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수립되자 영국은 미국다음으로 한국을 승인했고, 한국에 공사관을 설치했다. 6.25전쟁이 발발할 당시주한 영국공사는 비비안 홀트였다. 그는1949년 2월 7일부터 공사 임무를 수행했다. 홀트 공사는 서울이 함락될 때 피란가지 않았다.


북한군이 자신을 결코 겁을 줄 수 없고,자신은 영국시민을 보호할 책임이 있다며서울에 잔류했다. 그는 서울에서 북한군의 포로로 끌려갔다가 1953년 4월 상병포로교환 때 석방됐다. 남다른 책임감이 아닐 수 없다.한국과 영국의 공식관계는 188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조선과 영국이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외교관계가 단절됐으나, 대한민국이 건국되자 1949년 국교를 재개했다.


미국에 이어 1949년 1월 18일 대한민국을 승인했다. 이후 영국은 국제사회에서 미국과 함께 한국입장을 지지하고 옹호했다. 그 당시 영국은 중국대륙을 공산화한 모택동의‘중화인민공화국(중공)’을 승인하고 장개석 정부와 결별했다. 홍콩등 중국대륙과의 전통적 이해관계 때문에 등을 돌릴 처지가 못 됐던 것이다.


그렇지만 전쟁 기간 중 영국은 자유우방국의 강력한 일원으로 미국의 대한정책을 지지하며 한국의 입장을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중공군 개입 후에는 중공군과도 적대국가의 입장에서 싸웠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경제적 상황은 그렇게 썩 좋은 편은 못 되었다. 서유럽의 모든 국가가 그랬지만 그 중 영국이더욱 심했다. 비록 1948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마셜플랜(Marshall Plan, 유럽경제부흥계획)으로 전후 피폐해진 경제를 회복하고 있을 때,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겨우 몸을 추슬러 보는가 싶었는데 멀리 떨어진 극동의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유엔안보리 결의에 따라 한국에군대를 파병했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한국전쟁에 영국정부와 영국인의 관심은 뜨거웠다. 애틀리의 노동당정부는 태생적인 좌파정권임에도 불구하고 소련을믿지 않고 미국을 신뢰했다. 북한의 남침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애틀리 수상은“북한의 남침을 ”아무이유 없는 정당하지 못한 공격“이라고 규정하고 ”영국은 유엔회원국으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할 것임“을 천명했다. 이에 따라 영국은 한국전선에 자국은 물론이고‘정치적 연맹체’인 영연방국가의 군대파병에 앞장섰다.


영국은 해군(항공모함 포함)과 지상군(육군과 해병대)을 파병했다. 제2차 대전시 영국인에게 피와 땀을 요구하며 어려운 여건 하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영국 처칠 수상의 아들 랜돌프는 종군기자로 참전해 위험하기 짝이 없는 낙동강전선에서부터 취재활동을 했다.


전쟁 중에는 알렉산더 영국 국방장관을 비롯하여 영국군 수뇌들이 대거 한국전선을 방문했다.영국군 파병규모와 특징영국은 전쟁기간 한국에 영연방1사단,2개 보병여단, 항공모함 등 군함 17척, 그리고 5만6천명을 파병했다. 미국 다음으로 많은 군대를 파병했다. 파병시기도 미국 다음으로 빨랐다. 전쟁 발발 4일후인 6월 29일 먼저 극동함대의 군함 8척을 한반도 서해로 보내 북한해안을 봉쇄했다.


이어 지상군을 파병했다. 홍콩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27여단을 급파했다. 한국전선에서 가장 가까이 위치한 군대를 한국전선으로 보냈다.


영국27여단은 1950년 8월말 낙동강전선에 도착했다. 이 부대는 1950년 9월에 오스트레일리아의 보병대대를 배속해 영연방27여단으로 개칭된 후 1951년 4월뉴질랜드ㆍ캐나다ㆍ인도군을 추가로 배속해 영연방 28여단이 됐다. 영국 29여단은 영국본토에서 1950년 11월 한국전선에 도착했다. 이 무렵 영국해병대도 한국전선에 도착했다. 이로써 영국은 육군과 해병대가 한국전선에서 공산군과 싸우게됐다.


영국군군은 규모면이나 전투면에서 대영제국의 후예답게 싸웠다. 영국군은 유엔군 중 미군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독립된 사단(師團) 체제를 유지하며 작전을 수행했다. 영국군은 영연방국가를 통합한영연방군대를 편성하여 운용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영연방여단과 영연방사단이다. 그들은 한국전선에 파병된 영연방 국가를 한데 묶어 영연방 부대를 만들었다. 영연방 27여단과 영연방 28여단 그리고 영연방1사단이다. 대영제국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영연방1사단은 1951년 7월 28일 창설됐다. 영연방 국가로 이루어진 유엔군 내의 또 다른 다국적 군대였다.


영연방1사단은 유엔군내의 또 다른‘작은 유엔군’으로서 영국ㆍ캐나다ㆍ호주ㆍ뉴질랜드ㆍ인도ㆍ벨기에ㆍ룩셈부르크의 7개국 군대로 편성됐다.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는 영연방국가는 아니었으나 보급지원을 영국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영연방 사단에 통합됐다.


작전의 효율성을 기하기 위해서다. 영연방1사단은 미군과 함께 독립적인 작전을 수행했다. 그만큼 자존심이 강하고 명예를 중요시 하는 군대였다. 대영제국의 후예다운 당당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영국군과 한국전선에서의 전투


 한국전선에 긴급 투입된 영국군은 낙동강전선에서부터 싸웠다. 가장 어려운 전선에 뛰어든 것이다. 처음에는 낙동강 전선에서 미1기병사단에 배속되어 싸웠으나 38도선을 돌파하여 북진할 때는 미24사단에 배속되어 압록강을 향해 올라갔다. 평북 정주까지 올라간 영국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군과 함께 후퇴했다.


유엔군의 재 반격으로 영국군도 38도선을 향해 다시 진격했다. 이때 중공군은 서울을 재점령할 목적으로 대규모공세를 펼


쳤다. 이것이 1951년 4월에 있은 중공군1차 춘계공세다. 중공군 4월 공세는 1951년 4월 22일 중서부전선을 목표로 개시됐다. 서울을 다시 점령하여 공산권의 최대명절인 5월 1일 메이데이 날에 모택동에게 서울을 선물하겠다는 팽덕회의 야심찬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중공군은 3개 병단ㆍ11개 군단ㆍ36개 사단을 투입했고, 북한군은 3개 군단ㆍ10개 사단을 동원했다.


중공군은 먼저 취약한 중부전선의 국군6사단을 공격하여 돌파구를 형성한 다음,유엔군을 동서로 차단하려고 했다. 이어 서부전선의 국군1사단과 영국군29여단을 공격하여 의정부로 우회함으로써 유엔군의 퇴로를 차단하여 서울 북방에서 국군과 유엔군을 완전히 섬멸하고자 했다. 이때 영국군29여단의 글로스터대대는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대영제국의 후예답게 용감히 싸웠다.


영국군29여단은 중공군19병단이 의정부로 우회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될 임진강 남쪽의 적성일대에 배치돼 방어임무를 수행했다.


글로스터대대는 감악산 줄기의 설마리 235고지(후에‘글로스터고지’로 명명)에서 중공군 3개 사단의 포위공격 속에서도 전선을 사수함으로써 의정부로 진출하여 유엔군의 퇴로를 차단하려는 중공군의 기도를 분쇄했다.


글로스터대대는 이 전투에서 부대원800명중 50여명만이 포위망을 뚫고 겨우살아남을 정도로 많은 희생을 당했다.


1674년 창설돼 워터루에서 나폴레옹 군대를 꺾고 승리를 쟁취했던 글로스터대대는 44번째로 참전한 한국전에서‘항복보다는 최후까지의 결전’을 택해 대영제국의 명성을 드높였다.


글로스터대대의 혈전은 자칫‘제2의1.4후퇴’로 연결될 번한 중공군의 춘계공세를 저지하는데 기여했다. 이처럼 영국군은 6.25전쟁에서 전쟁참전시기, 참전규모, 그리고 전투능력 면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며 한국의 자유 수호를 위해 헌신했던 고마운 나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