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축성술은 후진적인가? 5부 : 무슬림 요새의 혁명


아래 글을 보기 전에 1~5부를 보시면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습니다.


화약의 본격적 도입 이전인 델리술탄국 시기부터, 무슬림 요새는 인도의 군사건축에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16세기 본격적인 화약무기의 시대가 열리면서 무굴제국과 무슬림 술탄국가들은 인도의 군사건축에 공성포에 대한 방어와 성곽 내부의 화기 및 대포의 운용 측면에서 혁신을 일으켰습니다.


무슬림 요새는 무슬림의 지배권역이 확장되면서 북인도에서 데칸고원과 남인도로 전파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슬림 요새와 구분되는 전통적인 힌두식 요새들의 특징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남인도에서 살아남은 힌두식 요새들, 변화한 세계를 맞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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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칸 고원의 술탄국과 비자야나가르 제국의 몰락----


무굴제국이 최대한 팽창하기 이전에, 이슬람의 정복을 저지하고 있던 남인도의 패권국가였던 비자야나가르 제국은 1565년 Talikota에서 데칸고원의 무슬림 술탄국들의 연합군에게 크게 패배한 이후 쇠락의 길을 걷다가, 1646년 비자푸르 술탄국에게 멸망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데칸고원과 남인도에 무슬림 요새들은 빠르게 확장되어갔습니다. 당연히 모르타르를 사용하는 석조건축 요새들이 데칸고원 곳곳에 건설되거나, 기존의 요새를 개축했습니다. 16세기 화약의 도입은 이러한 경향을 가속화시켰습니다.


하지만, 남인도의 많은 요새들에는, 무슬림식 요새와 구분되는 힌두식 요새들의 특징들이 여전히 남아있었습니다. 또한 무슬림 요새의 전파 이후에도 고대 인도 전통에 따른 힌두 요새의 특징을 가진 요새들이 건축되었고, 18세기 말에 영국에 의해 거의 대부분 파괴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힌두 요새의 전통이 살아남은 것을, 완전히 전통의 고수란 측면으로만 해석해선 안됩니다. 무슬림에게 점령당하거나, 무슬림 요새 식으로 개축된 경우라 하더라도, 기존의 오래된 요새들을 완전히 철거하는 것은 비용효율적이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무슬림식 요새가 개축된 곳에서도 과거 힌두식 요새들이 내부 성벽이나 외부 성벽으로 남아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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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조된 Warangal 요새, 모르타르를 사용한 무슬림 여장과 우측의 포대를 보자.----


4부에서 소개한 13세기 힌두 요새인 Warangal의 경우, 석축으로 구성된 성벽의 상부는 모두 무슬림식 여장으로 교체되었고, 기존의 4각형 탑 위는 개조되어 대포를 운용하기 위한 포대가 설치되었습니다. 이는 기존의 메쌓기식 석축 성벽이 그 이후로도 방어 용도로 유지되었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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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davatam 요새의 성벽과 사각형탑, 여장은 무슬림식으로 개조되었다.---


Siddavatam 요새는 원래 토성이었지만,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초 지역의 영주인 Matli Ananta에 의해 석성으로 개축되었습니다. 1682년 무굴제국에 의해 점령되었고, 1755년 카다파의 지방장관인 Abdul Alam Khan이 이를 건설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때문에 이 요새의 구조는 전형적인 힌두식 요새가 부분적으로 무슬림식으로 어떻게 개축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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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davatam 요새의 전경 사진, 외벽의 사각형 탑들과, 외벽 안쪽의 위에 포대가 설치된 원형탑에 주목하라.----


이 요새의 외벽의 사각형 탑들은 개조되기 이전의 힌두식 요새의 특징들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성벽은 모르타르를 사용하지 않고 메쌓기 방식으로 건설되었습니다. 이 성이 16세기에 개축되었다면 화약 도입 이후에도 이 지역에서는 인도 전통방식의 메쌓기로 성벽이 지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무굴제국이 18세기 개축한 시점에서도 여전히 메쌓기로 쌓은 성벽을 그대로 유지해도 된다고 판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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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davatam 요새의 메쌓기 성벽과 통짜 돌을 깎아 만든 무슬림 여장의 크기----


대부분의 성벽은 개축시 강변쪽 남쪽에만 추가된 보조성벽 이외에는 모르타르의 사용 없이 건설되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개축과정에 설치되었을 무슬림식 여장입니다. 여장은 돌출부는 통짜로 돌을 깎아서 성벽 위에 설치되었습니다.


가슴 위치까지 올라온 흉벽 위에 얹혀져 있는 이 돌출부를 구성하는 돌의 크기는 90~100cm의 높이에 그 두께는 45~57cm에 달하고 너비는 70~100cm입니다. 중포탄에는 쓰러질지도 모르지만 어설픈 소구경 포탄은 튕겨낼지도 모르겠습니다.


화강암으로 보이는 통짜 여장 일부는 힌두교의 것으로 보이는 조각이 포함되어 있는데, 사원의 석재를 사용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조선시대 경주읍성의 성돌 일부에도 석조 불상이나 사원의 석재를 사용한 경우가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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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dgal 요새, 메쌓기 방식으로 건설된 곳과 모르타르를 사용한 곳이 공존한다. 돌 사이 흰색 줄눈이 모르타르---


Raichur 요새나 Mudgal 요새는 무슬림의 정복 이후에 기존의 메쌓기로 지어진 힌두식 요새들을 활용하거나 개축한 흔적이 나타납니다. Mudgal 요새는 모르타르를 사용하지 않고 힌두식으로 메쌓기 방식으로 지어졌으면서도, 동시에 무슬림식 원형구조의 치성구조물이나 이중성벽 구조가 나타납니다.


설계방식은 바뀌었지만, 대형 성돌을 섬세하게 가공해서 높은 위치까지 모르타르없이 쌓아올리는 힌두식 석조건축방식이 사용되었다는 것은 무슬림 지배자들에 의해 진행된 개축과정에서 힌두 건축가나 석공이 고용되었던 것이 원인일 수 있습니다. 중세 인도에서 무슬림 지배자들은 모스크를 건축하는데 힌두 석공들을 적극적으로 고용했습니다.




무슬림 기술을 받아들인 Vellore 요새


무슬림 요새의 영향이 힌두 국가들에게 퍼져나가서 요새건축의 발전을 초래했음을 보여주는 아주 잘 보존된 사례는 타밀나두 지방의 Vellore 요새입니다. 현재까지 잘 보존된 이 요새는 매우 흥미롭게도 무슬림, 힌두, 유럽의 3가지 요새건축의 특징들이 섞여있는 매우 흥미로운 유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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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Vellore 요새의 전경. 좌상단의 붉은색으로 강조된 사람을 통해 크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요새는 1566년 즈음에 비자야나가르 제국의 지역 총독인 Chinna Bommi Naicker에 의해 건설되었습니다. 한 때 남인도의 가장 강력한 힌두국가로서 무슬림의 침공을 저지해왔던 비자야나가르 제국 소속이었던 이 요새는 1656년에 비자푸르 술탄국에 의해 점령당했고, 1676년에는 4달 반의 공성전 끝에 마라타 연방에 의해 점령당하게 됩니다.


이 요새는 힌두교 국가인 비자야나가르 제국이 건설한 요새에 미친 무슬림 요새의 영향을 보여줍니다. 보조성벽과 주성벽에 설치된 치성구조물들은 반원형으로 건설되었고, 무슬림식 여장이 설치되었습니다. 이는 데칸 고원의 무슬림 국가와 대결하던 과정에서 비자야나가라 제국이 적들의 군사기술을 수용했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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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llore 요새의 이중성벽 구조, 아래의 보조성벽과 주성벽은 메쌓기 방식으로 건설되었다.---


하지만, 힌두 요새의 전형적인 메쌓기 구조가 유지되었습니다. 거의 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정밀하게 가공된 성돌은 모르타르의 사용 없이 만들어졌습니다. 무슬림식 여장의 돌출부는 통짜 돌을 가공하여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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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llore 요새 주성벽의 돌출된 원형 치성구조물 위의 유럽식 포대----


주성벽의 상부의 흉벽은 유럽인에 의해 개축된 것이 분명합니다. 무슬림식 여장이 아니라 석재나 벽돌, 그리고 석회 모르타르를 사용해 개축된 흉벽에는 유럽식 포안(砲眼, Embrasure)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개축은 16세기 비자야나가르 제국에 고용된 이탈리아인 용병들에 의해 이루어졌을 수도 있겠지만 1760년대부터 이 요새에 수비대를 배치한 영국인들에 의한 것일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근대적인 유럽식 포안은 인도 남부의 마이소르고원을 비롯한 인도 메쌓기식 석조 요새들에서도 나타납니다. 유럽인과의 밀접한 접촉은 무슬림식 요새의 포대와 다른 방식으로 남인도 요새들의 중포운용을 위한 혁신을 제공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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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Vellore 요새의 여장과 총안, 돌로 된 여장 돌출부 하단의 3개의 구멍이 총안이다.---


Vellore 요새의 무슬림식 여장은 모르타르를 사용해서 만들지는 않았지만, 매우 섬세하고, 수비병을 완벽히 엄폐하는 총안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장 하단부에 3개의 구멍은 겉보기에는 작아보이지만, 저 여장의 실제 크기가 사람보다 큰 수준이란걸 생각해야 합니다.


여장 일부는 위 사진의 우측 끝에 보이는 것처럼 보다 큰 구멍이 뚫려 있는데, 아마도 보다 소구경 대포를 사격하는 용도로 사용했으리라고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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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llore 요새 통짜 돌 여장의 뒤에서 봤을 때의 모습----


돌 여장의 하단 부는 수비병이 보다 넓은 각도에서 밖을 바라보면서 총으로 사격할 수 있도록 섬세하게 가공되어 있습니다. 수비병은 완전한 엄폐 상태에서 외부를 관측할 수 있었을 것이며, 그 후 적을 이 구멍이나 여장 사이에 있는 좁은 간격을 활용하여 안전하게 사격을 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Vellore 요새는 화약무기의 도입 이후 비자야나가라 제국에서도 무슬림 요새의 원형 탑이나 이중성벽 구조를 받아들였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메쌓기 방식으로 모르타르의 사용 없이 성벽을 쌓는 전통을 유지했습니다. 이는 성돌이나 여장의 섬세한 석재가공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고대로부터 이어진 인도 힌두 요새의 4각형 탑은 사라졌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남쪽으로 갈수록 전통적인 4각형 탑은 보다 오랜 기간 생존했으며, Vellore 요새처럼 완전히 대체되지 않았습니다.




타밀 나두의 근세 힌두식 요새


타밀 나두 지방은 인도아대륙의 남쪽 반도 끝에 위치합니다. 비자야나가라 제국이 몰락한 이후, 무굴제국은 거의 인도아대륙 전체를 정복했지만, 타밀나두 남부지방까지 정복하지는 못했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힌두 요새의 전통들이 18세기까지 상당히 잘 유지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장 거대한 요새는 티루치라팔리(Tiruchirappalli)에 건설되었습니다. 티루치라팔리는 타밀 나두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비자야나가르 제국에 의해 통치되었다가 제국의 멸망 후 마두라이 나야크 왕조의 수도로 번영했습니다. 이 요새의 주요 건설은 나야크 왕조의 16세기 중반에 이루어졌습니다.


이후 카르나틱 술탄국과 마라타 연방 등 계속되어 그 소유자가 바뀌었고 결국 영국인의 통치하에 넘어갔습니다. 1866~1876년 사이 성벽과 해자가 해체됨으로서, 실제 이 요새의 구조를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8세기 문헌자료를 통해서 이 요새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굴제국과 그 봉신국들, 그리고 프랑스군과 영국군이 얽혀들어간 카르나틱 전쟁 기간동안 남은 자료들은 이 요새들의 형태에 대해 유럽인들에 의해 상세한 기록이 남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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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루치라팔리의 1763년 요새 평면도---


처음에 북쪽 요새(위 그림의 오른쪽)가 먼저 건설되었고, 인구 증가에 의해 남쪽으로 새로운 요새가 추가되었습니다. 18세기 초 이 도시의 인구는 30,000명이었고, 난공불락의 요새로 유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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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루치라팔리의 북쪽 요새와 성벽의 단면도----


둘레가 거의 6km인 이 도시는 무슬림식 요새의 이중성벽 구조입니다. 아마도 모르타르를 사용하지 않고 건설되었으리라 추정됩니다. 바깥쪽의 보조성벽의 높이는 마른 해자 바닥으로부터 5.5m였고, 성벽의 두께는 1.5m였으며, 길이 1.5m에 달하는 대형 성돌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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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루치라팔리 이중성벽의 스케치---


7m 뒤에 위치한 주성벽의 높이는 9m이고, 성벽 하부 기저면의 너비는 9m였으며, 성벽 위에는 2~2.5m 높이의 총안이 뚫려있는 여장이 설치되었습니다. 주성벽 뒤에는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설치되어 성벽 어디에서나 수비병이 바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주성벽에 설치된 치성구조물인 탑 60개 중 42개는 힌두식 4각형 구조이며, 14개는 무슬림식 반원형입니다. 주로 모서리 위치에는 성형요새의 Bastion과 같은 오각형 구조로 영국인에 의해 개조되었습니다. 1719년에 이 요새는 130문의 중포를 배치했습니다.


티루치라팔리의 요새의 외부성벽은 흔적도 남아있지 않지만 그 흔적이 상당부분 남겨져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동쪽으로 45km 정도 떨어진 탄자부르(Thanjavur)에는 나야크 왕조의 또다른 요새가 건설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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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자부르의 대형요새와 소형요새, 소형은 16세기, 대형은 17세기 후반에 건설되었다.---


18세기 중반 프랑스군이 이 요새를 공격하기 위해 수립한 공성계획도와 유럽인들의 편지를 통해 이 요새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형 요새의 주성벽은 61개의 힌두식 4각형 탑이 설치되어 있고, 보조성벽도 모두 4각형 탑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마을 남서쪽에 위치한 소형 요새의 경우는 주성벽은 4각형 탑을, 보조성벽에서는 일부는 반원형 탑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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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자부르 시바강가 공원에 현재 남아있는 요새의 이중성벽----


현재 탄자부르에 남아있는 요새의 이중성벽의 경우 주성벽의 4각형 탑들 상부는 Vellore요새와 같이 유럽식 포좌로 개조되어 있습니다. 이 요새의 건축시기를 고려할 때 아마도 18세기 이후에 영국인에 의해 개조된 것으로 보입니다.


보조성벽 상부는 벽돌로 여장이 설치되어 있고, 하단의 성벽 부분은 돌을 쌓아서 만든 것으로 보이는데 내부는 석회 모르타르와 벽돌로 건설된 흔적이 보이기도 해서 Vellore 요새의 메쌓기식 방식과는 구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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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년대 동인도 회사군의 제임스 웰시의 저서의 삽화에 묘사된 마두라이의 외성벽---


마두라이(Madurai)는 마두라이 나야크 왕조의 최초 수도였습니다. 이 요새도 동일한 원칙으로 1559년에 나야크 왕조에 의해 이중성벽 구조로 건설되었으며, 72개의 4각형 탑으로 보호되며, 성벽은 돌로 건설되었습니다.


주성벽은 90~100m 마다 4각형 탑이 돌출되어 건설되어 있으며, 6.6m의 높이의 주성벽 위는 유럽식의 포안을 가진 벽돌 흉벽이 1.8m 높이로 건설되어 있었습니다. 주성벽에서 9m 앞에 낮은 보조성벽이 있었습니다. 이 요새도 1842년 해체되어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크 왕조 시기 주로 16세기에 건설된 타밀나두의 요새들은 영국인들에 의해 해체되기 전까지 기원 이전의 고대 힌두 석조요새들로부터 이어져온 4각형 치성 구조물의 전통이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부분적으로 반원형 치성이나, 유럽식의 5각형 보루(bastion)이 설치되었음에도 이런 전통이 고수된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타밀 나두의 요새들은 힌두 요새의 4각형 탑 구조와 무슬림 요새에서 나타난 이중성벽 구조, 그리고 유럽인들의 영향을 받은 포안(Embrasure)과 벽돌 및 석회 모르타르의 사용이 인상적입니다. 무슬림 술탄국들이 북쪽으로부터 중근동의 영향을 받으며 요새를 건설했다면 인도 남쪽 끝에서는 3가지 문화적 특징이 결합되어 18세기까지 유지됩니다.

이슬람과 유럽을 통해 인도에 보다 선진적인 건축기술이 도입되었는데도 힌두 요새들에서 메쌓기식 건축방식이나, 구조적으로 반원형보다 불리한 4각형 탑이 유지된 원인은 무엇일까요?


명확한 답안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가능하게한 요소는 존재합니다.




15~18세기 인도 메쌓기식 요새의 대형 성돌


현재 남아있는 남인도 15~18세기 요새 유적, 특히 메쌓기로 지어진 요새들은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교적 크고, 세밀하게 가공된 성돌을 사용하여 건축되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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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찬드라기리 요새의 성벽 성돌-----


찬드라기리(Chandragiri) 요새는 아직까지 남아있는 비자야나가르 제국의 유적 중 하나입니다. 이 요새 내부의 궁전은 벽돌과 석회 모르타르를 사용해서 건설되었지만, 요새의 성벽은 그렇지 않습니다. 메쌓기 방식으로 지어진 성돌의 크기는 균일하지는 않지만 거대한 크기로서, 틈새가 잘 나타나지 않도록 섬세하게 가공되어 있습니다. 성돌의 크기는 때로 사람보다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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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페누콘다 요새의 4각형 구조와 성돌----


메쌓기로 지어진 힌두식 요새의 성돌은 대체로 모르타르를 사용한 무슬림 요새들의 성돌보다 큽니다. 이는 모르타르를 사용하지 않고 표면의 대형 성돌이 자체적인 무게를 통해 성벽의 구조적 안정성을 제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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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llore 요새의 성돌의 크기와 가공, 힌두 요새의 석재가공은 잉카인 못지 않다. 거의 틈새가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성돌의 가공 역시 중요합니다. 사각형으로 성돌을 섬세하게 가공하여 마찰을 극대화할 수 있다면, 큰 성돌의 무게를 통해서 성벽을 더 높고 튼튼하게 쌓을 수 있습니다. 인도의 사원 건축에 기반한 많은 수의 석공과 석재가공기술은 화강암을 사각형으로 가공하여 메쌓기로도 튼튼한 성벽을 쌓을 수 있도록 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돌의 크기나 가공기술이 이슬람을 통해 전파된 모르타르가 주변의 무슬림 국가에서 사용되었음에도 메쌓기 방식이 유지되고, 4각형 치성 구조물의 전통이 유지된 것을 실용적인 이유에서 완전히 설명해주지는 않습니다. 성돌이 커질수록 성돌을 채석하고, 운송하고, 가공하는 비용이 증가하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인도 힌두 요새의 전통을 고수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먼저 문화적 요인을 고려할 수 있습니다. 오랜 기간 익숙해온 전통이나 방식을 고수하려는 경향,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y)이 발휘되었다고 가정하는 것입니다.

중근세 인도에서 축적되어온 석재가공의 인프라의 강점은 오히려 새로운 방식, 석회 모르타르를 사용한 건축을 도입하는 것이 지연시켰을 수 있습니다. 교체로 얻는 효과가 기존에 익숙한 방식과 쌓아놓은 인프라로 인해서 메리트를 덜 느꼈을 수 있으니까요.


두번째로는 그러한 경로의존성을 반드시 파괴해야할 만큼 요새에 대한 화약무기의 위협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3부 : 인도 4천년 메쌓기"에서 소개한 바 있지만, 공성병기가 발전하지 않으면 마찬가지로 축성기술의 발전을 촉발시키지 못합니다. 위협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전통이 고수되었을 수 있습니다.



바로 6-2부로 이어집니다. 다음 링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