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엔 145,046명의 지원자가 있었지만 육군이 실제로 받아들인 인원은 3,208명에 불과했다.
모병관들은 79,672명의 강요당한 지원자 대신, 일본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내고 성장배경에서 친일적 사고방식을 보여준 50,184명의 ‘진짜 자원자‘ 중에서 실제 입대자를 선택했을 것이다.
이 자원자들은 진정으로 일본에 충성하는 ‘애국자’거나 경제적 기회주의자였다. 일부 자원자는 일본의 선전과 범아시아주의, 대동아공영권을 진심으로 믿었고
일본의 길이야말로 모든 아시아인들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이들은 부모나 교육자에게서 배운 제국의 사상을 받아들였고 복무야말로 모든 일본인 남자가 거쳐야 하는 의식이라고 여겼다.
또 다른 한국인 남성들은 남자다움의 추구, 혹은 생계유지를 위해 육군에 입대했다.
중일전쟁 초기부터 진주만 직후까지, 일본군은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며 민족주의적 열광을 고무시켰다.
어떤 한국인 젊은이들은 그 열광의 일부가 되고 싶어 했고 그들에게 지원서 제출은 목표로 향할 수 있는 가장 신속한 길이었다. 한 익명의 한국인은 이렇게 설명했다.
“우린 또한 일본인이기도 하기에, 병사로써 천황의 방패가 되는 영광을 누리고 싶어 했다.”
한국인 법대 졸업생 마츠바라 타카노부(Matsubara Takanobu)는 육군에 입대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에 겨워 뛰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과거 한번 체력문제로 탈락했으나 정기적인 운동을 통해 최소한도를 맞추는데 성공했다. 또 다른 일본군 출신 원조장씨는 당시 정부의 선전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부모와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천황과 그의 조국을 위해 싸우고 싶었다고 전후 인터뷰를 통해 증언했다.
최소 한명의 자원자는 군이 자신의 지원서를 받아들이지 않자 자살했다. 이러한 일화들은 당시 일본이 시행했던 교화 작업의 효율성과, 일부 자원자들이 일본을 대하는 신실한 태도를 생생하게 드러내주는 사례다. 이들은 또한 모든 지원이 강요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 또한 보여준다.
1941년에는 그 누구도 한국의 독립을 예상하지 못했고, 따라서 일부 한국인은 일본군 입대를 최고의 직업으로써 선택했다.
한편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지만 “자원자” 중 일부는 또 다른 내면의 목적이 있었다. 그들은 장기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기 위해 입대했다.
즉 역설적이게도 한국인들은 지원제도를 이용해 개인적, 민족적으로 일본에게 저항했다. 한 자원자는 이렇게 증언했다.
“면접에서...한 일본 장교가 왜 일본 육군에 입대하려 하는지 그 동기에 대해 물었다. 난 어떻게 하면 나라를 위해 죽을 수 있는지 배우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말한 나라란 조선인의 나라를 의미했다. 그 장교야 일본이라고 해석했을 테지만.”
1943년, 한 만주국 신문기사에서 또 다른 확인되지 않은 한국인이 자신의 동기를 밝혔다.
“난 조선 독립을 위해 일본 육군 지원병에 자원하고자 한다. 많은 조선인들은 무기를 어떻게 다루는지도 알지 못한다.
따라서 난 일본군에서 그 방법을 배워와 조국 독립을 위해 사용하려 한다.”
자신의 자원을 들여 적군을 훈련시키는 꼴. 이것야말로 일본 정부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태였고, 분명 실존하는 사례이기도 했다.
고등경찰은 한국인 자원자 중 많은 이들이 개인적인 여러 금전적, 사회적 이유로 인해 군대에 자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많은 이들이 독립에 대한 희망을 버렸고, 설사 자신들의 행위가 식민지 정부에 부역하는 것을 의미한다 해도 좀 더 나은 삶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식민지 계급체제의 밑바닥 신세였던 한국인들에게 군 복무는 경제적, 사회적 출세를 향한 가장 빠르고 확실한 지름길처럼 보였다.
여기에 정부 또한 일용직 노동자나 농부들을 대상으로 군 복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기회를 홍보했다.
자원자 다수는 궁핍과 기아에서 탈출하기 위해 입대를 선택했다. 1941년 지원자 중 거의 44%에 달하는 이들은 전 재산이 1,000엔을 넘지 못했다.
자원자들에게 있어 가난은 매우 강력한 결정 동기였다. 일단 육군에 들어가면 안정된 수입과 규칙적인 식사가 보장됐다.
전신장치 다루는 법, 트럭 운전법과 같은 소위 잘 팔리는 기술들을 얻을 수 있었고 일본어를 더 갈고닦을 기회기도 했다.
이러한 기술들과 군 복무 기록은 당시 사회에서 상당한 이점이었다. 군복무자는 평균적인 한국인 남성들보다 훨씬 더 많은 기회를 누릴 수 있었다.
일부 자원자들은 가뭄과 기근에 시달리는 농장에 남아있느니, 차라리 군대에서 복무하는 길을 선택했다.
가족을 위해 입대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었다. 총독부는 아들이 복무 중일 경우, 해당 가정에 여러 가지 특권을 부여했다.
식민지 관료들은 병사의 가족에게 사회적 존중과 물질적 이득을 제공했고, 이것으로 해당 가정의 사회적 지위를 올릴 수 있었다.
병사의 아버지는 담배나 도장 같은 소정의 선물을 받았고, 가정은 통상적인 관료적 차별에서 약간 자유로웠다.
이러한 장려책은 물론 사소해 보이지만, 기아 직전에 놓여 있는 몇몇 시골 가정으로썬 이정도마저도 충분한 대가였다. 그들은 아들을 군대로 보냈다.
주민협회와 시청은 병사들을 위한 행사를 개최했고, 몇몇 경우에는 육군에 입대하는 자원자들을 축하하기도 했다.
육군은 심지어 입대자 가정에 현수막을 증정해 집밖으로 걸어놓도록 하기도 했다. 이러한 현수막은 존경의 표시였고, 이들 가정에게 있어 영광과 자부심, 사회적 평등을 상징했다.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no=1807524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no=1808799
야채가 작성했던 일본의 전쟁과 한국인 지원병 : 그들의 지원동기를 다시한번 읽어 보길바란다.
지원 동기라는게 다들 같을 수는 없겠지
조선인 군속도 마찬가지 문제인데 당시 20년이 넘은 식민지배로 동화된 인원 + 경제적, 출세적 지향적 지원을 제외하고 무조건 그들을 강요에 의한 희생자로만 보는 건 문제라 봄. 특히나 해당 민간인 군속 선발은 후에 이루어진 강제적인 학도지원병이나 징병제가 도입된 시기보다 이르기 때문에 주변 강요와 압박으로 이루어진 면으로만 볼 수 가 없다
무조건 그들을 강요에 의한 희생자로만 보는 건 문제라면, 무조건 그들을 자발에 의한 가해자로만 보는 건 문제가 안되나? 여러 군상이 모여있다는 말은 양면적이야.
표면적으로는 모집이라고 해서 사람을 모았어도 그 실제 노동 형태가 어떤지를 따져서 강제동원인지 아닌지 판단해야 하는거고
그 실제 노동형태가 포로수용소 근무이기때문에 문제인거지. 해당 지원자들은 그 사실을 알고 지원을 당했거나, 스스로 했다는걸 잊지 말아야지.
징병제보다 이른 시기라서 강제동원 아니라는데, 1939년부터 이미 모집 형태로 강제동원 했다고 봅니다
1938년에서 41년의 육군 특별 지원병령은 어느정도 가려 뽑은거 맞아.
모병관들은 79,672명의 강요당한 지원자 대신, 일본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내고 성장배경에서 친일적 사고방식을 보여준 50,184명의 ‘진짜 자원자‘ 중에서 실제 입대자를 선택했을 것이다. 친일적 사고방식? 자기 일본말로 쓸줄 아냐 그정도일건데. 장교 뽑는것도 아니고 일개 병사 뽑는데 면접을 빡세세 했으리라 생각함? 진심으로?
한반도내 조선인들 군 징병제를 왜 1944년에 와서야 시행을 했을까? 연합군의 공격에 의해 자신들이 칭하던 대동아공영권 붕괴자체가 실질적으로 다가오는 시기에 와서야 징병제를 할 정도로 일본군부는 조선인들이 군내에서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걸 탐탁치 않게 여겼음. 하물며 자신들이 유리하던 시기에는 어느정도 걸러서 뽑은거 맞아. 링크 글에서도 그건 잘 서술되어 있고. 50184명 중에서도 일본육군에 실제 복무하게 된건 3,208명에 불과하다는건 빼먹었나?
1938년 2월 22일 공포되고 4월에 시행된 육군 특별 지원병령 지원병 자격요건은 다음과 같음 첫째, 만 17세 이상인 남자, 둘째,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하지 않은 사상이 견고하고 신체 및 정신에 이상이 없는 자, 셋째, 6년제 소학교를 졸업하거나 그와 동등한 학력자, 넷째, 입소 및 복역 중 일가의 생계와 가사에 지장이 없는 자로 정함. 전형 과정에서 각 도에서의 학과 시험과 일본어 구두시험이 진행, 민족 운동에 가담한 자의 입대를 배제하기 위한 군과 경찰의 엄격한 심사.
이미 일본말로 성명만 쓸줄 아는 인원은 지원대상에서 제외했다는 면을 알아두기 바란다. 너가 말하는 인원들은 남양군도에 징용자로 가게된 사람들 케이스임
외노자 고용할때도 최소한 의사소통은 가능한지 보는데 이름 일본어로 쓸줄아는 수준으류 41년에 징병했겠냐
솔직히 말해서 독립이 안된 대동아공영권 타임라인을 상상해보면 개좇같으면서도 묘하게 재밌기도 함.
지들 보급수준에서 수십만명씩 뽑을수없으니깐 대충 야 일본에 충성맹세같은거 해라 하고 추려서 뽑은거지
니 입장에서 일본에서 뽑은 일본애들이 먼저지 조선애들이 먼저겠냐 애초에 맹세라는게 그냥 일본군인으로서 사명을 다하겠습니다이정도 수준이라고
지금 일뽕이 저 시대가면 일본군 입대하는거지
44년 말~45년 쯤에야 강제징용이지 그 전엔 자원제 아니였음?
당연히 저 시대에도 일제에 협력해서 입신양명 하고 싶었던 사람이 있는거 아니겠음? 인정할건 하면 되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