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는 Hitler’s fatal miscalculation: why germany declared war on the united stated by Klaus H. Schmider, Cambridge military histories.



렌드리스가 동부전선에 끼친 영향력에 대한 논의 대부분은 1942년 이후 전달된, 베를린과 부다페스트로의 두 갈래 진격을 지원한 막대한 양의 물자(특히 차량)에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알렉산더 힐은 2006년과 2009년, 최초로 전달된 영국제 렌드리스 전차들이 1941년 12월 모스크바 전투에서 결정적인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했을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친 최초의 학자가 되었다.



물론 적은 숫자였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지만(약 90대, 모두가 전투에 투입된 것도 아님) 붉은 군대가 과거 수개월 겪은 무시무시한 손실과 1941년 10월 T-34 전차의 생산량이 불과 185대에 불과했다는 사실까지 감안하면, 당시의 소련은 확실히 고양이 손 하나라도 필요한 상황이었다.






렌드리스 법안 자체는 1941년 3월 이미 통과된 지 오래였으나 소련에 대한 지원은 1941년 6월 개전 즉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소련에 대한 첫 렌드리스, 퍼스트 프로토콜이 선포된 건 1941년 10월 1일 모스크바 회의 말미에서였고 독일은 이를 흔들리는 소비에트 정권을 지원하기 위한 대1중 선전으로 일축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1941년 9월 12일, 독일 공군 전투기부대 JG 77이 무르만스크 인근에서 영국제 허리케인 전투기 몇 대와 갑작스럽게 조우했었고 이 사건은 연합국이 실제로 소련을 지원하고 있다는 첫번째 증거였다.



이후 10월 13일, 중부집단군의 모스크바 진격을 지원 중이던 JG 51 또한 첫 북극해 호송선단편으로 소련에 도달한 커티스 P-40 전투기 편대와 마주쳤다. 2주 후 미국의 라디오 또한 마치 쐐기를 박으려는 듯, 실제로 미국제 전투기들이 러시아에서 수행한 역할에 대해 주요 특집 방송을 송출했다.



중부집단군 구역의 청취소는 영어로 된 목소리들을 잡아내기 시작했으며 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새로 도착한 기체들의 조종법을 소련 조종사에게 교육하기 위해 파견된 미육군항공대 교관들의 것이었다.






연합국의 소련 지원 경로를 차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간략하게나마 주장한 최초의 독일 문서는 1941년 8월 6일 OKW 사령부참모 발터 발리몬트 중장의 보고서였다.



소련과의 전쟁이 1942년까지 이어질 경우 발생할 수 있는 결과를 논한 10쪽짜리 비망록에서 그는 아르칸젤스크와 무르만스크를 경유하는 경로에 대해 어떠한 논의도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러시아 전역이 연장될 경우 일본의 기여가 필요할 수 있다고 적었는데, 그렇게 되면 ‘극동을 통해 전해지는 연합국의 원조’를 삼국동맹이 차단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었다.






히틀러 또한 1941년 대소 렌드리스와 관련해 남긴 기록이 많지 않으며, 그나마도 일부 기록은 애매모호하다. 하지만 당시의 군사적 배경을 감안해 분석해보면, 히틀러는 동부전선의 군사적 상황과 관련해 렌드리스가 가지고 있었던 잠재력을 대체로 무시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히틀러(그리고 대다수의 고위 지휘부)는 영미의 대소 렌드리스가 붉은 군대의 투쟁에 크게 기여하기에는 이미 상황이 너무 늦었고, 의미 있는 양의 물자가 투입되기도 전에 전쟁이 끝날 것이라 여겼다.



이런 태도가 잠시나마 흔들린 건 8월 하순, 중부집단군의 진격이 스몰렌스크 외곽에서 주춤댔을 때가 유일했다. 리벤트로프는 1941년 8월 25일, 일본에게 미국의 블라디보스토크 항행을 허용하지 말라는 경고를 전달했다.



그의 이 전보는 당시 독일 수뇌부가 느꼈던 이러한 불안감을 그대로 반영한 것일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일본을 소련과의 전쟁에 끌어들임으로써 미국과의 잠재적 마찰을 차단한다는 당시 히틀러의 대일 전략과 완벽하게 부합한다는 사실 또한 결코 부정할 수 없다.



11월 중순 볼로그다에 대한 히틀러의 관심 또한 위 사례와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상반된 해석을 가능케 한다. 얼핏 보기에 할더의 기록은 연합국의 물자 지원을 육로에서 차단하려 한 독재자의 의도를 반영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해석은 소련이 렌드리스 물품을 소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북극해 항구들에 대한 논의가 해당 시기 히틀러와 독일 해군 지도부의 전략 회의에서 전혀 관찰되지 않는다는 사실과는 모순된다.






따라서 과거 10월 27일, 블라디보스토크의 잠재력은 결국 제한적이라는 해군사령부 참모총장 쿠르트 프리케와의 합의가 이후 몇 주 동안 거의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거나, 혹은 진주만 공습 전후 수주간 있었던 도쿄와의 협상에 블라디보스토크 문제를 포함시킬 정도로 북극 항구들의 중요성을 크게 재평가하지는 않았다는 해석이 가장 합당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1941년 12월 14일, 히틀러는 오시마 주독일본대사와의 회담에서 소련의 태평양 기지를 주제로 꺼내 들었는데, 이는 최소한의 부분적인 재평가 시도 정도는 존재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러나 렌드리스의 영향력에 대한 히틀러의 태도가 진정으로 급변했다는 증거는 1941년 12월 29일이 되어서야 나타난다. 그날 히틀러는 해군 지도부와의 대담에서 노르웨이에 대한 우려를 드러냈고 3척의 전함과 3척의 중순양함을 북극으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그의 이러한 태도변화는 당시 동부전선 중부집단군의 위기, 미국에게 선전포고하던 12월 11일까지만 해도 아직 감당할 수 있을 수준으로 보였던 소련군의 역공세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던 것이 명백하다.






결국 현재의 증거들을 종합해보면 10월 말과 11월, 히틀러는 소련군이 비록 완전히 패배하지는 않았으나 연합군의 뒤늦은 도움이 회생시킬 수는 없을 정도로 충분히 무너졌다고 판단했다.



이는 OKH와 대부분의 동부전선 야전 사령관들 또한 마찬가지였고 따라서 이 간단한 이유 덕분에 히틀러는 렌드리스가 바르바로사 작전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기꺼이 무시하기로 결정했다.



1줄요약


소련을 개ㅈ으로 보다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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