따로 수립하는 것은 문제를 해소하기보다 일으키는 일이었을 것이다. 여하튼 그런 햇병아리 민족국가가 합스부르크제국의 보호막 없이 대체 어떻게 생존할 수 있었겠는가? 1848년 체코 민족주의 역사가 프란티셰크 팔라츠카František Palacky는 합스부르크제국이 해체된다면 체코인은 해방되기는커녕 그저 "러시아 보편군주국"에 잠식될 거라고 경고했다. "나는 자연적 원인에 더해 역사적 원인 때문에 우리 민족을 위해 평화와 자유, 정의를 보장하고 지켜줄 중심을 [빈에서] 찾지 않을 수 업습니다."24 1891년 슈바르첸베르크 공 카를은 청년체코당 민족주의자 에드바르트 그레그르Edward Grégr에게 질문하면서 팔라츠키와 같은 주장을 폈다. "당신과 여러분이 이 국가를 싫어한다 해도 (...) 홀로 서기엔 너무 작은 여러분 나라를 어쩔 겁니까? 여러분이 오스트리아 연방을 버리면 다른 뾰족한 수가 없어서 독일이나 러시아에 나라를 내주어야 할 겁니다."25 1914년 이전에 제국과의 결별을 추구한 급진적 민족주의자들은 여전히 소수였다. 여러 지역에서 민족주의 정치집단들은 합스부르크에 대한 애국심을 다양한 형태로 고취한 협회들(퇴역군인회, 종교단체와 자선단체, 저격병협회)의 네트워크에 의해 상쇄되었다.
13. Henry Wickham Steed, The Hapsburg Monarchy (London, 1919) p. 77.
22. Robert Musil, Der Mann ohne Eigenschaften (Hamburg, 1978), pp.32-3
-같은 책 135-1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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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줄 요약
1. 소수민족이 의회에서 지네 언어만 써서 필리버스터 유도 가능
2. 민족주의는 제국 내 사상의 다양성으로 그 독성이 상쇄됐음
3. 경제성장
헝가리 내 소수민족 : 우리는? 헝가리 : 응 느그들은 아니야
헝가리도 뭐 계속 경제성장 되는 상황과 빈의 우위가 지속되었다면 헝가리 폭주가 제어 되었을 확률이 크지 않았을 까? 뭐 헝가리 가지고는 상대가 안 될테니 사라예보에서 위기가 안 터졌으면 독일 + 오스트리아 vs 헝가리 + 러시아 전쟁 났을 거라고 생각되지만.
빈 뒷배도 있고 경제성장도 하겠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마자르화 정책을 밀어붙였겠지
얘들 진짜 1차대전 겪고도 안 망했으면 유럽 어떻게 돌아갔을지 궁금함
1차대전때 세르비아 아줌마들 목매달아 죽인 거 보고 충격먹었다.
근데 전쟁은 왜 그렇게 못해
대전 전해까지 러시아에서 포섭되서 스파이가 된놈이 참모본부 핵심에서 자료신나게 빼서 갔다바쳤는데 되겠냐?
저거 하느라고 국방예산 쪽 개판 났었고 초반에 세르비아에게 꼬라박고 결정적으로 현대화된 러시아군에게 포위 섬멸 당한 게 너무 컸어.
히틀러 빡칠만 했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