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융청 2번(二番) 장초군(壯抄軍) 3백 38명이 와서 점호를 받고 전례에 따라 광지영(廣智營)에 입직하였으며, 전번군(前番軍)은 해산하여 돌려보냈다.
국조의 병제(兵制)는 오위(五衛)에서 총괄하였는데 병조가 본병(本兵)이 되고 도총부가 통솔하였다. 상번(上番)이 바뀌어 쉬면 숙위(宿衛)하는 군졸이 되고, 일이 생겨 동원하면 싸움터에서 전투하는 군졸이 되며, 그 가운데 나머지 군졸로는 의관을 갖추고 배위(陪衛)하는 자가 있었고 납포(納布)하여 정군(正軍)에게 자급(資給)하는 자가 있었고 이 밖에 다른 병력은 없었다. 임진년에 병란을 겪은 뒤로는 오위가 볼품없이 쇠잔하여 모두 전투를 감당해내지 못했고, 인조 때 북쪽 오랑캐와 실랑이가 벌어지니 변경에 계엄이 내려진 상태로 병자년에 이르러 병화(兵禍)가 유난히 참혹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국사를 모의하는 자들이 병력이 없던 상황을 뉘우치고 모집한 병사를 널리 유치해서 서울에 모으고는, 각기 아문을 세워 저마다 기고(旗鼓)를 전담하게 하니, 50, 60년 동안에 군문의 명목 수가 나날이 늘어나고 병액(兵額)도 갈수록 많아져서 내적으로는 나라의 늠록을 축내고 외적으로는 백성의 노동력을 바닥냈으며, 곡물을 빌려주어 이자를 불려서 조도(調度)에 공급하는 비용이 한없이 많았다. 국력은 헤아리지 않고 군사를 늘리는 데에만 힘썼으므로 서울에 가만히 앉아 먹어대는 군졸이 1만여 인이나 되었다. 폐해가 여러가지로 발생하여 화액의 근원이 점점 열렸으니, 이야말로 나라의 커다란 폐단이자 훗날의 안위와 흥망이 비롯되는 바이다. 그러므로 이에 그 연혁과 설치의 본말을 모두 기록해 둠으로써 후일의 참고가 되게 한다.
훈련 도감(訓鍊都監)
선조 계사년에 상신 유성룡(柳成龍)이 명나라 군대가 철수하여 돌아가면서 남겨 둔 절병(浙兵)의 기예가 몹시 뛰어나다고 건의하여, 서울에 유졸(游卒) 수백 인을 모아서 그들의 기예를 받어 익히게 한 다음, 이들을 묶어서 대오를 편성하여 포(砲)·살(殺)·사(射) 및 척계광(戚繼光)의 진법(陣法)099) 을 가르쳤다. 삼수(三手)라는 명칭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뒤 각도로 하여금 식년(式年)마다 호수(戶首) 2백 인의 정예 장정을 가려 뽑아 속오 포수(束伍砲手)라 이름하여 군장을 꾸려서 올려 보내도록 함으로써 각초(各哨)의 모자란 인원에 충당하고, 지부(地部)로 하여금 각도 전결의 원세(元稅) 외에 삼수량(三手糧)을 추가 출급하도록 함으로써 늠자(廩資)를 삼았는데, 인조조 이후로 날이 갈수록 점차 증가하여 원액이 3천에 이르렀고 나중에는 4천에 이르렀다.
또 마병(馬兵)에 좌우영(左右領)을 설치하니 그 숫자가 2백여 명이었는데, 신경진(申景禛)이 대장으로 있으면서 마병 3백여 명을 늘려 5초(哨)로 나누어 편성하고 또 보군(步軍) 1사(司) 5초(哨)를 늘리어 합해서 35초로 만드니 마군·보군을 모두 합한 수가 5천여 명이었다.
효종조(孝宗朝)에 이완(李浣)이 대장으로 있으면서 다시 마병 1초를 늘렸고 무술년에 또 보군 10초를 늘려 전부(前部)라 불렀으며, 그뒤 신해년100) 에 유혁연(柳赫然)이 대장으로 있으면서 별대(別隊)의 제도를 신설하고 전부(前部) 10초를 없애 표하군(標下軍)에 배치하였는데, 명목상으로는 비록 인원을 줄였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마병은 호(戶)마다 4보(保)이고 보군은 호마다 3보인데, 보인(保人)101) 은 각자 3필을 납포하여 호수에 자급하였다. 그뒤 보군에게 다시 보를 늘리어, 지금 현재 군졸에게 한 달에 지급되는 군량은 쌀 4천 77석, 콩 5백 6석이다. 양향청(糧餉廳)을 설치하고 둔전(屯田)을 폭넓게 마련해서 물자를 축적·판매함으로써 군중의 용도에 보태는데, 기계(器械)·기고(旗鼓) 등을 갖추는 데 드는 자금이 모두 그 속에서 나온다.
‘별대(別隊)’는 기유년102) 초부터 설치되어 각도의 한정(閑丁)으로서 타역(他役)에 투속(投屬)한 자들로 충원하였는데, 처음에는 7천 명이었는데 나중에 늘려 1만 3천 7백 명에 이르렀으며, 4부(部)로 나누어 편성되어 있고 여름과 가을에는 번(番)을 면제하고 겨울과 봄에 번을 선다. 호마다 3보이고 보인은 각자 쌀 12두를 내어 번졸(番卒)에게 준다. 한 차례마다 10초(哨)씩 상번(上番)하는데 그 숫자는 1천 3백 70여 명으로 어영군(御營軍)의 제도와 같다. 원군(元軍) 6천 명에게는 각자 4보씩 지급하여 보인의 합계가 2만 4천 명이고, 별대(別隊) 1만 3천 7백 명에게는 각자 3보씩 지급하여 보인의 합계가 4만 1천 1백여 인이다.
어영청(御營廳)
인조 갑자년 초에 설치하였고,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가 어영사(御營使)가 되어 서울 안에 포술(砲術)을 업으로 삼는 자 수백 명을 소집해서 교습하였다. 어가(御駕)가 공산(公山)으로 피난했을 때 다시 산군(山郡)의 산척(山尺)103) 중에 포술에 정예한 자를 모집하였는데, 대읍(大邑)은 7명, 중읍(中邑)은 4명, 소읍(小邑)은 2명씩 해서 합해 6백여 인이 되었다. 환도한 뒤에는 다시 총융사(摠戎使)에 배속시켜 서너 해 단속하여 이루어 놓은 효과가 있었다. 완풍군(完豊君) 이서(李曙)를 제조(提調)로, 능천군(綾川君) 구인후(具仁垕)를 대장으로 삼아, 통솔하여 가르치게 하였다.
그뒤 상이 3천 명까지 늘려 모집하도록 하였는데, 이때 경외(京外)의 정장을 양민·천민을 막론하고 이리저리 불러 모아 군액(軍額)이 점차 증가하였다. 사·포수(射砲手) 2만 8천 인을 5부(部)의 별삼사(別三司)로 편성해 14번(番)으로 나누었는데, 번당 10초(哨)로 그 숫자는 1천 4백 10여 인이었다.
효종 무술년에 별마대(別馬隊)를 추가 설치하였는데, 해서(海西)의 군보(軍保) 및 양정(良丁)으로서 무예가 있는 자를 가려 뽑아서 14번으로 나눠, 돌아가면서 상번(上番)토록 하였다. 또 별파진(別破陣) 5백 11인을 두고 15번으로 나누어 돌아가면서 입번(立番)시켰는데, ‘별파진’이란 대포(大砲)를 전문적으로 익힌 자들이다. 경안(京案)의 잡색군(雜色軍) 4백 70 인과 아병(牙兵) 1백 14인은 모두가 공장(工匠)으로서 개성부(開城府)에 입속되었고, 각차비군(各差備軍) 1백 60인은 별좌사(別左司)에 배속되어 입번(立番)하고, 개성부 및 황주(黃州)의 마태재졸(馬駄載卒) 2백 23인은 정군(正軍)이 아니어도 보인을 지급했다.
임진년에 이완(李浣)이 대장으로 있으면서 원군(元軍)에게 비로소 3보를 지급하였는데, 1보는 호수(戶首)의 자장(資裝)을 해결해 주고 2보(保)는 베나 쌀을 거두었다. 산군(山郡)의 경우에는 베로, 연해(沿海)의 경우는 쌀로 거두어 합계하면 베 2만여 필, 쌀 1만 70여 석이 되는데, 쌀은 상번(上番)의 초름(稍廩)으로 지급되고 베는 군중의 용도를 삼았다. 군졸과 보인을 합하면 8만여 인이었다.
총융청(摠戎廳)
인조 갑자년에 처음으로 설치했다. 경기 병사를 대신해 기병(畿兵)을 거느렸고, 그뒤 광주(廣州)·죽산(竹山)·양주(楊州)의 3영(營)이 수어청에 이속되어 본청 소속은 수원(水原)·남양(南陽)·통진(通津)·파주(坡州)·장단(長湍) 등 5영이었으며, 군병의 합계는 1만 4천 8백 91인이었다. 장초군(壯抄軍)이 또 10초인데, 겨울 석 달 동안 돌아가면서 담장 밖에서 번을 서고, 송도의 속오(束伍) 1천 인이 각자 1석씩 쌀을 바쳐 번졸에게 지급했다. 아병(牙兵) 15초는 나중에 6초만 남았고 그 나머지는 강등시켜 보인을 만들어 쌀을 거두었다.
수어청(守禦廳)
인조(仁祖) 때 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가 오랑캐와의 실랑이가 나날이 심화되고 도성만 지키기가 어렵다 하고, 또 강도(江都)는 응원(應援)이 없으나 광주(廣州) 가까운 곳에 있는 남한 산성(南漢山城)은 바로 온조(溫祚)104) 가 옛날에 축조한 것으로서 형세가 매우 험준하므로 들어가 보전할 만하다는 이유에서 진(鎭)을 설치하자고 헌의하였다. 그리하여 성 안으로 부치(府治)를 옮기고 성첩(城堞)을 대대적으로 기공한 뒤 창사(倉舍)와 궁궐을 설치하고 병오(兵伍)를 단속하고 재물과 곡식을 쌓아 모음으로써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병자년에 상이 이 성에 들어가 포위당했고, 전란이 끝난 후에 더욱 수선하고 축적하였으며, 수어사는 모두 훈척이나 중신으로 임명하였다. 광주 부윤(廣州府尹)이 부사가 되고 광주(廣州)·양주(楊州)·죽산(竹山)·원주(原州) 등 4영(營)이 그에 소속되어 있었다. 철원(鐵原)과 충주(忠州) 양진(鎭)이 예전에는 본청에 속해 있었는데, 이완이 수어사로 있으면서 충주는 새재[鳥嶺]를 방어하기에 적절하고 철원은 북로를 방어하기에 적절하다는 이유로 산성에 소속시키지 아니하고 단지 4영에 소속된 속오군 1만 1천 9인만 존속시켰다. 아병(牙兵)이 1천 8백 87인이고 수어군이 4천 4백 40인이었다. 그뒤 김석주(金錫胄)가 수어사로 있으면서 청을 올리기를,
"산성의 주위가 광활하므로 2만 인이 아니고서는 수어할 수가 없는데, 본성에 속한 기좌(畿左) 3영(營)과 영서(嶺西) 1영의 병력수는 1만여 명에 불과합니다. 이에 좌도(左道)의 각 고을에 있는 아병(牙兵)을 좌부(左部)에 소속시키고 호서(湖西)에 가까운 고을에 있는 아병을 우부(右部)에 소속시킴으로써 철원과 충주 두 진을 대신하도록 함이 마땅합니다. 영서(嶺西)의 제읍은 포술을 익힌 자를 새로 모집해서 이미 7, 8백 인을 얻었으니, 홍천(洪川)·횡성(橫城)·지평(砥平)에 옛 아병 3백여 인을 두어 사방에 주둔토록 하고, 또 1사(司)를 만들어서 중부에 소속시키소서."
하니, 조정이 이를 허락하였다. 이때에 수성하는 군졸이 합하여 2만여 명이 되었고, 또 산성에다 승장을 두어 승군을 총섭하게 하면서 성을 분담하여 성 위의 담을 지키도록 하였다. 아무런 일이 없는 때에도 승도(僧徒)로 하여금 번(番)을 나누어 들어와 지키게 하였으므로 그 숫자가 무척 많았다. 기계(器械)와 화포(火砲)를 포함한 전쟁 장비는 여러 해에 걸쳐 쌓아 모아서 서울 안의 여러 군부와 비교할 때 가장 많았고, 군향 미곡(軍餉米穀)은 8만 8천 3백 53석이었다.
정초군(精抄軍)은 옛날에는 기병 가운데서 가려 뽑아 돌아가면서 궐내에 입직(入直)하는데 1백여 사람 밖에 되지 않았다. 김좌명(金佐明)이 병조 판서로 있으면서 인원을 늘려 수백 명이 되었고, 그뒤 경술년에 병조 판서 홍중보(洪重普)의 건의로, 옛 제도를 따라 기병의 호수(戶首)·보인(保人) 가운데 건장한 자를 널리 뽑아서 그 인원을 늘리니 4천 4백 10인이나 되었다. 한 사람마다 자장보(資裝保) 1인을 지급하였는데 그뒤 자장보를 호수(戶首)로 승격시켜 부대의 편성이 또 증가함으로써 8천 9백 60인에 이르렀다. 8번(番)으로 나누어 매번 5초(哨)씩 돌아가면서 상번(上番)하고 그 보인으로 하여금 쌀을 바치게 하여 번량(番糧)을 지급하였다.
처음에는 도제조를 두었으나 얼마 안 가서 없앴고, 정초청(精抄廳)으로 불리워졌으며, 병조 판서로 대장을 삼아 금군(禁軍)과 더불어 좌우대(左右隊)로 나누어 매월 습조(習操)했으니 양국(兩局)105) 의 제도와 똑같았다. 그뒤 정사년에 대신의 의논에 따라 정초정이라는 호칭을 없애고 그 병력을 도로 병조에 소속시켰고, 병액(兵額) 및 기타 규제는 예전대로 따랐다.
훈련도감 19,700
어영청 20,000
총융청 14,891
수어청 20,000
대충 합쳐서 75,000명.
훈련도감은 번상병도 아니니 ㄷㄷㄷ
금위영은 기록없음??
없는듯.
+지방군으로 예비군개념 속오군
그런데 규모는 금위영도 15000명 전후인걸로 기억함.
금위영은 숙종때임 현종때 없음 광인효현숙
지방군도 혹시 알수있음?
호란때는 이괄의 난 병크가 제일 컷지...
군액 합치면 104만명.
卽今諸色軍保。大略一百四萬四千餘名。而兵曹所屬三十四萬一千四百餘名內。
제대로 운용이 될까 모르겠다 얘네들도 세조 시절처럼 현 한국 공익수준 아니냐
현종 시기면 제대로 작동할때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