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리며 걷다가 끝난 제2국민병 남하 명령



문주흥




  서울을 다시 내주고 1.4후퇴라는 무서운 남하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긴박한 상황이 되어 만 17세 이상의 모든 남성들을 남하시켜 경남의 모 집결지로 모이라는 명령이 내려졌는데, 우리 대덕군에서는 어느날 대전의 모 학교로 모이라고 하기에 나는 우리 동네 사람 약 30여명과 같이 무조건 대전의 집결지로 이동했다.


동네 사람 중에는 약 50세가 넘는 연령층도 있었으나 이번에는 인민군에게 부역자가 없도록 거의 모든 청장년들을 남하시키기로 결정한 모양이다. 대전의 어느 학교에 모인 사람은 7~8천명으로 발 디딜 틈도없이 그 넓은 운동장에 가득 모여 있는데 각 동네별로 일렬로 주-욱 한 줄로 세우더니 무조건 앞에서부터 당시 17세 이상 발급해 줬던 군민증을 걷더니 어디로인지 가져가고 그 다음에는 누군가가 단상으로올라가더니 마이크를 잡고 하는 소리가“각 동네단위로 인솔자의 책임 아래 경남의 모 집결지(방위사령부)로 집결할 것”을 명령하였다.



각 부락별로 목표지점인 경상남도의 집결지를 향해 걸어서 남하하느라고 그 모진 고생을 하면서 발길을 옮기지만 큰 길로 들어서니 이미 길을 꽉 메워 모든 사람이 남쪽을 향하여 내려가는데 거기에는 북한에서부터 내려오는 피난민을 비롯하여 강원도 서울 경기도 지방에서 내려오는 모든 피난민이 이 길로 내려가고 거기에다 강원도와 서울에서부터 제2국민병도 이 길로 뒤죽박죽 사람들로 2차선을 가득 메워내려갔다. 철길 옆을 지나다가 열차를 바라보면 완행열차나 급행열차 화물열차까지 기차 안은 말할 것도 없고, 출입구 손잡이에 매달려 가는 사람, 열차 지붕 위까지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차서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그래도 저들은 재수가 억수로 좋은 사람들로 보였다.


첫날은 그런대로 우리 동네 사람들은 별로 많이 흩어지지 않고 옥천을 지나서 얼마나 더 갔는지 어느 시골 근처를 지나니 해가 저물어 동네에 들러 인솔자가“각자 방을 얻어서 자고 내일 아침에 이곳에서만나자”고 약속한 후 나는 가장 가깝게 지내던 친구와 둘이서 어느 좀 큰 집에 들러서 하룻밤 묵어갈 것을 부탁하니 주인 노인은 들어오라고 하였다.


사랑방을 안내하여 들어가니까 벌써 7~8명의 사람들이 있어 어색한 눈 인사를 나눈 채 조금 있으니까 생각지도 않은 밥상이 들어오는데 부잣집이라서인지 제법 반찬과 국까지 차려줘서 아주 맛있게 게눈 감추듯이 먹어치웠다.


잠깐 사이에 식사를 마치고 밥상을 물리자 또 다시 그 방으로 하나둘씩 찾아드는데 밤이 늦은데도 자꾸만 들어오는데, 그 집 사랑방이라야 한옥 한 칸 약 2평 남짓 되는 방에 약 30여명이 들어오니 몸을 움직일 수도 없고 꼼짝을 할 수가 없는데 그래도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나중에는 사람들이 문을 열어보고는 발도 디딜 틈이 없음을 알아차리고 주인에게 가마니나 혹은 짚을 빌려 마룻바닥에서 덜덜 떨면서 깔고 덮고 하룻밤을 신세지는데 아마도 주인이 마음이 좋아서보다는 지나가다 무조건 들어와서 하룻저녁 묵자니 거절할 수 있는 처지도 못 되는 것이 이름만 주인이지, 일단 들어오면 거의 되돌아가는 사람은 없고 또 나간다 해도 그곳보다 나은 곳이 있다고 장담할 수 없으니 가마니라도 얻어서 덮고 하룻밤을 신세지는 것이다.


그러니 당시에는 비록 남하하는 사람들의 고생뿐이 아니고 한 길 근처의 동네마다 아마도 큰 고생을 했을 것이다. 그래도 첫날은 재수가 좋아 그런대로 편안히 하룻밤을 지냈지만 그 다음 날부터는 첫날처럼 밥까지 얻어먹지는 못하고 둘째날은 출발하여 얼마나 갔는지 가다보니까 영동을 지나게 되고 또 얼마간을 걸어가니 추풍령 고개가 기다린다.


6일째가 지나고 낙동강을 건너게 됐는데 저 멀리 낙동강 다리로 건너가는 사람보다 얼음 위로 건너는 것이 지름길인 듯싶어 우리들도 얼음 위로 강을 건넜다. 왜관을 지나고 대구에 거의 다 다다랐을 무렵 어쩐지 돌아오는 사람들이 차츰 많아져서 우리는 어리둥절하여 올라오는 사유를 물어보니 다행히 전세가 호전되고 그리고 집결지가 초만원으로 더 이상 받아주질 않고 귀가 조치한다기에 우리는 중간에서 되돌아오게 되었다.


내려갈 때는 거의 모두가 남하하는 행렬이었는데 3분의 1정도만이 올라오는 것을 보니 아마도 북한 땅에서 내려오는 피난민들과 현재 수복이 안 된 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냥 내려가는 것 같았다. 돌아올 때는 하루에 평균 30km 가까이 걸었던 모양인데 정말로 간신히 4일 남짓 걸려서 저녁 때 대전 외곽까지 왔고 밤 늦게까지 죽기살기로 걸어서 대전 집에 겨우 도착했다.






죽을 고생만 한 국민방위군


전상준


52.7.27 입대, 8사단 중포중대 수송부





  우리 충주 국민방위대는 1950년 12월 20일에 남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그때 나는 충주국민방위군 8단 4지대 1편대 1소대원으로 있었다. 우리 지역의 인원은 30명이었으며 주기적으로 5일씩 집에서 출퇴근하면서 방위군 소위의 통제로 훈련을 받고 있었는데 이동 명령이 내렸다. 


최영호 4지대장 인솔하에 피란민을 포함하여 500여명이 피복과 양식(쌀 등)을 짊어지고 남쪽으로 이동해 가면서 해가 저물면 가까운 마을에 들어가서 흩어져 잠을 자고 식사는 지고 온 양식을 조금씩 주기도 하고 얻어먹고 갔는데 마을 청년방위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가져간 식량은 대구에 갔을 때 이미 다 떨어지고 그때부터는 계속 얻어먹어가며 동래에 도착했다. 부산 동래 제35교육대에는 충주에서 온 피란민을 포함하여 500여명인데 방위군 생활은 참으로 고달팠다. 보급이래야 1일 주먹밥 1개 소금 1수저 정도이고 피복 신발은 없었다.



그나마 매일 나오는 것도 아니고 하루 건너 1끼 아니면 2,3일 만에 한끼씩 나오니 말이 아니었다. 우리는 경계병이라고 어쩌다가 흰 죽이 나왔다. 수저도 없어서 앞산 아래에 포로수용소에서 세탁하러 나온 포로병들로부터 군용수저를 얻어서 죽을 먹기도 하였다. 얻은 수저도 우리 30명 중 5~6개였으니 사용한 수저를 헌옷에 닦아서 먹기도 하였다.



1951년 2월 중순경에 충주가 수복령이 내려 충주로 원대복귀 한다기에 얼마나 좋았는지!



방위군으로부대에 휩쓸려 갔을 때만 해도 초등학교를 나온 사람이 드물어서 경계병들의 서무계를 내가 보게 되었다. 나머지 대원들은 낫 놓고 기역자를 몰라서 내가 경계병 명단, 생년월일 등을 기재하게 되었다. 



그때는 자기 생년월일마저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남으로 내려갈 때 경찰들에게 증명을 다 빼앗겨 없었기 때문에 나는 1932년생인데 1933년이라고 속이니 연령 미달로 귀향증을 받게되어 우리 한동리에 있는 김윤천과 김낙준 그리고 연령 초과자 미달자 등 15명의 국민병과 약간의 피란민이 고향 으로 복귀하고, 징집 해당자는 영도섬의 육군훈련소로 가게 되어 35교육대는 해산되고 말았다. 35교육 대에서 군용차를 준다기에 반가웠으나 삼량진까지만 태워주고 거기서 귀향증을 나누어 주었다. 



거기서 부터 우리는 끝없이 걸었다. 옷도 석 달을 세탁하지도 못하고 신발이래야 미군화를 신었는데 뒤꿈치 발창이 떨어져서 앞꿈치만 남아 덜렁덜렁 거려서 걸을 수가 없기에 새끼 끈으로 발목을 매고 걷기도 하고 버려진 헌 고무신을 신고 걷기도 했다. 나와 김윤천, 김낙준, 3명은 다른 사람들과 헤어져서 청도, 밀양, 경산을 거쳐 의전리 큰 산을 넘어서 의성이라는 곳까지 왔다. 



어떤 화물차가 하나 오기에 손을 들고 세웠더니 풍기로 간다하여 차 뒤 적재함에 탔다. 안동을 거쳐 풍기에 오니 해가 저물어 어딘가 들어가서 저녁을 얻어먹고 자야 할 처지인데 같이 행동할 수가 없어서 세사람이 상의하여 내일 아침에 여기 담배건조실에서 만나자 하고 헤어졌다. 



나는 50~60호 되는 동네 입구에서 혼자 갈 곳이 막연하였다. 힘을 내어 비탈진 골목길을 올라가니 김00라는 문패가 달린 큰 대문이 있는 집이 있어 들어서며“길 가는 나그네 하룻밤 쉬어가려고 왔습니다”하니 어떤 여자가 나와서 누구시냐며 묻는데 바로 할아버지가 나오는 것이었다.



“제가 살기는 충주에 사는데 부산교육대에서 생활하다 집으로 가는 길에 날이 저물어 들어왔습니다.” 말하니 할아버지가 고생하였다 하면서 얼른 들어오라 하시기에 행랑방에 들어가니 이미 군인 3명이 있었다. 군인이 하는 소리가 대뜸 공비가 아니냐고 하기에 부산 35교육대 귀향증을 내보였다. 마음고생을 많이 하였구나 하며 여기가 최전방 수색대이니 조심하라 하였다. 그 날 밤은 행랑방에서 자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고향은 어디며 성명은 무엇이냐고 하기에 문득 대문 앞의 김씨 성을 본 것이 생각이 들어 김가라고 대답을 하였더니 어디 김씨냐고 묻기에 김해 김씨라고 대답하니 어느 파냐고 물어 나는 대답을 할 수가 없어 모릅니다 하였더니 할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 요즘 젊은 사람이 그만큼만 알아도 된다 하시며 그 날이 제사라 하여 제사 음식을 먹게 되었다. 제사 음식하면 무엇이 없겠는가…. 석 달 배를 곯아허기진 참에 오래간만에 많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같이 온 일행이 마음에 걸려서 편하지 않았다.



아침에 떠난다고 하니 할아버지가 점심 먹으라며 음식을 싸주기에 같이 온 일행 이야기를 하였더니 어제 남은 떡과 과일을 더 싸주기에 얼마나 고맙던지 지금도 할아버지의 고마움이 문득 생각이 나곤 한다. 그곳을 나와 동리 앞에 헌병 검문소가 있어 신분증을 보이며 고향 충주에 간다 하니 고개 넘어 단양 간다는 차를 태워주어서 타고 단양에 오고 보니 집에 다 온 것 같았다. 김윤천과 김낙준과 셋이 걸어 살미 요각골을 오니 김윤천의 누님댁 이었다. 거기서 식사를 하고 집에오니 해가 넘어 밤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모두 다 계셔서 그 날 밤 지나온 이야기를 하다보니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했다. 집에 돌아와서 농사일을 하면서 다시 향토방위대 활동을 하다가 52년 7월 27일 소집영장을 받고 군에 입대하였다.







피골이 상접한 방위군


박을영



  1950년 12월 13일 밤에는 연백 집에서 조부님의 기일이 되어 제사드릴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밖에서 온 동네가 벌컥 뒤집혀 야단법석들이었다. 내용을 알고보니 압록강까지 진격하고 있던 남한 국군들이 또 다시 철수를 하여 후퇴를 한다는 것 이었다.


이때의 공산정치가 싫은 이북 국민들과 남한 국민들 모두가 국군을 따라 남쪽으로 피란을 하느라고 나라가 벌컥 뒤집어져 무법천지가 되고 이 소식을 남보다 늦게 알게 되니 매우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의 부모님도 이 소식을 듣고 온통 자식의 걱정뿐이셨다.


“큰 애야 너도 빨리 피란 가는 사람들을 따라가라”고 성화를 하셨다.


할 수 없이 인사도 제대로 못 드리고 온 가족을 남겨둔 채 단신으로 피란민 행렬을 따라 서울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며칠만 피하고 나면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하며 떠났다. 며칠 후 서울 신촌로터리에 들어서니 경찰과 방위군들이 다가와서 신분 조사를 하더니 도민증을 압수했다. 돌려달라고 하니 군에 입대하라고 해서 젊은 혈기에 곧 바로 서대문 경찰서로 몰려가“우리들은 모두 군대에 가기로 각오가 되어 있으니 군대에 가게 해주시오”라고 요청하니 참 잘들 생각했다면서 빨간 선이 두줄씩 그어진 영장을 한 장씩 나눠주면서 3일 후 아침 비원 마당으로 나오면 된다고 했다.


영장을 받아들고 경찰서를 나와서 시내를 활보하니 그 영장만 소지하고 다니면 거칠 것이 전혀없고 무사통과였다. 3일 후 아침 비원으로 갔더니 사람들이 많이 모여 발 들여놓을 틈 조차 없이 꿈틀대며 일렁거리는 인파에 휩쓸리다가 한나절이 훨씬 지나서야 약 400명 정도  그룹을 지어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방위군 1명이 400명을 인솔하는데 정부에서 조치를 해서 한 백리 가면 잠자고 밥 주고 했지만 밥이라야 아침 저녁으로 주먹밥 1개씩 주니 그 배고픔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마치 거지떼처럼 내려가면서양심불량한 사람들은 행패를 부렸다. 떡 장사 팥죽 장사들이 나타나면 서울에서 온 사람들은 돈이 있어서 그것을 사 먹으려 하는데 옆에서 뺏어먹을 뿐 아니라 아예 그 장사꾼의 물건을 모조리 덮쳐 너도나도 뺏어먹어 버린다. 그래도 양심 있는 사람들은 죽으면 죽었지 남의 것에 손을 대지는 않았다. 배고파 일어나는 일은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9일이 되어 김해에 도착한 후 다시 마산 바닷가 어느 고등학교에서 자나깨나 대나무 막대기 총으로 하나, 둘, 셋, 넷 구령에 맞추어 훈련을 받는데 배고픔의 고통은 지겹도록 이어졌다. 



밥이래야 통조림 깡통 반쪽짜리에 반도 안 되게 담아주고 반찬은 연꽃뿌리 삶은 것 한 쪽, 운좋으면 두 쪽이니 밥을 배식하는 사람이 밤새 괴롭히며 들끓는 이보다 더 미운 괴물로 보였다. 



이러한 생활이 3개월 계속되니 모두 말라빠져 괴물로 보일 정도인데 모두 현역에 입대하여 이 고통을 탈피하고 싶어하는데 나는 운좋게 신체검사에 합격하여 제주훈련소에 입소하게 되었다.





내용출처 -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편찬, 6.25 전쟁 증언록 II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