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인 "조선 축성술은 후진적인가? 6-1 : 인도 요새의 정체와 몰락"에서 이어집니다.




15~18세기 인도의 포병의 한계 


 "5부 :  화약의 시대, 15~18세기 무슬림 요새의 발전"에서 북인도와 무슬림 국가의 대포 도입과 무굴제국의 성공적인 운용사례에 대해서 설명한바 있습니다. 하지만, 화약무기의 도입에도 불구하고, 무슬림 요새와 힌두 요새 모두 유럽과는 달리 6m 이상의 높은 성벽을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3ebcdc35e0c1782a944b5a56fe5dd9c56e9ce8db4702944803170c37b8562ccf55f69880610a0e3e781866c8038de404b3a56efadf28a85f8fa0a9da7e40ecc7df68ac112aa217c1b251db8ec76506839447b963634263

----1504년에 아라곤에 의해 건설된 Salses 요새, 위는 지표면에서 볼 때 노출되는 부분이고 아래는 해자 가장자리에서 볼 때 요새의 모습이다.----


 유럽에서 공성포는 하드웨어에서나, 소프트웨어에서나 15세기 초부터 엄청나게 빠르게 발전했습니다. 당연히 이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요새의 발전도 빨랐죠.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적의 공성포에 노출되는 요새의 면적을 최소화하는 것이었습니다. 넓은 해자를 파고 성벽은 그 안에 건설되었고 공성포가 성벽을 명중시키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반면에 15~18세기 인도 요새는 남인도건 북인도건 간에 성벽의 높이는 낮아지지 않았습니다. 수십톤짜리 거포를 운용하던 인도에서, 왜 유럽과는 다른 결과가 나타났을까요? 



a14008ad0a36782d836f5a6cce5bf7fd43fafde2f464d467615cfa4e47f9f712005e16553e1e59a2f4cc5acbefa7aec7fed24d11822e51e9fed43072fa804525007f8b6b0ed470c4

----인도 데칸고원의 Basavakalyan Fort의 석제 포탄-----

 

 먼저 고려해볼 만한 것은 인도의 많은 요새들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되는 석제 원형 포탄입니다. 모든 요새들에서 대구경포탄으로는 석제 포탄만 발견되며, BasavaKalyan 요새에서는 45cm 지름의 석탄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Bidar 요새에서 직경 20cm의 철제포탄 1개와 직경 10cm 철제포탄이 2개가 발견되었습니다. 아마도 철제 포탄은 재활용을 위해서 주민들이 가져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Iqtidar Alam Khan의 "Gunpowder and Firearms: Warfare in Medieval India"에 의하면, 16세기에 황동이나 납을 사용한 포탄의 언급이 등장하고 석제 포탄에서 금속 포탄으로의 전환이 17세기에 발생하지만, 저렴한 가격으로 인해 석제 포탄이 17세기 말까지 계속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1758~1760년 동안 남인도에서 인도의 대포들을 관측하고 기록을 남긴 De la Flotte는 요새에서 사용되는 대포들이 석제 포탄을 사용하며, 여러번 도탄되다가 먼 거리까지 굴러갔다고 묘사했습니다.


 유럽에서 돌로 만들어진 원형포탄은 14세기에는 일반적이었지만, 15세기에는 점차 대체되고, 16세기에는 드물어졌습니다. 이는 철제 포탄이 구경 대비 더 무겁고 깨지지 않기 때문에 더 효과적이면서, 석제 포탄의 가공에 드는 인건비가 증가하여 비용효율이 떨어졌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반면에 인도는 숙련된 석공이 많고 상대적으로 인건비가 저렴합니다. 이는 석제포탄을 보다 오랜기간 사용하도록 만들었을 것입니다. 


 공성포에서 석제 포탄이 사용되었을 때 충분히 큰 성돌로 이루어진 성벽에 탄착될 때는 포탄이 면석을 파괴하는게 아니라 쪼개지거나, 튕겨나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인도 요새에 가해지는 공성포의 위협이 18세기까지 충분하지 못하게 만들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더 큰 문제는 기동성일 수 있습니다.



a14008ad0a3678f73633326d9c09f47d06dc7cafbe533fd5ad8a25a9fe99f499eb9dc51beeb9bc57a1d0568d918e43ed0f2277be9fd8a271e358d561a632177d1caae186ad2721159d3bab8cfc26fcfa652ee0dea3728e90077d61c2eac5b5f85efb8c408649f19595d30ff3b40729758d3fbfa51e41d1f3030afce65d6ab8156ba64ccd76421136384aaa4dbe52279e1a4b8638ade025102a

---18세기 중반 코끼리가 끄는 인도 중포에 대한 그림---


 무굴제국이나 데칸고원의 무슬림 술탄국들이 자랑하는 중포를 원하는 지역까지 이동하려면 코끼리와 많은 수의 황소들이 사용되었고, 이동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북인도에서 라지푸트인들의 요새를 공략했던 무굴제국이 점차 남쪽으로 진출하면서 까다로운 데칸고원의 지형과 인도 아대륙의 광대한 넓이, 유럽과 달리 발전되지 못한 인프라는 이러한 거대한 공성포의 효율성을 끔찍하게 제한했을 것입니다. 


 15세기 초까지 유럽 역시 거대한 중포(Bombard)를 운용했지만, 점차 공성포의 구경과 무게는 빠르게 감소했습니다. 15세기초에 주조된 Dulle Griet는 16.4톤에 달하는 무게를 자랑했지만 18세기의 24파운드 공성포는 2.8톤에 불과했습니다.


 반면에 인도인들은 18세기까지 감당하기 어려운 중포에 과도하게 의존했고, 이를 관측한 유럽인들의 비웃음을 당했습니다.


 군사 분야에서 저지르는 오판들에 있어서 인도의 포병과 그들의 지휘관들의 잘못된 개념들보다 심각한 것은 없다. 그들은 적들의 포병을 무서워하며, 그들 자신의 포병에 대한 바보같은 자신감을 가진다.


 그들의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그들이 제대로 운용하거나 이동하는 것이 불가능한 가장 큰 중포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다. 70파운드에 달하는 포탄을 운용하는 중포에 이탈리아인들처럼 거만한 이름을 붙인다.


 우리 영국인들이 그들 옆에서 경포를 가지고 행군할 때, 그 거대한 중포를 옮기기 위해서 매우 다루기 힘든 황소들을 필요로 한다. 만약 대열에 총격이 가해지면 이 황소들은 통제불가능해진다. 이 황소들의 멍에는 엉망이기 때문에 다른 황소들로부터 날뛰거나 죽은 황소를 분리하는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Richard Owen Cambridge, 1761년 "The Account of the War in India on the Coast of Coromandel"



 18세기 북인도 바트푸르의 군주(Jat Raja)가 바트푸르 남쪽 30~40마일에 위치한 공성위치까지 그의 48파운드 포탄을 사용하는 가장 큰 대포를 수도로부터 끌고 왔습니다. 이 대포를 끄는데는 1000마리의 황소와 4마리의 코끼리가 사용되었으며, 절반 거리인 18~19마일까지 끌고오는데만 1달이 걸렸으며 그 위치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대구경 공성포를 데칸고원과 남인도까지 이르는 먼 원정에 끌고 다니는 것은 기동성 문제로 심각하게 제한되었을 것입니다. 때로 중포는 행군대열과 같이 움직이지 못하고 뒤에 남겨지는 경우도 빈번했습니다. 

 

 하지만 인도 포병의 문제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유럽의 관측자들은 인도의 포병운용과 공성능력이 매우 후진적이었음을 기록에 남기고 있습니다. 


 18세기 영국 동인도회사에서 일했던 역사가 Robert Orme에 따르면, 1746년 무굴제국의 봉신국인 남인도 카르나틱의 군주가 이끄는 군대의 포병은 형편없었습니다. 그들은 대포가 1시간에 1발 발사하면 괜찮은 결과였다고 생각했습니다. 70년 후 하이데라바드의 포병도 크게 발전하진 못해서 15분에 1회 발사하면 만족했습니다. 


 원주민들은 돌출된 보루(salient angle)를 공격하는 것에 대한 장점과 공병을 사용한 접근로 구축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들은 굴착과 지뢰설치(Mining)을 하는 것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그들의 군대가 공성전에 돌입했을 때, 그 목적은 성벽에 돌파구를 만드는 것보다는 포위된 이들을 괴롭히고 봉쇄하여 그들을 지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포가 사용되는 경우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공성 대상인 마을로부터 소총 사격거리 밖으로 멀리 떨어져서 배치되며 항상 포대에 배치되지도 않아서 그 효과가 불확실하다.


 게다가 그들의 포격은 오직 낮 동안 잠깐 동안만 수행되는데, 밤에는 적이 습격해오는 것에 대비하기 위해서 대포가 진영으로 후퇴하기 때문이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과정은 포위된 이들이 지쳐서 협상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된다. 

에드워드 레이크, "Journals of the Sieges of the Madras Army, in the Years 1817, 1818, and 1819"


 이것은 16세기 바부르로부터 악바르 대제까지 초기 무굴 제국 포병의 성공적인 노하우가 잘 계승되고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5부 :  화약의 시대, 15~18세기 무슬림 요새의 발전"에서 무굴제국군은 라지푸트인들의 요새를 점령하는데 있어서 에드워드 레이크가 지적하는 공성방법들을 상당히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악바르의 군대는 성벽에 접근하기 위해 공병으로 접근호를 파고 이를 보호하는 구조물인 "Sabat"를 사용했으며, 굴착을 통해 지뢰를 설치하고 폭파시켜서 돌파구를 만들었으며, 영국인들처럼 성벽에 돌파구(Breach)로 돌격하는 용맹함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초기 무굴제국의 포병과 공병이 영광은 남인도에서, 그리고 그 후손들과 봉신국들에 의해 재현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잘 훈련되지 못하고 전투의지가 충분치 않은 인도 현지인 포병들의 낮은 숙련도는 실제 공성포가 배치되었을 때에도 성벽에 실질적인 위협을 가하지 못하고 심리적 위협에 그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17세기 이후 아우랑제브의 시기나 그 이후 남인도에서 무굴제국이 가한 포위공격에서 공성포는 결정적인 위협이 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요새의 함락은 협상이나 뇌물로 인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도의 무슬림, 힌두식 석조 요새가 공성포의 위협에 충분히 대응할 만큼 우수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연재글의 뼈대를 이루는 주요 내용들은 Jean Deloche의 논문을 참조했고, Jean Deloche는 영국 자료를 통해서 석재 뒤에 흙으로 두텁게 쌓인 인도식 요새가 포병에 상당히 저항할 수 있다고 해석습니다만, 아마도 이는 Jean Deloche가 문헌자료를 잘못 해석한 결과로 보입니다. 그가 인용한 Edward Lake의 인도 요새에 대한 견해를 살펴봅시다.


 요새에 돌파구를 형성하기 위한 적절한 포대의 위치는 성벽으로부터 150야드보다 멀리 설치해서는 안된다.

 1752년 Ghingleput 공성전에서 4문의 24파운더 공성포는 500야드 거리에 배치되었으나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했다. 200야드 거리에서 동일한 공성포로 사격해서 4일동안의 포격으로 외벽과 내벽에 사용가능한 돌파구가 형성되었다. 100야드 거리로 줄어들었다면 돌파구가 형성되는데 필요한 시간은 절반으로 감소했을 것이다.


 인도 요새의 성벽이 돌로 건설된 경우, 일반적으로 벽에 돌출된 탑은 그 원형구조와 건설에 사용된 자재의 견고함으로 인해 포탄이 도탄될 가능성이 높으므로 일반적으로 성벽을 탑보다 먼저 포격해야 한다. 

 이 원칙은 1781년 Palghaut 공성전에서 공성측은 거대한 화강암 블록으로 건설된 원형탑을 포격하여 돌파구를 만드려는 헛된 시도를 했던 사례를 통해서 검증될 수 있었다. 1790년에 요새가 다시 공격을 받았을 때 단 몇시간만에 성벽 중 하나에 돌파구가 형성되었다. 


 요새가 아예 진흙으로 건설된 경우에는, 성벽과 방어선에 돌파구를 형성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빠른 방법은 공성포보다는 지뢰의 사용이다. 공성포의 경우 이러한 흙으로 만들어진 성벽에 사격했을 때 포탄은 이를 무너뜨리는게 아니라 그냥 진흙에 박혀버리게 된다. 


 흙으로 쌓은 요새에 대한 지뢰의 효과는 유럽에서 이미 포탄보다 매우 효과적이라는게 증명되었다. 요새에 대한 공격을 목적으로 지뢰를 사용하는데 세계에서 인도보자 적합한 나라는 없다. 외벽에 대한 측면 보호가 엉망이므로(유럽식 성형요새의 기하학구조가 아니라서) 광부는 병행호를 파지 않고 성벽을 향해 바로 굴착이 가능하다. 요새를 구성하는 진흙은 뚫기 매우 쉬울 정도로 부드럽지만 별도의 목재 구조물의 설치 없이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튼튼하다. 

Edward Lake, Journals of the Sieges of the Madras Army, in the Years 1817, 1818, and 1819


 성벽이 돌로 건설된 경우, 이 표면의 면석을 파괴하고 무너뜨리는데 걸리는 시간은 생각보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Jean Deloche는 "If all the works of a Fort be constructed of mud"를 돌로 된 면석 뒤에 두터운 흙이 포병을 방어하기에 적합했다는 관점으로 해석했지만, 이는 석재를 사용하지 않고 아예 진흙이나 진흙벽돌로 쌓은 일부 인도식 요새들로 해석해야 합니다. 


 실제 석재로 쌓은 성벽의 경우 수시간에서 수일의 포격만으로 무너질 수 있었습니다. 아예 진흙으로 쌓은 경우가 아닐 경우, 표면의 면석은 가파르게 쌓이며 그 뒤쪽의 내탁부가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합니다. 면석이 포탄에 의해 파괴될 경우, 뒤에 쌓인 흙은 무너지게 됩니다. 



a66d24ad0e16b55eb6333c719a2cdc7d396d6b2e9483dc5e4bd76540d017a3e6f5652a6ec5724483f4c651f3bd73

----바다호스의 성형요새 보루의 성벽----


 1812년 바다호스 요새에서 진행된 공성과정에서 이후 웰링턴 공작이 되는 아서 웰즐리가 이끄는 영국군은 3월 25일 포격을 시작해 4월 5일까지 2개의 돌파구를 만들었고, 4월 5일에서 6일 저녁까지 8문의 24파운더 포와 6문의 18파운더 포로 사격을 가해서 3번째 돌파구를 만들어 냈습니다. 



a66d24ad0e16b55eb633105d565bf7e8467d605b66db90b463d0ac94ddb4ad3ac6d1f940fafa6b694e41ee4e14271c7093cc62c26bbeed124f32fbe6761b199d2d4da585af13973bd35eb775b121f224652721635f117e63ff10fa50417201060c70ccd29681d266b3f4d7edc46391d5fbcfd2a327

----바다호스 공성전 당시를 묘사한 미니어쳐, 면석이 무너지면서 뒷부분 흙이 무너지므로 보병이 올라갈 수 있는 돌파구가 형성된다.----


 즉 성벽의 외벽을 돌로 쌓은 후 그 뒤에 흙을 쌓는다고 해서 포탄의 충격을 완화해서 안무너지는 일은 없습니다. 아예 보병이 기어올라도 될 만큼 완경사로 흙으로만 쌓은 경우가 아니라면, 옹벽 형태로 쌓은 석조 요새는 면석이 파괴되면 무너지게 됩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토성인데 외벽만 벽돌로 쌓은 명나라나 청나라 시기의 성벽들도 유사합니다. 

(관련된 상세한 내용은 다음 부에 다루겠습니다.)

 

즉 18세기까지 이어진 인도 무슬림, 힌두 요새의 높은 성벽의 고수는 잘 훈련되고 적절한 크기의 공성포를 방어하기에는 부적절했습니다. 다만 인도아대륙의 광대한 넓이, 발전하지 못한 인프라, 때로 험악한 산악지대나 우기와 같은 악천후, 보급의 어려움, 인도 원주민 포병의 낮은 훈련도로 인해서 인도 요새들은 충분히 위협적인 공성포에 노출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최종적으로 인도를 정복한 영국 동인도회사군도 요새를 공략하는데 인도 현지인들과 유사한 문제에 시달렸습니다. 동인도회사군이 운용하는 24파운더 공성포는 3톤 정도의 무게로 수십톤에 달하는 인도인들의 중포보다 훨씬 가볍지만, 공성포 대열을 공성위치까지 이동하는건 까다로운 작업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단 공성포를 운송해오면, 인도인들의 중세적인 대포 운용과 달리, 잘 훈련되고, 수학과 기하학을 배운 포병장교를 갖춘 영국인들은 간단하게 인도의 석축 요새들에 돌파구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세포이 반란 당시 1857년에 감행된 델리 공성전에서 델리 외성벽은 포대가 설치된지 며칠 안되서 돌파구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인도의 15~18세기 무슬림, 힌두 요새의 건축기술은 그 이전 인도의 요새건축이 고대로부터 오랜기간 정체해왔던 이유와 거의 동일한 이유로 정체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대 인도가 이슬람의 침입 이전까지 공성무기의 미발전으로 요새건축에 가시적인 변화 없이 정체가 일어나고, 메쌓기 전통이 계속 유지되었듯이, 화약무기 전래 이후의 인도는 분명 상당한 혁신이 일어났지만 그 혁신은 16세기 이후 지속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정체되었습니다. 


 이는 16세기 무굴제국에 의해 시작된 화약무기의 도입과 발전이 그 이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정체되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18세기 본격적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인도 공략이 확장되기 시작하자 기병과 중포에 의존하는 구시대적인 인도 현지인들의 군대는 이에 제대로 맞서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18세기에는 16세기에 무굴제국이 보여주었던 혁신들이 오히려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전통적인 메쌓기나 4각형 탑의 건축과 같은 힌두 요새의 전통이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요새가 맞서야할 위협의 수준이 정체되거나 오히려 부분적으로 퇴보하였으며, 고대 인도로부터 계승되어온 석재가공의 역량과 인프라, 인적자원이 이를 교체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비용효율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요새건축의 혁신을 만들고, 무엇이 정체하도록 만들까요? 인도의 메쌓기 요새의 생성과 발전, 정체외 몰락의 과정은 우리 한국의 메쌓기 요새 건축의 전통을 해석하는데 어떤 도움을 줄까요?




힌두 요새 전통의 생존이 주는 깨달음


 인도 요새의 발전과정을 통해서 무엇이 축성기술의 변화와 발전을 야기하는지, 무엇이 그것을 정체시키거나 또는 퇴보하게 만드는지 살펴볼 수 있는 몇가지 원칙들을 한번 가능한 단순하게 정리해봅시다.



1. 공성전술과 병기의 발전은 축성기술의 발전과 변화를 촉진한다. 


 인도의 메쌓기 요새의 4000년 역사는 인도의 긴 역사가 꽤 오랜 기간 외부의 강력한 자극 없이 유지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슬람의 정복과 지출이 없었다면 인도의 축성기술은 더 오랜기간 정체되었을런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일단 새로운 위협이 발생하면, 오랜기간 정체되었던 축성기술은 빠르게 발전합니다. 반대로 위협이 적어지면 축성기술의 발전은 정체되고, 아예 퇴보할 수도 있습니다. 



2. 외부 문명과의 분쟁과 교류는 축성기술의 발전을 촉진한다. 


 12~13세기 중근동 십자군전쟁으로부터 퍼져나간 모르타르를 사용한 석축 성곽의 건축기술은 서쪽으로는 유럽으로, 동쪽으로는 인도까지 퍼져나갔습니다. 무게추식 투석기는 중근동에서 유럽과 동쪽으로는 중국에 이르기까지 퍼져나갔죠. 


 위협 자체만으로 기술의 발전은 촉진되지 않습니다. 축성기술의 혁신은 외부 문명으로부터 기술이 유입되고 교류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상대적으로 같은 종교를 가진 오스만 투르크와 중근동으로부터 기술자와 학자가 대거 유입된 인도 내의 무슬림 국가들이 힌두 국가들에 비해 축성기술의 변화가 더 드라마틱한 것은 이러한 요인 때문일 것입니다.



3. 위협과 교류가 있어도, 전통이 고수될 수 있다. 


 기술이 유입되어도 기존의 방식을 바꾸지 않으려는 경로의존적인 성향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인도 힌두 요새들에서 나타나는 전통의 고수는 이러한 보수적인 경향을 보여줍니다. 이는 실용성이 있다고 해도, 문화적 요인이나 인적 요소가 기술의 발전을 정체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4. 민간 분야의 역량은 기술의 발전에도, 정체에도 영향을 준다. 


 인도 축성기술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고도의 석재가공기술입니다.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사원건축과정에서 석재를 가공하여 사용하는 전통과 인프라는 벽돌을 많이 사용하는 이슬람의 모스크 건축 조차도 인도 내에서 인도풍으로 바꾸게 할 만큼의 영향을 끼칩니다.


 반대로 이러한 석재의 채석, 유통, 가공의 인적, 물적 인프라는 인도의 메쌓기 요새 건축방식이 바뀌지 않고 정체되게 하는데 기여합니다. 어떤 면에서 이는 단지 "다를" 뿐이지 "후진적"인게 아니라고 할수도 있습니다. 


 

5. 전문기술자의 역량과 사회, 경제적 지위 


 단순히 인력을 갈아넣는다고 기술이 발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건축기술의 발전과정은 전문기술인력의 주도성, 사회 및 경제적 지위와 대우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무굴제국과 무슬림 술탄국의 화약무기와 건축기술의 발전과정에서 중근동의 영향은 매우 두드러집니다. 이는 중근동에서 투르크, 아랍, 페르시아의 전문기술자들이 인도에 유입된 결과였습니다. 이들이 강제로 동원되거나 무급으로 착취당했다면 해외에서 기술자를 초빙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무굴제국에서 Ustad라고 불리는 고급기술자들의 유입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타지마할의 건축가 Ustad Ahmad Lahori나 대포와 총기의 기술자 Ustad Ali Quli같은 이들이 대표적입니다. 


 외부의 고급기술자가 아니더라도, 인도의 건축가들의 사회적 지위는 단순한 장인과 다릅니다. 이들은 비문에 이름이 적혀 기록되며, 가문으로 계승되고 지역 및 국가 지배자들과 오랜 인연으로 이어졌습니다. 중세 인도의 공공건축, 예를 들어 힌두 사원이나 모스크, 우물의 건설은 강제노동이 아닌 노동자와 석공의 고용을 통해서 진행되었습니다. 


 건축에 종사하는 장인이나 석공들은 Sreni, Desi, Goshti라고 불리는 일종의 길드로 조직되어, 사원의 유지보수를 위해 정기적으로 기부한 기록을 남길 정도의 부를 축적했습니다. 이러한 인적기반은 15~16세기 인도 요새들의 발전을 견인하였을 것입니다.



6. 강제노동과 고용노동 


 무굴제국에서 악바르는 중요한 혁신 하나를 일으킵니다. 그는 인도에서 국가에 의해, 또는 민간 카스트를 통해 사용되는 강제노동의 관행을 폐지합니다. 1598년에 건설된 카슈미르 스리나가르에 위치한 나가르 요새의 건설은 부역노동이 아닌 임금노동으로 진행되었으며, 인건비로 11,000,000 Dams에 해당하는 동화가 지불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인도에서 아예 요새의 건축과 수리 과정에서 부역노동이 없었다고 일반화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인도는 전통적으로 부역을 통한 강제노동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은 힌두교 지배권에서 보다 강했습니다. 

 무굴제국을 물리친 마라타 연방에서 석공들은 지역요새를 수리하는데 필요한 의무 노동시간이 부과되었습니다. 때로는 급료를 지급하거나, 주요 건축사업인 사원 건축이 진행될 때는 부역이 면제될 때도 있긴 했지만, 강제노동이 존재했다는 것을 부정할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노동 시스템을 Vethbegar라고 합니다. 


 만약 인도의 요새 건축이 무급으로 진행되는 부역으로 건설되었다면, 과연 그렇게 섬세하고 대형의 성돌가공이 가능했을까요? 이 부분은 충분히 확실하게 판단할 요소는 아닙니다. 인도의 경우는 석공의 수가 많기 때문에 부역노동으로도 충분히 성돌 가공이 가능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중세 유럽의 사례를 고려하면, 섬세한 성돌의 가공이나 효율적인 성곽의 축성을 위해서는 전문기술자 뿐만 아니라 보다 하급기술자나 단순노동자들 또한 급료를 지급하는 고용노동이 필요했습니다. 

  



인도 메쌓기 요새의 변천사 소개를 마치면서


 이렇게 Jean Deloche의 "Études sur les fortifications de l'Inde"(인도의 요새화에 대한 연구)를 뼈대로 해서 여러 자료들과 제 나름의 견해를 덧붙여 나가며 인도 요새의 변천사, 특히 메쌓기를 초점으로 소개해 봤습니다.


  인도의 요새건축이 고대로부터 발달해오는 과정을 연재글로 계속 보신 분들이라면 이미 한국의 메쌓기 요새가 왜 그렇게 발전했는지, 그리고 왜 계속 유지되었는지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감을 다 잡으셨을런지도 모릅니다. 


 다음 연재글에서는 빌드업이 너무 길다고 짜증이 나셨을 조선의 축성술, 특히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의 메쌓기 식 석축 성곽에 초점을 두어서 본격적으로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