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투안 장 그로 (1804), <야퍄의 페스트 환자를 방문하는 나폴레옹 (Bonaparte visitant les pestiférés de Jaffa)> [이미지 출처]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당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머나먼 이집트의 적대적인 땅에서 여러 가지 악조건에 시달려야 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하게 나폴레옹과 그의 군대를 괴롭혔던 요소 세 가지를 꼽자면, 첫째로는 프랑스까지의 해로를 틀어막아버린 영국 해군, 그 다음으로는 낙오된 병사들과 보급품을 노리고 사방팔방에서 덤벼드는 베두인, 맘루크 등 현지 유목민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프랑스에서는 겪어보지 못한 이집트의 풍토병이 있을 것이다.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나폴레옹의 병사들은 척박한 환경 속 열악한 전장에서 비위생으로부터 비롯된 온갖 풍토병에 시달려야 했었다. 이미 풍토병은 다미에타, 로제타, 알렉산드리아 등 프랑스군이 주둔했던 곳에서마다 소규모로 터져나왔었으며, 이는 야파 공성전 (Siege of Jaffa, 1799) 직후 프랑스군과 야파 전역에 페스트가 창궐하는 것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당시 프랑스군의 수석 군의관이었던 데쥬네트 남작 (René-Nicolas Dufriche, baron Desgenettes, 1762 ~ 1837) 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야파 (Jaffa, 현재는 텔아비브의 일부) 점령 후 이틀만에 31명의 병사들이 감염되었고, 14명의 병사들이 병사했다고 한다. 그렇게 오스만 제국 치하 팔레스타인을 공략하던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대는 야파에서 발이 묶여 전진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고 만다.
나폴레옹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페스트 그 자체가 아닌 페스트로 인해 퍼지는 공포였다. 당시 이 림프절 페스트 (Bubonic Plague, 또는 가래톳 페스트) 는 어떻게 치료하는지는 고사하고 어떤 방식으로 옮는지조차 파악되지 않은 미지의 질병이었다. 인간의 가장 큰 공포는 미지로부터 비롯된다는 말이 있듯, 페스트로 인한 공포는 삽시간에 퍼지며 프랑스군의 사기를 곤두박질치게 만들었고, 이는 시리아와 이집트의 장악을 통한 영국과 인도간의 연결 차단이라는 원정의 목표를 아직 달성하지 못한 나폴레옹에게 있어 최대의 위기였다.
이 악재를 극복하기 위해 나폴레옹은 다양한 방법을 강구했다. 그가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은 다름아닌 병사들로 하여금 이 전염병이 페스트가 아니라고 믿게 만드는 일이었다. 드트루아 (Detroye) 라는 한 프랑스군 장교의 일기를 보면
"봉 장군 (Louis André Bon) 의 사단에서는 가래톳 (buboes, 림프절이 부어오른 것) 이 일어나는 전염병이 돌고 있으며, 이 병에 걸린 병사들이 갑작스럽게 죽어나가고 있다고 한다. 군의관은 우리에게 이것이 흑사병이 아니라고 확신시켜 주었다."
- Clément de La Jonquière (1899), <L'expedition d'Egypte, 1798-1801.>, Henri Charles-Lavauzelle
이렇듯 프랑스군 군의관들은 병사들로 하여금 전염병이 페스트가 아니라고 믿게 만들고자 안간힘을 썼다. 처음에는 위 일기장에 나타난 것 처럼 이 방법이 먹혀드는 듯 했다. 그러나 페스트는 점점 퍼져나갔고, 확산세를 저지할 방법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가래톳이라는 분명한 증상과 함께 고통받는 병사들이 늘어만 갔고, 이 고통은 곧 군의관에 대한 의심, 그리고 페스트에 대한 확신으로 바뀌게 되었다. 위의 일기를 쓰고 나서 고작 이틀 뒤, 드트루아는 아래와 같은 기록을 일기에 남겼다.
"증상은 가래톳과 극심한 고열이다. (...) 많은 병사들이 고통에 몸부림쳤고,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했다. 다들 이미 이 병을 페스트라고 받아들이고 있으며, 퍼지는 소문을 듣고는 증세가 나타났던 병사 네 명은 자살해버리고 말았다."
- Clément de La Jonquière (1899), <L'expedition d'Egypte, 1798-1801.>, Henri Charles-Lavauzelle
그렇게 나폴레옹의 첫 시도는 철저히 박살났고, 여전히 페스트에 대응할 해결책은 없었다. 병사들은 이미 이 전염병이 페스트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속절없이 퍼지는 공포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무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나폴레옹은 뭔가 특단의 대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결국 나폴레옹은 그 특단의 대책으로 다름아닌 자기 자신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음은 당시 데쥬네트가 이를 보고 남긴 기록이다.
"1799년 3월 11일, 보나파르트 장군과 그의 참모진은 직접 병원을 찾아가봐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다. (...) 장군은 병원과 그 별관을 거닐며 아직 의식이 남아있는 병사들 거의 모두에게 말을 걸었으며, 그 후 1시간 반동안 대단히 침착하게 행정상의 세부 사안들을 처리했다. 매우 좁고 붐비는 병동에서 그는 찢긴 제복이 터진 고름으로 더럽혀진, 매우 끔찍한 상태였던 병사의 시체를 들어올려 나르는 일을 돕기도 했다."
- René-Nicolas Dufriche, baron Desgenettes (1802), <Histoire médicale de l'armée d'Orient, par le médecin en chef R. Desgenettes>, Chez Croullebois
나폴레옹은 참모진과 함께 자기 자신이 직접 모스크에 위치한 야전병원에 방문해 병사들을 위문하는 것으로 이 상황을 타개하기로 했던 것이다. 이는 실제로 상당한 효과를 보였는데, 이어지는 기록에 따르면 총 지휘관이 위헙을 무릅쓴 채 직접 병에 걸린 병사들을 찾아와 일일이 말을 걸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군의 사기가 증진되었으며, 빠르게 퍼지던 공포도 대체로 가라앉았다고 한다. 맨 위에 있는 앙투안 장 그로 (Antoine-Jean Gros, 1771 ~ 1835) 의 그림인 <야퍄의 페스트 환자를 방문하는 나폴레옹 (Bonaparte visitant les pestiférés de Jaffa)> 이 다름아닌 이 순간을 묘사한 작품이다.
사실 이 장면의 진위여부는 지금까지도 논쟁의 대상으로 남아있다. 일단 데쥬네트가 위같은 증언을 남긴 것은 사실이긴 한데, 문제는 정작 나폴레옹을 항상 가장 가까운 곳에서 수행했던 베르티에 (Louis-Alexandre Berthier, 1753 ~ 1815) 가 남긴 기록에는 나폴레옹이 이런 과감한 행동을 했다는 내용이 전무하다고 한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이를 단순히 나폴레옹의 프로파간다로 취급하기도 한다. 작품을 그린 그로 본인은 그림에 나타난 디테일이 모두 사실이라고 주장하긴 했지만, 정작 그로 본인이 이집트 원정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므로... 판단은 다들 각자 해주세오!
어쨌든, 이 당시 실제로 나폴레옹이 위와같은 포포몬쓰를 통해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든, 아니면 그냥 방치했든간에, 나폴레옹은 이로부터 3일 뒤 하이파 (Haifa) 와 아크레 (Acre) 를 향해 본군을 이끌고 출정하게 된다. 크리스토퍼 헤롤드 (Jean Christopher Herold, 1919 ~ 1964) 가 저술한 <Bonaparte in Egypt> 에 따르면, 출정 전 나폴레옹은 참모장 피에르 그레쥬 (Pierre Joseph Bérardier Grézieu, 1755 ~ 1799) 에게 150명의 병사를 맡겨 남아있는 300명의 병든 병사들을 지키게끔 하였다. 참고로 생몰년도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레쥬는 나폴레옹이 출병한 뒤 전염병에 걸려 얼마 뒤 죽게 된다.
그레쥬와 함께 야파에 남았던 에티엔 루이 말뤼 (Étienne-Louis Malus, 1775 ~ 1812) 의 기록에 따르면 이 때 야파 전역에서 대략 하루에 30명 가량이 죽어나갔으며, 병에 걸린 뒤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고작 12~13명 중 한 명 꼴이었다고 한다. 말뤼 역시 이 전염병에 걸렸지만, 기적적으로 회복해 생존하는데 성공한다. 프랑스군의 군의관들은 최선을 다해 전염병이 더 이상 퍼지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둔영의 위치를 바꾸기도 하였고, 병자들을 아직 병에 걸리지 않는 병사들로부터 철저히 격리시켰으며, 병사들을 최대한 청결한 상태로 유지시키고자 노력했다.
야파의 생존자들이 이렇게 악착같이 버티는 와중, 나폴레옹은 하이파를 성공적으로 점령하고 아크레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시드니 스미스 제독 (Sidney Smith, 1764 ~ 1840) 이 이끄는 영국 해군의 지원을 받은 제자르 파샤 (Ahmad Pasha al-Jazzar, circa 1730 ~ 1804) 휘하 오스만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나폴레옹은 무려 2개월간이나 공성전을 지속해야 했으며, 이 와중에 야파의 페스트가 하이파와 아크레까지 번지게 되자 결국 나폴레옹은 아크레를 포기하고 카이로로 돌아가게 되었다.
카이로로 돌아가는 도중의 프랑스군이라고 해서 페스트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특히 제해권이 완전히 영국군에게 넘어간 상황에서, 전염병에 걸린 병사들을 배로 나를 수도 없었던 지경이었기에 프랑스군은 어쩔 수 없이 전염병과 함께 행군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당시 나폴레옹의 비서로 있었던 루이 앙투안 브리엔 (Louis Antoine Fauvelet de Bourrienne, 1769 ~ 1834) 이 죽은 뒤 발간된 회고록을 보면 이 때의 처참한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나는 역병에 걸린 병사들, 또는 그런 의심을 받은 병사들이 버려지는 모습을 보았다. (...) 죽어가는 병사들은 길가에 버려져 겨우 들릴듯한 목소리로 "나는 부상을 당했을 뿐이다, 페스트에 걸리지 않았다" 라고 말하며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부상당한 곳을 보여주거나 아예 스스로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 아무도 그들을 믿어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저 "그냥 죽은 사람일 뿐이야" 라고 말하며 지나쳤다."
- Louis Antoine Fauvelet de Bourrienne (1836), <Memoirs of Napoleon Bonaparte>, R. Bentley
이런 끔찍한 경험을 했으니, 야파에 다시 당도한 나폴레옹이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오스만 군대가 자신을 추격해 오고 있다는 생각에 나폴레옹은 데쥬네트를 불러 야파의 남아있는 병자들을 치사량의 아편으로 안락사 시키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렇게 두고 가면 어차피 나중에 당도한 오스만군이 그들을 잔혹하게 죽일테니, 차라리 미리 그들을 고통에서 해방시켜주자는 취지였다.
Robert Ker Porter (1803), <야파에서 580명의 부상병들을 독살하라고 지시하는 나폴레옹 (Buonaparte ordering five hundred & eighty of his wounded soldiers to be poisoned at Jaffa.)> [이미지 출처]
그러나 데쥬네트는 나폴레옹의 이 명령을 거부한다. 군의관으로서 그의 임무는 사람을 치료해 살리는 것이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는 논리에서였다. 데쥬네트의 기록에 따르면 이에 나폴레옹은 일단 그의 양심을 존중하겠다는 말을 하면서도, 자신의 의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을 찾겠다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병자들을 안락사시키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 번 내비쳤다고 한다.
결국 나폴레옹은 다른 군의관을 시켜 남아있는 병사들에게 기어이 아편을 투약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다만 그 이후 일어난 일은 분명치 않은데, 다시 헤롤드에 따르면 오스만측의 기록에 독으로 죽은 프랑스군 병사에 관한 내용은 전혀 없었으며, 다만 야파의 병원에서 7명의 완전히 회복된 프랑스군 생존자들이 발견되었고, 그들은 발견 직후 동행한 영국 해군의 보호를 받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실제로 나폴레옹의 명령이 이행되었는지의 여부는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있다.
좌우간, 그렇게 나폴레옹은 카이로로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폴레옹은 대다수 병사들을 내버려두고 일부 측근과 함께 이집트를 빠져나가 프랑스로 향했고 이것이 이집트-시리아 원정의 끝이었다. 나폴레옹의 군의관 중 한명이었던 도미니크 장 라레 (Dominique Jean Larrey, 1766 ~ 1842) 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원정에서 프랑스군 병사들은 하루에 6명 ~ 15명 꼴로 페스트에 죽어갔으며, 헤롤드에 따르면 이 당시 페스트의 결과적 치사율은 무려 92%에 달했다고 한다.
프랑스에 돌아온 나폴레옹은 쿠데타로부터 시작한 일련의 정치 활동을 통해 1804년, 스스로 프랑스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그리고 이 황제는 그 어떠한 정치적 공격으로부터도 자유롭고 싶었다. 특히 그가 야파에서 저지른 "불미스러운 일들 (위에서는 언급을 안 했지만, 야파 점령 직후 기독교도와 무슬림을 가리지 않는 약탈과 오스만군 포로 학살을 저지르기도 했다.)" 은 이미 세간에서 어느정도 회자되고 있었으며, 이는 새 황제에게 굉장히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위에 인용된 그림으로, 1803년 영국에서 발간된 한 책자의 삽화였던 이 그림에는 나폴레옹이 "부상병" 을 포함한 무려 580의 프랑스군을 "독살" 시켰다는 대단히 과장된, 자극적인 문구가 함께 붙어있었다.
이런 반 황제 프로파간다를 차단하기 위해, 황제에 즉위하기 전 나폴레옹은 그로를 불러 맨 위의 그림을 그릴 것을 주문했고, 그로는 거의 6개월만에 이 그림을 완성했다. 1804년에 그림이 완성되자마자 나폴레옹은 이를 즉시 파리 살롱 (Salon de Paris) 에 전시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이집트에서 보여준 "위대한 사건" 을 각인시켰고, 이것이 효과를 보았는지 나폴레옹의 제위 기간동안은 야파에서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들" 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전쟁을 통해 정치적 입지를 얻거나 강화한 정복자, 독재자들은 모두 자신이 전쟁에서 저지른 만행을 숨기고, 왜곡하려 들며, 한편으로는 자신의 전쟁영웅적 면모를 강조하는 적극적인 프로파간다로 시민 사회의 동의와 추종을 얻고자 한다. 이는 막스 베버 (Max Weber, 1864 ~ 1920) 가 이야기한 "카리스마적 권위 (Charismatic authority)" 의 성격과 연계해서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운 독재자의 일반적 경향이다.
나폴레옹은 그런 카리스마적 권위의 표상이나 다름없는 인물일 것이다. 분명 영웅적인 면모도 많았던 인물이지만, 그 영웅적 이미지를 온전히 하기 위해 또한 많은 것을 가려야만 했던. 물론 정 반대로 나폴레옹이 주어진 악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평가를 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이 평가는 기록된 역사를 읽는 우리 개개인의 몫으로 남는 것이 아닐까.
잘 그려진 그림에 명암이 고루 사용되듯, 잘 기록된 역사는 인물의 명암을 충실히 반영하는 법인 것이다. 야파에서 페스트에 개고생한 나폴레옹과 그 휘하 프랑스군을 기록한 역사를 살펴보며, 역시 역사의 인물이란 영웅이나 악당 둘 중 하나로만 평가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결말과 함께, 오늘의 글을 마침미다. 그럼 군-바!
주요 참고자료:
James C. Harris (2006), <Napoleon Bonaparte Visiting the Plague-Stricken at Jaffa>, American Medical Association
Jean-Philippe Chimot (2012), <La vérité sur le mensonge>, Écrire l'histoire
J. Christopher Herold (1962), <Bonaparte in Egypt>, Harper & RowRobert K. D. Peterson (1995), <Insects, disease, and military history: the Napoleonic campaigns and historical perception>, American Entomologist
Yvonne Hibbott (1969), <"Bonaparte Visiting the Plague-stricken at Jaffa" By Antoine Jean Gros (1771-1835)>, British Medical Journal
파딱감이야
그래서 병명이 뭐였는데
본문에 적혀있듯 "림프절 페스트 (Bubonic Plague)"
찾아보니까 흑사병이네
맞워오, 여러가지 흑사병의 한 종류람미다.
프랑스군이 진이유는 역사대대로 정신력과 의지 부족이였다 엘랑비탈 정신으로 극복해야한바 -푸틴시진핑개새끼
파딱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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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바빠서 글 싸는것만 할 수 있는뒈스웅
꿀잼-
양질의 번역글 개추
콩순아 이런건 어디서 가져오는거냐
하단의 참고자료를 참고하면 되는데스. 인용구는 별도로 출처 명기해둠!
아니 콩순아 그 출처 말하는거 아니고 그냥 이런 소스 발굴하는 곳이라도 있나 싶어서 그럼
아항, 보통은 내가 이미 갖고있는 책이나 논문이 있으면 그걸 보고 하는 편이구, 정 없으면 일단 구글 스칼라나 도서검색, 아니면 아예 filetype:pdf 써서 관련된 논문이나 서적 한 편 찾은 다음에, 그 안에서 내가 원하는 내용에 사용된 참고자료를 또 찾아서 원문 확인하구 내용을 쓰는거임! 특히 이 글에서 인용문 출처로 사용된 1차사료 대부분은 출판된지 100년도 넘어서 저작권이 소멸된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구글 도서검색 같은 곳에서도 자료 찾으면 그냥 전문 다 제공해주는곳두 많웡! 예를 들면 데쥬네트가 남긴 기록은:
https://books.google.com/books?id=C_sGAAAAcAAJ&dq=%EF%BB%BFHistoire+m%C3%A9dicale+de+l%27arm%C3%A9e&red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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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근데 님 몇개국어할수잇는거에요 도대체 ㄹㅇ 영어도 하고 프랑스어도 함..?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