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로 일어난 전쟁이다?
위의 다큐멘터리에서는
마치 에드워드가 프랑스 왕위에 대한 욕심으로 + 호기롭게 선전포고를 하면서 침공을 개시한 것처럼 설명되지만..
1337년 10월 이후 공문서들에 반영된 잉글랜드 정부의 일관된 입장은 필리프가 '공인되지 않은' 또는 '자칭' 프랑스의 왕이라는 것이었다.
필리프가 자칭 왕에 불과하다면 진정한 왕은 누구인지에 대한 문제는 신중하게 무시되었다.
확실히 잉글랜드 정부의 정책은 유사시에 왕위를 주장할 권리를 유보하는 한편, 당장 필리프의 왕위를 인정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행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당분간 에드워드는 필리프에게 상처를 입히기를 마다하지 않았지만 강하게 때리기를 두려워했다.
출처: 유럽인문아카데미: 홍용진 교수, “백년전쟁이 만든 근대국가: 교회에서 국가로 - 삶의 질서의 전환” 유튜브 영상
필리프가 프랑스의 진정한 왕이 아니라는 에드워드의 주장은 대륙 진출을 위한 침공의 명분이 아니라
'프랑스의 왕이 아니므로 아키텐의 주권자가 아니고 따라서 나를 법정에 소환할 자격도 아키텐을 몰수할 권한도 없다'는 방어적인 명분이었고
(=취소하면 다시 프랑스 왕이라고 인정해줄게)
심지어 1340년 이전에는 스스로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지도 않았음.
사실 살리카법이 아니었어도 에드워드의 계승 순위는 나바라의 샤를 다음이라서 계승권을 주장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2. 국가간의 전쟁이 아니라 프랑스 귀족들의 내전이었으며 잉글랜드 왕과 귀족들은 영어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위와 같은 설명은 1200-1350년 사이의 급격한 변화와 발전에 대한 이해 없이 12세기까지의 상황을 14세기 중반에 그대로 대입해서 내린 엉뚱한 해석.
1200년경 이후로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서유럽의 여러 지역들에서 국가 공동체 개념이 형성되고 민족의식 비슷한 게 생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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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4년 노르망디의 완전한 상실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잉글랜드의 남작들`은 해협 반대편의 토지를 잃었다.
이후 그들은 오직 잉글랜드에서만 태어나고, 자라고, 근거지를 두었다.
국왕 역시 마찬가지였다.
귀족 가문들은 여전히 노르만인 조상들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잉글랜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수용하게 만드는 압력에는 이제 저항할 수 없었다.
존 왕은 공식문서에서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신하들`이라는 지칭 사용을 그만둔 최초의 왕이었다.
그의 신하들은 이제 모두 잉글랜드인이었다.
이러한 변화의 근원에는 12세기와 13세기에 잉글랜드인으로서의 정체성의 발전을 점차 강화한 또 다른 중요한 현상이 있었다.
그것은 영어의 부흥이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1125년 이후에도 언어의 분열은 노르만인과 잉글랜드인을 분열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실 13세기에도 두 계층은 여전히 사회적으로 분리돼 있었다.
인구의 대부분인 앵글로색슨 혈통의 소작농들은 영어만 사용했다.
반면에, 기사였던 비브즈워스의 월터가 1250년경에 말했던 것처럼, 프랑스어는 `모든 신사가 알아야 하는 언어`로서 정중한 대화, 정치, 사업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영어의 사용은 점차 증가했고, 결과적으로 2개 국어를 구사하는 신사들과 귀족들이 나타났다.
잉글랜드인과 가까이 살면서 일하는 노르만인들이 영어를 말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우면서도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13세기에 쓰인 가문 연대기에 따르면, 노샘프턴셔 클롭턴의 기사 기욤 드 그롱쿠르는 `노르만식 이름보다는 그들의 언어인 잉글랜드식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편했기 때문에 하인들에게 클롭턴의 윌리엄이라고 불렸다.`
그롱쿠르 가문이 클롭턴 가문이 된 것은 이 집안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1190년대 서퍽의 한 기사의 집안에서는 확실히 영어가 사용되었다.
설화에 따르면 그 집에 나타난 유령이 영어(정확히 말하면 서퍽 방언)로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13세기 중반쯤에는 대귀족들조차도 영어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헨리 3세의 동생인 콘월 백작 리처드는 확실히 영어를 사용했고, 에드워드 1세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어가 자연스럽게 습득하는 모국어로서의 입지를 잃고 있으며, (라틴어와 마찬가지로) 제2언어로서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아야 했다는 증거들도 있다.
위에 인용한 비브즈워스의 월터의 이야기의 출처는 그가 드니즈 드 몽셴시 부인이 그녀의 아이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것을 돕기 위해 쓴 교재다.
그리고 드니즈 부인은 노르만 혈통의 대귀족의 아내였다.
1300년경 글로스터의 로버트가 쓴 잉글랜드의 역사가 영어 운문으로 쓰여졌다는 사실 역시 영어가 이 시의 청중들 중 하나였던 바셰보른 같은 상류층 기사 가문 사람들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언어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브리튼의 전설적인 시조인 브루투스의 이름을 딴) 브루트라는 제목의 잉글랜드 역사서의 1300년 이후에 만들어진 많은 사본들은 프랑스어와 라틴어로 30권, 그리고 영어로 168권이 남아 있다.
1300년경에는 비록 프랑스어의 지위가 더 높더라도 영어가 백성들을 하나로 통합시켰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아서와 멀린이라는 시의 한 구절은 이렇게 말한다. `비록 이 신사들은 프랑스어를 사용하지만, 모든 잉글랜드 사람들은 영어를 알고 있다.`
1295년 에드워드 1세는 전쟁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필리프 4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해서 영어 사용을 금지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선언했다.
여기서 영어는, 100년 전에는 불가능했을 방식으로, 잉글랜드인의 정체성과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헌팅던의 헨리가 찬양했던 `가장 저명한 노르만인인 잉글랜드의 남작들`은 몰락했다.
다시 말해, 잉글랜드인이 되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1280년경 서리 백작 워렌은 자신의 조상들이 윌리엄 공작과 함께 잉글랜드를 정복한 일을 상기시켰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녹슨 검을 꺼내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과거의 역사가 아무 영광스럽더라도, 워렌은 이제 자신 역시 과거의 조상들이 노예로 전락시킨 바로 그 민족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피할 수 없었다.
노르만족의 정복을 어떻게 볼 것인가 대한 고민은 매튜 패리스와 후대의 역사가들의 양가적인 서술에서 드러난다.
윌리엄의 승리를 기념해야 하는가, 아니면 억압받은 잉글랜드인들을 동정해야 하는가?
13세기 잉글랜드의 귀족들은 100년 전과 달리 자신들의 혈통에 대해 `가장 저명한 노르만인` 같은 순수한 자부심을 느낄 수 없었다.
그에 따라 브리튼의 다른 민족들을 경멸하는 태도 역시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이런 관점은 `야만인 일람표`의 변화에 의해서도 드러난다.
12세기초, 맘스베리의 윌리엄에게 프랑스는 문명의 중심지였다.
100년이 지난 후, 이제 이곳은 덜 매력적인 종족들의 근거지였다.
1216년, 웨이벌리 연대기가 `야만적인 외국인들`이라고 지칭한 프랑스 왕의 장남 루이의 군대에 의해 끔찍한 잔학행위가 자행되었다:
`프랑스 왕국에서 온 용병들과 다른 사악한 약탈자들이 마을을 불태웠고, 심지어 교회나 공동묘지조차도 봐주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주민들을 납치하고 약탈했으며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잔혹한 신체적 학대를 통해 막대한 몸값을 내도록 강제했다.`
이 `대학살`은 오랫동안 기억되었다.
매튜 패리스는 야만인의 기준을 스코틀랜드인이나 웨일스인이 아니라 루이 왕자의 프랑스인 신하들로 정했다:
`심지어 루이조차도 에드워드 왕자(미래의 에드워드 1세)의 가신들 같은 비열하고 난폭한 부하들을 잉글랜드로 데려온 적이 없었다.` 라고 그는 표현한다.
-David Carpenter, The Struggle for Mastery: Britain, 1066-1284
13세기 중반 이전의 대부분의 잉글랜드-프랑스 전쟁은 어느 정도 내전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14세기 중반에는 더 이상 사실이 아니었다.
중요한 프랑스 이민자들의 물결은 1265년 잉글랜드 내전에서 싸우다 죽은 랑부예 출신의 소귀족 시몽 드 몽포르의 세대가 마지막이었다.
일부 잉글랜드인들은 14세기에도 여전히 프랑스에 많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펨브룩 백작 애메르 드 발랑스는 자신의 이름을 프랑스 동부의 론 지방의 도시에서 따왔고,
프랑스 중부에 많은 땅을 가지고 있었고, 프랑스의 유력한 귀족 가문들의 여성들과 두 번 결혼했다.
그리고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적어도 열 번은 프랑스를 방문했다.
일부 프랑스 평신도들과 많은 수의 프랑스 수도원들은 여전히 잉글랜드에 상당한 크기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1세의 치세(1272~1307)가 막 시작됐을 때 잉글랜드에는 이미 강한 국가 정체성 의식이 존재했다.
잉글랜드의 대귀족들은 아들들에게 에드워드, 험프리, 토머스 같은 잉글랜드 기독교도의 이름을 붙였으며, 에드워드 2세가 자신의 후계자의 이름을 프랑스 외삼촌의 이름을 따서 루이라고 짓자고 제안했을 때 반대했다.
잉글랜드인들은 외국인을 좋아하지 않았고, 외국인에 대한 지저분한 편견이 대부분의 계층을 하나로 묶었다.
왕의 외국인 자문관들,
잉글랜드의 도시들에서 무역하는 외국인 상인들,
교황이 잉글랜드의 성직록을 수여한 외국인 성직자들,
그리고 외국 군대의 침략을 돕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의심을 받고 있는 외국인 수도사들
에 반대하는 시위가 주기적으로 일어났다.
에드워드 1세는 1278년 글래스턴베리에 있는 아서 왕과 귀네비어 왕비의 무덤을 열고 유해를 교회의 중앙 제단 앞에 이장(移葬)함으로써 잉글랜드의 국가적 신화를 공식 역사로 인정했다.
그는 자신에게 스코틀랜드에 대한 지배권이 없다고 감히 주장한 교황에게, 선지자 엘리와 사무엘의 시대에 트로이의 난민들이 정착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브리튼 섬의 역사를 짧게 강의했다.
이 중 상당 부분은 전시 프로파간다였지만, 프로파간다는 우선 청중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에 퍼트리는 것이다.
에드워드는 1295년 프랑스 국왕이 잉글랜드를 정복해서 영어 사용을 금지하려 한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을 때, 자신이 백성들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자극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확실히 옳았다.
[주: 에드워드 1세는 1295년 의회를 소집하면서, 필리프가 잉글랜드를 침공해서 영어 사용을 금지시킨다는 '주님께서도 눈을 돌리실 혐오스러운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주장했다.]
언어는 중요한 상징이었다.
프루아사르에 의하면 잉글랜드 외교관들이 프랑스어를 이해하지 못한 척하면서 난처한 질문을 회피하는 것은 잘 알려진 속임수였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외교적인 속임수고, 어디까지가 진짜였을까?
이전 세대의 귀족들과 고위 성직자들은 당연히 프랑스어를 주로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남아있는 프랑스어 문법 교재들은 13세기 후반 무렵에는 귀족들 사이에서도 프랑스어가 후천적으로 습득하는 언어였음을 암시한다.
비록 이후 반세기 동안 공무용 언어로 남아있었지만, 그것도 초서의 시대 이전부터 이미 '스트랫퍼드앳보우식 프랑스어'였다.
[And frenssh she spak ful faire and fetisly, / After the scole of Stratford atte Bowe, / For Frenssh of Parys was to hire unknowe.
그녀는 프랑스어를 유창하고 우아하게 구사했다, / 스트랫퍼드앳보우식으로, / 왜냐면 파리식 프랑스어를 할 줄 몰랐기 때문에.
-제프리 초서, 캔터베리 이야기]
반면에 영어는 기도, 사업, 가벼운 읽을거리, 그리고 정중한 대화에서 쓰는 언어가 되어 있었다.
잉글랜드는 작은 나라였고, 대륙의 기준으로는 대단히 동질적인 집단이었다.
지역색과 지역에 대한 충성은 확실히 존재했지만, 억양, 의복, 토지보유권 등 비교적 표면적인 수준에서만 존재했다.
잉글랜드의 정치 제도들은 거의 나라 전체에 걸쳐 일률적으로 운영되었고, 정치인과 행정인들은 자신들이 하나의 공동체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의 정체성은 외부의 적에 대한 의식으로 더욱 강해졌다.
-Jonathan Sumption, The Hundred Years War, Volume 1: Trial by Battle
3. 백년전쟁 시작 직전 프랑스 내의 잉글랜드 영토가 절반에 달했다?
아마 앙주 제국 시기 지도 보고 나온 얘기 같은데
그거 백년도 더 전인 존 왕 때 다 뺏기고 백년전쟁 시작 시점에서 잉글랜드의 대륙 영토는 이게 전부였음
4. 백년전쟁 시기의 군대는 40일 복무 의무를 가진 봉건 기사들의 집단이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13세기 동안 교역이 발전하고 국가 공동체 개념과 주권 개념이 발전하면서 흔히 중세 하면 생각하는 봉건제도와 봉건적 군역은 사문화되었고,
잉글랜드는 에드워드 1세 시기, 프랑스는 필리프 4세 시기부터 이미 국왕은 개인적이고 봉건적인 신서관계가 아닌 '왕국의 방어'를 위해서라는 추상적인 명분으로 18세에서 60세 까지의 모든 자유민을 소집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손에 넣었다.
5. 잔다르크가 등장하기 전까지 프랑스군은 일방적으로 밀리기만 했다?
예를들어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백년전쟁 캠페인 다큐멘터리를 보면
1370년 퐁발렝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승리했으나 일시적인 성과에 불과했고 잔다르크가 등장하기까지 60년 동안 잉글랜드가 프랑스 영토를 점점 잠식해갔다고 설명하는데..
실제로는 이후 20년 동안 잉글랜드가 일방적으로 털려서 대륙 점령지 다 뺏기고 해안가 구석으로 쪼그라든데다 브리튼섬 본토까지 침공당하다가 휴전함.
본토털린건좀 놀랍다 - 시진핑견공자제
사스가 잉글랜드 호전광새기덜ㅋㅋㅋㅋ
그러면 유로파 스타팅때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인근이 다 영국땅에 코어칠까지 되어있는건 게임적 허용이냐 아니면 1410년대 휴전 뒤로 또 쳐발려서 뺐긴거냐?
시발 갤 착각했는데 비번 모르겠다..
1415년 이후 또 쳐발려서 뺏김
삼실 찌질이 존왕이 또,,
하여간 마그나카르타도 그렇고 존 이새끼가 문제라니까
우리나라 역사 유투버중엔 제대로 된 놈이 하나도 없는듯
그럼 오히려 백년전쟁 개전은 영국이 선빵 때린 게 아니라 프랑스가 선빵때린 셈이네??
ㄴ3번에서 설명했듯이 앙주 제국 시절의 대륙 영토는 백년전쟁 시작하기 백년도 더 전인 존 왕 시절에 다 잃음. 백년전쟁 시작 시점은 잉글랜드가 가스코뉴 해안가에 조금 남은 영토라도 지키려고 애쓰던 상황임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 왕위주장자 발리올 지원하면서 프랑스의 동맹인 스코틀랜드를 먼저 치기는 했는데 결국에는 프랑스가 선빵친 게 맞지
윾갤인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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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6세가 정신병 걸리고 아르마냑파 부르고뉴파 내전 벌어지는 중에 잉글랜드가 쳐들어와서 아쟁쿠르에서 아르마냑파 줘패버린 거라서 잉글랜드가 가스코뉴 지키는 데 급급했던 전쟁 초중기랑은 상황이 꽤 달라짐
말이 백년전쟁이지 실제로 백년 내내 끊임없이 치고박은게 아니니까 뭐
그래서 메인 양도 이벤트에서 프랑스가 선빵을 치는 거군요.
영국왕이 봉신인건 알고있었지만 본문 내용은 ㄹㅇ 생소하네. 정리 ㄱㅅㄱㅅ - dc App
뒤게클랭 활약으로 이미 프랑스가 중반에 전세 확 역전 시켰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