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호스바흐(Friedrich Wilhelm Ludwig Hossbach, 1894~1980)는 1차, 2차 세계대전 시기의 독일군 군인으로, 아돌프 히틀러의 개전 직전 야망을 드러낸 호스바흐 메모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는 1913년 독일 제국군에 입대하여 동부전선에서 보병연대의 부관으로 복무했으며, 이후 독일 제국이 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자 잠시 해임되었으나 직후 바이마르 공화국의 독일 국가방위군(Reichswehr)에 다시 입대하여 군복무를 이어나갔다.
I. 호스바흐 메모
호스바흐는 1927년 3월 1일 국가방위군 총참모부에 배속되면서 군의 주요직에 앉게 되는데, 이후 승진을 거듭한 결과 그는 1934년 소령으로 진급하였으며, 1935년 국가방위군이 해체되고 독일 국방군이 설립되는 와중에도 총참모부에 계속 남아 결정적으로 히틀러의 부관까지 승진하였다. 히틀러의 부관으로 근무하는 동안 호스바흐는 히틀러의 심복으로써 많은 회의에 참석하였는데, 그가 회의에 참석하면서 남긴 회의록 중 1937년 11월 5일에 열린 국가 지도자 간의 회의를 기록한 '호스바흐 메모'는 개전 이전 히틀러의 계획과 주변국에 대한 시선과 정책 등을 엿볼 수 있는 단서로써 2차 세계대전을 연구하는 데에 있어 큰 단서가 되고 있다.
호스바흐 메모의 주요 내용인 1937/11/05 회의는 강철의 배분을 둘러싼 각 군의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 시작되었는데, 당시 해군 최고지휘관이었던 에리히 레더(Erich Johann Albert Raeder, 1876~1960)은 공군 위주로 강철을 분배하는 현 상황에 불만을 느껴 공군으로 가는 강철의 일부를 해군으로 배분하지 않는다면 더이상의 해군력 증강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공군 최고사령관 헤르만 괴링(Hermann Wilhelm Göring, 1893~1946)은 크게 반발하였으며, 육군 또한 현 상황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면서 갈등이 심화되자 당시 국방장관인 베르너 폰 블룸베르크(Werner von Blomberg, 1878~1946)가 아돌프 히틀러에게 중재를 요청하였고, 이에 따라 회의가 개최되었다.
육해공군 간의 강철 배분 문제를 일단락시킨 히틀러는 직후 현 국제정세와 자신의 외교정책에 대한 의견을 각군 최고사령관 들에게 전달하였다. 히틀러는 현재의 자급자족 사회로는 독일의 성장에 한계가 있다고 하였으며, 동시에 세계경제에 의존하는 것도 경제 불안정성을 높이고 독일이 허약해지는 길 중 하나라며 자급자족식 폐쇄경제와 개방경제 정책을 모두 비판하였다. 또한, 식민지 확장론도 비판하였는데, 알마르 샤흐트(Hjalmar Horace Greeley Schacht, 1877~1970)가 주창한 독일의 식민지 확장 정책은 영국의 세력이 약해지고 독일이 좀 더 강성해진 뒤에 실행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후 히틀러는 독일이 질서를 회복하고 살아남아 강해지기 위해선 독일의 생존공간을 넓히는 것이 최우선이라 주장하였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다른 대륙의 영토가 아닌 유럽 내의 생존공간을 확보해야 한다고 하였다. 즉, 유럽 내에서의 식량생산 확보와 인력 확보를 통해 기반을 다진 뒤 전세계로 영향력을 확대하겠다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유럽 내의 생존공간 확보를 위해선 무력이 유일한 해답이라고 하였으며, 동시에 이러한 무력을 실행하기 위해선 늦어도 1943년에서 1945년 이전에 군사적인 행동을 실시해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어 히틀러는 현 국제 정세를 들며 자신의 시나리오를 이야기하였는데, 그는 현재 프랑스가 혼란에 빠져있어 독일을 상대로 군사적인 행동을 펼칠 여력이 없으며, 영국의 경우 국내 반전여론과 식민지 독립 위기 등의 이유 때문에 유럽 대륙에 개입할 여유가 없다고 하였다. 또한, 스페인 내전이 장기화될 경우 프랑스와 영국은 내전에 개입할 것이며, 이 경우 두 국가가 중부 유럽과 동유럽의 상황에 개입할 확률은 극히 낮아진다고 하였다.
이어 히틀러는 이러한 현재 국제정세를 틈타 적어도 1938년에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공격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주장의 배경에는 위의 이유로 영국과 프랑스 양국이 이미 체코슬로바키아를 포기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었다. 독일이 만약 두 나라를 치더라도 영국은 이미 여유가 없고, 프랑스는 영국의 지원없이 독일과의 전면전에 나서지 않을 것이며, 폴란드는 소련 견제 때문에 서쪽의 상황에 개입할 여유가 없는데다, 소련은 일본을 견제하고 있어 유럽의 상황에 개입할 수 있는 여력이 없기 때문에 독일은 큰 전면전 없이 두 나라를 확보할 수 있다고 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마무리했다.
이날 히틀러는 처음으로 각 국의 최고 사령관들에게 자신의 팽창론을 구체화시켜 설명하였으며, 동시에 적어도 1938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와 오스트리아로 쳐들어가겠다는 계획을 간접적으로 전달하였다. 히틀러의 발언이 끝난 이후 각 군 최고사령관들은 히틀러의 망상에 경악하였다. 국방장관 블룸베르크와 육군 최고사령관 베르너 폰 프리치는 히틀러의 계획에 반대하였고, 해군 최고사령관 에리히 레더는 침묵으로 일관하였으며, 공군 최고사령관 괴링 만이 유보적인 입장을 표하며 히틀러에게 지지를 보낼 뿐이었다. 특히, 블룸베르크는 1942년 이전에 개전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며 히틀러의 주장에 격렬히 반대하였다.
이때 각군 최고사령관들은 육해공 모두 준비가 덜 되었고, 그 시나리오는 영국, 프랑스와의 전면전에 뛰어들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였으나, 미래에 나치독일은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를 넘어 폴란드까지 영프와의 큰 전면전 없이 성공적으로 점령하게 된다.
II. 프리츠의 동성애 스캔들에 휘말려 히틀러의 부관에서 해임되다
다시 호스바흐의 일생으로 돌아와서, 1935년 히틀러의 부관으로 취임한 호스바흐는 계속해서 부관으로 임무를 이어나갔으나, 1938년 발생한 블룸베르크-프리치 스캔들에 휘말리게 된다. 당시 괴링과 힘러는 나치당과 독일군 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싶어했는데, 이들에게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국방장관 블룸베르크와 육군 최고사령관 프리치였다. 블룸베르크와 프리치는 나치당의 핵심인사였으나 히틀러의 말에 무조건적으로 충성하기 보다는 나치의 사상에 동의하는 인사들이었다. 때문에 괴링, 힘러와 같은 히틀러 지지자들에게는 눈엣가시로 취급되었는데, 이때 위의 '호스바흐 메모'로 알려진 1937년 11월 5일의 회의에서 블룸베르크와 프리치가 히틀러의 주장에 정면으로 반대하면서 히틀러에게 눈엣가시로 찍히자 괴링과 힘러는 이때를 틈타 블룸베르크와 프리치의 축출을 주도하게 된다.
괴링과 힘러는 첫번째로 블룸베르크의 재혼 아내인 에르나 그룬에게 매춘경력이 있다는 사실을 입수한 뒤, 게슈타포를 통해 그녀의 포르노 사진을 입수하여 이를 히틀러에게 흘린다. 이를 입수한 히틀러는 블룸베르크에게 이혼을 명령하였으나, 블룸베르크는 거부하였고 이에 화가난 히틀러가 이 사실을 대1중에게 폭로하겠다고 하자 블룸베르크가 스스로 군인 신분을 포기하면서 성공적으로 블룸베르크를 축출하는 데에 성공한다.
블룸베르크 축출 성공 이후 괴링과 힘러는 프리치를 축출하기 위해 움직이는데, 그들은 각종 스캔들을 동원해 프리치를 동성애자로 둔갑시킨다. 이후 조작된 증거들과 단서를 통해 한 순간에 동성애자가 된 프리치는 이러한 소문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이 소문이 히틀러의 귀에 들어가면서 사건이 커지게 된다. 히틀러는 프리치의 사임을 요구하였고, 프리치는 이에 사실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했으나 결국 히틀러에 의해 1938년 2월 4일 강제 해임된다.
프리치의 사임 과정 중 호스바흐는 히틀러의 부관으로써 히틀러의 해임 권고 명령을 프리치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때 호스바흐는 프리치에게 명령을 전달하는 동시에 프리치에게서 자신과 관련된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는 메세지를 히틀러에게 전달해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는데, 호스바흐가 이에 동조해 히틀러에게 프리치의 메세지를 전달하는 동시에 프리츠를 변호하면서 호스바흐 또한 히틀러의 눈 밖에 나게되고 결국 호스바흐는 프리치 해임 이틀 후 히틀러의 부관직에서 해임된다.
III. 1945년 동프로이센 방어전과 호스바흐
히틀러의 부관에서 해임된 이후 호스바흐는 요직에서 물러났으나, 독일 국방군 장교로서 복무를 이어나갔다. 그는 1942년 4월 1일 제82보병사단의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동년 7월 6일까지 부대를 지휘했으며, 이후 승진을 거듭하며 제31보병군단, 제56기갑군단, 제16전차군단장을 역임한다. 1944년 7월 18일에는 제4기갑군 사령관으로 취임하여 동부 전선에서의 방어전을 지휘하게 된다.
호스바흐는 제4기갑군의 사령관으로 취임한 직후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를 방어하는 작전을 맡게 되는데, 그는 안그라파강 방면으로 돌파하는 소련군을 막기 위해 네멘스드로프(Nemmersdorf)로 진격하여 방어선을 구축한 뒤, 굼비넨(Gumbinnen)에 공격부대를 배치하여 돌파하는 소련군의 허리를 끊고 돌파구를 봉쇄시켜 진격을 저지하는 데에 성공한다. 이후 1944년 7월에서 1945년 1월에 이르는 기간 동안 동프로이센을 계속해서 방어하였으나, 소련군의 계속된 공격으로 제4기갑군 북부에 위치한 제3기갑군이 크게 패퇴하면서 측면이 노출된다.
제3기갑군이 패퇴하여 쾨니히스베르크로 후퇴한 이후 제4기갑군은 계속해서 소련군의 공세에 노출되었으며, 얼마 지나지않아 남측에 위치한 제2기갑군과 제4기갑군 또한 돌파당해 부대 자체가 괴멸될 위기에 놓인다. 이에 호스바흐는 제4기갑군을 퇴각시키고 제2기갑군 방면으로 제4기갑군의 잔존병력을 보내 소련군의 진격을 막아야 한다고 히틀러에게 즉각 주장하였으나, 히틀러는 이 주장에 회의적이였고, 결국 많은 시간이 지난 후인 1월 21일에 히틀러는 호스바흐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히틀러는 호스바흐에게 마주리안 호수 지역으로 철수하여 위치를 사수할 것을 명령하였으나, 이미 시간이 많이 늦어 제4기갑군은 소련군의 공세에 포위섬멸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호스바흐는 호수 지역에서 계속해서 방어전을 펼치면 부대가 포위되어 괴멸될 것이라고 히틀러에게 전달하였으나, 히틀러는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호스바흐는 히틀러의 명령을 어기고 호수 지역을 포기, 제2기갑군과 합류할 것을 독자적으로 결정한다.
제4기갑군이 철수하여 제2기갑군과 합류했다는 소식을 듣자 히틀러는 크게 분노하였다. 호스바흐의 상관인 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Georg-Hans Reinhart) 중부집단군장이 호스바흐를 변호하였으나 1월 26일 해직당했으며, 이어 호스바흐도 1월 30일 해직당하며 그는 국방군에서 물러나게 된다.
IV. 게슈타포와 총격전을 벌이다
독일 국방군에서 물러난 호스바흐는 괴팅겐(Göttingen)에 위치한 자택에서 지내면서 전쟁 동안 얻은 병을 치료하고 있었으나, 1945년 봄 미군이 라인강을 넘어 독일 내로 진입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상황이 긴박해지기 시작했다. 나치독일의 비밀경찰인 게슈타포는 나치정12권에 반대하거나 비협조적인 퇴임 장군을 체포한다는 명목으로 독일 도시를 들쑤시고 다녔고, 이 체포목록에는 전통적인 보1수주의자였던 호스바흐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1945년 4월 8일, 미군이 괴팅겐에 진입하자 게슈타포는 호스바흐를 체포하기 위해 움직였으나, 호스바흐는 보1수주의자들로부터 조금 뒤 게슈타포가 쳐들어온다는 연락을 받았고, 이에 1시간 전부터 대비하여 게슈타포가 호스바흐의 자택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권총으로 총격전을 벌여 시간을 버는 데에 성공한다. 호스바흐는 격렬한 저항으로 게슈타포를 물러나게 만드는데에 성공하고, 게슈타포가 물러난 동안 미군이 호스바흐의 저택에 도착하는데 성공하여 호스바흐는 게슈타포에 체포되지 않고 미군에게 구속될 수 있었다.
V. 전쟁범죄
2차세계대전기의 모든 독일 국방군 장군들이 그렇듯, 호스바흐 또한 전쟁범죄에 연루되어있다는 의혹이 있다. 호스바흐는 오자리치(Ozarichi)에서 소련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발진티푸스 전염병 환자를 일부러 피난민 수용소에 집어넣어 환자를 극대화 시킨 뒤 피난민들을 풀어 해당 지역에 전염병을 퍼뜨리려 했으며, 이에 소련군은 발진 티푸스 백신을 공급하여 군의 피해를 최소화했으나 민간인은 보호를 받지 못해 약 1만명 이상의 민간인이 발진 티푸스로 사망했다.
쓰다보니 호스바흐 메모 이야기가 절반 이상이네
흥미로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