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에 2대갤에서 활동하던 배군님이 작성했던 내용임
14년전 밀글
< 전과와 손해 >
전쟁사나 전사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라면 최소한 알기쉬운(...) 뭐뭐뭐 전쟁사 시리즈만 봐도 대개「 자군의 손해 보고는 줄어들지만 전과 보고는 줄어들지 않는다」- 라는 케이스를 종종 접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이번은 노몬한 사건을 그 사례로 삼아 피아의 손해 보고와 전과 보고의 엇갈림을 한번 알아보도록 하죠. -ㅅ-;
노몬한 사건은 1939년 5월 11일에 발발해 동년 9월 15일에 정전한 소일 양군의 국경 분쟁입니다. 뭐, 고작 국경 분쟁 레벨로 피아 전과보고나 손해보고의 엇갈림을 논하기엔 사례가 너무 사소하지 않는가?...........라고 반문하실수 있겠습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 노몬한 사건은 일본 육군항공대에게 있어서 터무니없는데서 끌려들어간 상정 외의 대전투였거든요 -ㅅ-;
일본 육군항공대 전투기 탑승원을 조사할 때의 바이블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일본의 항공정보지 별책「일본 육군 전투기대」의 자료를 근거로 한다면(참고로 이 책에는 일본 육군항공대 에이스 대부분의 일람과 경력이 있음) 대략 15년 전쟁기를 통틀어 20기 이상 격추한 탑승원은 23명, 그리고 그 스코어를 합계하면 630기입니다. (에이스 파일럿의 격추수 총계)
그런데, 그중 416기가 무려 노몬한 사건에서의 격추수이므로 뒤집어 생각해보면 태평양 전쟁에서의 일본 육군 에이스 파일럿 23인의 격추수 합계는 고작 214기란 충격적인(...) 결과도 잘 알 수 있습니다. -ㅅ-;
41년 12월부터 45년 8월 15일까지 장장 44개월이나 지속된 태평양 전쟁을 통틀어 에이스 파일럿들의 총 격추수를 더해보면 214기인데, 단 4개월( 태평양 전쟁에 비하면 불과 1/11의 기간!)에 불과한 노몬한 사건에서 416기?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ㅅ-;
그럼 태평양 전쟁에서는 해군항공대의 화려한 전투에 가려져 육군항공대는 공중전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당연하지만 그런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개전 직후의 필리핀 항공전이나 말레이 항공전, 란인항공전, 이어 계속되는 버마 항공전이나 솔로몬 - 뉴기니아의 항공전, 플라잉 타이거스와 상대한 지나 항공전, 말기에 또한번 사투를 펼친 제 2 차 필리핀 항공전이나 대만, 오키나와 항공전 및 일본 본토 방공전.....딱 봐도 육군의 항공전도 규모나 스케일 면에서 해군에 못지 않았죠.
그런데, 육군항공대의 톱 에이스 23명에 의한 1개월당 격추기수로 따져보면 태평양전쟁은 평균 1개월에 5기꼴이었는데 노몬한 사건에선 1개월 평균 104기로 무려 20배가 넘습니다. -ㅅ-;
자, 그럼.......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도 계실겁니다.
「 소련 공군기는 독소개전 초반의 대 루프트바페전 전과를 보아도 알듯 미국과 영국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은 저급한 집단이었다.」
........라고 -ㅅ-; . 맞아요 맞는 얘깁니다. 저도 어느정도는 수긍합니다만 그 전에 우선「 (대영미 개전 이후와 비교해)노몬한의 터무니없는 전과 보고는 뭔가 이상하지 않나?」- 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요?
자, 다시 앞의 이야기로 돌아와볼작시면 일본 육군항공대에게 있어서 노몬한 사건은「 터무니없는데서 대량의 소모를 낸 상정 외의 전투」- 인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 노몬한 사건 발발 당시, 일본 육군의 전투기 부대는 10개 전대(*주 1) 외 1개 독립중대 편성으로 그 구성은 23개 전투기 중대(97식 전투기 15개 중대, 95식 전투기 8개중대, 참고로 당시 일본 육군항공대는 1 개 전투기중대가 약 9기 편성이었으므로 탑승원의 숫자는 대략 200명)였지만 이중 85%가 넘는 20개중대(97식 전투기 14개 중대, 95식 전투기 6개중대)가 노몬한에 투입되어 절반 가까운 100여명의 전투기 탑승원을 상실했거든요. 즉 이 손실율은 노몬한전 개전 전과 비교하면 가동 가능한 현역 탑승원의 절반을 상실했다는 의미입니다. 특히나 지휘관 클래스의 손실이 특히 심해 지휘관급 전사자만으로도 소좌 1명, 대위 8명, 중위 10명에 이릅니다. -ㅅ-;
(* 주 1)
자료에 따라선 노몬한 사건시 육군항공대의 비행전대는 8개전대라는 자료도 있습니. 하지만 제가 10개 전대라고 소개한 것은 제 5 전대나 제 13 전대등의 연습 부대도 포함한 숫자거든요. 그러나 이러한 연습부대나 제 4 전대의 경우 전대가 단 1 개 중대밖에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으며 제 1 전대나 제 24 전대, 제 59 전대는 2 개중대 편성이었지요. -ㅅ-;
노몬한전 당시 육군항공대의 주력이었던 97식 전투기
.........근데, 보기보다 지휘관급(영관) 전사자가 적다고요? 근데 꼭 그렇게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초기 투입된 7개 비행전대(1, 9, 11, 24, 33, 59, 64전대)중 제 33 전대가 전장에 투입된 날은 16일, 59 전대는 6일, 9 전대는 3일 뿐이므로 사실 계속 노몬한에서 싸운 4개 전대만으로 한정하면 11 전대를 제외한 3개 전대 모두의 전대장이 격추, 또는 부상당하고 있었거든요. -ㅅ-;
특히 제 1 전대에서는 7월 12일의 공중전에서 전대장인 가토 중좌가 부상, 후임의 하라다 소좌가 전대장직을 승계했지만 그 하라다 소좌도 첫 출진에서 전사-_-, 최종적으로는 전 중대장과 전 장교가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는게 실상이었습니다. 또 이렇게 손해가 극심한 것은 제 1 전대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4개 전대(합계 11 개 전투기중대) 통틀어 보면 중대장 11 명중 9명이 사상, 그 후임 중대장이나 중대장 대리들도 계속 전사하거나 부상당했거든요. 즉 노몬한 사건에서의 지휘관급 항공장교 대량 상실이 그 후의 전쟁에서 일본 육군 전투기부대에 큰 영향을 미친 점은 더이상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ㅅ-;
<노몬한 항공전의 개략 >
그러면 간단히 노몬한 사건의 추이에 대해 설명합니다.
1939년 5월 11일, 소일 어느 쪽인가가 월경해 국경분쟁( 제 1 차 노몬한 사건)이 발발했습니다. 일단 여기선 그 월경한 쪽이「 어느 쪽인지」- 는 뒤로 재쳐둡시다. -ㅅ-; 요점은 어느쪽이나 「 물러날 생각은 없다는 것 」- 이 중요했기 때문이죠.
.........뭐, 이렇게 해서 사건은 확대되기 시작했습니다.
육전에 대해서까지 쓰면 길어지므로 이후는 항공전, 특히 전투기 부대에 관해서만 설명하겠습니다. -ㅅ-; 최초 노몬한에 전개중이던 소련군 항공부대는 자바르예프 소령이 지휘하던 적군 제 70 전투기 연대로써 그 구성은 전투기 38기, 그리고 적군 제 150 폭격기연대의 폭격기 29기로 그 외에는 15기가 예비기로 있던 제 100 혼성 비행단이 전개중이었습니다.
이 정보를 파악한 관동군 참모부는 제공권을 장악하기 위해 13일부터 육군비행 제 24 전대(97식 전투기 2개중대)를 투입했습니다. 이 제 24 전대는 18일부터 정찰을 개시해 20일에는 첫 격추(정찰기)를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소련측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22일에는 적군 제 22 전투기 연대의 63기와 제 33 폭격기 연대 59기를 추가로 100 혼성 비행단에 합류시켰습니다. 하지만 이 증강에 맟춰 일본군도 24일에는 제 11 전대의 절반(97식 전투기 2개중대)를 추가로 진출시켰지요.
일단 초기의 공중전은 일본군이 확실히 승리했습니다. 왜냐? 일본이 주장하는 전과보고와 소련측이 발표하는 손실기의 차이가 거의 비슷했기 때문이죠. 실제로도 5월 중에 일본기가 격추된 것은 28일에 1기 격추된 것 뿐으로 소련측도 자신들의 전과가 1기뿐이고 항공전에선 진 사실을 인정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29일부터는 위기감을 안은 소련군 총참모부의 지시에 의해 무려 공군 부본부장(...)이 48명의 베테랑 전투기 파일럿을 인솔해 수송기 3기로 몽골의 전선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30일부터는 일본군도 제 11 전대의 나머지 전력(97식 전투기 2개중대)을 모두 투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오오........-ㅅ-; 이대로 사태의 추이가 진행되면 노몬한에서 아시아 최대의 항공전이 벌어질 것은 자명......orz 제법 살벌한 시추에이션이 되었겠지만 현실은 여기서 일단 반전됩니다. 6월 2일에는 제 1 차 노몬한 사건이 종결되거든요. 그런데, 이것도 종결로 보기엔 좀 뭐한 것이, 종결이라고 말하면 「 아, 정전교섭이 시작되거나 외교적 액션이 시작된 건가」- 라고 생각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사실은 이와는 좀 달라 일본육군이 지상부대를 조금 후방으로 물린 것 뿐으로, 문제는 그때까지도 소련측은 이렇게 분쟁을 끝낼 생각이 없었단거죠. -ㅅ-;
때문에 소강상태로 접어든 이후에도 변함없이 소련군은 병력을 증강시켰고 결국 6월 17일부턴 당연하다면 당연합니다만 제 2 차 노몬한 사건이 발발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번은 일본군도 병력을 축차 투입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습니다. 6월 19일에는 만몽지역의 비행전대를 모두 모아 새로 제 2 비행집단(편성된 전투비행대의 총계는 3개전대로 제 1, 11, 24 전대 합계 97식 전투기 8개 중대)을 편성했고 이 부대가 소련군과 다시한번 싸우게 되었던 것이죠. 이렇게 해서 소일 양군은 다시 격렬한 항공전을 펼치게 되는데 22일에는 소련군의 그라즈이킨 소령, 24일에는 자바르에프 소령이 전사했습니다. 그리고, 이 여세를 몰아 발동된 것이 6월 27일에 벌어진 일본군의 제 1 차 탐스크 공습입니다.
소련군의 항공시설을 격멸하려는 목적에서 기획된 이 작전에 일본 육군항공대는 정찰기 12기, 전투기 74기, 경폭 6기, 중폭 21기 합계 113기를 투입했고 98기 격추의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 수치는 앞서 언급한 일본 육군전투기대에 의한 수치, 참고로 츠지 참모에 의하면 지상격파를 포함 114기, 마루 제 648호에서는 지상격파를 포함 110기, 세계의 전투기대에서는 140기)
그리고......이후 양군은 더욱 더 항공전력을 증강시키기 시작했습니다. -ㅅ-; 7월 21일, 소련은 적군 제 56 전투기연대를 진출시켜 이에 맞섰고 일본도 8월 15일부로 비행 제 64 전대(97식 전투기 3개중대)를 투입해 8월 21일에는 제 2 차 탐스크 공습을, 22일에는 제 3 차 탐스크 공습을 연이어 발동시켰지만 이러한 잇단 공세덕분에 탑승원의 소모도 점점 상승곡선을 달리기 시작했지요. 참고로 이 기간동안 7월 12일에는 가토 중좌( 제 1 전대장, 부상), 7월 29일에 하라다 소좌( 제 1 전대장 대리, 전사), 8월 4일에는 마츠무라 중좌( 제 1 전대장, 역시 부상)를 위시로 각 전대장 이하 탑승원의 사상이 잇따랐습니다.
.........자. 보시다시피 이미 노몬한 전선의 일본 육군항공대는 삐걱대기 시작했습니다 -ㅅ-; 하여간 이것을 보충하기 위해 8월 30일부로 비행 제 33 전대(95식 전투기 3개중대), 9월 9일에는 비행 제 59 전대(97식 전투기 2개중대), 9월 12일에는 비행 제 9 전대(95식 전투기 3개중대)등 증원은 계속 보내졌지만 이미 97식 전투기부대는 결핍 상태....orz 괄호로 소개했다시피 증원의 주력은 복엽기인 95식 전투기부대로 전락해버렸지요. -ㅅ-;
이 항공전의 최종 시점에서 소련공군 또한 제 19, 22, 23, 56, 70의 5개 전투기 연대라는 상당한 병력이었습니다. 그리고 9월 15일의 제 4 차 탐스크 공습을 마지막으로 노몬한에서의 항공전은 마지막이 되었고 동일 성립된 정전교섭에 의해 노몬한 사건은 그 막을 닫게 되었습니다.
< 화력과 방어력 >
여기서 양군의 주력 전투기인 일본군의 97식 전투기와(이하 97식전) 소련군의 I-16을 비교해 봅시다. 양쪽 모두 1930년대 후반을 대표하는 저익단엽 단발전투기였지만 97식전이 고정식 랜딩기어, I-16은 뚱뚱보 몸체(...)라는 결점을 가지고 있어 최고속도는 동일한 정도였죠.
또 97식전은 운동성이 우수했지만 화력과 방어력이 약했고 I-16은 운동성이 나쁜 대신 화력과 방어력이 강했습니다. 그러면 이번엔 97식전과 동시기에 개발된 각국 전투기의 화력을 비교해 봅시다.
97식전은 1935년 12월에 개발이 개시되어 1936년 10월에 시작기가 처녀비행, 1937년 12월부터 양산된 7.7㎜기관총 2문을 장비하는 단좌전투기입니다. 우선 독일에서 이와 비슷한 시기 개발된 전투기를 찾으면 1935년 9월에 시작기가 처녀비행한 Bf-109가 해당합니다. Bf-109는 시작기 단계에선 7.92㎜기관총 2문의 경무장이었지만 초기 양산형(1937년 3월)인 B형에서는 7.92㎜기관총 3문으로, 그리고 1937년 말부터 생산이 개시된 C형에서는 7.92㎜기관총 4문으로 무장이 계속 강화되었습니다.
다음은 이탈리아. -ㅅ-; 스페인 내란에서 대활약한 피아트의 CR32는 1933년 4월에 시작기가 처녀비행해 1935년 이후 잇달아 양산된 복엽 전투기로 당초 7.7㎜기관총 2문이었던 무장은 12.7㎜기관총 2문으로 강화되어 후에 7.7㎜기관총 2문이 더 추가되었습니다.
요놈이 스페인 내란에서 대활약한 CR32 -ㅅ-;
프랑스라면 1935년에 참고로 일본이 2기 구입한 드와이텡의 D510가 대표적인데 전투기에는 당시에 이미 동축식 20㎜포 1문과 7.5㎜기관총 2문이 장비되고 있었지요. -ㅅ-;
영국은 1937년 1월부터 부대 배치가 개시된 글로스터 글래디에이터가 7.7㎜기관총 4문, 그리고 동년말부터 부대 배치가 시작된 호커 허리케인은 7.7㎜기관총 8문.
미국은 1937년 7월부터 부대배치된 세버스키의 P-35와 거의 동시기에 양산된 커티스의 P-36이 97식전의 라이벌이 될 수 있는데 당초는 어느쪽이나 12.7㎜기관총 1문과 7.62㎜기관총 1문을 장비할 정도였죠. 그러나, 이후 P-35는 12.7㎜ 2문과 7.62㎜기관총 2문으로 강화되었고 P-36도 12.7㎜기관총 1문과 7.62㎜기관총 3문 혹은 12.7㎜기관총 2문과 7.62㎜기관총 4문 혹은 8문 장비로 여러가지 타입으로 무장이 강화되었습니다.
이외에 열강은 아닌 각국 전투기들도 대동소이해 네델란드의 D21(1936년)도 7.92㎜기관총 4문이고 폴란드의 PZL.P11(1934년부터 양산)도 7.7㎜기관총 4문을 장비했습니다.
.........-ㅅ-; 그렇습니다. 즉 당시 기준으로 97식전보다 약한 화력의 전투기는 세계에도 거의 없었던거죠. 이렇게 동시기 타국의 전투기들과 비교해보면 보면 97식전의 진짜 문제는「최초부터 조금 약한 화력」인 주제에 타국 전투기가 차례차례 화력을 증강해 나가던 중에도 전혀 화력을 강화하지 않은 채 3386기나 양산한 점에 있습니다.
즉 양산이 개시된 1937년 말의 단계에서 육군의 97식전은「조금 화력이 약한 전투기」였지만 노몬한 사건(1939년 5월~9월)의 단계에서는 「 세계 최약 화력의 전투기」- 가 되어버렸던 것이죠. -ㅅ-;
.......뭐, 생각해보니 최약 화력은 아니었군요(뽀핫) 또하나 있긴 있습니다.
해군의 96식 함전도 7.7㎜기관총 2문 장비였는데 아마 이 기체가 당시 열강 신예기 중에서 유일하게 97식전에 필적하는(...) 화력의 전투기였던것이죠. -ㅅ-;
세계최약무장 전투기 no.2....96함전....orz
( 물론, 비행성능은 당대 일류였습니다. )
쓰다 보니 일본측에 상당히 우울한 시추에이션인데, 하지만 이 노몬한 사건의 종결(1939년 9월 15일)과 제 2차 세계대전의 발발(1939년 9월 1일)을 전후한 일본 군용 항공기의 무장 강화에 관해서는 역시 좀 주의해서 봐야됩니다.
확실히 제 2차 세계대전 발발시 세계에서 가장 약한 화력의 전투기를 주력으로 한 국가는 일본이었음을 부정할 순 없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반동이 영전을 낳았던 것이죠. -ㅅ-;
다만「 영전이 20㎜ 기관포를 장비해서 전세계가 놀랐다.」- 라는 기술을 일본측 서적에서 종종 볼 수 있는데 이건 사견으론 역시 상당한 오바(...) 이므로 나름데로 이걸 받아들이는데는 조심했으면 좋겠네요. -ㅅ-; 사실 이미 소련도 I-16 type24에서 20㎜포를 장비하고 있었고 프랑스는 일본이 참고로 수입했을 정도로 나름의 동축식 20㎜포의 본가였기 때문이죠. (히스파노 수이자)
I-16 type24
또 영국도 영전 21형과 거의 동시기에 생산된 스핏파이어 MK1 이나 MK2에선 20㎜포 장비형이 소수이지만 생산되고 있었고 열강이 아닌 폴란드의 PZL.P11의 수출형인 P24도 20㎜포를 장비하고 있었죠, 게다가 이미 P-39에 37㎜포(...)를 장비한 미국도 있었기에 사실 단발 전투기에 20㎜포를 달았다고 놀란 국가는 아마 이탈리아(...) 정도였을 겁니다. -ㅅ-;
뭐,「 항공기에 관해서는 후진국이라고 생각되던 일본이 20㎜포 장비의 전투기를 자력 개발했기 때문에 놀랐다」- 라고 말한다면 있을 수 있는 얘기긴 합니다만.(뽀핫)
다음으론 방어력인데, 97식전이 전혀 방탄설비가 장비되지 않았던데 비해 노몬한 항공전에 투입된 소련군의 I-16은 이미 장갑판을 장비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모든 I-16기가 장갑판을 장비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죠 -ㅅ-; 최초로 투입된 적군 제 70 전투기 연대의 I-16에는 방탄판이 장비되지 않은 형식이 대부분이었고 탑승원의 숙련도도 낮아 초기에 심대한 손실을 입었단점은 이미 지난 글에서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 증강된 적군 제 22 전투기 연대는 I-16에도 대부분 장갑판이 장비된 형식으로 편제하고 있었고 화력도 20㎜포 2문, 7.62㎜기관총 2문으로 강화되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소련이 I-16기의 방어 강화를 시작한 것은 노몬한 사건부터는 아니었습니다.
또 이 I-16들이 장비한 장갑판의 두께는 전사총서「육군 항공병기」에서는 6.4㎜, 마루 648호나「육군항공대 전사」에서는 9㎜ 등등이라고 나와있습니다.
여담입니만 전사총서「육군 항공병기」에 의하면 일본 육군도 격추한 I-16의 장갑판을 수거해 본국으로 가지고 돌아가 일본 특수강철 주식회사에 연구를 명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쇼와 14년(1939년) 12월부터 ki-44(2식전 쇼키) 용으로 방탄판의 시작을 동사에 지시했다 합니다.
역시 뱀다립니다만 동 저서에 의하면 일본 육군기중 최초로 방탄판을 장비한 것은 99식 습격기이며 방탄판의 제조 메이커는 대동 제강 주식회사.....근데 어차피 같은 항공기용 방탄판인데 전투기용이나 폭격기용의 제조 메이커가 다른 것도 꽤 재미있는 사실입니다. 어찌되었건「 I-16이 방탄판을 장비하고 있던 일」이 결정적으로 「일본 육군이 전과를 과대 평가한 일」의 여지가 되지만 자세한것은 역시 후술.....-ㅅ-;
2식 단전, 쇼키 -ㅅ-;
.........그리고 일본기중 최초로 방탄판을 장비한 99식 습격기. -ㅅ-;
< 양군의 전과보고 교차검증 >
그러면 노몬한 항공전을 전후로 양군은 각각 어떻게 전과보고를 올렸을까요? 일본측 발표와 소련측 발표 쌍방을 모두 기술하고 있는 자료라면 앞서 소개한 이번 글의 주요 리퍼런스인 항공정보 별책「세계의 전투기대」와 마루 제 648호가 있지만 양쪽 모두 소련측이 주장하는 전과는 격추 660기, 손상 207기..... 일본측이 주장하는 전과는 책에따라 좀 다릅니다만 격추 1340기, 손상 171기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참고로 일본의 2차대전 공간전사인 전사총서는 이것에 대해 어떻게 기술하고 있을까요? 거기선 소련기 격추 1389기에 대해 일본측의 격추는 192기(이중 97식 전투기 119기)라고 나와있습니다. 이 자료는 공간전사답게 일본측의 손해와 보충량을 기종과 기간별로 집계하고 있어 훌륭한 자료입니다만 5월 28일에 97식 전투기 1기가 최초로 격추되었는데도 불구하고 6월 20일 이전의 손해가 제로인 등 약간의 의문점도 볼 수 있습니다. -ㅅ-;
뭐, 이와같이 일본측이 주장하는 격추전과를 대략 어림잡아보면 1340 ~1389기, 손해는 166 ~192기로 만약 일본측 발표가 맞다고 가정하면 일본의 기록적 대승리(전사총서를 예를 들면 1:7)이고 소련측 발표가 맞다면 소련의 대승리(1:3)인겁니다.
............그럼, 과연 일본측 발표와 소련측 발표.........-ㅅ-; 어느 쪽이 올바른 것일까요?
그런데, 진짜 문제는 양군 모두「 상대가 전장에 진출시킨 총 항공기수 이상의 항공기를 격추했다고 주장 」- 하고 있으니까 -ㅅ-; 양군 모두 통틀어 믿기 어렵다는게 진실입니다. orz
자.......그럼 여기서 만일 양군이 주장하고 있는 전과가 맞다고 생각해 봅시다. 노몬한의 초원에 소일 양국의 항공기가 대소 합쳐 2000기 이상이나 전개하고 있다는 계산이 되는데....-ㅅ-; 진짜라면 이건 BOB와 맟먹는(...)굉장한 스케일이죠. 일본측 주장이 맞다고 해도 약 1500기, 소련측 주장이 맞다고 해도 약 800기..........orz
역시 답을 구해낼려면 일단 양군의 손해치만을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수치로 보는 것이 좋을겁니다. 그렇다면 전장에 전개된 항공기는 일본측이 발표한 자군 손실기수 최대치인 197기에 소련측이 발표한 자군 손실기수 207를 더해 대략 최대 약 400여기 정도라고 봐야겠죠. -ㅅ-;
아마, 이런 정도일 겁니다 -ㅅ-;
흔히 노몬한 항공전은 일본군의 승리라고 전해집니다. 위에도 서술했듯 최소한 양군이 발표한 자군의 손실수를 대조해봐도 일본측의 손해가 적은게 사실이거든요, 하지만 결코 압도적 승리는 아니었던겁니다. -_-;
참고로 제 11 전대에 소속되어 노몬한에서 5기를 격추시킨 타카야마 중위는 한 잡지와의 대담에서(군사사학) 전반부는 승리, 중반부는 5대 5의 백중세, 후반부는 패배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군의 압도적 승리를 주장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것은「전반부는 승리」와「후반부는 패배」라는 두가지 팩터가 공존한다는 것이 하나의 열쇠가 됩니다. 노몬한 항공전에서 일본군의 전과로 1340기 격추, 40기 지상 격파를 주장하는 마츠무라 코지로(松村黄次郎)중좌의 경우 제 24 전대 전대장으로 승전한 전반전에서 싸우다가 중반전이 한창이던 8월 4일에 격추되어 부상으로 후송되었습니다.
즉, 마츠무라 중좌는 분명 그의 저서「격추 노몬한 공중실전기 / 撃墜 ノモンハン空中実戦記) 」에서 밝힌데로 노몬한전의 용사였지만「패전한 후반부」는 전혀 모른다는 얘깁니다. -ㅅ-; 참고로 마츠무라 중좌는 그의 저서에서 「 9 월 상순부터 적 공군의 병력은 압도적으로 우세해졌다. 적어도 전선에 있는 소형기는 1500기, 대형기도 300기를 넘는것으로 판단된다」- 라고 언급했지만 아무리 소련군의 배치상황을 재검토해봐도 최종적으로 노몬한 항공전에 투입된 소련군 전투기는 5개 연대(당시 소련군의 1개 연대는 약 60여기)를 약간 웃돌 뿐 손해가 재빨리 보충되었다고 해도 전장에 1500기가 집결되었다곤 생각할 수 없습니다.
즉..........적의 소재 병력에 대한 과대 평가가 전과의 과대 평가로 연결된 측면도 분명히 있다고 말할 수 있는거죠. -ㅅ-;
앞서 전기는 승리, 후기는 패전이라고 기술했지만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을까를 일단 여기선 탑승원의 손실을 주요 팩터로 역산해봅시다. 일단 노몬한 항공전에서 일본육군의 전투기 탑승원이 어느정도 상실되었는지는 제시하는 자료가 여럿 있습니다. 우선 항공정보 별책「일본 육군 전투기대」를 근거로 노몬한전에서의 각 전대 전사자를 합산하면 제 1 전대가 16명, 제 11 전대가 19명, 제 24 전대가 12명, 제 33 전대가 3명, 제 59 전대가 5명, 제 64 전대가 8명으로 합계 63명입니다.
(참고로 361p의 전사자 일람표에는 합계 66명 -ㅅ-; )
어쨌건 이 66 명 중, 무려 반수인 33명이 4개월에 걸친 노몬한 항공전의 마지막 1개월에 집중(7월 16일부터 8월 15일까지의 전사자는 18명, 이것이 중기에 해당합니다. 그 이전 2개월간의 공중전 전사자는 불과 15명)되어 있기에 후기의 고전은 굳이 다른 1차사료(증언록 등)을 뒤져보지 않아도 교차검증이 가능합니다.
소련측이 인정하는 자군 손해 207기의 경우 역시 항공정보 별책인 「세계의 전투기대」를 근거로 하면 8월 20일 이후의 손해(정전이 9월 15일이므로 교전기간은 26일간, 여기선 귀찮으니 그냥 한달로 잡겠습니다.)는 34기라고 나와있습니다. 즉 후기는 일본측이 전사자 33명으로 소련기 34기를 격추했으므로 대략 손실교환비는 1:1이 됩니다만 전기, 중기의 평균은 33명의 손해로 173기를 격추하고 있었으므로 1:5.2가 됩니다.
참고로 전기, 중기는 약 3 개월간에 걸친 전투였으므로 월 단위로 보면 후기는 33명의 전사로 34기를 격추하고 있는데 비해 전기, 중기는 평균 11명의 전사로 57기(소련군 항공기 손실도 일본측처럼 전기와 중기로 세분화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저도 여기까진 자료가 없습니다. -ㅅ-; 따라서 이 계산은 173 ÷ 3 = 57로 계산해 1달 평균으로 계산하겠습니다)를 격추하고 있었거든요.
자, 이제 아시겠습니까? 타카야마 중위가「전기는 승리, 중기는 5대 5 , 후기는 패배」- 라고 말했던 사실을 납득할 수 있으실겝니다 . 마지막으론 여기서 한번 더 일본 육군항공대의 전투기 탑승원의 손실에 관심을 돌려 「 노몬한 항공전이 일본 육군 전투기부대에 준 영향」- 을 생각해봅시다.
사실 탑승원의 손실은 전사자 뿐만이 아닙니다. 물론 전투기의 손실 = 탑승원의 손실도 아니지만 부상(마츠무라 코지로 중령 등) 으로 탑승원으로 복귀할 수 없었던 부상자를 포함하면 손실수는 더 증가하거든요. 일단 8월 말까지의 육군항공대 전투기대의 인원 손실은 당시 전장에 있던 전투기 조종사의 거의 3/4에 해당하는 76명으로, 노몬한 항공전 전 기간동안 항공부대의 손실은 전사 141명, 부상 89명, 중대장 이상의 전상자가 17명이었습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ㅅ-; 서두에도 언급했지만 노몬한 항공전 발발시 일본 육군의 전투기 부대는 총계 23 개 중대(1 개중대는 9기)로 탑승원 숫자가 약 200명이었거든요. 그중 약 절반이 불과 4개월동안의 항공전으로 사라져 버렸던 것입니다. 특히 중대장 클래스의 지휘관 손실는 엄청났는데 이것이 당시 확장기에 있던 일본 육군 항공대에게 준 영향은 결과적으로 다대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부턴 사견입니다만 만약 노몬한 항공전이 없었다면 태평양전쟁에 즈음해 육군항공대도 해군만큼 상당한 페이스로 탑승원을 양성할 수 있었다고는 생각되는데 뭐 영향은 굳이 이런 마이너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 항공기의 보충은 할 수 있어도 탑승원의 보충은 곤란하다」- 라는 사실을 눈치챈 일본 육군은 해군보다도 빨리 전투기의 방어력 강화에 착수했거든요 (뽀핫)
..............이렇게 탄생한 것이 이후 일본기의 동체 후방에 장비된 6.5㎜장갑판이었다며 마무리. -ㅅ-;
< 전과 오인의 요인 >
자, 전편에서 소개한 여러 이야기들로 소일 쌍방이 터무니없는 전과를 발표해 양군 모두 자군 승리를 주장한 일은 어느정도 설명이 되었으리라 믿습니다. 일단 제 평가로는 최소한 양군이 발표한 자군의 손실률이 올바르다고 가정해도 노몬한 항공전은 분명 일본의 신승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렇다 치더라도 전과 오인은 항공전에서 드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까지 양측 모두 큰 오인이 발생했을 것일까요?
참고로 소련측이 주장하는 일본기 격추전과 660기는 일본측이 주장하는 자군손실 166~192기의 3배, 일본측이 주장하는 소련기 격추전과 1340~1389기는 소련측이 주장하는 자군 손실 207기의 7배 이상에 이릅니다.
.........3배와 7배,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일단 제 분석에 의하면 이렇게 답이 좁혀집니다.
첫번째는 대량의 항공지휘관 손실에 의해 일본측이 종합적인 정보 수집력을 상실한 일.
두번째는 「믿음에 의한 전과 오인의 다발」인데, 마지막 이야기의 주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전술한대로 I-16의 조종석 뒤쪽에는 방탄판이 장비되고 있었으므로 일본군의 7.7㎜기관총으론 전혀 관통할 수 없었습니다. 일단 일본측의 상식으로는 방탄판의 장착 등은 생각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선회전을 거듭해 목표의 배후를 잡아 접근해 조종사를 겨냥해 사격, 명중을 확인할 수 있으면 「격추된다」- 라는 믿음이 있었죠.
하지만 이에 비해 소련공군의 교전교리는 후방을 잡힌 상태에서 사격을 받게되면「우선 급강하해 이탈한다」- 라는 전술상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이에 대해선 일본측의 증언도 많은데, 마루 엑스트라판 19호에선 마츠무라 중좌가, 그리고 같은 잡지 648호에서는 후루코리 상비조의 술회에도 나와있습니다. 여담입니다만 당시 일본 육군항공대의 파일럿들은 소련군기의 이러한 행동을「위장 추락」이라고까지 호칭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찌보면 소련기의 이러한 행동은 당연한겁니다. 아시겠지만 I-16은 일본 육군항공대의 97식전에 비해 선회 성능에서는 뒤떨어지지만 급강하시의 가속은 발군이었거든요. -ㅅ-; 그러나 97식전을 포함한 일본 육군기는 기본적으로 급강하로 이탈한다는 기동은 잘 하지 않았고 뒤가 잡혀도 가능하면 선회전으로 돌입하는 경향이 많았습니다.
정리하자면 일본군 전투기 탑승원은 육해군을 가리지않고 일단「 싸울 수 있는 이상은 급강하하거나 하지 않는다. 」- 는 선입관이 항상 머릿속에 들어있었던겁니다. 그런 파일럿이, 적기의 배후에 잡고 적 조종사를 향해 확실한 명중탄을 퍼붓고 난 후 적기가 지표를 향해 떨어져가는것을 보면「격추가 아니다」- 란 생각은 도저히 할 수 없었겠지요. -ㅅ-;
이외 곁다리로 하나 더 추가하자면 상급사령부에 의한 의도적인 과대 전과 발표가 있던 것도 부인할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상급군사령부란 현지군인 관동군인데, 사실 이 노몬한 사건 자체가 통수권을 무시한 현지군의 독단전행에 의한 일종의 사변이기 때문에 결과가 잘 나오지 않으면 책임자는 처벌되기 때문이었죠.
뭐 이것에 대해서는 디씨 2차대전갤의 난늘궁금해님이나 입치료님처럼「 제국 육군에선 그런 일은 없다」- 라고 생각해버리면 더이상 할 말 없습니다만 -ㅅ-; 흥미가 있는 분은 알빈 쿡스의「노몬한」이라던가, 이게 외국인이라 믿음이 안간다면 우시지마 야스미츠씨의 저서「노몬한전전사/ノモンハン全戦史」의 일독을 추천합니다. -ㅅ-;
개추 - 시진핑김정은개새끼
따끈따근하지 않은 따끈따근한 글
자군 손실 인정을 보자면 소련207:일본173 이고 초반 일본이 승전 중기 팽팽함 후반 소련승 이렇게 보면 되나?
먼저 쓴 글과 해당글 정리를 통해 보면 딱 그게 적절한 표현이라고 봄. 특히나 후반 전투에서의 일본육군항공대 숙련조종사 손실률이 급상승 했단걸 생각하면
글좀 좃같이 쓰네 ㅂㅊ
글이 진짜 00년대 느낌 난
우왓 영토에 왜구가.. -ㅅ-a; 몽글몽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