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cafe.daum.net/tooth8020/5WUi/381 - 번역출처


https://www.smithsonianmag.com/air-space-magazine/world-war-i-pilot-ptsd-180967710/ - 원문




The Dark Side of Glory



1차대전 에이스가 보낸 편지에서 엿보이는 PTSD


by 마크 윌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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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급격하게 상승을 시도했고, 내 조종석으로 압력이 밀고 들어왔는데, 내 시각이 잠깐 나갔어. 쫓아오는 사람들이 더 쏘고. 모두 날 쏘고 있었어. 난 미친 듯이 하강 급상승하고 수평으로 기수를 꺾고 빠른 롤링도 시도하면서 어떻게든 떨어트리려고 했어. 불쌍한 강아지처럼 내던져졌지. 아주 민감한 강아지 새끼. 동체가 환자처럼 전율하는 정말 엄청난 비행이었어. 평범한 사람이면 정신 나가.” (아서 골드 리)



1차대전이 2년 경과했을 때 전쟁은 제대로 흐르지 않았다. 병사들은 진흙탕 속에서 참호전을 마주했고, 절망적으로 낙담한 가운데 전선의 병사들은 하늘을 바라봤다.



전선의 보병들이 기관총이 난무하는 한 폭의 그림 같은 공중전을 바라보는 것은 일종의 낙이었다. 새로운 전투형태가 태어났다. Aerial combat. 참호전을 치르던 병사들에게는 상상도 못하던 것이다. 이런 일련의 항공전을 난생 처음 바라본다.



또한 조종사들도 생각으로만 품었던 전술을 실현해보는 기회기도 했고, 실전에서 새로운 기동 전법이 탄생했다. 그런 기동을 하지 않으면 공중에서 죽기 때문이다. 새로운 전투의 탄생과 함께 또 새로운 용어가 등장했다. 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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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날까지 간직된 1차대전 에이스의 공중전 일기는 톰 크라우치의 것으로 국립항공영공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2차대전 것은 무척 많지만, 1차대전은 에이스 이름이나 들어보면 다행이고, 붉은남작 정도만 기억한다. (독일군 에이스 만드레드 본 리츠토펜)



1차대전 에이스들은 명성을 얻고 성공했지만 대가도 치러야 했다. 조종사들은 인류애에 반하는 상황과 직면했고, 자신에게 격추되는 희생자들을 ‘죽였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고, 이는 양쪽이 마찬가지였다. 이로 인해 어떤 조종사들은 감정적인 트라우마를 겪게 된다.



전투 스트레스가 조종사들 사이에 나타나고, 관계자들은 이를 항공-신경증(aero-neurosis)이라 지칭하여 대.중적으로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한다. 참호의 병사들은 전혀 모를 높은 고도의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조종사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지면 타죽거나 떨어져 박살이 나 죽는다. 이로 인해 비행을 포기(배제)하는 사람도 생겼고 영국과 프랑스로 후송되어 요양병원에 입원하는 경우도 생겼다.



그런 항공신경증도 참호선의 병사처럼 치료한 후 최대한 빨리 복귀시켰다. 전쟁이 지속되자, 연합국과 동맹국 양쪽 모두 조종사를 위한 병원을 특별히 만들게 된다. 그중 하나가 제24호 왕립공군병원인데, 캐나다 조종사 로이 브라운도 이 병원을 겪었다.


“햄프스티드 언덕 근처, 주로 항공신경증 환자들만을 위한 병원이었다. 거기엔 영국공군 장교들만 있었고, 많은 물자로 장교 환자들을 지원했다. 이를 보안에 부쳐 일반 병원으로 위장했는데, 심리적 문제를 겪는 조종사들이 어떤 치료를 받는지 사람들은 몰랐다.”


이 병원에 입원한 많은 장교들이 그러했듯, 브라운도 여기가 군생활 마지막이었다. 이 병원에서 치료받은 사람은 제대하거나 교관을 하면서 일선에서 물러났고, 군 지휘부나 의무부대도 이 증상의 완치에 관해 토론의 여지가 있었다. 어떤 사람이 나은 건지 여전한지 평가하기 애매했던 것이다. 보통은 심리적인 충격을 받아 침울한 상태였다. 상부는 이런 환자들을 언론과 철저하게 차단했다. 사기가 떨어질 것을 염려했다. 환자들의 나가고 들어오는 편지도 통제했다.




그중 한 편지가 브라운이 쓴, 이런 편지가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한 것이다.


“언제까지 내가 제정신이 유지될지 나도 몰라요. 전에 이런 말을 쓴 적이 한 번도 없는데, 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전선에서 싸운 조종사들은 ‘그래도 참호보다는 편하잖아.’ 그런 말을 들었다. 조종사들도 자신들의 스트레스를 표현할 길이 없었다. 이해를 못할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영국공군 조종사였던 아서 골드 리의 경험.


“공중에서 기총소사를 받고 조종석에서 피 범먹이 되는 경험을 한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이거 못 잊는다. 공을 세워 에이스가 되고 싶다고? 난 그냥 살고 싶었어. 다른 사람도 다 그랬어. 내 찬란한 인생에서 가장 소심했던 시간이었어.”



1918년 전쟁이 끝나자, 많은 조종사들이 자신의 편지들을 공개하고 출판했지만, 에이스로 알려진 사람들은 입을 열수 없었고, 다른 동료들이 종종 언급했을 뿐이다. 아래 다섯 명의 조종사들은 심리적인 문제를 겪었음을 밝힌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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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맥거복 글라이더는 1917년 미국이 전쟁에 들어가면서, 미 통신부대에서 항공부대로 지원한 210명 중 하나였다. 자원자들은 훈련을 위해 영국으로 갔고, 1918년 5월, 글라이더는 영국공군 85전대에 소속되었고, 이 전대에서 적기 4대를 격추시켰다. 6월 18일, 글라이더는 전사했다. 그가 전사하고 나서 전우가 그의 편지를 공개했다.


요즘 좀처럼 글을 쓸 수 없다. 너무 불안하다. 펜을 쥐고 있기조차 힘들다. 상공에 떠 있을 때는 정말 내가 침착하다. 헌데 땅에 내려오면 난 극도로 불안하고 무섭다.


그런 (전투)정찰비행에서 돌아온 조종사들 중에 유리컵을 한손으로 잡아 입으로 가져다 댈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우리 전대에 단 한 명도 없었다.


일부는 밤에 악몽을 꾼다. 우린 잠을 제대로 못 잔다. 오직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 작살이 나서 죽을 것 같다. 내 유일한 희망은 이 부대에서 나가는 거다. 그만두고 싶지는 않다. 내 신경은 완전히 마비되었다. 이걸 멈출 수도 없다.


상상 너머에 우리가 있다. 이건 죽음에 대한 공포로만 설명할 수 없다. 내 속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다. 사람을 소심하게 만든다. 몇몇은 엄청난 공포를 느끼며 산다. 하루하루, 속에서 무엇이 자라고, (죽을) 결심을 하고 오른다. 이전 내 인생에서 이런 불안을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다. 방법이 없다. 지금 나, 스물넷. 내가 외모는 40대로 보이고 감정은 90대 같다. 다음 정찰비행 외에는 그 아무 것도 관심이 없다.


이 편지를 쓴 며칠 후, 글라이더는 독일 진영 안쪽 20마일 부근에 추락했다. 독일군은 그를 임시로 매장했으며, 무덤은 나중에 적십자사에 의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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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램버트는 1916년 영국공군에 자원했다. 토론토에서 훈련받고 유럽으로 갔으며, 1918년 3월 프랑스 24전대로 들어갔다. 기종은 S.E.5a 전투기. 램버트는 비행술도 전투도 잘했다. 하지만 전쟁은 통행세를 치러야했고, 가까운 동료들이 사라져갔는데, 특히 윙맨(요기)이었던 데일리 중위가 준 충격은 컸다.


“Daley was gone forever. 우린 세 달 동안 형제처럼 지냈고 둘이 팀처럼 일했다. 지금도 비행이 눈에 선하다. 우린 정찰비행이 즐거웠고, 나와 거의 날개 끝을 대고 날면서 나에게 손을 흔들며 커다란 함박웃음을 짓던 얼굴이 기억난다. 나 정말 데일리 중위가 그립다.”



이후 램버트는 로프 끝에 매달린 사람처럼 변했다. 램버트의 일기.


어제 이후로, 전대 모든 조종사들은 공중에서 맞을 수 있다는 생각에 정말 불안해졌다. 이 일은 길어야 3주를 못 간다. 아무도 불평은 안 하지만, 조종사의 안색과 행동을 보면 알 수 있다. 더 이상 전의 일을 말하지 않는다. 다른 생각할 틈이 없다. 24시간 뒷면 또 다른 내일이 다가온다.



램버트는 자신에게 전투피로가 온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건 폭약을 향해 천천히 타고 있는 도화선 같았다.


8월 하순 그날 이후로 지금 1918년 10월 1일까지 정신이 백지상태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고, 알고 있는 것은 전투피로로 인해 내가 고통 받는다는 것 뿐. 동료 한 명과 하얀 백사장에 수영하러 갔다. 간호사 복장의 여군이 한명 수영하고 있다가 우리와 함께 했다. 그녀는 한 리조트 호텔에서 있다고 했는데, 정식 명칭은 14호 병원, 외부는 모를 거라고 했다. 그녀는 말했다. 우리 같은 조종사들이 거기 환자로 있다고. 우린 어리둥절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나중에 런던의 퀸 알렉산드라 병원에서 9월 한 달을 꼬박 있었는데, 날 담당한 군의관은 두 명이었다. 거기서 이상한 장비를 사용했다. 12인치 길이 구부러지는 봉이 전기고트에 달려 있었는데, 내 귀에 넣고 고막을 점검하는 거다. 정말 끔찍한 고통이 온다. 한번 치료를 받으면 며칠에서 몇 주나 후유증이 온다. 난 정말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휴가를 가고 싶어 갖은 애를 썼다. 하라는 대로 달라는 대로 해줄 테니, 제발 휴가 좀 보내달라고 매달렸다. 병원은 끔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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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버트는 결국 제대하여 오하이오로 돌아왔고, 후유증은 몇 년을 간다. 병원에는 Bergonic chair란 것이 있었는데, 항공승무원용 전기치료 장비였다. 주로 정신적인 문제를 가진 조종사들에게 쇼크요법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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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우데트는 붉은 남작이 전사 이후 독일 최고 에이스였다. 적기 64기 격추. 37전투기전대에서 복무했고, 나중에 과 11과 4전투기전대 전대장으로 지휘했다.



우데트는 공을 세우는 초기부터 전투비행이 인륜에 반하는 정서가 나타남을 알았다. 우데트 입장에서 전쟁은 모든 것이 불완전했다. 그러나 다른 조종사들에 비하면 long run 한 조종사였다. 흑색 철십자훈장을 탄 직후 우데트의 기억.



“적기 한 대와 정면으로 가까워졌고, 조종사 머리가 보였다. 그 특징적인 고글을 쓰고 있었고, 그는 대단한 용기로 피하지 않고 나에게 돌진해왔다. 내가 먼저 쏠 수 있는 순간이 왔다. 그러나 난 쏠 수 없었다! 공포가 몰려왔고 내 피가 얼음처럼 굳은 것 같았다. 팔과 뇌가 무감각해진다. 난 조종석에 똑바로 앉아 그 사람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계속 가까워졌다. 우린 서로가 눈을 응시했다. 서로를 경멸하며 버텼다. ‘이 소심한 머저리야, 비켜!’ 엔진이 으르렁거린다. 난 결정적인 행동을 하는데 비참하게 실패했다. 내가 죽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혔고, 전혀 경험하지 못한 공포가 몰려온다.”



“순간이 왔다. 내 심장은 미친 듯이 고동치고, 조종간을 잡고 있는 내 손이 무감각하다. 내 Fokker 전투기는 노래를 부르며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처럼 적 전대 위쪽에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주저하게 되었다. 내가 먼저 쐈을 때, 이 상황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지 용기가 나지 않는다. 착륙하자마자 내 방으로 갔고, 그대로, 그 다음날 아침까지 있었다. 내가 권총을 만지작거리는 동안, 바로 옆에서 한 명이 전사한 동료의 아들에게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를 쓰고 있었다.”


이 장면은 우데트가 자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생존하는데 성공했고, 자신의 전대장이자 동료였던 헤르만 괴링의 공군으로 2차대전에도 참가하여 1941년 자살했다. 위 기록의 내용은 권총으로 자기 관자놀이를 쏘려던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우데트도 처음에는 다른 조종사들처럼 적기를 격추시키고 싶어 안달이 났었다.


“내가 격납고에 도착하면 내 피부는 완전히 젖어 있고, 흥분 국면이 금방 떠나질 않는다. 난 격추되지 않을 나만의 규칙을 세웠다. 그것을 눈으로 본 날은 더욱 더 흥분 국면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날 서로 격추시키고 싶어 필사적으로 붙었다. 결국 적기가 땅에 떨어지는 걸 내가 봤다. 나와 상대한 조종사는 내 기관총에 머리를 관통 당했다. (당시의 풍습처럼, 적기가 아군진영에 떨어졌을 때) 군의관이 내 상대의 지갑을 건네주었다. [매스드롭 중위. 영국공군 47전대. 캐나다 온타리오 출신]. 나이 든 여성의 사진과 함께 편지가 나왔다. [비굴하지 말거라. 나와 아버지를 생각하거라.] 잊고 싶었다. 아들이 격추된 어느 어머니를 누가 기억하고 싶겠는가.”






로이 브라운은 영국공군 소속으로 서부전선에서 복무했다. 격추확인 10기를 기록했다. 영국공군 공식 기록으로, 로이 브라운은 그 유명한 남작을 1918년 4월 21일 격추시켰고, 그 자세한 사진, 심지어 남작의 시신 얼굴까지 신문에 공개했다. 단번에 브라운은 유명인사가 됐다. (남작은 총상으로 전사했는데, 조사 결과, 로이 브라운의 기총이 아니라 지상사격에 맞아 죽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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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은 당시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가까이 가서 그를 살펴봤습니다. 키는 나보다 작더군요. 친근한 인상이었습니다. 금발에 어린애 같은 부드러운 머리칼, 넓은 이마, 얼굴은 보기에 평화로워 보였고, 젠틀하고 인상이 좋은 얼굴이었어요. 그 순간 갑자기 내가 비참해졌습니다. 결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부끄러움이 왔고 내 자신에게 화가 났습니다. 내 생각에게까지도. 난 건드리지 말라고 했어요. 속에서는 날 저주하는 말이 나옵니다. 난 이빨을 악물었고 전쟁을 저주했습니다. 가능하다면 시간을 돌려 그를 보내주고 싶단 생각을 했어요. 그 사람을 살리고 싶었어요. 얼굴을 오래 볼 수가 없었어요. 자리를 떴습니다. 내가 승자가 아닌 것 같았어요. 목에서 뭐가 울컥 넘어와요. 그의 친한 동료만큼 내가 슬프진 않았을 겁니다.



붉은 남작 전사 후에, 브라운은 완전한 기력쇠진을 경험하면서 병원으로 진단을 받으러 갔다.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잠을 정말로 잘 못 자요. 깨어 있을 때 간호사가 옵니다. 그때 소리가 들리면 아기처럼 공포에 떨며 점프해 일어납니다. 자그만 소리에도 깨어 벌떡 일어납니다. 어머니께라도 말하고 싶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무거운 짐을 벗을 것 같아요.”



브라운은 다시 일선에 복귀하지 못했고, 마지막 기록은 비행교관이었다. 1918년 7월, 이륙했는데 기상이 좋지 않아 시계가 안 좋았고, 브라운은 100미터 상공에서 급격히 추락해 사고를 당했다. 중상을 입었지만 목숨은 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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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맨녹은 전대장으로 전대 격추 73기를 기록했고 공중전 전술 개발에도 공을 세웠다. 1917년 7월 13일, 맨녹은 2인승 정찰기를 격추시켰다. 그리고 그때 자신에게 격추당하는 희생자를 처음으로 가깝게 봤다.


"난 조종사 몸 세 군데를 맞췄고, 같이 탄 관측장교도 어디 맞아 부상을 입었어. (기관총에) 기계가 조각이 났고, 흑회색 연기가 흘러나왔는데, 관측장교는 탈출하려고 애를 썼어. 내 기관총에 맞은 조종사의 몸은 끔찍한 모양으로 곤죽이 되었고, 그때 난 정확히 느꼈어. 이건 살인이다! 그때 그 신경쇠약 불안감이 얼마나 오래 가다 끝났는지 몰라. 난 더 늙어버린 것 같았고, 조종사로써 계속 전투에 임해야 했지. 그 시기는 끔찍했고, 내 인생이 정말 하잘것없이 무익하고 간당간당 하다고 종종 생각했어."


당시 난 결혼할 생각이 있었는데, 그 생각이 싹 가시더라고.



아일앤드인인 맨녹은 휴가 동안 친구에세 편지를 썼다.


“그 사람 얼굴, 정말 끔찍했어. 타액과 눈물이 얼굴에서 흘러내려. 멈추질 않아.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걸 깨닫고 날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었는데, 뭘 말하려는 것 같았어. 하지만 입을 열 수 없었지. 난 정말로 절망했어. 그는 내가 바라보는 것이 좀 창피한 내색이었지. 그러나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맨녹은 병원에서 여자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육체적 정신적 모두 치료를 받고 있었다.



“난 이 전쟁이 ‘거대한 전진’이란 소리 안 믿어. 그보다 날 것을 보고 느꼈으니까. 투쟁과 살인과 육체적 정신적 갈취를 위한 인간들의 경쟁이 현실이야. 전장의 모든 병사들은 매 순간 이 송장의 지옥에서 도망치고 싶어 해. 창조주가 이런 걸 만들었다니. 군인들은 사탕발림과 죽음에 저항하고 있어. 우린 그냥 도구지. 그냥 그거야.”




맨녹의 마지막 비행은 1918년 7월 26일이다. 신참 동료 비행사와 파카트 숲 상공을 날고 있었는데, 오른쪽에서 독일군 소총과 기관총이 올라와 때렸다. 총알이 연료통을 때려 점화시켰고, 기체 통제력을 잃은 맨녹은 독일군 진영에 추락했다. 그때 잔해에서 맨녹의 시신을 독일군 병사들이 끌어내 매장했는데, 증언을 찾을 수가 없어 ‘북부 프랑스 어떤 지점’으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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