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는 Leningrad: the epic siege of world war ii, 1941-1944 by Anna Reid.
소련의 전통적 역사 서술이 자주 감추려 드는 레닌그라드 포위전의 또다른 한 측면은 범죄다. 보급 정치장교 드미트리 파블로프는 레닌그라드 시민들이 너무 ‘고귀해서’ 포격 맞은 트럭에서 쏟아진 빵 한덩이를 낚아채는 것조차 주저했다고 주장한다.
‘외국 작가들은 인간이 굶주릴 경우 모든 도덕성을 버리고 한낱 짐승으로 전락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이었다면 당시 레닌그라드는 진작 무정부 상태에 빠졌을 것이다.’
물론 레닌그라드에서 무정부 사태가 발생한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도시가 범죄의 물결에 휩쓸렸던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음식과 배급표를 노린 절도와 살인이 특히 기승을 부렸으며, 가장 악명높은, 끔찍한 범죄 또한 발생했다.
포위전 중 만연했던 가장 악명높은 범죄이자 당시 레닌그라드 시민들의 절박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이 범죄는 다름아닌 식인이었다.
시인 올가 베르골츠가 여기에 대한 소문을 처음 들었던 건 정신과 의사였던 친구로부터였다.
‘프렌델에 의하면 시체를 먹는 사람이 증가하고 있다. 그의 병원은 (1942년) 5월 15건의 해당 사례를 처리해야 했는데 4월의 수치가 11건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늘어나는 것이 분명하다. 그는 식인종들에게 행위에 대한 책임이 존재하는가를 두고 전문가 조언을 제공해야 했고, 또 여전히 제공하고 있다.
식인은 사실이었다. 프렌델은 자식의 시신을 처음으로 먹고 이후 3명의 아이를 더 유인해 잡아먹은 식인종 한 쌍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가 해주는 말들은 정말 우스웠다. 그가 피의자들을 변호하려 했기에 더욱 그랬던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넌 네 할머니를 잡아먹지 않잖아!” 내가 말했고 더이상 그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너무도 역겨웠다. 식인종들과 구멍 뚫린 지붕, 산산히 깨진 창문과 무의미하게 파괴된 도시. 아! 전쟁의 낭만과 영광이여!’
길거리에서 아이들이 납치된다는 당시의 소문, 옷은 물론 허벅지와 엉덩이 살까지 벗겨진 시체들을 언급하는 일기. 포위전 기간 레닌그라드에서 인육이 사용되었다는 증거는 2004년 경찰 기록이 출판되기 전까지 이처럼 단편적인 일화 정도에 불과했다.
도살장-아파트로 유인된 젊은 부부에 대한 끔찍한 묘사의 출처가 사실 나치 선전부 후원으로 우크라이나 점령지에서 출판된 소설이었던 것으로 밝혀지는 일도 있었다.
실제로 당시 대부분의 레닌그라드 시민들에게 식인은 직접적인 경험이라기 보다는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는 도시전설, 괴담 수준의 문제였다. 지리교사 알렉세이 비노쿠로프는 이런 일기를 남겼다.
‘포크로브스카야 광장에서 한 무리의 군중이 어설프게 도살된, 통통한 젊은 여성의 시신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누가, 대체 왜 이런 짓을 벌였을까? 식인에 대한 끊임없는 소문이 사실이기라도 한걸까?’
드미트리 리카초프는 그의 ‘꽤 건강한’ 지인이 물물교환을 위해 낯선 주소로 떠난 이후 집으로 돌아오지 않자, 그녀가 건초 시장에서 수상한 ‘커틀릿’을 판매하는 불길한 상인들에게 살해당하기라도 한 것은 아닌지 궁금해했다.
올가 그레치나는 봉급을 받기 위해 공장에 들렀을 때 선반 주변으로 금속 부스러기가 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나스챠 이모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나이든 청소부가 어디로 갔는지 물었고, 그녀가 처형되었다는 대답을 들었다. 올가는 자신이 고약한 농담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아니, 사실이오! 그녀가 자기 딸을 먹었다고 하던데. 침대 밑에 숨겨두고 살을 한점씩 잘라냈다고 하더군. 경찰이 그녀를 쏘았소. 이런 시기엔 재판도 잘 없으니까.”
하지만 NKVD는 1941년 12월 13일 ‘인육을 식량으로 사용한’ 첫 9사례를 상세히 기술한 상황 보고서를 제출했고, 도시 지도부는 이후로도 완벽한 정보를 계속해서 제공받았다.
한 어머니는 18개월 된 딸을 질식시키고 그 고기를 다른 세 아이에게 먹였다. 타이어 공장에서 해고된 26살의 남성은 18살의 룸메이트를 살해하고 먹었다. 당원이었던 한 금속공과 그의 아들은 두 피난민 여성을 망치로 때려죽이고 신체부위를 헛간에 숨겼다. 한 실업 배관공은 십대 아들과 조카들을 먹이기 위해 아내를 죽이고 시신을 레네로고 노동자 호스텔의 화장실에 감췄다.
열흘 후에는 13건의 사건이 추가로 보고되었다. 18살의 실업 남성이 그의 할머니를 도끼로 살해하고 간과 허파를 삶아 먹었다. 17살짜리 하나는 공동묘지에서 묻히지 않은 시신을 훔쳐 고기 분쇄기에 넣었다. 청소부가 그녀의 한 살짜리 딸을 죽여 두 살짜리에게 먹였다.
범죄적인 수준으로 방치된 직업 학교(remeslennye uchilishchya) 학생들 또한 인간 고기에 의존하게 된 최초의 사람들 중 하나였다.
‘학생들은 버려졌다. 어떤 관리 감독도 없었고 12월을 버틸 배급표 한 장 제공되지 않았다. 12월 그들은 개와 고양이를 먹으며 버텼다. 12월 24일 한 학생이 영양실조로 죽었고, 다른 학생들은 그의 시신 일부를 식량으로 삼았다.
12월 27일 두번째 사망자가 발생했고 그의 시신 또한 식량이 되었다. 11명이 식인 혐의로 체포되었고 모두가 죄를 인정했다. 임원 레이머와 교장 플락시나는 감독이나 배급 없이 학생들을 방치한 혐의로 형사 기소되었다.’
1941년 12월, 경찰은 26명을 식인 혐의로 체포했다. 하지만 그 숫자는 1월 356명으로 급증했고 2월이면 612명에 달했다. 3월과 4월 300명으로 토막 나긴 했으나 5월 다시 약간 증가했고, 결국 체포수가 급격히 감소하게 된 것은 6월과 7월이 되어서였다.
1942년 12월 현상이 마침내 근절되었지만, 이미 총 2,015명의 ‘식인종’이 체포된 뒤였다.
러시아어는 도덕적으로 중요한 차이를 확실히 분간하기 위해 ‘시신 섭취(trupoyedstvo)’와 ‘인간 섭취(lyudoyedstvo)’라는 두 단어를 사용한다. 인간 섭취는 정확히 풀이하면 식인을 위한 살인을 뜻한다.
경찰 보고는 끔찍한 가족내 살인 사건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후자보다는 전자의 경우가 압도적으로 흔했다. 1942년 4월만 해도 ‘인육을 식용으로 사용한’ 300명 중 진짜 살인자는 고작 44명에 불과했다.
또 살인이 조직적인 수준까지 발전하는 경우는 극도로 드물었다. NKVD 보고서에서는 6명의 젊은이가 연루된 단 한 사례만이 관찰된다. 이들 중 3명은 철도노동자였는데, 주로 빵집 밖에서 희생자를 골라 물물교환을 제안했다. 그들은 그렇게 13명의 사람을 아파트로 유인해 도끼로 후두부를 가격, 살해했다.
식인은 도시 중심부보다는 교외에서 훨씬 많이 발생했다. 교외는 도시보다 더 가난했고, 치안이 열악했으며, 묘지로 넘쳐났다. 실제로 외딴 프리모르스키, 크라스노 그바르데이스키 지구에서 가장 많은 체포 사례가 발생했고, 식인이 가장 적었던 구역은 당 본부가 위치해 있던 스몰니 지구였다.
1941년 12월 22일, 경찰이 노바야 데레브냐의 세라피모브스코예 묘지를 순찰하던 중 자루를 운반 중이던 두 여성을 검문했다. 자루 속엔 유아 셋의 시신이 들어 있었다. 한 여성은 전선 병사의 아내였고 다른 한 명은 관리인이었는데, 그녀들은 그 고기를 18개월~16세의 딸들에게 먹이려 했다고 자백했다.
다음날 같은 묘지에서 공장노동자와 목수였던 다른 이인조가 체포되었다. 그들 또한 자루 속 내용물로 아이들을 먹이고자 했다. 43세였던 한 실직자는 아내 그리고 13살 난 아들과 함께 병원 영안실 시신의 ‘체계적인 절도’ 혐의로 체포되었다. 44세의 나이든 간호사 한 명은 수술실에서 절단된 팔다리들을 훔친 혐의로 체포되었다.
묘지만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또다른 시신 공급원은 다름아닌 기아로 사망한 동료나 친지들이었다. 이런 방식의 시체 섭취가 종종 야기한 전형적인 협력행동을 1월~2월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에서 관찰할 수 있다.
5월 1일 공장에서 같은 호스텔을 사용 중인 9명의 남성이 직장 동료의 시신을 공유했다. 레닌 공장에선 한 여성 노동자가 11살 난 아들의 시신을 두 여성 동료에게 나눠줬다. 청소부 하나는 남편의 시신을 실직한 이웃과 나눠 먹었고, 공중목욕탕의 전기기사와 차장은 죽은 보일러공을 나눴다.
광학 공학자 드미트리 라자레프는 그러한 사업에 초대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생생한 체험담을 남겼다.
‘발렌티나 안토노바(아내의 친구)가 찾아왔다. 그녀는 감정에 겨워 벌벌 떨며 한 여성이 어제 자신을 어떻게 끔찍한 일에 끌어드리려 했는지 회상했다. 그날 오전 크레스토브스키 섬의 한 건물을 해체하던 중 철골이 떨어져 민방위대원 몇이 깔려 죽었다. 그리고 그녀들의 시신은 이 여성이 홀로 사는 아파트 옆 빈 헛간으로 옮겨졌다.
그녀는 그 아이들 중 하나를 자신의 아파트로 옮겨다 해체하자고 안토노바에게 제안했다. 일부는 먹고 나머지는 소금에 절여 나중에 쓰자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장작도 있지만 모든 것을 혼자 할 수는 없을 것 같다고 밝혔더랬다.
또 그녀는 일종의 유인책으로 3주간 인육을 먹고 있는 자신의 자매가 체력이 회복되고 기력 또한 훨씬 나아졌다고 언급했다. 그녀는 고압적인 태도로 자신은 주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것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였기에. 따라서 내일 아침 방문할 테니 함께 작업에 착수하자고 말했다.
발렌티나 안토노바는 그날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제안에 고민했다는 사실 자체가 거부감이 들었고, 화가 났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잠에 빠진 장성한 아들을 바라보며 그를 위해서라도 여기에 동의해야 한다고 자신을 설득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 지 자세히 상상하고 말았다.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안돼! 그것만은 안돼! 미쳐버리고 말거야!”
아침이 되기 전, 그녀는 다시금 스스로를 납득시키려 시도했다. 이것은 살인이 아니었다. 소녀들은 어쨌건 이미 목숨을 잃었고, 이러지 않으면 키 크고 어깨 넓은 아들이 굶어 죽게 될 지도 몰랐다. 이 시점에서 그녀는 다시 잠을 청했고 아침에 일어나 손님을 기다렸다.
하지만 여성이 안토노바의 집을 방문했을 때 안토노바의 반응은 예상치 못한 격렬한 거부였다. 여성은 악랄한 욕설과 저주를 퍼부으며 그녀의 집을 떠났다.’
‘인육을 식용으로 사용한’ 사람들 중 64%는 여성이었다. 44%는 직업이 없거나 ‘고정 수입이 없었고’ 90%가 넘는 이들이 문맹이거나 기초 교육만을 수료한 상태였다. 15%만이 레닌그라드 ‘토박이’ 였고 전과 기록이 있는 사람은 2%에 불과했다.
결국 전형적인 레닌그라드 ‘식인종’은 스위니 토드의 음침한 전설과는 거리가 멀었고, 소련 역사 속에 존재했던 짐승 같은 밑바닥 인생들 또한 아니었다.
그들은 가족을 구하기 위해 절박히 단백질을 찾아다니던, 정직하고 근면한 지방 출신 노동자 계층 주부들이었다.
레닌그라드 보건 당국은 놀랍게도 최소 한 번, 증가하는 식인을 정신병으로 분류하려 시도했다. 1942년 2월 20일 레닌그라드 전선군 의무부대는 7명의 고위 정신과 의사들을 소집해 특별 회의를 주선했다. 시체를 먹은 사람들에게 그 행동에 대한 형사적 책임을 물어야 하는지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사법적 관점에서 보면 의사들이 내린 결정은 모순적이었다. ‘식인종’들은 제정신이었지만, 동시에 범죄적이지 않았다. 한 반대자는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절대 식인 행위에 의존할 수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들은 부적절하고 사회적으로 위험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엄격한 방식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회의의 결론은 대부분의 식인종들이 정신적으로 건강하지만, ‘원시적이고, 도덕성과 지적 수준이 낮다’는 것이었다. 모두가 위험하지만 ‘격리 기간’은 개인별로 판단되어야 하며, 범죄 당시의 상황과 용의자의 인격을 참작해야 할 것이었다.
물론 실제 현장에서 모든 ‘식인종’은 범죄자로 취급받았다. 멀쩡하건, 미쳤건, 살인자이건 무해한 ‘시체 섭취자’이건 여부는 그리 구별되지 않았다. 식인 행위에 대한 조항이 형법에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사건들은 포괄적인 ‘약탈’ 조항에 의거해 처리되었다.
정신과 의사들의 회의가 소집되었을 즈음에는 이미 554명의 ‘특수 약탈자’들이 군사 재판을 받았으며 그 중 329명은 총살되었고 53명은 10년형을 받았다. 이외에도 최소 45명이 구류 도중 아마도 기아로 사망했다.
상술했듯 재판 시 살인자와 시체 섭취자를 구별했다는 공식적인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판결 양상이 시사하는 바에 의하면 후자의 사례들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처벌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1942년 6월 초 재판이 진행된 1,913명의 식인종들 중 586명은 처형되었고 668명은 5~10년형을 받았다.
하지만 나머지 659명이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물론 단순히 판결을 기다리는 중이었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관용을 바라는 탄원서를 제출했을지도 모른다. 경찰 보고서에 따르면 ‘식용으로 인육을 사용한’ 대부분은 무전과에 부양자녀가 존재하는, 홀로 고립된 여성들이었다. 이것이 참작되어 부디 정당한 응답이 그들에게 전해졌기를 바래볼 뿐이다.
누군가는 우크라 외 떡밥을 달려야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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