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당사는 630년부터 250여 년 동안 모두 17차례 파견됐다. 사신뿐 아니라 유학을 목적으로 한 학자·승려들이 동행했다. 유학생 가운데는 수십 년간 머물면서 당의 학술과 문물을 배운 사람도 있었다. 이들이 배워 온 당의 율령과 불교, 각종 기예는 고대 일본이 발전하는 데 중요한 자양분이 됐다.


10세기 이후에도 일본인의 중국과 중국 문물에 대한 동경은 이어졌다. 송과 일본을 오가는 무역선을 타고 많은 승려가 중원으로 건너갔다. 일본 귀족은 당금(唐錦)이라 불린 중국산 비단에 열광했고 도자기·약재·서적·그림 등을 앞다퉈 구입했다. 가마쿠라(鎌倉) 시대 이후에도 중국은 여전히 선진적인 문물이 넘쳐나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1840년 발생했던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영국에게 굴복했던 것은 일본인의 중국 인식 변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당시 청을 여전히 대국이라 생각했던 지식인들은 이 전쟁을 계기로 청을 ‘유약한 나라’이자 ‘온몸이 병들어 나을 가망이 없는 환자’로 여기게 됐다. 또 청을 제압한 영국 등 서구 열강의 마수가 일본으로 뻗쳐 올 것에 대비해야 한다는 위기의식이 고조됐다. 한때 청을 치자고 주장했던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1769∼1850)는 아편전쟁 이후 “청 황제를 설득해서 영국에 복수할 수 있는 힘을 키우게 하는 것이 일본의 안전을 위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일종의 중·일연대론이었다.

전쟁 이후 ‘유약하고 망가진’ 중국에 대한 자신감은 급속히 커졌다. 1862년 상하이(上海)를 방문한 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晉作·1839∼1867)는 청의 현실을 직접 살펴볼 기회를 갖게 된다. 그는 상하이에서 공자사당이 영국군 병영으로 전락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또 “지나인(支那人)은 전부 외국인에게 사역당하고 있다”거나 “청 정부의 난정(亂政) 때문에 중국의 참상이 빚어졌다”고 기록했다. 동행했던 또 다른 일본인은 청군의 무기력함을 거론하고 “일본인 한 사람이 다섯 명의 청인을 대적할 수 있으니 1만 기병만 있으면 청을 종횡으로 유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급기야 1894 청일전쟁을 계기로 중국에 대한 멸시와 우월감, 자신감은 굳어졌다. 청일전쟁 승리 이후 일본 국민 사이에서는 “지나는 지도상으로만 커다랄 뿐 실력이 없다”는 인식이 퍼져갔다. 나아가 일본이 이제 중국을 대신하여 ‘동양의 맹주’가 됐다는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다.

시간이 더 흐르면서 위태로운 청을 독립국으로 보전시킬 의무가 일본에 있다고 강조하는 주장도 나타난다. 청이 열강에 넘어가 일본의 국익이 침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중국 영토를 보전하고(支中)’ ‘ 중국을 올바른 길로 이끄는 데’ 일본이 앞장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1874∼1937)는 1911년 발생한 신해혁명을 지원하고, 중국을 ‘요리’하려는 목적에서 이른바 지나개조론(支那改造論)을 제시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