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혹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맏아들이 아니고 수도사/학자가 되거나 관료코스를 밟지 않았다?


이러면 집안에서 방출되서 다른 귀족/기사의 종자로 생활하다가 서임받고 주군을 모시는 경우가 많았음.


근데 지금이나 그때나 일자리는 한정되어 있으니 고정된 주군이 없는 기사들도 상당히 많았는데,


그런 경우는 굉장히 높은 확률로 일자리(전쟁)나 주군 찾아 전전하는 용병기사가 되는 거임.


그러면 기사가 귀족계급에 편입된 14세기 이후부터는 줄었냐 하면 그건 또 아님.


이런 사람들이 사회 변두리를 떠돌게 되는 이유는 기사의 지위가 문제가 아니라 가문에서 물려받을 게 없었기 때문임.



중세 설화나 문학들을 보면 하인 하나 데리고, 혹은 하인도 없이 홀로 떠돌아다니는 방랑기사의 모험담이 자주 나오지만


중세가 워낙 험난하다보니 보통은 '루티에'나 '프리 컴퍼니' 등으로 불린 크고작은 용병대를 조직해서 우르르 몰려다니는 경우가 많았음.


물론 태어난 가문과 지금껏 받은 교육 및 훈련이 있다보니 평범한 용병은 아니고 용병들을 지휘하는 장교로 활동하고는 했음.


용병단에는 평민 장교들도 있었고, 기사 가문 태생이지만 서임을 못받은 장교도 있었지만, 보통은 귀족 태생의 기사 장교가 지휘권을 쥠.


그리고 이런 용병 장교는 대부분 가문에서 물려받을 것이 없어 내몰린 차남들이었음.



이런 무영지 귀족들은 16세기까지도 기사로 불리지만 않았을 뿐이지 존나 많았음.


프랑스에서 벌어진 위그노 전쟁 당시에도 독일의 무영지 귀족들이 일자리 찾아서 신교도측에 대거 참전했는데


반만 걸친 방탄갑옷, 승용마, 태엽 격발식 권총 등의 가성비 셋팅으로 무장하고 전통적인 프랑스 기병대에 맞서 괜찮은 전과를 올리면서


당대 기병 전투의 메타를 바꿔놓기도 했음.


또한 아즈텍을 정복한 코르테스와 그의 부관들 역시 귀족/기사 가문의 차남 출신들이었고


이탈리아 전쟁이 끝나서 일자리가 사라지자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신대륙으로 건너온 케이스였음.


(이러한 귀족 용병들은 녹슬지 않도록 블루잉 처리를 한 검은 갑옷을 입고 다녔기 때문에 흑기병이라는 단어의 시초가 됐음)


용병으로 활동하지 않은 무영지 기사들의 경우 들킬 경우 받게될 수모를 감수하고 몰래 상업활동을 하거나 아예 강도로 돌변하기도 했음.


이런 강도 기사들이 당대 사회문제 중 하나였는데 혼자 다니는 것도 아닌데다 잘 무장하고 전투력도 출중해서 토벌하는 게 쉽지가 않았기 때문임.


그리고 물론 강도 기사와 용병 기사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도 있었음.


예상했다시피 바로 전쟁이 끝났을 때.


프랑스는 백년전쟁 동안 엄청난 수의 용병을 고용해서 전쟁을 수행했는데 바로 이들이 휴전 기간 동안에는 약탈군대로 돌변하고는 했음.


해산을 거부하고 그대로 해당 지역에 눌러앉아 보호비를 뜯으며 평소 가져보지 못한 영지 굴리는 맛을 음미하는 건 예사고


갈수록 흉폭해져서 아예 성을 공격해서 해당 지역 장악하는 짓도 서슴치 않았음.


이 실업자 병력이 대규모 군세로 뭉쳐서 프랑스 각지로 진격하는 사건도 꽤 있었음.


전쟁이 끝나서 일자리가 사라졌으면 전쟁을 일으켜서 일자리를 만들면 되기 때문.


1357년에는 남프랑스를 따라 이동한 용병부대가 아비뇽을 공격해서 교황한테 몸값을 뜯어내는 초유의 사건이 터지기도 했음.

(참고로 그짓거리한 아르노 드 세르볼은 별명이 '대사제'였고 몸값을 부하들이랑 안 나누고 혼자 독차지하려다가 맞아 죽음)


특히 푸아티에 전투처럼 프랑스가 크게 개발린 전투가 일어난 직후가 가장 심각했는데 이런 시기에는 정말 이 약탈 용병단을 막을 방법이 없었음.


영끌해서 모은 군대가 야전에서 작살났으니 용병을 쓸 수 밖에 없고 휴전하면 그 용병들이 고용주를 약탈하는 악순환이 발생한 것임.



이들의 삶은 정말 중세판 느와르 그 자체였음.


그렇게 동료들과 동고동락하면서 번 돈으로 땅 사서 지주로 변신하기도 했고,


혹은 전쟁터에서 다시 만난 옛 동료들이 서로에게 칼을 겨누기도 했으며


돈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불화가 생겨 서로 죽고 죽이기도 했음.


또한 고용주한테 밀린 돈 받으러 갔다가 독약 먹고 살해당하기도 하고(나바라 왕이 이런식으로 돈 떼먹은 적 있음),


실력을 인정받아 세력있는 가문의 소속으로 편입되거나,


이탈리아에 눌어 앉아 국가 소속 용병단이 되어 '전쟁 청부업'이라는 새로운 산업을 일구기도 했음.

(소위 '콘도티에리'라 불린 이 국가 계약 용병들이 바로 마키아벨리가 죽어라 깐 그 용병군대임)


어찌보면 용병 이야기의 클리셰들은 이미 역사 속에 전부 실존했다고도 볼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