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때 150만결이었던 토지는 임진왜란 직후 토지조사 결과 30만결로 축소

호구조사도 사실상 붕괴됨 (사망 + 실종 + 노비도망)


결은 특정한 넓이가 아님. 오히려 생산량 기준으로 곡식 300두를 생산할수 있으면 1결임

그러므로 땅이 척박한 지역은 12000평에 1결이었고 전라도 충청도처럼 비옥한 지역은 3000평이 1결이었음


30만결이란 숫자를 보면 알겠지만 조선은 일본 + 청나라에 연속펀치를 얻어맞아 사경을 해맴

거기에 훈련도감을 비롯, 나중에 5군영이라는 직업군인들이 만들어지는데 여기 소모되는 비용이 엄청났음

결국 재정난에 허덕인 호조와 조선정부는 다음의 방법으로 버텼음


1. 병자호란 후 ~ 1700년대 중반 : 군량미 사용 


조선은 멸망때까지 세금이 3가지였음 전세(땅에서 곡식나면 낸다), 역(노동력징발, 징병), 공납(토산물을 바치는것)

전세가 가장 많았을것 같지만 아님. 사실 공납이 세금중 다수를 차지했음.


전세는 세금을 낮게 책정했기 때문임. 세율이 점점 낮아지다가 인조때 사실상 10%로 고정됨

오늘날로 치면 소득세 10%로 영원히 쭉 가는거. 역이야 노동력 징발인데 백성들은 불려가서 성 쌓거나 배 타거나 건축물 만들거나 함

이 역이 너무 힘들어서 자살, 자해하는 사람이 많아졌음. 군역(징병)의 경우 나중에는 돈 내는걸로 대체됨. 위에서 말했듯 조선은 직업군인체제로 변함


자 이제 공납이 남았음 이게 압권중에 압권임. 당시엔 냉장고도, 기차도 자동차도 없었음.

기술을 무시한 지역 토산물을 바치라는 세금임. 읽는 사람이 만약 여름에 해산물을 기한 내에 바치라는 공지를 받으면 어떻하겠나?

관리들은 토산물 상태가 안 좋으면 퇴짜를 놓았기에, 결국 상인에게 대신 돈을 주고 맡기는 수밖에 없었음. 일종의 공동구매지

근데... 여기에 관리가 상인이랑 결탁하면서 원래 비용의 몇배를 불려서 폭리를 취함

거기서 끝이 아님.  토산물 중에서도 진짜 바치기 힘든것들 예를 들어서 호랑이 가죽(!), 전복, 절벽에 핀다는 약초 등등

당연히 이거 구하려다 사망하는 백성도 많았음.


나중에 대동법으로 공납도 쌀로 내게 되는데, 계산해보니 전세의 3배였음. 이 정도로 힘든 세금이었음


아무튼 조선은 쌀이나 면직물로 걷은 세금을 다 쓰지 않고 각 성이나 전략 요충지에 비상용으로 보관해둠

남한산성, 강화도 그리고 특히 평양을 비롯한 현재 북한지역 대부분은 아예 세금자체를 현지에 보관해두었음.


실제 실록에 나온 호조판서의 발언 : "지금 나라의 곳간이 고갈되어 급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신(臣)이 알아보니 평안도 각 창고에 돈 6만냥과 쌀 수만석이 있다하니 우선 쓰도록 하는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결국 군량미를 이용해서 재정부족을 땜빵하기 시작함. 하면 안되는 일이었고, 사실 땅을 숨기고 탈세하는 양반이나 지방 호족도 많았기에 차라리 이걸 적발하는게

현명했을 거임.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공무원들은 그런 위험을 싫어함. 양반은 국가 기득권층인데 그 수많은 사람들과 갈등을 빚기 싫었을 거임

숙종때인 1680년에 이미 문제가 발생함. 강화도에 서류상 있어야할 군량미 10만석이 4만석으로 줄어듦. 다른 방법이 필요했음.



2. 17세기말 ~ 18세기 초 : 은화


청나라와 에도시대 일본은 오랫동안 직접적인 무역을 안했음. 조선에서 중개무역을 했는데, 은이 풍부한 일본에 조선이 청나라 물건을 수출하고 이익을 남겼음.

여기에 청나라에는 조선인삼이 인기가 많아서 이 시기 조선에는 엄청난 은이 유통됨. 기록에 의하면 서울 시장에선 채소와 땔감도 은 조각으로 거래하고 있을정도.

아무튼 호조는 여기에 주목해서 적극적으로 상인들로부터 은을 세금으로 받기 시작함. 조선은 역관들이 무역의 주체였기에 세금걷기도 쉬웠고.

여기에 단천에서 은광이 터져서 여기 주민들도 다른 세금을 면제하는 대신 은을 세금으로 납부하라고 함. 상당히 쏠쏠했던듯 함.


그런데..... 에도막부와 청이 결국 직교역을 시작해 버림. 거기에 일본도 면포나 인삼을 자체 개발하면서 더 이상 조선에서 수입할 물건이 없어짐.

결국 18세기가 되면 더 이상 은 수입이 안나오게 됨. 

(어차피 일본도 은광이 쇠퇴하고 청나라는 엄청난 무역흑자로 은이 쌓임. 이 때문에 불과 70년후 아편전쟁이 발발함.) 



3. 18세기 중반 ~ 조선멸망때까지 : 상평통보 발행, 삼정의 문란

이제 국사시간에 배운 바로 그 삼정의 문란이 나옴. 사실 그랬음 3정이라는게 전세, 역 + 환곡임 (공납은 대동법으로 어느정도 정리됨)


경비팽창의 법칙이란게 있음. 인구가 늘면 당연히 국가의 재정지출도 많아짐. 이를 대응하기 위해 국가는 세금제도를 개혁해야 하는데....

조선은 그걸 못했음. 19세기는 이미 한반도 인구가 1500만명에 육박함. 조선 초기에 2배이상인데 

여전히 전세에 세율은 10%였고 국가재정은 물론 지방재정도 텅텅 비게됨. 그리고 이 때는 이미 자기 땅을 가진 백성은 줄어들고

양반의 땅에서 소작을 하게 되는데 뼈빠지게 농사지어서 수확의 50%를 양반에게 바치게 되었음 근데 전세수입 10%도 떠넘겼으니 결국 세율이 60%......

초기에 조선은 상평통보를 찍어내서 재정을 땜빵해봤지만 임시방편이었고

나중엔 땅을 소수의 계급이 대부분 소유하니 전세수입은 더 낮아지게 되고, 결국 각 지방의 관청들은 세금수입 부족으로 이런 횡포를 부리게 된거임.


환곡은 원래 곡식이 부족한 사람한테 쌀을 빌려주고 싼 이자를 받는 복지정책인데 강제로 적은양의 쌀을 빌려주고

가을게 갚게하는 세금제도로 바뀌게 됨.


이쯤되면 단순히 탐관오리 운운할게 아니었음. 국가자체가 인구를 부양하지 못한거임. 한마디로 조선왕조는 수명이 다한거지.

그 유명한 맬서스의 트랩에 갖혔기에 산업기술을 받아들이거나 개항해서 무역해야 하는데..... 알다시피 못함.


어떻게 확신하냐고? 그 맬서스의 트랩을 벗어난게 일제시대 + 지금의 한국임.

일제시대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근대기술이 도입되면서 한반도 인구는 2300만으로 늘고

지금은 한반도의 절반인 남한의 인구가 무려 5000만명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