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글을 이어가려면 여말선초 시기와 조선 전기로 넘어가야 하지만, 축성기술 측면에서 고려시대에 그냥 넘어가기에는 너무 아쉽고 재미있는 내용이 있어서, 연재글의 진행을 잠시 중단하고 외전격으로 한 내용을 다루려고 합니다.
한반도의 성곽의 방어수준을 평가하고 이해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구조물이 있습니다.
바로 여장(女墻)입니다.
한국 성곽의 구조적 약점 : 여장(女墻)
여장(女墻)이란 성벽 위에서 수비병이 몸을 엄폐할 수 있는 일종의 난간 또는 흉벽(Parapet)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성가퀴(城堞)라고도 묘사하긴 하는데, 堞이란 표현은 성가퀴를 묘사할 때도, 때로는 성벽을 묘사할 때도 있습니다.
성(城) 위에 있는 담장(垣)을 일컬어 비예(睥睨)라고 하는데, 그 가운데 구멍(孔中)으로 들여다보기를 비상하게 함을 말하며 또한 비(陴, 성가퀴)라고 하는 것은 성에 보태어져 높이는 것을 말한다. 또한 여장(女牆)이라고 하니, 그 낮고 적음이 성과 비교할 때 마치 여자와 남자와 같기 때문이다.
석명(釋名, 후한의 훈고학자 유희의 최초의 훈고학서) 궁실에 대한 해석(釋宮室)
여장이란 명칭은 한국에서는 1415년(태조15년)에 가서야 최초로 문헌에서 나타나며, 그 유래는 중국에서 온 것으로 보입니다.
여장은 성벽 위의 수비병이 엄폐할 방어구조물로서, 수비병이 안전하게 공격자를 원거리무기로 공격하고, 공격자가 사다리나 공성기구를 통해 올라올 때 보다 공격자의 원거리무기에서 방호받으면서도 이에 대응할 수 있게 해줍니다.
즉 성곽의 방어에 있어서 여장은 성벽 자체만큼이나 중요한 구조물입니다.
수비병은 여장에 의해 성벽 아래의 적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받는 동시에, 여장은 수비병이 성벽 아래의 적을 인식할 수 있는 넓은 시야와 공격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 공간을 제공해야 합니다. 화약의 시대 이전까지 성곽의 여장은 이 2가지 조건을 동시에 만족하기 위해 발전해왔습니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한번 그림을 통해 살펴보시죠.
수비병이 성벽 위에 있을 때 여장은 수비병을 성벽 아래쪽으로부터의 원거리 공격에서 엄폐시켜줍니다. 사다리를 사용하여 공격자가 성벽을 오를 경우에도 수비병은 엄폐된 상태에서 공격자를 상대할 수 있습니다.
즉 여장이 없거나, 너무 낮으면 성벽은 산이나 언덕과 다를게 없습니다. 단지 장애물에 불과하죠.
우리나라의 여장(女墻)의 높이는 다만 몇 척(數尺)에 지나지 않으므로 성을 지키는 이가 몸을 숙이고 허리를 굽혀 쥐처럼 업드리더라도 적의 탄환을 피할 수가 없다.
서애집 14권 잡저
임진왜란 당시 한국 성곽의 여장이 낮아서 엄폐가 어려운 문제가 있었는데, 이는 여장의 중요성을 환기시켜주는 좋은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여장의 높이가 너무 높아서도 안됩니다. 성벽에 사람이 없으면 성벽은 다만 장애물에 불과하죠. 수비병은 자신을 보호하는 엄폐와, 공격을 위한 적절한 시야와 공간이 필요합니다. 성벽이 너무 높으면 그 너머의 적을 공격할수 없겠죠.
마찬가지로 여장의 두께가 너무 두꺼워도 문제입니다. 수비병이 여장 너머에서 공격할 때 보이지 않고, 공격도 불가능한 사각이 생기고 이는 성벽의 방어력을 약화시킵니다.
때문에, 성벽 위의 여장은 이 엄폐와 시야라는 2가지를 모두 만족시키기 위해서 요철(凹凸)형 구조를 고대로부터 도입하게 됩니다. 이 구조는 비교적 간단한 방법으로 수비병이 머리까지 완전히 엄폐되면서도 상대적으로 넓은 시야와 공격각도를 제공합니다.
이 2가지를 만족시키는 여장의 구조는 화약의 등장 이전까지 축성기술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한국 성곽의 여장은 어땠을까요?
---복원된 수원 화성의 여장, 여장은 의궤상에선 벽돌로 보이지만, 실제론 돌도 사용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목격하는 한국 성곽의 여장은 대부분 복원된 결과물로서, 주로 적어도 숙종 시기에 가서야 벽돌과 석회 모르타르를 사용하여 총안이나 요철형 구조가 사용된 위와 같은 여장이 일부 주요 성곽에 제한적으로 도입됩니다.
여장을 쌓을때 석회 모르타르가 제한적으로나마 사용하는건 빠르게 잡아도 남한산성의 남옹성 축조 시기인 1638년으로 잡아야 합니다. 그 이후에도 여장에서 석회를 사용하는건 아주 일반적인 일은 아니었고, 영조, 정조시기에 가서야 확대되었습니다.
즉, 한국 석축성곽의 여장은 약 1600여년간 그냥 돌을 쌓아서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성벽과 달리 여장의 성돌은 그다지 큰 편도 아니고, 너비는 1m 이하에 불과합니다. 메쌓기 방식으로 지어진 돌담과 같이 시간이 지나면 태풍이 불거나, 대량의 비가 내리면 조금씩 무너지면서 흔적만 남게 되는거죠.
그 결과, 현대에 남아있는 한민족의 성곽유적에 남아있는 여장들은 존재했다는 흔적만 남아있어서 존재는 알 수 있어도, 그 구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없습니다.
여장에 사용된 돌들은 삼국시대나 고구려시대나 잘 가공된 석재라기보다는 일반적인 돌담처럼 조잡한 자연석이나 할석들로 쌓아올린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석재를 사용하면서 우리가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여장들처럼 요철(凹凸)식 구조나 총안(銃眼) 구조로 여장을 쌓아올리는건 좀 까다로웠을 것입니다.
----평안남도 순천군 요동성총(遼東城塚) 벽화에 묘사된 요동성도(遼東城圖) 모식도----
국내 사학계에서는 고구려 성곽의 여장구조가 다양하게 존재했다는 근거를 요동성총의 벽화를 통해 재기하기도 합니다. 위 그림에 묘사된 요철 형태의 돌출부위가 성벽의 여장을 묘사한 것이라는거죠. 좌하단의 삼각형이나 凸 모양의 돌출 부위 안쪽의 구멍모양이 화살을 쏘는 사혈(射穴)이라고 서길수의 "高句麗 築城法 硏究"에서 추정합니다.
이런 해석이 국내에서 많이 인용되기는 하지만, 이 돌출물은 여장을 묘사했다기 보다 성벽 돌출구조물인 치성(雉城)을 묘사했을 가능성이 더 커보입니다.
요동성은 토성(土城)으로 추정되는데, 그 위에 여장이 있었다면, 흙으로 된 토담이거나, 메쌓기 방식으로 자연석을 쌓아서 여장을 만들었을 것이고, 구멍을 뚫는게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복잡한 구조였을 가능성은 낮아 보입니다.
----용강대묘 벽화에 묘사된 고구려 건축물---
북한 평안남도 남포시 용강군 용강읍의 고구려 유적인 용강대묘 벽화에는 손상이 심해 확실히 알아보긴 어렵지만 고구려 건축물의 묘사도가 존재합니다. 누각 사이 성벽이나 담장으로 보이는 것이 성벽이라면 성벽위에는 요철(凹凸)형 여장이 아닌 평평한 여장, 또는 목재로 추정되는 구조물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이것이 성이 아니라 저택이나 왕궁이라면 성벽이 아닌 담장과 기와지붕 형태였을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런 내용만으로 메쌓기 방식의 석축성곽의 여장이 요철형이나 총안과 같은 구멍을 가지는게 불가능하다고 결론내릴 정도는 아닙니다.
----북한산성의 수구문 서쪽의 여장, 북한산성 지표조사 보고서 참조----
자연석이나 가공하지 않은 단순히 쪼개낸 할석을 사용해서 매우 조잡하긴 하지만, 조선 후기인 숙종대에 건설된 것으로 보이는 북한산성의 복원 이전 여장은 총안(銃眼)구조를 만들기도 합니다. 벽돌이나 가공석을 사용한 남한산성이나 수원화성에 비해서 이런 형태가 조선 후기에 사용된 보다 일반적인 여장 형태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북한산성 여장의 경우 완전 자연석이 아니라 비교적 납작한 성돌을 사용하고 강회로 발라서 마감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산성의 대부분의 여장들은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고 기단부만 남아 있어 자연석을 메쌓기로 쌓은 여장이 쉽게 무너져 버린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는 내부를 석회 모르타르로 채우는게 아니라 외부의 마감시에 제한적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내부를 흙으로 채우고 외부만 강회로 마감하는 경우가 조선 후기 여장에서 나타나는데, 이 경우 수분을 머금은 흙이 팽창하거나, 겨울에 동결하면서 팽창해서 여장의 강회가 탈락하고 결국 붕괴로 이어지게 만들 수 있습니다. 석회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조선 후기 여장이 흔적이나 잔해만 남아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요철형 여장구조가 조선에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정할만한 사료는 선조 시기에 나옵니다.
우리 나라 성첩(城堞)의 제도는 높이가 4척, 너비가 4척 8촌, 두께가 2척 2촌이며, 성가퀴 사이는 높이가 3척, 너비가 1척 7촌인데, 더러는 넓기도 하고 더러는 좁기도 하여 성가퀴의 제도가 같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사이가 넓고 형세가 낮기 때문에 방패가 없이는 외적(外賊)의 탄환(彈丸)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성가퀴의 구멍도 밑으로 나 있지 않고 수평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가까이 오는 적을 쏠 수 없습니다.
예로부터 써 오던 이 제도는 모두 적을 막는 데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조정(朝庭) 의 명령에 따라 중국 제도로 이미 5백여 군데의 성가퀴를 쌓았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30년 3월 3일 (1597년) 순검 박충간이 성의 개축을 아뢰다
여기서 순검 박충간이 말하는 성곽은 선조 29년 11월 24일 비변사의 축성 관련 기록으로 볼 때 한양 도성의 개축에 대한 이야기로 보입니다.
여기서 성가퀴(城堞)의 높이가 4척이고, 그 사이(堞間)의 높이가 3척이며, 구멍이 수평(穴勢平出)으로 나와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가퀴 사이에 아예 여장이 없는게 아니라 일정 높이의 담장이 존재한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이는 적어도 조선 중기의 어느 시점부터 성벽의 여장이 요철(凹凸)형으로 지어지고, 활을 쏠 수 있는 구멍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타(垜)라는 요철형 구조를 말하는 용어 자체가 선조 26년(1593년)에나 최초로 명나라에서 파병된 경략 송응창의 제안으로 최초 등장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임진왜란 이전에도 존재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남한산성 남옹성의 포루여장의 강회 마감----
병자호란이 끝난 다음해인 1638년에 남한산성의 남쪽 성벽에 돌출된 남옹성이 축조되었는데, 이 때 포루의 여장을 마감하는데 강회가 사용됩니다. 본격 찰쌓기라고 하기에는 굉장히 어설픈 이 방식은 조선 중기의 어느 시점에 성벽은 아니지만 여장에 부분적으로나마 찰쌓기 방식이 사용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다만, 석회를 사용하지 않는 조선 전기까지, 그리고 도성이나 핵심 성곽이 아닌 대부분의 한국 성곽들의 여장들은 대체로 복잡한 구조가 아니라 성벽 위에 평평한 돌담이 일정 간격으로 배치된 형태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언양읍성 남문의 복원된 여장-----
언양읍성의 복원된 여장을 보면, 메쌓기 방식으로도 요철형이나 총안을 가진 여장을 쌓는게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런 복원 여장은 자연석이나 할석을 사용하고자 한게 아니고 가능한 성벽이 건축된 방식을 재현하기 위한 것으로서, 실제 불규칙해 보이는 할석을 사용하되 조선시대와 달리 섬세하게 성돌을 가공하면서 쌓은 결과물입니다.
그냥 휙 보기에는 불규칙한 것처럼 보여도, 자세히 살펴보면 고구려나 신라 시대보다 훨씬 섬세하게 가공된 돌로 쌓여있으며 당연하게도 이런 성돌로 여장을 쌓았을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북한산성 부왕동 여장보다 작은 자연석이나 할석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요철형 구조로 만들었다간 금방 허물어졌을 겁니다.
한국 성곽의 여장에 요철(凹凸) 구조가 도입되었다면, 아마도 중국으로부터의 영향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중국의 최초 도입 및 보급 시기를 알 수 있다면 고려나 조선시기의 여장의 변천과정을 추정하는데 도움이 되겠죠.
중국은 언제부터 성곽의 여장에 요철형 구조가 사용되었을까요?
위에서 소개한 후한 시기의 석명(釋名)에서 가운데 구멍(孔中)을 가운데 빈 공간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 해석대로라면 요철형구조가 후한 시기에도 존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합니다.
----당나라 이덕태자 이중윤(李重潤)의 묘실 벽화에 묘사된 누각과 성벽 여장----
측천무후의 아들 당중종 이현의 차남 이중윤(李重潤)은 측천무후에 의해 자살이 강요되어 사망했습니다. 이후 706년 당중종이 즉위하여 복권되어 건릉에 매장되었습니다. 그의 묘실 벽화에는 당나라 장안의 황궁 대명궁(大明宮)으로 추정되는 누각과 성벽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장은 독특한 凸자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누각의 하부구조는 벽돌로 되어 있습니다. 벽돌을 사용했다면 이런 凸자로 규격화된 여장을 제작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황궁 이외에 일반적인 성벽도 이런 구조였는가는 의심스럽습니다. 남송 이전까지 중국의 주류 성곽은 주로 토성(土城)이었기 때문입니다.
토성으로 성벽을 쌓은 후 토담을 쌓아서 여장을 만들었다고 가정할 수 있습니다. 토담을 쌓아서 요철형 구조를 쌓고 유지하는게 가능할까요?
판축토성은 나무로 틀을 만들고 흙을 쌓고 단계적으로 절구로 다져서 성벽을 만듭니다. 성벽처럼 토담도 판축 방식으로 비교적 튼튼하게 만드는 것이 가능합니다. 근데 요철형 구조로 만들 수는 있을까요?
----진흙벽돌과 진흙모르타르를 사용한 이란 케르만 주의 Rayen 성----
건조기후에서는 아예 불가능한건 아닙니다. 진흙이나 진흙벽돌로 만들어진 성벽들이 있거든요. 현재의 여장은 복원된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이런 형태가 유지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비가 일정 이상 내리는 곳에서는 성벽과 달리 얇은 토담 형태의 여장이 요철형으로 만들어지면 침식되거나 무너질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토성여장은 남아있는 경우도 거의 없으며, 요철형 구조의 흔적도 찾기 어려운데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중세 후기에 스페인의 판축 방식으로 만들어진 성곽의 여장----
굉장히 드문 사례로, 스페인의 독특한 판축방식인 타피알(Tapial)로 지어진 성벽에는 요철형 여장(Battlement)이 현재에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스페인도 건조기후에 속한다고 봐야하고 게다가 현재 남아있는 이러한 타피알 방식의 성벽은 일반적인 토성과 다릅니다.
---스페인 Castillo de Yanguas의 여장, 흙을 판축했다기 보다 돌덩어리에 가깝다.---
스페인의 타피알 방식 성벽은 동북아의 판축토성과 달리 석회가 상당량 들어가, 거의 돌덩어리에 가까우며 일반적인 토성벽에 비해 물에 의한 침식에 잘 저항합니다. 동시기의 동북아 토성들이 정말로 흔적만 남고 침식되는 경우가 많은데 비해 차이가 분명합니다.
---중국 산시성에 있는 통만성(統萬城) 유적---
중국의 5호16국의 하나인 하(夏)나라 시기에 건설된 통만성(統萬城)은 증토축성(烝土築城)하였다는 문헌기록, 즉 석회와 물이 반응해 끓어오른다는 묘사가 존재할 뿐만 아니라 실제 위와 같이 실제 유구에서 석회가 사용된 성벽이 확인됩니다. 몽촌토성이 이 방식으로 건축되었다는 주장도 있긴 한데, 통만성 유적을 보시면 알겠지만 한반도 토성과 아예 다르게 생겼습니다.
이런 방식의 토성은 동북아에서는 극히 예외적인 사례에 불과한데다, 통만성에서조차 여장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즉 대부분의 동북아 토성들의 여장은 석회를 사용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고, 요철형이 아니라 평평한 토담으로 이어지는 형태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판축 방식으로 만들어진 일본 히메지성의 담장과 그 위의 기와지붕, 일반적으로는 목재로 뼈대를 만들고 진흙을 바르는 방식을 쓴다.---
전국시대 후기인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이후 일본 성곽의 여장은 주로 흙으로 만든 담장인 도베(土塀)입니다. 여기서도 구멍을 뚫어 하자마(狭間)이라는 총안을 만들기는 하지만 요철형 구조는 나타나지 않는데, 이는 흙이나 목재로 만든 담장이 내리는 비에 젖어 침식되거나 썩지 않도록 지붕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조선시대 한국의 토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1764년~1845년)가 쓴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는 "담을 가리는 덮개가 없으면 불길하다."고 설명하는데 일본의 도베의 지붕과 마찬가지의 이유로 보입니다.
강남지방은 우리의 장마처럼 매우(梅雨)라고 하여 남부와 장강유역 일대에 장마가 발생합니다. 북송 시기도 송나라의 수도가 위치한 허난성 같은 경우, 강수량이 여름철에 집중되는건 마찬가지입니다.
당연히, 송나라 토성의 경우에도 무언가 덮개를 사용하던 해서 토담을 보호하기 위해서든, 아니면 최소한 침식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요철형 구조는 사용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를 추측할 수 있는 문헌자료는 남송 시기 금나라 상대로 수성전을 이끌었던 진규(陳規)가 쓴 수성록(守城錄)입니다.
----진규가 수비했던 덕안부는 양양성에서 160km 정도 떨어져 있었습니다.----
진규는 1126년 정강의 변으로 송나라가 수도였던 개봉을 잃은 직후인 1127년 현재의 후베이성 안루시인 덕안(德安)에서 금나라 군대 상대로 수성전을 벌여 지켜내는데 성공합니다. 그 후 1132년에 수성전에 대한 책인 수성록(守城錄)을 집필하였습니다.
수성록은 북송 시기 무경총요와 영조법식과 함께 이 시기 송나라 성곽이 어떤 형태였는지 추정하게 해주는 중요한 문헌기록입니다. 실제로 무경총요보다 수성전과 성곽구조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기록이기도 합니다.
여두장(女頭牆)은 옛제도에서는 성벽 바깥 가장자리에 약 6척의 땅마다 1개를 설치하며, 그 높이는 5척을 넘치 않게 하는데 산(山)자 모양으로 만든다. 양쪽의 여두(女頭) 사이에는 여구(女口) 1개가 들어간다.
여두(女頭)는 구각목(狗腳木) 1개를 세워서 가죽과 대나무를 엮은 방패 1개를 매달아서 화살과 돌을 막으며, 또한 투석기에서 발사된 돌이 넘어오는 일이 없도록 막는다. 여두(女頭)가 낮고 작으면 성 바깥의 화살이 성을 지키는 수비병의 얼굴에 맞을 수 있다.
수성록(守城錄) 2권 수성기요(守城機要)
여기서 보면, 성벽 위의 여장(女墻)에 요철형 구조 형태로 수비병을 보호하는 구조물이 어떤식으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장 위에 돌출하게 되는 여두(女頭)는 여장자체의 돌출구조물이 아니라 나무기둥을 세우고 가죽과 대나무를 엮은 방패(竹篦籬牌)를 매달아서 만듭니다.
말로 설명하기 까다로와 보이는 이것은 명나라 1621년 모원의(茅元儀)가 지은 무비지(武備志)의 삽화와 소개를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비지에서는 구각목에 대하여 여장안쪽에 여장과 같은 높이의 기둥 2개를 설치하고 가로로 무언가 걸 수 있는 갈고리가 있다고 설명합니다.(施橫鉤掛) 여기에 가죽을 씌우고 대나무로 엮은 방패를 매달면 무비지에 묘사한 목여두처럼 성벽 위에 돌출된 구조물이 생겨납니다.
실제 이 내용은 북송 시기 무경총요전집의 12권 수성(守城)편에 나온 내용들을 인용한 내용에 가까워서, 송나라 시기의 구조물 삽화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물론 시기가 지나서 오해하거나 잘못 그려질 수도 있습니다.
이 여두(女頭)는 송대의 영조척(31.2cm) 기준으로 156cm에 달하는 높이입니다. 송사(宋史)의 병지(兵志) 7권의 병력모집기준(召募之制)에 따르면 1047년부터 5척 7촌 이상(178cm)의 키에 해당하는 이들은 금군(禁衛)에 속하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만 중세에 이런 키가 일반적이었을 것 같지는 않고, 150cm 정도가 평균키라고 본다면, 성벽 아래의 적에게 화살을 쏘거나, 사다리를 타고 붙은 공격자를 수비병이 가슴 높이의 여장 높이는 90~110cm 정도였을 것입니다.
----수성록에 묘사된 여장 구조에 대한 추정도----
아마도 남송 시기의 여장은 평평한 형태의 담장이 성벽 위에 축조되고, 가죽을 씌운 대나무 방패로 수비병이 완전히 엄폐되는 돌출구조물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약식 구조물은 주로 긴 성벽 위에 일정 거리마다 설치되고, 핵심 방어거점인 수성록에는 마면(馬面)이라고 부르는 성벽에서 돌출한 치성 구조물위에는 누자(樓子), 적루(敵樓), 전붕(戰棚)라 불리는 목재 구조물을 세워 수비병이 엄폐하면서 공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중국 역사에서 타구(垜口)라 불리는 요철(凹凸)식 여장의 본격적인 보급은 남송 시기 판축토성 방식으로 만들어진 성벽의 표면을 벽돌과 석회로 포장하는 방식의 벽돌성곽이 보급되기 시작한 시점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가능했을 것입니다.
----내부는 판축토성, 외부를 벽돌로 포장한 중국 성벽 단면도----
요나라와 금나라가 건설한 성곽 883개 중 14개 만이 벽돌을 사용했습니다. 벽돌로 토성 외벽을 일종의 옹벽처럼 감싸는 방식이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벽돌성곽은 전혀 일반적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남송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송나라 시기에 건설되거나 전대로부터 유지된 성곽의 수는 363개에 달합니다. 이중에 23%만이 벽돌을 사용했습니다. 전대로부터 15개가 이어졌고 북송시기에 23개의 벽돌성곽이 남송시기에 46개의 벽돌 성곽이 건설되었습니다.
이 시기 가장 치열한 공성전을 치른 양양 공방전에서, 몽골군이 실질적으로 공성에 성공한 것은 양양성 북쪽의 번성(樊城)이었는데, 이 성도 당시에 토성(土城)이었습니다.
남송 시기는 분명히, 새로운 군사적 위협에 대응하여 벽돌성곽의 사용이 확장되기는 했지만, 아직 과도기적인 시기였습니다. 벽돌성곽의 광범위한 보급은 원나라 시대를 지나 명나라로 전환된 이후에야 가능해졌습니다. 원나라 시기 수도인 대도 역시 벽돌로 포장하지 않은 토성이었을 정도니까요.
명나라 시기에도 여전히 벽돌로 포장되지 않은 토성이 적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기효신서에서는 성곽의 높이와 너비에 대한 기준에 대해 벽돌로 포장하지 않은 경우와 포장한 경우를 별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동아시아에서 요철형 여장의 보급은 15세기 이전까지는 매우 드물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동아시아에서 가장 첨단의 축성 및 수성기술을 자랑했을 송나라 조차도 동시기 유럽이나 중근동, 인도에 비해서 성벽 위의 여장구조물의 방어력은 매우 제한적이었습니다.
----송나라의 성곽 상부구조물과 비교할 만한 중동과 유럽의 성벽 방어구조물 발전의 절정기 모습---
찰쌓기와 석조성벽이 조합된 유럽, 중동의 여장(Battlement)에서 요철구조(Crenellation)는 중세가 아닌 고대에 탄생했습니다. 송나라가 벽돌성을 이제 막 도입하다가 멸망한 시점에는 아예 성벽 하단의 사각을 없앨 수 있는 영구적 구조물인 Machicolation이 등장했으며, 성벽 틈새로 넓은 시야를 보장하는 Arrowslit은 수비병이 거의 완벽히 엄폐된 상태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보장했습니다.
송나라 토성의 여장은 이런 구조를 만들어내기 어려웠습니다.
때문에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추가적인 방어시설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수성록이나 무경총요에서는 방어에 필수적인 구조물로 성벽 위의 목재 방어구조물의 중요성을 반복적으로 강조합니다.
이는 아마도 거의 유사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 전기의 성곽들도 동일하게 가지고 있는 문제였을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도 이런 상황을 무력하게 방치하지 않았습니다. 송나라와 마찬가지로, 성벽 위의 여장의 취약한 방어력을 만회할 수 있는 추가적인 방어시설이 만들어졌습니다.
우리 조상들 역시 송나라 사람들처럼 익숙하면서, 가공이 용이한 재료를 사용했습니다. 바로 목재였습니다.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도 석축 여장구조가 동시대 다른 지역에 비해 미약했다니 확실히 쌈을 많이 하긴했어도 유럽이나 북아프리카보다 정도가 덜 했나보네. 동아시아는 방어시설을 지을때 저런 부가구조물을 돌과 석회로 한큐에 쌓는것보다 나중에 목재로 보강하는걸 더 좋아했나
여장의 발달이 토성에서 늦었을거란 부분은 생각도 못했는데 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과거 동유럽 목재성이나 중동 레바논 산맥 산악지역의 요새들을 다룬 여행기들에도 비슷한 구조 설명을 본거 같은데 이 글을 읽고나니 여장 묘사였을거 같네요
성위에 올리는게 여장이라는걸 오늘 알았음 ㅠㅠ - dc App
... 그럼 실제 동양의 성들은 드라마랑은 다르게 그렇게 멋있지는(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않았겠네 여장도 나무로 설치하고 토성이고..
한동안 안올라와서 연재중단한줄 알았자너 계속 연재해서 수원화성까지 써주셈
자료조사나 공부를 하면서 써야해서.. 늘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여장과 다음 글에 나올 성랑 같은거는 설명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는 중요한 부분이기에 외전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런 멋있는 성들도 남아 있음 대부분 15세기 이후 성들이지만 - dc App
당장 시안 성벽 같은 거 보면 장난 아님 - dc App
돌과 시멘트로 쌓은 유럽의 성들과는 달리 중국의 성은 흙벽돌로 쌓은게 대부분이니깐 초라할 수 밖에.
성벽위에서 남자가 여장했는데 저격마렵지
여장어디 - 시진핑개새끼
성랑! 성랑! 성랑!
동아시아의 성들을 보니 중세 유럽의 성들에 비해서는 손나 후달려 보이네. 이게 바로 서양과 동양의 격차란 걸까?
왠지 북한산성 여장은 황자 나 현자 같은거 놓고 쐈을거같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