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식 명칭은 '이치고 작전'이나 대륙타통작전으로 주로 불려지는 이 작전은 1944년 4월 중순에 개시되어 1945년 2월까지 전개되었다.
일본군은 베트남 국경까지 도달하여 작전 목표를 완수하였고, 중국군은 핵심 전력인 제1전구와 제9전구가 전멸 직전까지 내몰리고 나머지 전력도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중국 동남부를 방어하던 제3전구는 고립되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중국은 창사와 헝양, 구이린, 류저우 등 산업과 교통의 요지들과 주요 공군기지를 상실하였고, 1944년 중으로 시행하려던 반격 작전은 이듬해인 1945년 3~4월에 아주 제한적으로 실시할 수 밖에 없어졌다.
그러나 이 대륙타통작전이 일본군이 중국군을 시종일관 압도하여 손쉽게 진격할 수 있었던 작전이라고 보기는 몇 가지 난점이 존재한다.
특히 항공전력이 그러한데, 이치고 작전 직전에 1개 항공전대를 지원받아 항공기 230여 대를 보유한 일본군의 제5항공군에 비해 이미 두 배가 넘는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작전이 진행되면서 일본군은 제대로 전력을 보충받지 못한 반면, 중미 연합공군은 후난 성과 광시 성의 항공기지를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증가하여 작전이 개시된 지 7개월이 지난 11월에는 일본군의 5배가 넘는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압도적인 전력을 갖춘 중미 연합공군은 일본군의 행군 행렬과 보급부대를 습격하였고, 일본군은 야간 행군에 의존할 수 밖에 없게 되어 기동력이 감퇴하였다. 또한 후방의 사령부와 보급품 집적소에도 공습을 가했는데, 5월 6일자 제12군의 보고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적 공군의 지상 공격은 점점 활발해지고 있으며, 지난 달 28일부터 이번 달 5일까지 총 90소티의 공습을 받았다. 특히 사령부들이 위치한 정저우와 후방부대의 자동차와 화차에 대한 공격이 가해져 아군 사상자 97명, 자동차 및 화차 21대, 연료와 탄약 1,000톤이 소실되었다. (중략) 아군 전과는 지상화기에 의한 P-40 1기이다."
연합군의 공습과 더불어 악천후도 일본군의 진격을 방해했다. 제12군의 5월 14일 전투보고에 따르면 비바람이 거세어 전선 일대의 교통이 정체되었다고 하며, 이는 폭우로 인한 도하 불가 및 일본군이 진격로로 사용할 경작지들이 거센 비로 인해 진창으로 변해 진격이 정체된 탓이었다. 5월 15일에는 제12군 예하 사단이 강의 유일한 도하지점이 폭우로 인해 도하가 지체되어 비를 맞다가 166명이 동사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비전투 손실의 누적과 제1전구의 중국군의 저항으로 제12군의 예하 사단들은 평균 15퍼센트의 손실(다만 이 손실이 재투입이 불가능한 손실 포함인지는 불명)을 입었다. 제3전차사단은 전투 손실은 크지 않았으나 수백 km의 장거리 기동으로 인한 정비 상의 이유로 다음 단계인 상계 작전에서는 2개 전차여단 중 1개 만이 투입될 수 있었다.
( ) 안은 전체 인원 중 장교의 수. 상계 작전을 위해 차출된 사단들은 포함되지 않았으나 비슷한 수준일 것이라 생각됨
그러나 경한작전에 참가한 제12군은 300km 내외라는 상대적으로 짧은 작전 거리 덕분에 앞으로 벌어질 극심한 수준의 보급난은 겪지 않았다.
대륙타통작전이 실시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지역에서 추가적인 보급을 실시하지 않는다.'라는 조건을 걸었기 때문이며, 이 때문에 식량과 같은 물자들은 현지에서 조달해야만 했다. 물론 이 '현지 조달'은 약탈을 좀 더 점잖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상계 작전의 주요 실행부대인 제11군은 작전 실시 직전 "애민에 힘써 죽이지 말고, 방화하지 말고, 범하지 말라."라고 훈시하고 본토의 식량 공출 요령에 따라 촌락 책임자에게 소요량과 공출 시기, 장소를 통보하고 나중에 보상하겠다는 내용의 징발 증서를 남기라고 하였으나 이는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상계 작전에 참가한 제27사단의 중대장이었던 후지와라 아키라의 증언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규정은 거의 지켜지지 않았고, 대부분의 간부들은 규정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 나는 우연히 연대본부에서 확인할 수 있었지만, 이는 예외적인 상황이었다. (중략)
말하자면 징발을 명목삼은 약탈이었다."
이러한 현지 조달에도 불구하고 보급 문제는 여전히 심각했고, 6월 26일 3개의 철도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지인 헝양 근교에 도달한 제11군은 그날 즉시 헝양 공격에 나섰으나 중국군의 최정예부대인 제10군 17,000명의 처절한 방어와 보급 문제가 겹쳐 헝양은 한달 반이 지난 8월 8일에나 함락되었다. 그것도 110,000명의 전력을 동원하여 세 차례나 공격을 감행하여 이루어진 일이었다. 일본군의 손실은 중국군 전체 병력보다 많은 19,000명에 이르렀으며(중국 측의 주장은 최소 48,000명인데 일본측 주장과의 중간값이 더 실제에 가깝지 않을까 추측함), 헝양 인근 차링현을 공략한 일본군 중대 중 하나는 출발 당시 220명이었던 부대원들이 입원, 사망 등의 이유로 35명까지 감소하였다.
특히 질병에 의한 손실이 많았는데, 야전병원에서의 사망자 수는 이질, 영양실조, 말라리아, 각기병 순이었다고 하며, 그 중 이질은 헝양 공격을 진두지휘한 제11군 사령관 마저 이질에 걸릴 정도로 문제가 심각했다.
헝양 공방전 이후 대륙타통작전은 약 3개월간 지연되었고, 지나파견군은 대본영에게 36만 명의 병력과 6만 필의 군마 중 2할의 병력과 5할의 군마를 손실하였다고 보고했다. 이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 충원이 이루어졌는데, 당시 참모본부 작전과원이었던 니시우라 스스무 씨의 증언에 따르면 이 시기에 보충병 10만 명과 군마 4만필의 보충이 이루어졌다고 하며, 지나파견군 편성 참모 야마다 요시츠구 중좌에 따르면 4월 초부터 총 17만 명의 병력이 충원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인원들과 마필들을 위한 식량의 추가적인 수송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들은 스스로 식량 조달에 나서야 했다. 거기에다 장비와 훈련 상태는 극히 빈약한 수준이었다. 야마다 중좌의 증언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이들 인원은 전혀 장비를 갖추지 않았고, 소총도 수 명에서 십수 명이 소총 한 정을 돌려쓰고 있었다. 개인 장구류도 없었고, 다만 죽통을 수통 대신에 찼을 뿐인, 극히 빈약한 수준이었다. (중략) 일선에 이들이 어떤 형태로 보내졌는가,에 대한 간단한 조사도 할 수 없었다. 어쨌든 작전 말기 까지 이들의 행렬이 이어졌고, 이들이 후방 병참선 경비의 일익을 맡은 것이 이 작전의 실상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부족한 체력과 훈련 상태로 인해 일선 부대들은 이 보충병들을 기피했다. NHK 다큐멘터리의 증언에 따르자면 다음과 같다.
"이 작전에서 부대의 기동력과 전투력에 족쇄를 채운 것은 보충병들이었다. 이들은 환자와 낙오자들을 다수 발생시켰으며, 특히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일선 병력을 차출시켜 부대에 누를 끼쳤다. (중략) 체력이 극히 부족하여 보급 곤란과 피로 누적, 야간 행군 거리의 증가에 따라 몽유병자 처럼 거닐거나 자살을 기도하는 자가 늘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보충병들이었다."
약 50만 명이라는 대병력을 동원했다고는 하나, 그 1/3인 17만 명을 이러한 보충병들이 차지했다는 것은 대륙타통작전의 실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셈이다.
1개 군에 대해 1주일간 90소티의 공습이 가해졌다면 사실상 공습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저건 사령부 쪽 말하는 거니까 다른 곳은 많지 않았을까
제대로 번역한 게 맞다면 저건 제12군 전체에 대한 공습 소티임.
중미 연합공군 주력과 미 공군은 중국 동남부와 헝양, 구이린, 류저우 일대에 전개해서 양쯔강을 오가는 제11군 병력과 물자 공습 위주였고 제12군의 경한 작전 저지에 나설 수 있는 것은 중국 공군 120기(전사총서 기준)정도에 불과했으요.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재배치가 이루어졌겠지만 경한 작전 시기 중미연합공군의 지상 지원은 부족할 수 밖에 없었을듯 합니다.
그랬겠지요. 120대면 가동율에다가 일본항공기 요격 생각하면 일주일간 지상공격에 90소티 뛴 것이 크게 이상한 건 아닌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