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루스에 재밌는 글이 있길래 퍼와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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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는 한국에도 수용소를 지어 포로들을 가뒀습니다.
서울과 인천, 함흥 등에 규모가 큰 수용소들이 있었는데, 이는 식민지에 대한 정치 선전의 목적이 강했습니다. 일본군이 전쟁에서 이겨서 포로들을 잡아오고 있으니 경고망동하지 말라는 의도였지요.
선전을 목적으로 서울 시내에 포로들의 퍼레이드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 퍼레이드에 동원된 건 호주의 영연방군이었지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이들이 갖힌 수용소는 일본이 지은 신사 옆에 만들어졌습니다. 연합군이 포로 수용소를 폭격하지 않을 테니 신사도 덩달아 보호한다는 얍삽한 의도였지요.
아무튼 이 포로 수용소의 환경은 매우매우매우 열악했습니다.
이런 허술하고 협소한 가건물에 수십 명씩 생활 해야 했죠.
무엇보다 문제는 식량으로, 보리밥을 주식으로 반찬은 매실장아찌나 멸치, 생선, 연근 등을 줬다고 합니다만... 이건 당시 일제의 선전지 노릇을 한 매일신보나 경성일보에서 나온 기록이니 믿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실제 수용소 생활을 한 포로들의 증언에 따르면 발효한 콩(된장)과 무말랭이를 넣은 멀건 죽만 줬고 그나마 양이 적어서 영양실조로 쓰러지는 이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는 군요.
당연히 ㅈ같은 수용소에서 탈주하고자 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포로수용소에서의 탈출은 종종 영화화가 됩니다.
근래에 졸리 누나가 제작한 언브로큰에 섬나라 극우애들이 피꺼솟 했드랬죠.
그러나 탈주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낯선 땅에서 지리조차 모르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출한 사람들이 있었고, 오늘 소개하는 채스터 리 존슨 장군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전쟁 전 필리핀에 주둔해 있었던 존슨 장군은 바탄 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입니다.
당시 초급 장교였던 존슨은 1942년 필리핀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악명 높은 죽음의 행진에서 살아남았습니다. 당시 동남아 지역의러 수용소들을 전전하다 1945년 코리아라는 듣도 보도 못한 나라로 이감되었죠.
가혹한 노역과 열악한 환경과 일본군의 학대에 견디다 못한 그는 죽을 것을 각오하고 동료 3명과 함께 노역 중에 탈출했죠. 이때가 한여름인 7월...
그러나 구체적인 계획도 없었고, 당시 수용소가 있는 인천 지역에 대한 지리도 알지 못했습니다.
막연히 일본군만 피해 골목골목으로 도망치다 빠져나온 곳이 신포동이었습니다.
당시에 신포동은 인천에서 알아주는 번화가였습니다.
사람이 많은 곳일 수록 숨을 곳이 많은 것은 사실이었고, 실제 존슨 일행도 그 점을 이용했습니다.
일단 굶주림을 해결하고자 했던 그들은 다짜고짜 나리낑(成金)이라는 요정으로 들어갔지요.
당시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던 김진원씨는 연방 헝그리를 외치는 포로들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이내 이들을 숨겨주고 먹을 것을 갖다 주었습니다.
이건 정말 목숨을 걸고 도와준 것이었습니다. 도주한 포로를 보면 바로 신고하라는 총독부의 포고를 거스르는 행동이었기 때문이죠.
아무튼 밥을 얻어먹고 목욕탕에서 잠시 피로를 푸는 사이, 일본군이 들이닥치면서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김진원씨 역시 일경에 끌려갔습니다.
그렇게 다시 수용소로 끌려가 고생을 하던 존슨은...
이 폭탄 한 방에 살았습니다.
815 해방 후, 인천 포로수용소에 나부끼는 성조기
9월 인천에 들어온 미군에 의해 자유를 맞은 존슨은 한국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딱 20년 후인 1965년 9월...
그는 주한미군 제 7 사단장으로 다시 한국에 돌아옵니다.
20년 전의 일을 잊지 못했던 존슨 장군은 전임에게 인수인계를 마치자마자 신포동을 찾아갔습니다.
뒤늦게라도 은인을 찾아 감사의 인사를 하기 위함이었는데... 사실 은인을 찾을 가능성이 희박했습니다.
이름을 알지도 못했거니와 너무 짧게 만나서 얼굴도 익히지 못했기 때문이죠. 더구나 포로를 도와줬다는 죄목으로 살아 있을지 어떨지...
과거 나리낑이 있던 곳에 자리잡은 화선장.
낯익은 그곳을 찾는 데 성공한 존슨 사장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식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근데 20년전의 은인이 식당을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포로를 도와줬다고 끌려갔던 김진원씨는 해방이 되고 나서 풀려나 과거 자신이 일했던 식당을 접수(!)해서 화선장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1960년대 당시 화선장은 인천은 물론이고 서울에서도 잘 알려진 일식-경양식 레스토랑이었다네요.
은인을 만난 것에, 그리고 그가 무사한 것에 기뻐한 존슨 장군은 한동안 김진원씨를 붙들고 눈시울을 붉혔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과 동료들이 밥을 얻어 먹었던 식당 부엌에 존슨 키친이라는 사인을 해 줬다는 군요.
이런 인연 때문에 존슨 장군은 제 7 사단장으로 있는 11개월 동안 동두천 일대에 20여개의 교실을 지어주고, 다리를 건설하고, 농가에 토끼와 돼지를 기증하고 미국의 신식농경기술을 전파하는 등, 많은 대민봉사를 펼치고 귀국했습니다. 이후 중남미 전역 사령관으로 있다가 1973년에 퇴역... 1997년 샌안토니오에서 눈을 감았죠.
존슨 장군을 도운 김진원씨는 1970년에 타계했습니다. 이후엔 부인인 송 여사가 운영했는데, 1970년대부터는 위의 사진에 나오듯이 보다 서민적인 주물럭과 냉면으로 메뉴를 바꾸었다고 하는군요. 이 시점부터 쟁쟁한 고급 레스토랑들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현재의 화선장 부지.
화선장은 80년대 후반 혹은 90년대 초반 쯤에 폐업을 했다고 합니다.
신포시장 안에 있는 화선횟집.
이름이 비슷한 데는 이유가 있는데, 원래 이 집은 과거 화선장에서
일식요리를 하고 남은 재료들을 얻어와서
시장 좌판에서 매운탕을 팔던 데서 시작했다는 군요.
무상하게 세월은 지나갔고, 존슨 장군도 김진원씨도 화선장도 현재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만 2차 세계대전이라는 인류사에 휘말렸던 그들의 이야기만 활자로 남아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지요.
퍄 훈훈하다
은혜갚은 미구니추
*감동*
미군이 볍씨를 물어다줬네 ㅋㅋ
감동 8ㅅ8
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