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축성술 8부 : 난공불락 삼년산성과 고구려 산성까지
8부에서 전형적인 신라계 산성인 삼년산성과 고구려 산성을 소개했습니다. 축성기술 측면에서 고구려는 매우 특별하고 독특한 축성기술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삼국을 통일한 것은 고구려가 아니라 신라였죠. 삼국시대 이후 축성기술을 계승 발전시킨 것 역시 신라였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삼년산성과 같은 조적(組積)식 성벽이 한국 성곽의 주류 형태로 이어진 것은 아닙니다.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까지 : 신라의 석축 성곽의 발전
삼년산성으로 대표되는 중부내륙 산성군의 납작하게 쪼갠 석재인 판상할석들로 차곡 차곡 쌓은 성벽을 일반적으로 신라계 산성의 특징으로 구분하는 경우가 있지만, 모든 신라 산성들이 이런 형태로 건축되지는 않았습니다.
박종익의 "최근 조사된 경상도 지역 석축산성(石築山城)의 축성법 검토"는 점판암 성돌을 많이 사용하는 중부내륙 산성군의 신라계 산성들과 다른 경상도 지역의 신라 산성들을 통해 신라 축성기술의 변화를 추적합니다.
----경주 명활성 유적----
삼국사기에는 405년 명활성(明活城)을 공격한 왜구를 격퇴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명활성은 적어도 405년 이전에 초축된 것으로 보이는데, 발굴조사로는 정확한 초축시기를 알기 어렵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자비왕 16년(473), 진흥왕 15년(554), 진평왕 15년(593)에 명활성을 수리하거나 개축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명활산성의 축성을 기념하는 비석이 발견되어 진흥왕 12년(551)에 35일간 축성이 진행된 내용도 알 수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토성에서 석성으로 개축된 시기나, 현재의 성벽이 어느 시기에 축조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7세기 이전에 현재의 모습으로 축성되었다는 것은 문헌기록으로나, 발굴결과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명활성의 성돌은 화강암을 사용하였지만, 고구려 산성들과 달리 잘 가공되어 있지 않습니다. 납작한 사각형에 가깝게 쪼갠 조잡한 할석을 가능한 층을 이루어서 바른층 쌓기를 하기 위해 노력하긴 했습니다.
면석 뒤쪽의 채움석들은 고구려 산성과 달리 조잡한 잡석들로 이루어져 있긴 하지만, 단순히 채웠다고 하기 보다는 층층이 쌓아 올려져 있습니다. 신라 산성도 고구려 산성 수준은 아니더라도 뒤채움석에 가급적 흙이 섞여 들어가지 않고 잡석을 나름 신경 써서 쌓아 올리는 성벽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면은 삼년산성과 같은 조적식 성벽과 유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김해 양동산성도 이와 유사하게 섬세하게 가공되지 않은 조잡한 면석과 잡석을 사용한 채움석들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점판암을 사용하지 않은 6세기 신라 석축 성곽들의 경우에는 면석이 조잡해 보이고, 채움석도 균일하지 않죠. 고구려 산성들에 비해서 성돌을 가공하는 역량이 발전하지 못했음이 드러납니다.
비교적 이렇게 조잡한 할석을 사용하는 것을 신라계 산성의 특징으로 보고, 반대로 고구려와 유사하게 잘 가공된 면석을 백제계 산성의 특징으로 구분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완전히 확실한 구분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정읍 고사부리성 같은 경우, 백제시기에 초축된 것이 발굴된 기와를 통해 확인된 사례이고 위 사진처럼 잘 가공된 면석을 확인할 수 있지만, 통일신라 시기에 개축되었기 때문에 어느 시기인지 확인하기 애매합니다.
조잡하게 쪼갠 성돌을 사용하던 7세기 이전으로 추정되는 신라 산성들은 점차 백제계 산성으로 추정되는 산성들처럼 성돌의 가공상태가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삼국사기에 591년 진평왕 시기 남산성을 쌓았다고 기록된 남산신성(南山新城)에 남아있는 잔존 성벽들을 보면 명활성보다 훨씬 잘 가공된 성돌의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축성시기를 박종익의 "최근 조사된 경상도 지역 석축산성(石築山城)의 축성법 검토"에서는 삼국사기 기록에 있는 남산성을 늘려 쌓았다는 문무왕 시기인 679년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즉 신라는 나당전쟁기 시기에 들어서면서 이전의 조잡한 할석 수준의 면석을 사용하던 성벽이 점차 끼움석 또는 쐐기돌로 고정할 필요가 없는 섬세하게 가공한 성돌을 사용하게 되고, 이런 과정에서 성벽 하단에 보축용 성벽을 추가하던 과거의 특징들도 점차 감소하게 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성돌의 가공상태 변화를 한 성곽에서 동시에 보여주는 독특한 산성이 있습니다. 파주의 덕진산성이죠.
-----파주 덕진산성의 잔존 성벽-----
파주 덕진산성은 발굴조사를 통해 고구려에 의해 초축되었음이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임진강 북쪽에 위치한 성곽입니다. 발굴조사 결과 신라에 의해 2차례에 걸쳐 개축이 이루어졌고, 조선시대에 다시 보수되어,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와 조선의 축성기술을 한 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성곽 유적입니다.
서승완의 "파주 덕진산성의 축성법의 변화 검토"는 덕진산성의 발굴조사 결과를 통해서 각 시대별 축조기법의 변화를 추적합니다. 이를 통해서 신라의 성벽 축조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확인할 수 있지요.
덕진산성의 1차 수축성벽은 아직 임진강에서 고구려와의 분쟁이 벌어지던 7세기 초~중엽경 이후에 덕진산성을 신라가 점령하면서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성돌의 가공상태는 위에서 소개한 남산신성과 유사하며, 현무암이나 편마암계의 석재를 사용해 어느 정도 다듬어진 성돌을 사용하여 바른층 쌓기에 가깝게 쌓아 올렸습니다.
면석의 형태가 조잡한 명활성보다 분명히 발전한 모습을 보이며, 6세기 중엽~7세기 중엽에 축조된 신라 성곽들의 면석의 가공상태나 축조방식과 유사합니다.
덕진산성의 2차수축성벽은 1차 수축성벽에 덧대어 축조된 보축용 성벽입니다. 즉 그 이후에 쌓았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죠. 1차 수축 성벽과 분명히 구분되는 특징은 성돌의 가공 상태입니다.
이전에 비해서 성돌의 네 면이 보다 섬세하게 가공되었으며, 뒤쪽 뿌리가 사각추 형태로 가공되어 고구려 성곽에서 사용되는 사각추형 면석과 구조적으로 유사해집니다. 이와 유사한 성곽들은 양주 대모산성, 안성 망이산성, 전주 동고산성 등이 있으며, 이들 성곽의 내부에서 확인되는 유물은 통일신라 시기인 8세기 중엽 이후의 유물이 주를 이룹니다.
이 시기는 나당전쟁 종료 한참 후로, 통일신라가 백제와 고구려의 기술을 흡수한 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 통일신라의 석축 성곽의 중요한 특징이 바로 이렇게 잘 가공된 면석의 사용입니다.
삼국시대에 신라가 사용한 성돌은 조잡하게 가공된 납작한 사각형 할석을 사용했고, 면석 뒤쪽의 길이가 짧았습니다. 나당전쟁기 시기가 되면 면석 뒤쪽의 길이는 이보다 좀 더 길어지지만 여전히 장방형의 납작한 모양이었습니다.
-----망이산성(左), 이성산성(右)의 사각추형 성돌----
8세기에 들어서서 통일신라의 성돌들은 바깥쪽에서 보면 정방형(正方形)으로 틈새가 비교적 잘 안보이고 작은 쐐기돌의 사용이 나타나지 않도록 섬세하게 가공되며, 고구려 산성의 면석들처럼 뿌리가 길어지는 사각추형으로 만들어집니다.
통일신라 시기 성곽의 높이는 이전에 비해 낮아져서 4~5m 정도로 감소하고, 80° 이상의 급경사였던 성벽의 각도도 70°도 내외로 약간 완만해 집니다. 또한 성돌의 가공이 매우 섬세해지고 고구려처럼 品자 형태로 육합쌓기에 가깝게 바른층 쌓기가 가능해져 성벽의 구조적인 안정성이 개선된 것 때문인지 신라 성곽의 특징이었던 성벽 하단부의 보축 성벽이 점차 사라지게 됩니다.
다만 성돌의 크기는 고대 그리스나 인도의 메쌓기 성곽에 비해서 크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통일신라 이전 대전리산성의 성돌 너비는 35~50cm이고 두께는 15~21cm 정도로 추정 무게가 60kg 내외입니다. 덕진산성의 경우 통일신라 시기에 축조된 2차 수축성벽의 성돌 너비는 30~60cm, 두께는 13~27cm에 불과합니다.
----무거운 성돌을 운반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목도(扁擔)---
성돌의 가공상태는 점차 발전하지만, 성돌의 크기가 크지 않은 이유는 40~60kg 내외가 별도의 도구 없이 인력으로 운송할 수 있는 한계이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현대에는 목도 운반 시 1인당 운반가능한 무게를 대략 50kg으로 잡는데, 4인이 목도를 함께 든다고 하면 200kg의 자연석을 옮길 수 있습니다. 지게를 사용할 경우는 50kg 정도로 잡습니다.
하지만 단기간에 쉽게 성돌을 옮기려면 현대인보다 신체가 빈약한 당시 인력으로는 성돌의 무게가 50kg을 초과할 경우 부담스러웠을 수 있습니다. 지형이 까다로운 산악지대는 더욱 그랬겠죠.
다만 이것은 성돌을 운송하거나, 들어올리는 기구가 잘 발전하지 못했거나, 축성에 익숙한 전문집단이 없었거나, 가용 노동력의 규모가 제한적이었기 때문일수도 있습니다.
-----로마 제정 초기의 퀸투스 하테리우스의 묘비에 묘사된 기중기와 현대 재현품----
고대 그리스의 경우 기원전에 이미 기중기를 사용했고, 로마 제국은 기중기를 대량으로 사용하여 거대한 건축물들을 쌓아 올릴 수 있었으며, 이에 대한 상세한 문헌기록들을 남겨놓았습니다. 중세 유럽은 그 덕분인지 13세기에는 트레드휠 기중기의 사용이 부활하게 되죠.
반면에 한반도에서의 기중기 사용에 대한 자료는 극히 제한적입니다. 도르래의 사용 자체는 고려시대에 선화봉사 고려도경을 통해 녹로(鹿盧)라는 명칭으로 나타나지만, 조선시대에 영조대에 와서야 녹로(轆轤)라는 이름이 도르래를 사용하여 경종의 관을 내릴 때 사용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배병선은 "미륵사지 동서석탑 운반시설의 고찰"에서 미륵사지 석탑을 쌓는 과정에서 대형 기중기를 사용했다는 가설을 서탑 납측에 H자형 평면을 이루는 주춧돌과 목재를 세웠던 흔적을 근거로 제기한바 있습니다. 이러한 기중기의 사용이 실존한다고 해도, 일반적이었다고 보기는 사료나 흔적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기중기의 미사용을 만악의 근원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원시적인 목도나 통나무를 일종의 레일로 사용하는 방식으로도 경사면을 흙으로 쌓아 올려 무거운 성돌을 옮기고 쌓아 올리는 것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고대 이집트처럼 말입니다.
원인이 무엇이건 간에 삼국시대와 통일 신라 시대까지 면석의 크기는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었습니다.
면석의 각 면의 크기가 30cm를 크게 넘지 않는 것은 8부에서 소개한 고구려 성곽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일신라 성곽들의 면석 가공상태가 개선된 것은 좋은 일이지만, 성돌의 크기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소형 면석과 한국의 독특한 뒤채움 구조
8부 : 신라 산성과 고구려 산성의 축성기술 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고구려 성곽의 뒤채움 구조는 상대적으로 작은 면석을 사용하면서도, 성곽이 일정 이상의 방어력을 갖출 수 있는 높이까지 쌓아 올릴 수 있게 도와줍니다.
이런 특징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의 성곽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납니다. 다만 고구려 특유의 북꼴 모양으로 가공된 채움돌은 사용되지 않고, 조잡한 잡석이나 할석이 사용되어 고구려의 성곽보다도 가공비용이 절감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이것이 한국 성곽의 독특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문화재청의 심석과 적심쌓기에 대한 정의---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한국성곽 용어사전에서 적심석(積心石)이란 면석의 내부에 쌓는 돌을 지칭합니다. 적심쌓기란 성벽의 내부를 돌로 쌓는 것을 말하죠. 반면에 뒤채움이란 용어는 석축을 쌓을때 내부에 흙이나 잡석을 채워 다지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여기서 뒤채움이란 용어는 아마도 영어 Backfill이나 일본의 우라고메(裏込め)를 한글로 번역한 것으로 보이는데 꼭 돌로 채워넣는 것은 아니더라도 석축 안쪽을 채워넣는 것을 통칭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뒤채움 방식이 석재를 쌓는 것(積, Laying)이냐, 채우는 것(裏込, Filling)이냐라고 생각합니다. 이 것은 별 차이가 없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중대한 차이가 있습니다.
----메쌓기 방식의 조경용 옹벽의 단면도----
메쌓기 방식으로 돌을 사용해서 쌓는 현대의 옹벽의 구조에서 뒤채움(Backfill)은 주로 작은 크기의 잡석이나 자갈과 같은 골재가 사용됩니다. 이 뒤채움의 역할은 크게 2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벽체를 구성하는 석재가 잘 고정되는 역할을 해주는 겁니다.
위 사진에서 보여지듯이 심석(Deadman)은 뿌리가 뒤쪽으로 연장되어 뒤채움 자갈 사이에 박혀 있는데, 마치 한국 성곽의 사각추형 면석들과 유사하게 성벽에 측압이 발생해도 버티게 해주는 역할을 해줍니다.
뒤채움 자갈은 흙이 아니라 돌이기 때문에 흙처럼 공기나 물을 머금어서 부피가 증가하거나 감소하지 않습니다. 잘 압축된 뒤채움 골재는 잘 변형이 발생하지 않으므로 돌로 쌓인 옹벽의 벽체가 잘 고정될 수 있도록 도와줄 겁니다.
둘째는 배수(Drainage)입니다.
뒤채움 자갈 사이의 공간은 비어있기 때문에 흙에 비해서 투수성이 좋고, 물을 흡수하지 않으므로 비가 오거나, 지하수가 있을 때 빨리 배수 시킬 수 있습니다. 이는 비가 올 때 벽체 뒤쪽의 흙이 팽창해서 측압을 발생시키지 않도록 물을 빨리 배수시켜 주는 역할을 합니다.
위 단면도에서는 흙과 뒤채움 골재 사이를 조경용 천으로 막고 있는데, 이는 물이 새들어 오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가 아니라 물을 통과시키되 흙이나 유기물이 뒤채움 골재들 사이로 들어와 배수가 잘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일본 이시가키의 단면도----
일본 성곽의 이시가키 구조에서 뒤채움을 구성하는 우라고메이시(裏込石)의 역할은 이러한 현대 메쌓기 옹벽에서의 역할과 거의 동일합니다. 표면의 면석인 츠키이시(築石)는 대체로 높이와 폭 50cm, 길이 1m에 가까운 대형 면석으로 벽체를 구성하고, 뒤채움인 우라고메이시는 벽체의 일부가 아니라 배수와 고정을 도와주는 채움재의 역할을 합니다.
----센다이성의 이시가키 복구 사진, ----
일본 성곽에서 사용되는 뒤채움 석재들은 정말로 쌓여 있다기 보다는 뒤를 채우고(裏込) 있습니다. 일본의 뒤채움석은 구리이시(栗石)라고도 불리는 자갈이나 부서진 돌(대략 직경 5~15cm)들을 사용하는데 위 사진과 같이 둥근 돌의 경우 현대적 기준에는 부적합합니다. 다만 이런 둥근 돌은 석재 내부에서 마치 베어링처럼 작동해서 채움재가 움직일 수 있고, 잘 압축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별도의 채석과정 없이 강에서 적절한 크기의 자갈을 가져다 채움재로 사용할 수 있어서 선호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어디서나 가성비가 중요한 법이죠.
---일본 히메지성 1953년 사진, 큰 자갈로 흘려내리고 있는 뒤채움석들----
석재의 크기는 면석보다 훨씬 작아서 배수에 적합하지만, 면석이 탈락할 경우에는 고구려 성곽들처럼 뒤채움재만으로는 버티지 못하고 일제히 무너질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채워져 있는 것이지 성벽의 부분으로 섬세하게 쌓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일본 성곽의 이시가키 면석들의 뒤쪽 사이에는 카이이시(飼石)라는 석재가 별도로 고정을 위해 사용됩니다. 반면에 고구려를 비롯한 한국 성곽들은 뒤채움석들이 면석과 얽혀져서 쌓여 있고 그 뒤에 다른 뒤채움석들과 얽혀서 쌓여있죠.
----일본 구마모토성의 지진으로 붕괴한 이시가키---
지진으로 무너진 구마모토성의 이시가키를 보면 뒤채움재가 면석 없이 안식각(잡석의 경우 45도)보다 가파른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흘러내린 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대 옹벽의 뒤채움 골재들은 직경 15cm 이하의 잡석들을 사용하며 이는 면석의 크기보다 훨씬 작습니다. 일본 성곽의 뒤채움 구조는 현대 옹벽과 비교적 유사합니다. 큰 면석을 사용하여 뒤쪽의 토사가 흘러내리는 토압을 지지하고, 뒤쪽 흙을 쌓은 성토부(盛土部)와 면석 사이에 잡석들을 채워 넣어서 배수를 용이하게 함으로서 비가 내리거나 지하수에 의해 흙이 팽창해 측압이 발생하여 면석이 탈락하거나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죠.
반면에 한국 성곽의 면석과 뒤채움석의 상관관계는 상당히 다릅니다.
8부 : 신라 산성과 고구려 산성의 축성기술 에서 소개한 삼년산성의 조적식 성벽은 면석과 뒤채움석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뒤채움석들은 면석과 크게 다를바 없이 벽체를 구성하는 일종의 벽돌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잡석을 사용할 때는 어떨까요?
점판암을 사용하지 않은 화강암, 현무암을 사용한 신라의 철원 성산성의 성벽 단면을 통해 뒤채움석들을 보면, 잡석을 사용하긴 했지만, 일본의 이시가키의 뒤채움재들과 달리 비교적 섬세하게 교차하면서 쌓아 올렸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용인 할미산성의 발굴조사 과정에서 서벽구간의 단면----
실제 단면을 보면, 뒤채움에 사용된 잡석들의 크기는 때로 면석의 크기보다 큰 경우도 많으며, 할미산성과 같이 차곡차곡 쌓여 있어, 배수용 잡석이라기 보다는 성벽을 이루는 벽체의 연장선에 가까움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6세기에 아직 성돌의 가공이 충분치 않고 면석의 크기도 더 작았던 신라 석축산성의 경우, 뒤채움재의 잡석을 잘 쌓아 올리는 것은 성벽의 구조적 안정성을 확보하는데 더 중요했음이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본 전국시대 석축 성곽의 면석인 츠키이시(築石)는 마루가메성(丸亀城)의 경우 평균 높이 50cm, 두께 50cm, 길이 1m이며 무게는 535kg. 가장 큰 츠키이시의 무게는 1385kg에 달합니다. 한국 성곽들은 비교적 대형 면석을 사용하는 것은 조선 후기에 가서야 나타나며, 그나마도 성벽 하부에만 사용합니다.
채석, 가공, 운송이 까다로운 대형 면석을 사용하는 대신, 자연석이나 채석과정에서 쪼갠 할석들을 채움재로 사용해서 섬세하게 쌓는 방법으로 면석의 작은 크기를 보완했다고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특징들은 백제계 산성들에서도 나타납니다.
----백제 부여 나성의 성벽 단면----
부여 나성의 성벽 단면을 살펴보면, 뒤쪽은 판축으로 잘 다진 토축부가 존재하고, 작은 면석 사이에 면석보다 작지만 채워 넣었다기보다 나름 잘 쌓인 잡석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백제 정읍 고사부리성의 성돌과 성벽 단면의 채움구조----
이것이 백제가 쌓았는지 통일신라 시기에 쌓였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정읍 고사부리성의 성벽 단면의 잡석들도 마찬가지로 잡석들이 나름 섬세하게 쌓여있습니다.
29분 40초부터
현재 복원되는 성벽에서도 이렇게 뒤채움 잡석을 신경 써서 쌓아 올리는 것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면석의 크기가 작을 수록 뒤채움석이 벽채를 이루는 구조재로서의 역할이 크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잡석이나 할석을 사용하여 뒤채움석을 차곡 차곡 쌓았서 면석 뒤쪽의 벽체를 확보하는 과정은 비교적 직경이 작은 자갈이나 잡석을 채워넣는 일본 성곽이나 현대 옹벽하고는 구분되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대 복원 성벽들은 심석(Deadman)을 매우 긴 것을 일정 면석마다 사용하는데, 실제로 고구려나 통일신라 시기 사각추형 면석들은 이렇게까지 긴 성돌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현대에서는 안전문제가 더 중요하므로 복원 과정에서 무너지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부분적으로 타협한 결과입니다.
이는 한국 성곽의 전통적인 작은 면석이 성벽의 구조적 안정성을 약화시키는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뒤채움석의 쌓기 방식은 이 약점을 완화시켜줍니다.
----충청도 공산성의 붕괴로 인해 드러난 단면, 뒤채움석 부분의 너비가 좁고, 석재가 일본 성곽 뒤채움처럼 작다. https://blog.daum.net/e-chungnam 참조---
이러한 뒤채움석의 구조적 특징은 삼국시대부터 시작하여 조선시대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조선 후기에 축성과정이 전문화되면서 면석의 크기가 대형화, 규격화되는 경향이 나타나기 전까지, 뒤채움석을 잘 쌓는 것은 한국 성곽이 무너지지 않고 높이 쌓는데 매우 중요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를 소홀히 할 경우 쉽게 무너지게 만들었습니다.
한국 성곽의 잡석 뒤채움 구조가 작은 면석의 약점을 완화시켜주었던 것은 확실해 보이지만, 옹벽의 뒤채움재의 전형적인 역할인 배수에 적합한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잡석의 크기가 15cm 이상이고 차곡 차곡 쌓은데다, 때로 고정을 위해 점토나 흙이 사용되는 경우가 있어서 배수에 적합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 뒤채움 뒤쪽의 흙이 물을 머금어 팽창함으로써 성벽이 무너지게 만들었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일본 성곽의 뒤채움 구조에 비해서는 배수효율이 떨어지지 않았을까 추정되지만, 정확한 비교를 위해서는 제대로 된 연구가 필요할 것입니다. 다만 규격화되지 않은 자연석이나 할석으로 불규칙하게 쌓인 만큼 명확한 정의가 내려지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통일신라 시기에 성돌의 가공상태가 개선되고 납작한 장방형에서 정사각형 모양의 정방향에 가깝게 두께가 커지게 되고, 뒤쪽의 토축부를 의존하는 내탁식 성벽이 일반화 되면서 면석 뒤쪽의 채움석 부분의 너비는 이전에 비해서 감소하게 됩니다.
이런 방식은 석재의 사용량을 줄임으로서 축성비용과 노동력을 절감할 수 있었겠지만, 아마도 성벽의 높이나 경사를 부분적으로 희생하게 만들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당전쟁 이후 통일신라는 장기간의 평화기에 돌입했기 때문에, 이전에 비해 낮고 완경사의 성벽을 건축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시기의 성곽들은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석축 성곽을 발전시켜왔는지, 다른 나라와 구분되는 어떤 특징을 만들어갔는지를 보여줍니다. 기술이 퇴보하지 않고 점진적으로 발전한다고 생각할 때,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 시기까지의 성곽들은 이를 증명해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하지만, 고려시대로 넘어가면 축성기술, 특히 석축성곽의 축성기술이 단순히 정체되는게 아니라 퇴보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개추 - 시진핑개새끼
잡석 사이에 모르타르 섞어만든 성벽은 없음?
조선 후기에 모르타르를 부분적으로 사용하긴 하지만 성벽 쌓는데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비가 많이 내리고 습한 환경이라 견고함을 포기하고 배수를 택했고 여기는 상대적으로 건조한 대륙성 기후라 배수에 신경을 덜쓰고 견고함에 투자할수 있었던게 아닐까 싶음
일본이 면석의 크기가 크고 독특한 기울기 구조 때문에 더 높이 쌓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긴 합니다.
해당 댓글은 삭제되었습니다.
읽기 라는 걸 할 줄 모르고 댓글 싸는거 보소
과거엔 이민족노예 지금은 공산당노예 5000년 개잡탕 노예민족 지나蚛蝈 진-튀르크 수, 당-튀르크, 퉁구스 요-거란족 금-여진족 원-몽골 청-만주족
무지성 국까질은 제식갤에서
팩트)노비는 요역동원의 의무가 없다
내용 진짜 좋네요.
거 서양꺼 좀 보고 배우지 조상놈덜
서양하고 교류하는게 쉬운 일도 아니고 저 당시 주변 나라들은 다 저 정도였는데 어쩌라고
일부분야라도 삼국시대 퇴보가 존재했던게 사실이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