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방위군 시작과 끝


김지근



50.11 청년 방위대 활동, 국민방위군 이동 훈련해산


51.3 예비 101사단 5대대 54중대 미 3사 65연대 배속


철의 삼각지, 노리고지 전투지원 8240부대 타이거여단 행정계장 


73.10.30 상사 전역





1950년 11월 23일 황해도 연백군 온정면 소재 금성초등학교 교정에서 연백군 청년방위대 700명의 장정들이 제대편성(청년방위군 제4단 제2편대)을 완료하고 집체훈련 중에 있었다.



나는 제대본부 인사 담당부서 지휘부에 편성됐다. 그런데 오후 3시경 유엔군의 정찰기 1대가 장정들이훈련 중인 교정 상공에 나타나 저공 선회비행을하다가 남쪽으로 사라진 뒤였다. 지휘부에서는 그 정찰기의 선회비행이 장정 훈련 상황을 적으로 오판하는 것 같다며 일단 훈련을 중단하고 장정들을 교실 안으로 철수시켰다. 그런데 조금 후에 남쪽으로 사라졌던 정찰기가 다시 날아왔을 때는 학교 교정에서 훈련하던 장정들이 보이지 않으니까 분명한 적으로 오인하게 하는 결과가 되었고 이로 인해 엄청난 화근을 자초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마침 연안읍에서 백석포에 이르는 도로에는 추곡 매상 벼 가마를 실은 수십 대의 소달구지가 늘어져 있는 것 등이 적의 군수물자 수송대열과 흡사했던 것도 무서운 오판을 초래하게 한 일련의 동기가 되기도 했다. 다시 정찰기가 사라진 뒤 유엔군 폭격기 4대가 저공으로 날아와 우선 장정 700명이 들어있는 교사(校舍) 건물을 비롯하여 연안, 청단, 백석포에 이르는 우마차 행렬을 향해 폭격을 시작했다. 삽시간에 평화로웠던 연백 지역은 전쟁의 화염에 휩싸인 것이다. 교사(校舍) 건물이 불길에 휩싸여 와르르무너져 내린 잔해 더미에 깔린 장정들의 비명과 함께 아수라장이 연출되고 있었다.



나는 불타 무너져 내리는 교실에서 탈출하여 교정 옆 마늘밭 위에 쌓아놓은 볏짚 낟가리 사이로 숨어들어갔다. 기총사격과 폭발음은 계속되고 여기저기서 부상자들의 비명이 겹쳐 왔다. 내가 볏짚 낟가리속 에서 밖을 내다보니 볏짚 낟가리 쪽으로 불이 붙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반사적으로 불길을 피해어느 민가 부엌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곳엔 폭격을 피해 달려온 장정들이 여러 명 있었고 뒤따라 부상자들이 줄을 이었다. 그 순간에도 폭격은 계속되고 있었다. 오후 6시가 지났을 때 들판길을 몇 시간 걸어 집에 도착했다. 다음날 소식에 의하면 금성초등학교 수용장정 700명 중 약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튿날 이번 연안 청단 지역의 폭격은 유엔군의 오폭이었다는 발표가 있었다.



6·25 전쟁이 발생했을 때 미처 피란을 못하고 9.28 수복 때까지 3개월 동안 아버지는 어두운 곳간 한편 구석에 멍석을 매달고 황토흙을 발라 이중벽을 만들어 그 좁은 흙벽 속에 나와 동생 둘을 숨겨놓으시고 음식물 공급과 배설물을 받아내시느라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셨던가. 그래서 이번에는 낙오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연안 온천에서 오폭을 맞은 지 사흘 뒤 고향을 떠나온 것이 이렇게 실향 60년의 세월이 흘러갈 줄 누가 꿈엔들 생각했겠는가?



1950년 11월 27일 오후“너희들이나 며칠 나갔다 와라”어머니 아버지 전별 말씀을 뒤로 한 채 불당포에서 배에 몸을 실었다. 사실은 그때까지도 해주 근처에서 전투는 계속되고 있을 뿐 당장 적으로부터 신변 위협이 있는 것도 아닌데 9.28 수복 전 피란 못하고 겪은 고초 때문에 이번에는 미리미리들 서둘러 저마다 앞 다투어‘강화나 인천’행 여객선이든 고깃배든 간에 서로 먼저 떠나려고 아우성이었다. 특히 젊은이들이 더 심했다.



이른바 1.4후퇴의 시작이었다. 불당포를 떠난 배는 사나운 파도를 헤치며 한 시간쯤 남쪽으로 흘러갔을까 강화도 외포리 포구에 도착했다. 강화도에서 1박을 하고 강화도 초지 포구에서 건너편 김포로 건너가려는데 김포 쪽에서 우리를 향해 사격을 해 왔다. 총탄이 비 오듯 날아왔다. 김포 해안에 주둔한 터키군이 우리를 적으로 오인하고 사격을 했다. 그래서 결사적으로 배를 몰아 김포 해안으로 접근했다. 무릎까지 빠지는 갯벌을 뛰어 김포 땅을 밟았을 때 터키군 사격에 여러 명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들었다. 김포에 무사히 도착한 우리는 대오를 정비하여 석양 무렵 도보로 인천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인천에는 수십 대의 인민군 탱크가 파손된 채 국도 양 옆에 여기저기 하얀 눈 속에 묻혀 있었다. 인천 어느 초등학교에서 하룻밤을 잤다. 이튿날 일찍 일어나 모두들 특별한 지시나 주의없이도 이탈자 없이 능동적으로 협동하며 부산을 향해 남으로 남으로 대장정 행군을 시작했다. 1950년 12월 5일 우리 일행은 안양극장에서 1박을 했다. 수원을 거쳐 내려 갈 무렵부터 조금씩 피로와 추위가 겹치며 발걸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남하하는 피란행렬은 우리뿐이 아니다. 보따리를 메고 이고 끌며 수십 수백의 집단 또는 개별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방위군 제도권의 일원으로 가는 곳마다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유기적으로 숙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집을 떠날 때 입은 단벌 그대로라 몸이 가렵기 시작했다.



이가 생긴 것이다. 충주쯤 내려가면서 50명 대열 속에서 피로가 겹친데다가 동상 환자들까지 발생하여 부득이 행군 대열에서 낙오자가 속출했다. 도로 위에 줄을 지어 남으로 남으로 질주해 가는 피란민 차량 행렬을 볼 때마다 거북이 걸음인 우리들의 행렬은 이미 버려진 목숨인데 그래도 살겠다고 버둥거리는 것 같은 비애감을 억제하느라 고심했다. “그래도 나는 방위군 구성원 대열의책임 있는 초급 간부다”라는 쥐꼬리만한 자부심으로 박탈감을 참아 낼 수 있었다.



문경, 상주, 대구를 거쳐 청도 어디에선가는 피로와 추위에 지쳐 먼 길을 돌아가느니 위험한 경부선 열차 터널 속을 걸어 통과한 일도 있었다. 우리가 통과하는 동안 열차가 지나가지 않은 것은 정말 하늘이 도와 주신 것이다. 그런 엄동설한 추위와 굶주림과 질환 등을 견디고 천신만고 끝에 무려 500km를 20여일에 단 1m도 차를 타 본 일 없이 도보로 부산에 도착했을 때는 고향에서 출발할 때 50여명 중 10여명의 낙오자가 발생했다. 부산에는 피란민들로 인산인해였다. 부산에 도착했지만 우리를 반갑게 맞아 줄 사람은 없었다. 다시 피란민 대열에 휩쓸려 김해 읍내 중심가에 있는 국민방위군 제12교육대로 갔다. 여기서 나는 학교 대선배(황인묵 대위)가 중대장인 제1중대 예하 1소대장으로 임명되었는데 대대 내에서 내가 최연소 소대장이었다.



피로를 풀고 쉴 겨를도 없이 그때부터 장정 교육대 숙영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말이 교육대지 교재는 물론 변변한 침구 한 장 없었다. 가마니때기를 덮고 잤다. 콩나물시루 같은 비좁은 내무반에서 일과라야 수십 명이 종일 웅크리고 앉아 고작 먹고 자고 하는 것이 전부였다. 피복은 모두 집에서 입고 온 옷을 입은 채 1개월 가까이 지났으니 속옷은 이투성이었다. 그래서 주간에는 건강한 사람만 골라 기껏 연병장에나가 기초 집체훈련이나 하고 이잡기가 중요한 과제였다.



그런 와중에 식사라야 밥 한 공기에 멀건 된장 콩나물국이 고작이었다. 그나마 제한된 식사 시간 내 밥은 무조건 한 그릇, 그 멀건 된장국이나마 한 그릇 더 얻어먹으려고 새치기 하느라 동료들끼리 자주 다투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취사나 식품 보급 분야 부서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가장 당당해 보였고 선망의 대상이었다. 식사 군기를 잡는다는 구실로 약 1m쯤은 되어 보이는 곤봉을 들고 서있는 취사장 책임자의 위세가 대단했다. 교육대 간부들에게 급식과 관련된 문제제기를 할 통로가 거의 없었다. 말이 교육대지 수용소나 다름없었다. 엄연히 진단한다면 건강한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우리 1소대 대원들이 이질에 걸리더니 불과 1주일 사이에 소대원 반수가 환자로 전염되는 치명타를 입었다. 환자래야 무슨 별도 환자실로 옮기거나 특별한 치료 방법도 없었다. 오로지 현 위치에서 전염병이 치유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1951년 1월 20일 소대장인 나 자신이 이질에 전염되어 자리에 누워버렸다. 그래도 나를 소대장이라고 선임하사가 내 고향 선배이지만 열심히 소대장 대리 근무하랴 소대장 간병까지 하느라 정성을 다해 주었다. 그러나 이질은 정말 무서운 병이었다. 뒤가 잦아지고 순간순간 피 섞인 곱똥 배설물을 실례하곤 했으니 주변 동료 및 소대원들에게 얼굴을 들 수가 없을 정도로 미안했다. 그런 때는 죽고 싶었다. 그래도살아야 한다는 애착을 버릴 수가 없었다.



“젠장 나는 여기서 이렇게 겨우 이질병으로 죽어가는 걸까?"


오로지 먹어야 산다는 의지로 멀건 된장국이나마 갖다 주는 대로 열심히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주변머리 없는 나로서는 구할 수도 없었던 마늘이나 고춧가루를 고향 선배인 선임하사를 비롯하여 소대원들이 이질병에는 가장 좋은 효과가 있다며 그 마늘과 고춧가루를 어떻게 구했는지 열심히 얻어다 먹여준 그 정성 덕분에 이질병을 이겨내고 살아남았다.



/낙동강 굽이치는


가락의 옛터에


부모 형제 고향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온


우리들은


대한의 간성



/강철같은 몸과 마음


키우고 키워서


무찌르자 공산도배


지키리라 자유 조국


나가자 싸움터로



/아-아 우리 국민방위군


장하다 우리 12교육대



아침마다 가벼운 구보를 하며 군가를 부르면 마음이 한결 시원하기도 했다.



내가 당직날 하필이면 이날따라 시체를 처리하는 날이었다. 나는 우선 사역병을 차출했다. 웬걸? 사역병 지원자가 10여명이나 나왔고 저마다 가겠단다. 교육대 밖에 나가면 우선 자유롭고 민가에 가서 실컷 음식을 얻어먹으며 소박하고 동정어린 주민들과의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도 되거니와 장례비(800원)를받아 긴요한 용돈으로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영현처리반원 외에 아주 건강한 장정 5명을 선정하여 준비를 완료하고 출발해서 약 1km쯤 교외 낮은 산등성이 경사면에 시체처리반원들의 책임하에 매장을 마쳤다. 비상금을 털어 술과 떡을 샀다. 비상금을 다 털었는 데도 그들이 밉지 않았던 것은 동병상련의 그 끈끈한 의리가 아니었던들 가능했을까?


1951년 2월 초부터 소위 방위군 교육대가 해산된다느니 무슨“방위군 고위 수뇌부가 비리에 연루된 의혹이 포착되어 국회조사단이 방위군 운영전반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등의 어수선한 풍문이들려오고 있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삼삼오오 몇 명이 모였다 하면 나름대로의 앞날을 점치며 각자의 생각들을 쏟아놓는 것이 일과였다.



1951년 2월 25일 소대장급 이상 간부회의가 있으니 빨리 대대본부에 모이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대대장이 밖으로 나가더니 거기 모인 전 장교들을 막사 밖으로 나오라는 것이다. 그리고 대대장 직접 인솔하에 교육대 뒷산으로 약 20분쯤 올라가다가 어느 양지바른 잔디밭에 모여 앉았다.


대대장이 대외비라며 말문을 열었다. 현재의 전투전황과 앞으로의 전시 시국 전망 그리고 방위군 비위 문제 등도 거론했다.


“교육대가 해산되는 것은 확실하며 병역 적령 장정들은 국군 증강에 따라 현역에 편입 또는 입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교육대에 돌아와 보니 교실을 꽉 메웠던 사람들이 썰렁하리만치 군데군데 비어 있었다. 확인했더니 현역 군인들이 트럭을 몇 대 몰고 와서 아주 건강한 젊은 장정들만 차에 태워갔다는 것이다. 참으로 황당했다. 차에 실려간 그들은 현역군인으로 신병훈련소에 입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잔류병들은 환자이거나 나이가 지긋한 노년층들이었다. 뭔가 듣던 대로 방위군의 운명이 종말에 다가오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나름대로 온갖 고생을 감수하면서 열심히 근무했는데 일부 수뇌부 비리에 방위군 전체가 매도되어 불미스럽게 해체된다는 것은 너무도 억울하고 후회스러웠다.



1951년 3월 6일 드디어 교육대 해체의 날이 왔다. 제대편성을 다시하고 난 다음 부산까지 전 장정들은대대장 인솔 아래 도보행군을 시작하였다. 약 200명의 장정들이 도로 양편에 끝없이 길게 늘어진 채 흐느적흐느적 걸어서 해가 질 무렵에야 부산에 도착했다. 영도다리를 건너 남향한 경사지 해안에 위치한수십 개의 대형 야전천막으로 이루어진 숙영지 안에 들어갔다. 거기는 제주도 훈련소에 입소할 장정들이잠시 거쳐가는 제2 장정 대기소였다. 우리 12교육대 장정들은 우선 입촌 후 신체검사를 받고 제주도로건너가는 것이다. 비단 우리 12교육대뿐만 아니라 방위군 해체에 따른 수많은 장정들이 그 천막촌에 집결해 오고 있었다. 우리 12교육대 간부들은 장정들을 대기소에 인계 완료하고 나니 장차 우리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하고 다음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시간쯤 대기했을 때 대기소 측에서 우리 12교육대 인솔 장교들을 모이라고 해서 지휘소 앞에 모였더니 우리 대대장은 명색이 방위군 소령이었는데 신분증을 회수하고 난 다음 현역 육군 중위는 당당한


자세로 간단한 담화를 했다.



“지금부터 귀관들은 방위군 장교가 아니다. 방위군이 왜 해체되었는지 아는가?



지금 이 순간에도 전방 에서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국토방위를 위하여 피흘리며 싸우고 있는데 귀관들은 후방에서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가? 깊은 반성이 있어야 한다.”



그는 무슨 국사범 피고 앞에서 법관이 논고하듯 도도해 보였다.



“어쩌다 우리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그 날 밤이다. 일석점호가 끝난 후 대대장이 대기소 지휘부에 다녀오더니 천막 앞에 집합하라는 것이다. 우리들은 각자의 휴대품을 챙기고 조금은 긴장한 채 대대장 앞에 모여섰다. 그때 대대장은 좀 상기된 모습으로“이제 마지막으로 지휘한다.”며 우리들을 인솔했다. 우리들은 말없이 대대장 송 소령 뒤를 따라끌려가듯이 천막촌 제2장정 대기소 정문을 통과하여 한참 걸어서 영도다리를 건넜다. 영도다리를 건너 전차승강장에 도착하자 비로소 송 소령이 잠깐 숨을 고르고 나서“이제 12교육대는 완전 해체다.



지금부터 각자 개별적으로 대구에 있는 방위군 사령부에 찾아가 앞으로의 신분문제에 대한 수순을 밟든지, 아니면 각자 자유의사에 맡긴다.”고 했다.



나는 날벼락을 맞은 것 같은 심정이었다. 몇 개월의 고락을 함께 한 동료들이었는데 이렇게 길거리에 내팽개친 채 헤어진다는 것은 너무도 허무했다.나는 참으로 암담했다. 신분증도 비상금은커녕 땡전 한 푼도 없다. 정말 막연했다. 일단 나는 김명운 씨와 대구로 가기로 해서 1951년 3월 7일 아침 대구역에 내렸다. 김명운 씨와 나는 방위군 사령부에 들어갔다. 우선 사령부 내 식당에서 오랜만에 식사다운 아침밥을 먹었다. 방위군 사령부 영내는 해체에 따른 잔무처리 관계로 어수선해 보였다. 행정과에 들어갔다. 신분증까지 회수당했고우리들의 신상문제 진로 등을 이야기했더니 현 상황에서 방위군 사령부에서는 이미 모든 업무 기능이 정지된 상태라 아무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한심한 일이었다. 이럴 수가?



불시에 신분 미상의 낭인 신세가 된 것이다. 어디 누굴 붙잡고 호소할 건가? 별수 없이 방위군 사령부에서 물러나왔다. 밤이 어두웠다. 더 이상 김명운 씨와도 함께할 명분이 없어 내가 먼저 헤어질 것을 제의했다.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죽지 않으면 언젠가는 만날 수 있겠지”하며 헤어져야 했다.



그러고는 시장골목으로 들어갔는데 시장기가 몰려왔다. 마침 해주에서 피란 온 노점에서 빵 파는 아주머니의 정 깊은 배려로 빵도 얻어먹고 셋방 사는 그 집에서 하룻밤 신세까지 졌다. 새벽에 대구역 으로 갔을 때 풀이 죽은 방위군 장교를 만났다. 우리는“국가 소명에 적극 참여하여 젊음을 바치고 최선을 다해 책임을 완수했다”고 자부하는데 방위군 사령부 몇몇 수뇌부의 그릇된 처신으로 많은 젊은 장정들이 길거리에 내팽개쳐진 박탈감을 감출 수 없었다.



나는 궁리 끝에 김해에 가기로 작정하고 김해행 버스를 탔다. 물론 차비도 없어서 차장과 시비가 벌어졌다. 나는 진심으로 사정을 했더니 거칠게 창피를 주던 차장은 묵인하는 것 같아 너무도 고마웠다. 나는 김해 정류장에서 목적도 없이 걷다가 나보다 나이 많은 소대원을 만나 그를 따라갔다. 그는 다른 4명과 옹기가마굴에서 생활하면서 낮에는 나름대로 먹을 것을 구걸해 와서 그런대로 푸짐한 먹을거리를 내놓고 그날 얘기들을 나누었다.



거기서 하룻밤을 지내고 무턱대고 시내로 들어갔다. 마침 순찰 중이던 경찰관을 만났다. 그는 나를 거기서 가까운 군부대로 안내해 주었다. 이곳 병영 생활은 전 12교육대와 비슷했으나 그래도 식사 등 제반 생활 시설이 12교육대보다는 조금 나은 편이었다. 그러나 예비사단도 방위군 해체와 더불어 머지않아 폐쇄된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저기 알아봤지만 우리 방위군 간부들의 현역 편입 수속 기간은 이미 끝나고 괜한 시간만 낭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잔류 장정 중 현역 편입대상자 마지막 분류작업날이었다. 현역 장병 몇 명이 내방했다. 나는 드디어 현역 신병 입대를 결심했다.



1951년 3월 19일 현역병 입대 적임 장정분류가 시작되었다. 나는 현역대상자 장정대열에 끼어들었다. 심사관은 나를 적령 미달자 대열에 끼어 세우며“귀향 대상자!”라고 했다. 아니 내가 왜 미달자인가? 항의했더니 오히려 심사관은 주먹으로 내 머리를 툭툭 치며“집에 가서 더 큰 다음에 군대 가라는데 무슨 이유가 많은가”라고 언성을 높였다. 이거 야단났다. 나는 12교육대에서 방위군 소위로 소대장 근무를 했고 방위군 해산에 따라 교육대 현역대상자들을 부산 영도 제2장정 대기소까지 인솔 인계시켰다고 털어놓아도 심사관은 막무가내였다. 신분증을 보이란다. 신분증은 영도 제2장정 대기소에서 회수당했다니까 “그럼 그때 왜 현역에 편입 안 했는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미달자’로 분류되어 적령 초과자와 함께 군용차 편으로 부산을 거쳐 울산 제103예비사단으로 보내졌다. 울산극장에서 하룻밤을 새우고 나서 우리들 일행은 울산 옛 향교건물에 수용됐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단체생활 중 가장 좋은 환경이었다. 우선 침실에 모포가 할당되고 식사도 괜찮았다.


그때서야 비로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소위‘국민방위군 비위사건’의 환부를 도려내는 큰 변혁이 있었구나 하는 장정들의 평가가 흘러나왔다.1951년 3월 26일 결국 우리들은 울산역에서 열차를 타고 대구에 호송되었다. 그러나 출발에 앞서 예고하기를 대구역에서 주·부식비 3일분과 여비를 지급하고 해산시킨다더니 해산은커녕 대구 시내 어느방직공장 건물 안에 이송되었다. 이곳에는 우리뿐이 아니라 수많은 장정들이 집결해 있었다.


울산에서 올라온 우리들 외에도 제2국민병과 피란민들이 전쟁이 호전되면서 각 지방에서 대구까지 올라와 총 집결한 것 같았다. 대개는 경기 또는 서울, 강원, 이북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사실은 귀향조치가 아니라 전방 전투부대 작전 군수지원 예비사단을 창설하는 인력 자원 보충대로 전환되고 있었다. 노무 군수지원사단 약칭CTC 창설 기간장병이 바로 해체된 방위군 간부출신들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나는 제101예비사단 제5대대 제54중대(미보병 제3사단 제65연대 배속)에 배치되었다.




내용출처 -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편찬, 6.25 전쟁 증언록 II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