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612년 정월, 출병에 앞서 장문의 조서를 발표하였는데 이는 고구려 침략 명분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그 요지는 첫째 고구려가 번성한다는 것, 둘째 거란·말갈과 친하며 요서를 침범한다는 것, 셋째 여타 종족의 조공길을 차단한다는 것, 넷째 藩禮를 하지 않는다는 것, 다섯째 고구려 내정에서 强豪가 국권을 잡고 백성에게 혹독한 정치를 한다는 것 등이었다.


 수군은 좌·우군 각 12군 도합 24군을 조직하여 총 113만 3천 8백 명이었는데 여기에 군량과 무기를 운반하는 餽運者가 그 배나 되었다. 이들 24군의 명칭을 각각 道라 하여 左第1軍은 鏤方道, 第12軍은 襄平道라 하였는데 단지 그것은 명칭일 뿐 실제 각군의 進軍路는 아니었다. 이들 군에는 大將과 亞將을 각 1인씩 두어 통솔케 했으며 기병 40隊와 보병 80隊로 편성하였다. 기병은 1대가 100명, 10대를 1團이라 했으며 보병은 4단으로 편성하여 각 단마다 偏將 1명씩을 두었다. 또 각 단마다 鎧冑·纓拂·旗旛의 빛깔을 달리하여 하루에 1군씩 출발시키되 40리 간격을 두어 40일 만에 출발을 완료케 하니 그 首尾가 이어지고 鼓角이 서로 들리면서 깃발이 960리에 뻗치었다고 한다. 당시 총지휘본부는 수 양제가 거느린 御營軍으로 12衛 3臺 5省 9寺로 나누어 내·외·전·후·좌·우의 6軍이 차례로 출발하여 그 대열이 80리를 이었는데 이같이 성대한 출병은 近古에 없었다고 하였다.399) 그러나 수에서는 親征反對者와 反戰論者가 있었고,400) 또 병사와 식량운반자 중에는 고역을 이기지 못해 群盜가 되는 자도 있었다고 하므로 비록 수의 軍勢가 대단했지만 수군의 戰意는 높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401)


 이렇게 해서 고구려 영양왕 23년(612)에 수의 2차 침입이 시작되었고 그 開戰은 요하에서였다. 수군은 宇文愷에게 浮橋를 만들게 하여 渡河作戰을 개시하였다. 이 때 요하를 수비하고 있던 고구려군은 수군의 침략에 완강히 항전하였다. 수의 대장군 麥鐵杖·호분랑장 錢士雄·孟叉 등 여러 적장을 죽였다는 점으로 보아 수많은 적병을 사상시키는 전과를 올렸다고 믿어진다. 그러나 고구려군측에도 1만 명의 전사자가 있었으며 끝내 요하방어는 실패하였다. 요하를 건넌 수군이 곧 遼東城을 포위하자 고구려군의 거센 항전으로 3개월간이나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요동성 수비군은 성을 굳게 지키고 기회를 보아 나가 싸우면서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면 항복하겠다고 거짓 전하여 적의 공격을 이완시켜 여러 번 위기를 극복하였다. 또 이 주위에 있는 諸城도 굳게 지켰다. 따라서 별다른 전과를 얻지 못한 수 양제는 요동성 서쪽으로 수십 리 떨어진 六合城에 진을 치고, 于仲文·宇文述 등 9軍의 별동부대를 편성케 하여 평양을 直攻케 하는 새 전략을 사용하였다. 이 전략은 출병초에 左翊衛大將軍이었던 段文振의 주장이기도 했다.402)


 한편 수의 水軍을 거느린 右翊衛大將軍 來護兒는 바다를 건너 浿江(大同江)을 거슬러 평양에서 60리 떨어진 지점까지 이르렀다. 이 때 고구려군이 저항했으나 수군에게 밀리니 수군은 승세를 타고 평양성으로 향하려 하였다. 여기서 내호아와 부총관 周法尙 사이에 전술상 異見이 있었는데 내호아는 주법상의 “諸軍의 도착을 기다려 진격하자”는 주장을 일축하고 정병 4만 명을 뽑아 평양을 직공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수의 수·륙 양군은 평양 근처에서 만날 약속을 미리 정한 듯하다.


 내호아군과 싸우던 고구려군은 평양성의 羅城(外城)에 있는 빈 절(寺)에 군사를 매복시켜 두고 거짓 패하면서 성안으로 적을 유인하였다. 적군이 입성하여 물화를 약탈하느라고 대오가 무너진 틈을 타서 고구려 복병이 달려가 급히 쳤다. 내호아는 겨우 죽음을 면했지만 4만 명은 일시에 섬멸당하여 도망간 수군은 수천 명에 불과할 정도로 고구려군이 대승을 거두었다.


 이같이 수군이 평양성으로 육박하자 고구려는 境內의 병력을 대거 집결시켰는데 그 列陣이 수십 리에 걸쳐 있으니 이를 본 수의 諸將들은 두려워 떨었다고 한다. 이 때 고구려군을 지휘했던 장군은 建武(영양왕의 아우, 후일 榮留王)였는데 그는 驍勇이 絶倫한 인물로 높이 평가되었다.403) 建武軍이 평양에서 적의 水軍 4만을 괴멸시킨 것은 수의 전략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이 수군은 무기·식량을 운반하고 있었는데, 이를 망실하거나 육군에게 보급하지 못했다. 또 于仲文 등 諸軍(9軍)과 합류하지 못한 채 패배하여 그들의 합동작전도 무산되었다. 이 때문에 고구려군은 평양 교외 30리 지점까지 접근했던 우중문의 군사를 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


 수의 제군은 요동에서 압록강 서쪽까지 진입했는데, 우중문·우문술 등 9軍으로 편성된 평양직공부대는 30만 5천 명을 통솔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 병사는 1백일 분의 식량과 무기·의복을 지급받아 1인당 곡식 3石에 해당하는 중량을 운반해야 했다. 이에 군량을 버리는 자는 참형한다는 軍令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그 무거운 짐을 운반하기 힘들어 행군하면서 식량을 땅에 묻어버린 결과 도중에서 굶주리게 되었다.404)


 한편 고구려에서는 요동 諸城의 고수에도 불구하고 적의 대병력이 평양을 향해 남하하여 위기에 봉착하였다. 이에 적의 형세를 정탐하려고 항복한다는 구실로 大臣인 乙支文德을 적진에 파견하였다. 우중문 등은 “고구려왕이나 을지문덕이 오거든 반드시 사로잡으라”는 수 양제의 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수군의 慰撫使였던 尙書右丞 劉士龍의 반대로 놓아주고, 이를 후회하여 다시 잡으려 했을 때는 이미 을지문덕이 압록강을 건넌 뒤였다.


 군량이 다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가운데, 우중문은 군의 지휘체계가 1인에게 있지 않아서 적을 이기기 어렵다고 하였고, 수 양제는 우중문의 전술에 따르도록 명령했기 때문에 우문술도 우중문의 진군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405)


 을지문덕은 수군의 飢色과 지휘통제의 동요를 보고 그들에게 더욱 피로를 가중시켜 장거리로 유인하고자 宇文述軍을 맞아 하루 7번 싸워서 7번 패주하는 식의 후퇴작전을 이용하였다. 피로에 지친 적군은 더 싸울 수 없는 형편이었는 데도 勝勢를 타고 薩水를 건너 평양 교외 30리 지점까지 육박하여 산을 의지해 진을 쳤다.


 바로 이 때 을지문덕은 우중문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의 戰功을 비웃는 내용의 五言詩를 전하며 수군이 물러나면 고구려 왕이 양제의 행재소에 나아가 入朝하겠다고 하였다.406) 이에 수군이 거짓 항복을 이유로 살수를 반쯤 건넜을 무렵, 을지문덕은 복병을 일으켜 적의 後軍을 맹공하였다. 적장 辛世雄을 격살하고 적의 대군을 함몰시켜 통쾌한 승리를 거두었는 바 이를 고구려의 薩水大捷이라 한다. 처음 수의 군사 30만 5천 명 중, 하루밤낮으로 450리를 달아나 요동성에 돌아와 보니 겨우 2,700명뿐이었다고 한다.407)


 결국 수 양제는 엄청난 군사를 전사시키고 많은 무기를 탕진하며 戰意를 상실한 채 패퇴하였다. 고구려군은 요동에서 평양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략을 모아 적을 격퇴했던 것이다.


*

공통점

1. 세계적인 강국이  이웃 소국을 공격함

2. 라스푸티차 = 요택 습지

3. 정예부대 드랍을 시도함 

4. 본대는 진격 얼마 못하고 대도시 앞에서 전진 못함

5. 수륙 다방면으로 공격함

6. 개망하고 국력이 소진됨


차이점

1. 수 양제는 보급병을 전투병의 두배정도로 편성함

2. 4만이라는 대군을 수군으로 보내서 평양 근처에 보급기지를 만들려고 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