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는 Kursk 1943: The Greatest Battle of the Second World War, by Roman Töppel  


 


 


붉은 군대에게 쿠르스크는 대조국전쟁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투 중 하나였다. 소련, 이후 러시아가 발표한 쿠르스크 전투의 ‘공식적인’ 사상자 수치에 의하면 7월 5~23일의 기간 동안 보로네즈 전선군은 약 74,000명의 병사들을 손실했고, 그중 27,500명이 완전손실(전사 혹은 포로)이었다.  


이러한 ‘공식’ 수치는 물론 연구자들 사이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실상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했다는 비판 또한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상기한 보로네즈 전선군만 해도 1943년 7월 24일 사상자 보고서를 상부에 제출했는데, 여기에 의하면 전선군이 7월 22일까지 손실한 인명만 이미 101,000명에 달했다. 


이중 전사는 20,500명, 실종은 26,000명으로 종합하면 ‘공식’ 사상자 수치보다 1/3이나 높은 수준이다. 이 수치에 7월 23일 발생한 전투는 포함되지 않았다는 사실까지 감안하면 실제로 7월 23일까지 발생한 사상자 수는 공식 수치보다 최소 40%는 더 많았을 것이다. 


쿠르스크 전투의 방어 단계에 참여한 다른 두 전선군에도 동일한 비율을 적용할 경우, 방어 단계에서 발생한 소련군의 인명 손실은 약 250,000명이 된다. 약 58,000명에 달하는 독일군 사상자와 비교하면 약 4:1의 비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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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소련의 역공세 단계까지 고려할 경우 숫자는 더욱 무시무시해진다. 러시아의 ‘공식’ 수치는 공세 단계까지 포함한 쿠르스크 전투의 ‘총’ 사상자 수치를 약 863,000명으로 헤아린다. 이에 회의적인 러시아 학자들은 91만명부터 무려 230만명까지 다양한 수치들을 제시하지만, 상기한 40%의 비율을 감안하면 약 120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대략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조차도 굉장히 보수적인 추정치다. 소련군 인명손실의 신뢰도 높은 계산으로 유명한 러시아 역사가 보리스 바디모비치 소콜로프에 의하면, 쿠르스크 전투에서 발생한 소련군 ‘전사자’만 무려 999,300명에 달한다. 한편 독일군 기록에 의하면 쿠르스크 전투에서 발생한 국방군 및 무장친위대의 총 사상자는 203,000명으로, 이 경우 우리가 추정한 쿠르스크 전투의 총 인명손실 비율은 약 6:1에 이른다. 


그리고 1943년 7월과 8월, 붉은 군대는 전 전선에 걸쳐 약 9,300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손실했다. 그리고 이중 약 7,000대가 쿠르스크 전투에서 격파된 것으로 보인다. 이때 독일군은 1,200대를 잃었으므로 총 차량 손실비 또한 6:1에 달하며, 항공기는 3,000대와 650대로 약 5:1의 손실 비율을 보인다. 


이렇듯 붉은 군대는 1943년 여름 승리를 위해 정말 엄청난 비용을 치러야 했다. 그런데 이러한 결과들을 살피다 보면 문득 궁금해진다. 소련군은 대체 왜, 그 모든 전략적 이점과 정교한 방어진지, 수적 정보적 우위를 가지고도 이토록 엄청난 피해를 입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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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 전차부대와 독일 공군은 뚜렷한 전술, 기술적 우위를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뿐만 아니라 독일군 보병대 또한 Mg 42 기관총의 도입으로 화력 면에서 상당한 개선이 이루어진 상태였다. Mg 42는 초당 25발의 발사속도를 지닌 극도로 뛰어난 무기였다. 그리고 추후 성채 작전에 참가하게 될 독일군 부대 상당수가 1943년 봄이면 이미 이 기관총을 보급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단순히 기술력 차이만 고려하기에는 훨씬 중요한 변수들이 많이 있었다. 독일 육군은 제병 협동에 있어 여러 병과 간의 유기적 협동을 특히 중요하게 여겼다. 또한 전선에서 병사들을 직접 지휘하는 행위를 장려했고 임무형 전술 또한 강조했다. 독일 국방군은 이러한 전술적 개념들 덕분에 훨씬 우월한 적수들을 상대로 몇 번이고 놀라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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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 포병대의 정확한 포격이 1943년 여름 동부전선의 전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그동안 제대로 된 주목을 끌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1943년 7월 14일, 소련군의 강력한 공격에 직면한 48 기갑군단의 사례는 이들이 독일군에게 얼마나 중요했는지 생생하게 증언해준다.  


4 기갑군 본부 전투상보에 의하면 ‘수많은 보병이 계속해서 몰려왔으나 곧 군단 포병대의 완벽한 정밀 포격에 노출되었다.’ 7월 17일 7 보병사단의 전투상보 또한 이렇게 증언한다. ‘포병 연대의 관측 포격이 적의 모든 움직임을 차단했다.’ 


특히 ‘기갑 포병’의 자주포들은 전투에서 그 가치를 입증해냈다. 일례로 1943년 8월 20일 4 기갑사단 103 기갑포병연대 2대대장의 사후보고서에 의하면,  


‘자주포는 거의 완벽하게 안전하다는 장점이 있었고, 이는 과거 동부 전선의 소모전에서 매우 중요했다. 타대대의 포대들은 끊임없는 공습과 포격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2대대에서는 그런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자주포는 위치에 포격이 집중될 때 재빨리 달아날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자리를 지켜야 하는 경우 또한 존재했는데, 이때는 두르고 있는 장갑이 생존에 큰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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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소련군은 이러한 ‘기갑 포병’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자주포’는 엄밀한 의미에서 자주포보단 돌격포와 자주 구축전차에 더 가까웠다. 


이러한 평가들이 무색하지 않게 실제로 1943년 7~8월 독일군 포병대의 탄약소모량은 이제까지의 전쟁 중 최고 수준이었다. 200 돌격포 보충훈련대대장 헬무트 크리스트 중령은 8월 30일부터 9월 22일까지 동부전선을 방문해 병사들의 경험을 기록했다. 그의 보고서 중 한 구절에 의하면 


‘독일군 포병대는 변함없이 우수하다. 그들은 전선의 근간이다. 보병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에도 언제나 전방 관측수들이 있었다. 한 사단장의 증언에 의하면 포병이야말로 그의 최후의 수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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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스크 전투에서 소련군에게 큰 피해를 입힌 또다른 중요 요소는 독일군 폭격기와 급강하 폭격기들의 효율적인 공습이었다. 특히 유명한 Ju 87 슈투카는 적군에게 있어 공포의 대상이었다. 많은 슈투카 조종사들은 잘 훈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전투 경험 또한 풍부했다. 


물론 슈투카는 쿠르스크 전투쯤 되면 이미 구식 항공기에 속했다. 또 이들이 제대로 활동하기 위해선 제공권 장악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쿠르스크의 슈투카들은 대부분의 경우 맡겨진 임무들을 치명적인 정확도로 완수해냈다. 


전쟁이 끝난 후 노획된 슈투카를 몰아볼 수 있었던 한 영국 시험 조종사는 항공기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감상을 남겼다. ‘대부분의 급강하 폭격기에서 경험할 수 있는, 통제 불능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느낌이 없었다.’ 


‘Ju 87은 급강하를 시작하기 전까진 그 진정한 가치를 찾아볼 수 없다. 슈투카는 90도 강하 시에도 비슷한 항공기의 가속도에서 으레 느껴지는 제어 불가능한 폭주의 느낌을 찾아볼 수 없다. 이 항공기에게 수직 강하는 매우 일상적인 기동으로 보인다.’ 


이러한 전술 폭격의 효과는 항공 연락 장교(Fliegerverbindungsoffiziere)들 덕분에 극대화되었다. 이들은 육군과 무장친위대 주요 부대에 파견되어 지상군과 공군의 협동을 조율하는 동시에 조종사들이 공격할 지상 표적을 중계했다.  


여기에 더해 슈투카 혹은 통제 장교(Schlachtflieger Leitoffiziere)들과 항공 무선 통신수들이 지상병력의 전방까지 파견되어 지속적인 직접 무선접촉을 유지했다. 이러한 전술들의 효과는 지상군과 공군의 협력 효율에서 곧바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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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스도이칠란트 전차 연대의 7월 9일자 일일 보고서에 의하면 ‘오후의 공군은 매우 활동적이었다. 적군 공습은 후방에 대한 타격에 국한되어 있었지만 아군 공군, 특히 슈투카들은 아군 선봉대를 훌륭하게 지원했다. 그들은 적 전차와 대전차포, 포병대를 자율적으로 공격했고 주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1943년 7월 11일 9군의 일일보고서는 41 기갑군단의 전투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언급을 남겼다. ‘약 1800시 트럭에 탑승한 적군 보병들이 6~8대의 전차와 함께 253.5 고지를 공격했다. 이들은 배치 도중 슈투카 공습으로 격퇴되었다.’ 


1943년 7월 31일 미우스의 6군 구역에서 포로로 잡힌 한 소련 병사는 이틀 전 시작하기로 계획했던 공격이 포병의 부재로 취소되었다고 증언했다. 슈투카가 전선에 배치된 포병 연대를 완전히 휩쓸어버렸던 것이다. 대조적으로 1943년 여름, 독일군의 부대나 편제가 소련군의 공습으로 완전히 파괴된 사례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슈투카는 치명적으로 정확했을 뿐만 아니라 소련 병사 개개인에게 상당한 심리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들이 강하하며 발생하는 요란한 사이렌 소음은 특히 경험이 부족한 병사들의 사기를 쉽사리 꺾어 놓았다. 그리고 적군의 사기를 꺾는 만큼 아군의 그것은 증진시켰다. 1943년 7월 5일 7 보병사단의 한 병사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슈투카의 울부짖음만큼 듣기 좋은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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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거대한 항공전이 펼쳐진 곳 중 하나가 쿠르스크라는 사실은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쿠르스크에서 공중전은 지상의 전차전 만큼이나 대규모로, 격렬하게 펼쳐졌다. 물론 상술했듯 여기서의 손실비 또한 쿠르스크 전투의 전형적인 손실 경향을 그대로 따라간다. 


소련의 방어와 공세 전 기간을 포함한 쿠르스크 전투에서 소련군은 항공기 3,000대, 독일군은 항공기 650대를 잃었다. 기간을 방어 단계로만 한정하는 경우도 소련군은 약 1,107대, 독일군은 약 277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따라서 방어 단계의 양군 항공 손실비는 4:1 수준이다. 


소련 공군이 이런 피해를 입은 까닭 또한 여러가지가 있다. 우선 첫째로, 당시 소련 공군기는 객관적으로 독일 항공기에 비해 성능이 떨어졌다. 하지만 이것 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당시 양군 항공기의 성능차는 아예 가망이 없을 정도로 절망적인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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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붉은 공군은 전술이 부족했다. 전투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 소련 전투기들은 대체로 지상공격기들을 근접 호위했는데, 이들은 임무의 특성상 보통 낮게 날았다. 물론 소련 전투기들은 저고도에서 가장 뛰어난 성능을 보여주기 때문에 얼핏 생각하면 상관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독일 전투기들은 대체로 고도 4~6km에서 날았고, 소련기를 포착할 경우 강하하며 고속으로 내려와 짧게 사격한 후, 즉시 상승해 재차 공격하거나 이탈했다. 독일과 소련의 이러한 전술은 소련측에 큰 피해를 초래했다. 


1943년 7월 5일, JG 3과 JG 52가 격추한 200여기의 소련기 중 1/3이 2km보다 낮은 고도에서 격추되었다. 소련 조종사들이 이러한 전술을 마침내 바꾸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붉은 공군은 결국엔 호위 전력을 여러 고도로 분산시켜 고고도까지 배치, 위에서 공격하는 독일 전투기들을 쫓아내는 식으로 대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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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식으로 쉽사리 대응할 수 없는 진정한 원인들은 따로 있었다. 경험 없고 훈련도 부족한 수많은 초짜 조종사들이 전쟁 초 당한 어마어마한 손실을 메우기 위해 성급히 투입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붉은 군대는 대숙청의 부분적 영향 등으로 인해 경험 많은 중간 지휘 장교가 부족했다. 


이런 연유로 소련 지휘관들은 자세한 지시들로 구성된 작전 명령을 수령하곤 했다. 이러한 명령들은 보통 행동의 자유를 거의 허락하지 않는다. 그런 ‘명령형 전술’은 하위 지휘관들에게 보다 많은 책임과 기회를 부여하는 독일군의 ‘임무형 전술’과는 대조적이다. 사실 부여보다는 요구에 더 가까웠는데, 전술 수준에서 이러한 자유는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변수가 된다. 


이렇듯 국방군의 뛰어난 전술과 기술, 더 나은 훈련 외에 소련군 스스로가 가지고 있었던 내부의 결함 또한 그들의 대피해에 기여했다. 사실 내막을 살펴보면 소련 육군의 사정 또한 소련 공군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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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 단계의 붉은 군대는 진지 구축과 요새화에 상당히 유능한 모습을 보여줬고, 상대적으로 고정적인 방어의 일환으로 진지들을 악착같이 사수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군 지휘관들은 계속해서 치명적인 실수들을 저질렀다.  


특히 역습 도중 과오가 두드러졌는데, 이들은 부대를 분산시켜 축차 투입하거나 심하면 총알받이로 내던지기까지 했다. 소련군과 소련 사학계 모두가 이런 불명예스러운 사건들을 숨기려 시도한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로 보인다. 


하지만 수많은 사례가 독일군 기록에 보고되어 있으며, 참전자들의 회상 또한 완전히 침묵시킬 수는 없었다. 한 예로 소련 3 전차군단과 307 소총사단은 1943년 7월 8일 포니리를 향해 무려 11차례의 공격을 퍼부었으나 모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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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집중공격을 퍼붓기보단 병력을 소규모 부대로 분산시켰는데 당시의 약화된 독일 방어선은 집중공격시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7월 8일 18 기갑사단 무전수 안톤 뵈물러는 소련군의 포니리 공격이 단 한 대의 페르디난트 구축전차에게 격퇴당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600~700m 떨어진 곳에 전선과 평행하게 뻗어 있는 분지가 하나 있었는데, 어떤 전차도 숨길 수 있을 만큼 깊었다. 러시아 전차 지휘관은 첫번째 T-34를 그곳에 보냈다. 놈은 살금살금 다가왔고 주포와 포탑을 내밀자마자 아래에서 타격을 받았다. 섬광이 번쩍이더니 전차는 뒤로 굴러갔다. 


 무려 14번째 전차가 그렇게 될 때까지 이런 일이 반복되었다. 모든 전차가 격파되었다. 그러고 나서야 2대의 전차가 동시에 나란히 서서 전진해왔다. 첫번째 전차는 포탑을 내밀자마자 격파 당했다. 두번째는 평지까지 거의 도달했지만 곧 폭발해 화염에 휩싸였다. 러시아 지휘관은 마침내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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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후인 1943년 7월 10일, 48 기갑군단의 전투상보는 이렇게 기록한다.  


‘군단 참모총장과 무장친위대 기갑군단 참모총장 사이의 정보 교환 결과 일관적인 경향이 도출된다. 양 군단 전방에 위치한 수많은 강력한 소련 기갑부대들은 조직적인 주요 공세에 동원되지 않는다. 적들은 보통 20~30대의 전차로 구성된 소규모 단위로 공격한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아마 러시아 보병의 낮은 전투력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 대부분은 너무 늙거나 너무 어린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어 중년 나이대의 병사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따라서 적은 보병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전차들을 분산시킬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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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 단계뿐 아니라 역습 단계에서도 유사한 보고들은 계속된다. 쿠투조프 작전에 맞선 46 기갑군단 35 전차연대 1대대의 1943년 8월 21일자 보고서에 의하면,  


‘적 전차들은 계속된 손실로 인해 결국 개활지에서 상당한 거리를 유지하게 되었다. 공격 시 그들은 보병 지원에 힘입어 골짜기와 마을을 통해 진격했다. 이러한 작전은 아군 보병을 상대로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곧 반사면에서 대기중이던 아군 전차에 격파되었다.  


이제 공격에 더 유리한 위치를 선택할 수 있는 유연성이 상실되었다. 허나 이미 수대의 전차가 격파 당한 상황에서도 그들은 끈질기게 공격을 이어 나갔다. 적군은 전차를 보병 지원에 사용하는 대신, 여단 단위로 모아 (독일식의) 돌파에 활용하려 했다. 


하지만 러시아 전차장들은 적 전선을 뚫은 후에도 공격을 속행할 만큼 숙달되지는 못했다. 대신 그들은 가만히 서서 상황을 관찰하다 그대로 격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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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트 중령의 또다른 보고서는 1943년 여름 소련군 보병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을 묘사한다. 


‘러시아 보병은 일반적으로 매우 미숙하며 보통 전차의 지원이 있어야만 공격한다. 이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큰 손실을 입었고 훈련도 거의 받지 못했으며, 투지 없이 전진하고 기본적으로 지도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포로로 잡은 한 중위는 사실 서류 정리원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떤 훈련도 받지 못한 채 난데없이 30명의 ‘소대’를 지휘하게 되었고, 그대로 독일군 진지 공격을 앞장서 이끌라는 명령을 받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진술들이 단순하고 기만적인 선전 기록물에서 발췌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들이 담긴 보고서는 군 지휘부에 교훈을 주기 위해 최대한 제대로 작성된 기밀문서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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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소련군의 문제점은 병사들의 불충분한 훈련, 소련 하급, 중급 지휘관들의 경험부족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소련 상급 지휘관들의 지휘 실수 또한 붉은 군대가 입은 어마무시한 손실의 원인이었다. 


소련 지휘관들은 1943년 7월 12일 노보실과 프로호로프카, 7월 15일 포니리와 테플로에, 17일 드미트리에브카와 쿠이비세보처럼 독일군 전선의 가장 강력한 구역에 몇 번이고 정면공격을 시도했다. 많은 소련 지휘관들은 간단히 말해 손실을 신경 쓰지 않았으며, 전쟁 후반에도 ‘무의미하고 피비린내 나는 공격’에 병사들을 끊임없이 밀어넣었다. 


이러한 손실의 규모는 완전히 은폐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너무 거대했다. 따라서 소련 지휘관들은 어떻게든 자신을 정당화해 무능하다는 비난을 피해가야 했다. 스탈린은 이미 경고를 날린 바 있었다. 실패한 지휘관은 체포되거나 심지어 처형당할 수도 있었다. 


실패, 혹은 높은 손실을 정당화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적군의 전력을 과장하는 동시에, 적군 또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보고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엔 부작용이 따랐다. 


붉은 군대의 성공을 다룬 과장된 보고서에 끊임없이 노출된 소련 지도부는 결국 그들의 군대가 이제 약하고 취약한 독일군 부대만을 마주하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스탈린이 가장 강력한 독일군 부대에 대한 정면 공격을 거듭 지시한 이유 중 하나는 이것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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