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부 산하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우리역사넷에서 원균 찾아보니 이러고 있네 ㅋㅋㅋㅋ

링크 붙이려고 하니 보안연결 안된 주소라고 자꾸 에러나서 못하겠으니 '우리역사넷'에서 원균 검색해봐.


대충 중간중간에 짜증나는 부분만 발췌해보면


임진왜란 때의 무장. 일본군이 쳐들어왔을 당시 경상우수사로서 수군을 이끌었으며,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와 함께 일본 수군을 격파하였다. 이후 충청병사, 전라좌수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정유재란 때 이순신을 대신하여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다가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하여 전사하였다.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이 대거 조선으로 쳐들어왔다. 압도적인 일본군의 군세 앞에 순식간에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 경상좌병사 이각(李珏)은 동래성 구원을 포기하고 본영으로 돌아왔다가 도주하였으며, 경상좌수사 박홍(朴泓)도 휘하 군세를 결집하지 못하고 본영을 버리고 후퇴하였다.

경상우수사 원균 역시 적절한 초기 대응을 보이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원균은 전쟁이 발발하자 급한 대로 전선을 이끌고 출진하였으나, 자신의 휘하 수군을 결집하는 데 실패하였다. 결국 그는 본영을 우후(虞侯) 우응진(禹應辰)에게 맡겨 관고(官庫)를 불태우게 하고, 자신은 옥포만호(玉浦萬戶) 이운룡(李雲龍), 영등포만호(永登浦萬戶) 우치적(禹致績), 소비포권관(所非浦權管) 이영남(李英男) 등의 휘하 장수들과 함께 4척의 배를 거느리고 곤양(昆陽) 해구(海口)로 물러났다. 이로 인해 경상우수영 관할 지역의 방어체계는 와해되었다. 비록 이순신보다 늦게 부임하여 경상우수영을 정비할 시간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휘하 세력을 결집하지 못한 것은 명백히 그의 책임이 아닐 수 없다.

원균은 남해(南海)로 이동하여 일본군을 피해 상륙하려 하였으나, 이운룡의 진언을 받아들여 이영남을 보내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원군을 청하였다. 이후 원균은 한산도(閑山島)로 이동하였다가, 5월 6일 판옥선(板屋船) 1척을 타고 이순신과 합세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남해현령(南海縣令) 기효근(奇孝謹),미조항첨사(彌助項僉使) 김승룡(金勝龍),평산포권관(平山浦權管) 김축(金軸), 사량만호(蛇梁萬戶) 이여념(李汝恬),소비포권관 이영남, 옥포만호 이운룡, 영등포만호 우치적, 지세포만호(知世浦萬戶) 한백록(韓百祿) 등 그의 지휘 하에 있는 장수들도 각각 배를 타고 이순신 함대와 합류하였는데, 그 전력은 총 판옥선(板屋船) 3척과 협선(挾船) 2척이었다. 전라좌수영 함대와 합친 연합함대의 전 병력이 판옥선 28척, 협선 17척이었음을 감안하면, 원균의 함대는 매우 열세였음을 알 수 있다.

5월 6일 이순신 함대와 합류한 이후, 원균은 소수의 경상우수영 함대를 이끌고 옥포해전, 합포해전, 적진포해전에 참여하여 이순신과 함께 일본 수군을 격파하였다. 이때 경상우수영에 속한 여러 장수들 역시 옥포해전에서 5척의 적선(敵船)을 격파하는 등 활약하였다. 이후 5월 9일 이순신 함대가 일시 전라좌수영으로 귀항함으로써 전라·경상 연합함대의 1차 출동은 끝이 났다.

원균은 이후 일본 배 10여 척이 사천(泗川)·곤양 등지로 육박하자 이를 피하기 위해 함대를 노량(露梁)으로 이동시키고, 이순신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순신은 원균의 통지를 받고 23척의 전선을 끌고 출정하여 5월 29일에 노량에서 3척의 전선으로 이루어진 원균의 함대와 합세, 2차 출전에 나섰다. 2차 출전에서 연합함대는 동진하면서 5월 29일 사천해전, 6월 1일 당포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6월 4일 전선 25척으로 이루어진 이억기의 전라우수영 함대가 합류함으로써 51척의 전선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연합함대는 6월 5일 당항포해전, 6월 7일 율포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기세를 이어 가덕도까지 진출했다가 귀환하여 6월 10일 해산, 귀항하였다.

이 과정에서 경상우수영 함대는 기효근, 이영남 등이 돌격전에서 활약하는 등 개별적으로 분투하였으나, 원균 자신은 “군사없는 장수[無兵將]”로서 작전을 지휘하기 어려워 전투에 직접 공헌하지는 못하였고, 전투가 끝난 뒤 화살이나 탄환에 맞아 죽은 일본군의 수급을 수습하는 보조적인 역할을 주로 담당하였다. 즉 아직까지 경상우수영 소속 장수들이 개별 전함을 타고 전투를 벌이고 있었으며, 함대의 지휘통솔이 복구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연합함대가 재정비하는 동안, 일본 수군은 다시금 가덕도·거제도 등지에 출몰하였다. 이에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함대와 이억기의 전라우수영 함대는 7월 6일에 출전, 노량에서 원균의 함대와 합류하였다. 원균은 부서진 전선을 수리하여 7척의 전선을 마련한 상태였다. 연합함대의 전력은 전선 56척에 거북선 3척, 소형선 50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3차 출전에서 연합함대는 7월 8일 유명한 한산도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7월 10일 안골포해전에서도 승리하였다. 이후 연합함대는 동래 근처까지 나아가 해상에서 무력시위를 벌이고 7월 13일에 해산하였다. 이때 규모가 커진 원균의 함대는 여전히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안골포해전에서 후미를 맡아 참전하는 등 함대 단위로 전장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이때에 이르러 경상우수영 함대가 원균의 지휘통솔 하에 하나의 함대로서 다시금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연합함대는 전선과 무기를 준비하는 등 전력을 확충하는 한편, 8월에 4차 출전을 감행하였다. 원균은 8월 25일 자신의 선단을 이끌고 전라도 수군과 합류하였다. 연합함대는 동쪽으로 진격하여, 9월 1일 부산포해전에서 일본 군선 470여 척에 총공격을 감행해 100여 척을 격파하는 등 대승을 거둔 뒤 9월 2일 해산하여 각자의 본영으로 철수하였다. 이때 경상우수영 소속 장병들도 일본 수군을 격파하는 데 적지 않은 공을 세웠다.

이렇게 일본 수군 격파에 공헌한 결과, 이순신은 정2품 상계(上階)인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진하였고, 원균과 이억기 역시 종2품 하계(下階)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다. 원균은 임진왜란 초기에 휘하 병력을 수습하지 못하여 소수의 병력으로 이순신에게 원병을 요청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지만, 이순신·이억기와 함께 일본 수군과 싸우면서 점차 경상우수영 수군을 재건하고, 나아가 일본군 격파에 공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초기부터 원균은 이순신과 갈등을 빚고 있었고, 이순신이 1593년 10월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어 원균의 상관이 된 이후에도 갈등은 봉합되지 않았다. 원균과 이순신의 갈등에는 원균이 주로 원인을 제공하였다. 공식적으로 조정에 보고된 사안만 보더라도 원균은 옥포해전 당시 이순신 휘하 장수들이 사로잡은 일본 전선을 자신의 부하들이 활을 쏘아 빼앗아가면서 아군 부상자를 발생시킨 사안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였으며, 한산도해전 당시 한산도에 상륙한 일본군 패잔병 400명을 도망치게 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또한 제2차 당항포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격파한 31척을 모두 자신 휘하의 장수들이 불태운 것처럼 공문을 만들어 보냄으로써 전과를 독차지하려 하기도 했다.

칠천량해전은 조선군의 완전한 패배로 끝났다. 이로 인해 전라우수사와 충청수사 최호(崔湖)를 비롯한 많은 주요 장수들이 전사했으며, 이순신이 파직될 당시만 해도 전선 130여 척, 병력 13,000여 명에 이르던 조선 수군은 철저히 괴멸하였고, 한산도의 통제영(統制營)에 쌓여 있던 물자는 모두 불에 타버렸다. 조선 수군에 남아 있던 것은 탈출에 성공한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이 이끌고 있던 십여 척에 지나지 않았으며, 살아남은 장병들도 흩어져 버렸다. 바닷길을 막고 있던 조선 수군이 말 그대로 사라지면서, 일본군은 수륙 양면으로 서진하였으며, 전라도가 직접적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가 벌어진 것은 근본적으로는 무리한 전략을 고수한 조정의 잘못도 있으나, 직접적으로는 원균이 그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다. 원균은 무리한 수군 운용을 지시하였고, 가장 기본적인 경계를 소홀히 하였으며, 장병들을 제대로 통솔하지 못해 많은 병력이 싸워보지도 않고 도주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가 진퇴양난의 지경에 빠져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잘못된 대처를 연발했고, 그것이 결국 자신의 죽음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칠천량해전의 패배를 접한 후, 선조는 패배를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하늘의 뜻으로 돌렸으며, 패배의 책임을 원균에게만 돌릴 수 없음을 강변하였다. 전쟁이 종결된 이후 논공행상을 할 때도 선조는 원균의 공을 이순신, 권율과 같은 반열에 올렸으며, 선무공신(宣武功臣)을 책봉하는 과정에서 2등으로 올라간 원균을 1등으로 올리는 등의 배려를 하였다. 그 결과 1603년(선조 36) 원균은 이순신, 권율과 함께 선무공신 1등에 최종적으로 책록되었고, 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원릉군(崇錄大夫議政府左讚成兼判義禁府事原陵君)의 관작이 추증되었다.

조선 후기 내내 원균은 이순신과 비교되어 장수로서 낮은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평가에는 분명 지나친 면이 있으며, 원균이 주위 상황의 제약을 받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원균은 주어진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해 최악의 사태를 초래했으며, 그 점에 본인의 책임이 적지 않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1) (임난 발발 직후) 원균은 전쟁이 발발하자 급한 대로 전선을 이끌고 출진하였으나, 자신의 휘하 수군을 결집하는 데 실패하였다. 

<<<<<< 원균이 70척에 달하는 판옥선을 모으지도 않고 자침시킨걸 '휘하수군을 결집하는데 실패하였다' 정도로 퉁쳤으며, 원균이 튀는 내용 전에 전혀 상관없는 이각과 박홍을 적어서 물타기를 함


2) 원균은 소수의 경상우수영 함대를 이끌고 옥포해전, 합포해전, 적진포해전에 참여하여 이순신과 함께 일본 수군을 격파하였다. 

<<<< 초기 연합함대 판옥선 28척, 협선 17척 중 경상우수영 소속은 판옥선 3척과 협선 2척이었고, 이걸 가지고 뛰어나게 뭘 한것도 아닌데 '함께 격파하였다' 라는게 말이 되냐?


3) 원균 자신은 “군사없는 장수[無兵將]”로서 작전을 지휘하기 어려워 전투에 직접 공헌하지는 못하였고, 전투가 끝난 뒤 화살이나 탄환에 맞아 죽은 일본군의 수급을 수습하는 보조적인 역할을 주로 담당하였다

<<<<<<<<< 자기 휘하의 배가 있다면서? 이순신과 관직도 동급인데 뒷처리나 하는걸 담당했다고? 전투 후 모가지 따느라 혈안이 된걸 이렇게 포장하네 


4) 부산포해전에서 일본 군선 470여 척에 총공격을 감행해 100여 척을 격파하는 등 대승을 거둔 뒤 9월 2일 해산하여 각자의 본영으로 철수하였다. 이때 경상우수영 소속 장병들도 일본 수군을 격파하는 데 '적지 않은 공을 세웠다.'

<<<<<<< 뭘 했는지는 말 못하고 그냥 공 세웠다라고 하네 ㅋㅋㅋㅋ


5) 원균은 임진왜란 초기에 '휘하 병력을 수습하지 못하여' 소수의 병력으로 이순신에게 원병을 요청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지만, 이순신·이억기와 함께 일본 수군과 싸우면서' 점차 경상우수영 수군을 재건하고, 나아가 일본군 격파에 공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 이순신 지휘하에 라인 지키면 공이야 세우는거지. 노젓는 인부도 활쏘는 사수도 다 공이 있는건데. 그런데 경상우수사에 걸맞는 공을 세우느냐가 중요한거지.


6) 공식적으로 조정에 보고된 사안만 보더라도 원균은 옥포해전 당시 이순신 휘하 장수들이 사로잡은 일본 전선을 자신의 부하들이 활을 쏘아 빼앗아가면서 아군 부상자를 발생시킨 사안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였으며, 

<<<<<<< 경상우수영 몇척 안되는 배를 '단속하지 못했다' 라면 그게 장수냐? 단속 못한건지 조장한건지 ㅋㅋㅋ


7) (칠천량패전) 이러한 사태가 벌어진 것은 '근본적으로는 무리한 전략을 고수한 조정의 잘못도 있으나,' 직접적으로는 원균이 그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다.

<<<< 원균이 자기를 그 자리 앉혀주면 부산을 공격하거나 차단하겠다고 장계를 보내서 이순신 쫒아내고 원군 앉힌거니까 원균은 거가 가야되고, 조정은 원균보고 가라고 해야 되는건데?  그걸 조정 핑계를 대네.


8) 칠천량해전의 패배를 접한 후, 선조는 패배를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하늘의 뜻으로 돌렸으며, 패배의 책임을 원균에게만 돌릴 수 없음을 강변하였다. 전쟁이 종결된 이후 논공행상을 할 때도 선조는 원균의 공을 이순신, 권율과 같은 반열에 올렸으며, 선무공신(宣武功臣)을 책봉하는 과정에서 2등으로 올라간 원균을 1등으로 올리는 등의 배려를 하였다. 

<<< 선조 팔아가며 좆같은 물타기


9) 조선 후기 내내 원균은 이순신과 비교되어 장수로서 낮은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평가에는 분명 지나친 면이 있으며, 원균이 주위 상황의 제약을 받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 마무리까지 시발. 초반 판옥선 70척 말아먹은것부터 시작해서 중간에 팀킬하고 모가지나 수집한거, 화려한 마무리까지 더하면 한반도 역사상 손꼽는 병신인데 이걸 옹호하네.


이거 누가 적은건지는 몰라도 한번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