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원의 억울한 전투코끼리-쿠르스크의 페르디난트
· 강철과 불과 살점-대전차포병의 쿠르스크 참전기
· ???: 소련은 쿠르스크에서 왜 이기고도 진것 같지?
출처는 Kursk 1943: The Greatest Battle of the Second World War, by Roman Töppel
쿠르스크 전투는 독일군의 패배로 끝났다. 1943년 여름 독일 지도부는 성채 작전의 그 어떤 목표 하나 달성하지 못했다.
소련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쿠르스크 지역의 소련군 부대를 포위한다는 계획은 완전히 실패했다. 돌출부를 잘라내 전선을 축소시켜 새로운 예비대를 확보한다는 목표 또한 무산되었다. 쿠르스크 전투를 통해 전세계에 메세지를 전달하겠다는 히틀러의 의도 하나만은 어느정도 달성되었다. 비록 그가 원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내용이었지만.
독일 전쟁 경제에 숨통을 트일 노예의 확보 또한 불충분했다. 쿠르스크 전투에서 붙잡은 40,000명의 소련 포로는 본국의 노동력 부족을 해소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1943년 남은 기간만이라도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소련군의 공세 역량을 충분히 분쇄한다는 마지막 목표 또한 좌절되었다.
물론 소련군이 쿠르스크에서 입은 피해는 처참했고 그들은 분명 약화되었다. 하지만 소련 연방은 여전히 예비 전력을 갖추고 있었고, 1943년 7월부터 전 전선에 걸쳐 공세를 시작했다.
다만 독일군이 쿠르스크 전투, 정확히는 쿠르스크 공세에서 입은 손실은 이를 둘러싼 수많은 신화들에 비하면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다. 소련 사학계는 물론 구데리안, 멜렌틴 등 많은 독일 장성들이 이런 전설의 탄생을 부채질했다. 하지만 기록을 살펴보면 독일군의 피해 자체는 쿠르스크 공세의 실패와는 별 관련이 없었던 듯하다.
1943년 7월 5~23일의 소련 방어 단계에서 독일군은 대략 10,000명의 전사자, 46,000명의 부상자, 2,000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다. 그리고 같은 기간 독일 기갑부대가 완전손실한 전차와 자주포의 대수는 겨우 350대에 불과했다. 공군 또한 277대의 항공기를 손실했을 뿐이었다. 소련 역공세까지 포함된 쿠르스크 전투 기간이라 해도 독일군의 총 인명손실은 203,000명, 전차 1,200대, 항공기 650대 수준에 그친다.
소련군의 피해와 비교해보면 독일군의 사상자는 보잘것 없어 보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렇게 결론짓는 건 너무 성급한 행위다. 독일군의 입장에서는 이정도 피해도 무시할 수 없는 출혈이었다.
하지만 여러 기록을 살펴보면, 독일군은 쿠르스크 공세보다는 오히려 이어진 1943년 하계 방어전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이후 독일 동방군의 전력은 심각한 수준까지 감소한다. 한 예로 국방군 손실부(Abteilung wehrmachtverlustwesen) 보고서에 의하면 도네츠 분지의 6군은 1943년 7월 11~31일의 20일 동안 총 18,673명을 잃었다.
이 수치는 1943년 7월 1~20일의 20일 동안 켐프 분견군과 4 기갑군에서 발생한 손실을 능가하는 수치다(각각 17,769명, 15,702명). 한편 4 기갑군은 1943년 8월 21일부터 31일까지의 10일 동안 성채 작전에서 20일간 발생한 것과 거의 동등한 손실이 발생했고(14,545명), 켐프 분견군은 그마저도 훨씬 능가했다(23,470명).
이렇듯 1943년 동부전선의 독일군이 큰 피해를 입었다는 독일 장성들의 주장은 어느정도 뼈를 품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설명과는 달리 그 정확한 계기는 결코 쿠르스크가 아니었다. 독일군을 진정으로 황폐화시킨 것은 1943년 하계전역 자체였다.
7월부터 10월까지 독일 동방군이 손실한 총 인원은 무려 911,000명에 달했다. 하지만 소련과는 달리, 이들의 빈자리를 메우게 될 보충병력은 고작 421,700명에 불과했다. 이제 독일군은 1943년 9월 9일 괴벨스가 적었듯 ‘병사들은 지쳤고, 사단들은 피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독일군으로썬 쿠르스크 하계공세의 실패 자체도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히틀러는 1943년 7월 초 일일 명령에서 여전히 ‘올해 첫번째 공격의 막대한 중요성’과 ‘1943년 첫 주공세의 성공’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번 공격은 ‘평범한 승리’를 훨씬 넘어설 결정적인 것이었다.
병사들에게 전달될 또 다른 명령에서 그는 이렇게 선언한다. ‘오늘 그대들은 대공세를 시작한다. 이 작전의 결과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게 될 것이다.’’전투의 성공에 모든 것이 걸려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사실, 그는 병사들의 동기부여를 위해 다가올 전투의 중요성을 의도적으로 과장했다. 그동안 아주 잘 먹혀왔던 전형적인 히틀러식 선전이었다. 하지만 1943년 여름, 이제 그 전술이 역으로 그의 목을 졸라왔다.
‘결정적’이어야 했을 하계공세가 북부에선 1주일, 남부마저 2주일만에 줄줄이 취소되면서 병사들을 경악시켰다. 1943년 7월 16일 7 보병사단 칼 프레이강 중위는 일기에 적었다. ‘후퇴해야 한다! 그 모든 희생이, 모든 노력이 전부 무위로 돌아갔다. 난 분노와 슬픔으로 울었다.’
마르쿠스 폰 부세 소령은 총참모부 조직부의 명령에 따라 8월 12일부터 15일까지 전선을 방문한 뒤 보고서를 작성해 8월 17일 제출했다. 부세는 중부집단군 본부 뿐만 아니라 수많은 군, 군단, 사단 본부들을 방문해 전선의 목소리를 직접 들었다.
그에 따르면 당시 전선에 팽배한 분위기는 이렇다.
‘지휘부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성채 작전은 모든 것을 끝내야만 했었다. 하지만 이어진 건 격렬한 전투와 후퇴뿐이었다. 지휘관들은 최신 정보가 부족하다. 그들은 현재로썬 병사들의 다방면한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을 제공하지 못한다.’
쿠르스크 전투는 독일군의 작전적 관점에서 기나긴 후퇴의 시작을 의미한다. 독일군 지휘부의 희망을 비웃기라도 하듯 동부전선은 거의 곧바로 다시 달아올랐다. 8월 7일에는 스몰렌스크를 향한 공세가 시작되었다. 6일 후엔 도네츠 분지에 대한 공세가 재개됐으며 8월 26일에는 폴타바, 9월 1일에는 브리얀스크를 향해 공세가 이어졌다.
동부전선의 주도권은 더이상 국방군에게 있지 않았다. 히틀러는 그 사실을 깨달았고 따라서 1943년 가을, 전략의 중점을 서유럽으로 변경한다. 예정된 프랑스 상륙에서 서방 연합군에게 파괴적인 패배를 안길 수만 있다면, 승리할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했다. 적어도 히틀러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쿠르스크 전투가 과연 전략적으로 결정적인 전투였을까? 몇몇 학자들은 이 전투로 2차 세계대전의 결과가 결정되었다고까지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전쟁의 결과에 훨씬 큰 영향력을 행사한 많은 사건들이 이미 존재한다. 미국의 참전이 그렇고, 독일의 1941년과 1942년 동부 공세의 실패가 그러하며, 일본이 태평양 전역의 주도권을 빼앗긴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이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르스크 전투는 분명 하나의 큰 전환점이다. 동부전선의 전운이 뒤바뀌었다는 사실을 더 이상 아무도 무시할 수 없게 된 분명한 시점이다. 사실 독일군의 패배는 1년 전 1942년 스탈린그라드의 패배로 이미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1943년 3월 독일 동방군의 기적적인 승리와 뒤이은 긴 휴식기는 아직 소련을 군사적으로 무너뜨릴 수 있다는 독일의 희망을 연장시켰다.
그렇기에 하계 공세가 실패한 충격은 더욱 컸다. 이제 반히틀러 연합군이 유지되고 또 독일이 다중 전선에서 싸우는 한, 동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명백해졌다.
1943년 9월 2일 SS 보안부대는 독일 민중의 분위기를 이렇게 보고한다.
‘동부 전선의 상황이 가장 큰 우려의 대상이다. 물론 소련은 아직 결정적인 돌파를 달성하지 못했으나 거의 두 달에 걸쳐 여전히 그런 식의 공세를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엄청난 두려움을 초래하고 있다.’
4일후 보안부대에 의하면 ‘휴가차 집에 돌아온 동부전선 출신 병사들에게서 점점 많은 비관적 견해가 관찰된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거의 모든 병사들은 승리에 대한 변함없는 믿음과 전적인 자신감을 표출했었다.’
그리고 베스트팔렌 주지사 칼 프리드리히 콜보우는 9월 18일자 일기를 이렇게 적었다.
‘동쪽에서 오는 위협이 점점 거대해지고 있다. 다가올 겨울이 그저 두렵기만 하다. 동부 전선이 무너지면 전쟁은 끝장이고, 우리 모두 또한 그렇게 될 것이다. 기적과 독일인의 용기를 믿어볼 수밖엔.’
이처럼 1943년 하계 전투는 독일 동방군의 전투력 뿐만 아니라 최전방과 국내의 사기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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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미씹 12세기도 아니고 20세기 전쟁에서 노예확보란 말이 나오네추ㅋㅋㅋㅋㅋㅋ
이제 결정적 한방으로 소련군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걸 깨달은 건가?? - dc App
Брянск. 브랸스크.
오... 쿠르스크 전투의 패배로 인한 심리적 타격
기적과용기(뒤짐)ㅋㅋ - 시진핑개새끼
이 글은 뭘 말하고 싶은건지 모르겠네. 이미 41,42년도 공세가 실패했으니 쿠르스크는 별 의미 없다는 건지 43년 하계 방어전이 더 심각하다는건지 아니면 그럼에도 쿠르스크가 중요한 분기점이란건지.
문단 사이에 역접을 너무 많이 넣은거 같얘
큰 전략적 의미는 없지만 그럼에도 중요한 분기점, 의미를 지니고 있고, 쿠르스크 공세 자체의 피해보다는 43년 하계 방어전에서 발생한 피해가 더 크다는거 - dc App
실질적인 피해는 43년 하계 방어전이 더 심각했고 쿠르스크는 별개 아니었지만 그와 별개로 쿠르스크 이전까지는 한타 잘하면 역전 가능하다는 심리가 팽배했다면 그 이후부터는 우리 좃망한거 아님? 했다는거. 별로 안어려운데 이해하기
물리적, 수치적 피해는 미디어에서 말하는것처럼 결정적이지 않았지만 전선의 사기, 주도권등 전략적 시점에서 거대한 분기점이 되었다는거 아닌가
소련 연방은 곂말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연방인셈
입에 너무 익숙해서 그랬음 좀 봐줘 - dc App
쿠르스크 전투는 아무래도 독일이 전략적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했다는 의미가 크겠지. 쿠르스크 이후로는 독일이 망할 때까지 소련이 자기가 때리고 싶은 전장을 선택했지 독일이 자기가 원하는 곳을 때리는 경우가 없었잖아..
양심선언) 이 시리즈 글 읽기전까지 쿠르스크전투는 낙지군이 일방적으로 처발린 전투인줄 알았다 ;; 그 소련 영화 쿠르스크전투로 이전투를 배운지라 ㅋㅋ - dc App
노예확보 이지랄 시발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