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는 Operation Barbarossa and Germany's Defeat in the East by David Stahel


많은 저작물들이 2차 대전의 독일군 야전원수들을 뛰어난 군사경영자로 묘사한다. 동시에 독일군 기갑지휘관들은 흔히 혁명적인 군사개념을 새로이 고안해낸 위대한 혁신가들로 소개되곤 한다.



하지만 기록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서술은 실제 일어난 역사와는 거리가 먼 허상이라는 사실을 곧 깨달을 수 있다.


독일군 야전 지휘관들은 1941년 여름 전역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여러 고난과 역경들은 고사하고,



심지어 바르바로사 작전에 처음부터 내재되어 있던 계획과 개념상의 실수들조차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1941년 8월. 이제 독일군의 보급체계는 지나치게 길게 늘어나 있었고 집단군들의 공세역량은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었으며 재정비 또한 미처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바로 이 시기, 장군들은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모스크바로의 즉각적인 공세를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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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가 지휘 중인 군대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무능력은 그들뿐만 아니라 전역 자체가 내재하고 있던 오점이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진격 도중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을 학습하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심지어 전선 지휘관들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은 광대한 소련 연방을 상대하면서 나타난 여러 어려움들을 직접 목격했다. 그들은 이이상 작전을 지속할 경우 발생하게 될 군수 및 군사적 대가에 대해 계산해 볼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



설사 매일 눈앞에서 이어지는 전투들로 인해 미래 계획에 신경 쓸 시간이 조금도 없었다 해도, 과거 수 주간 소련 연방의 열악한 도로와 붉은 군대의 끊임없는 역습을 상대하면서 무언가 깨달을 만한 기회는 충분했다.


기계화 부대가 지속된 전역으로 인해 한계에 도달하지는 않았을까? 과연 어떻게 해야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버리기 전에 다음 공세를 실시할 수 있을 만큼 보급을 해결할 수 있을까?



전선에 뚫린 구멍을 메우고 제대로 점령되지 않은 영토를 마저 처리할 예비대는 어디 있을까?



물론 그들이 이러한 문제점들을 아예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공평을 기하자면 대부분의 문제점들에 긍정적인 해결책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각 야전 지휘관들은 나름대로 이 끔찍한 상황을 식별할 수 있을 만큼은 전략적 시야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르바로사 작전이 실패하기 직전이라는 사실을 지적한 장군이 아무도 없었다는 점, 그리고 너무 늦기 전에 어떤 방식으로든 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요구한 지휘관이 아무도 없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그들은 독일이 정말 어떤 위기에 처해 있었는지 제대로 깨닫지는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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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이한 실수가 어째서 발생했는지 설명하기 위해선 잠시 과거로 물러나 독일 장군들의 과거 배경을 살펴봐야 한다. 이들 모두는 1차 대전 당시 독일군에서 복무했고, 특히 할더, 룬트슈테트, 만슈타인, 케셀링, 클라이스트 등 몇몇은 아예 동부 전선에서 제정 러시아와 싸웠다.


독일에게 있어 1차 대전의 러시아는 아무리 좋게 봐도 결국 만만한 상대였다. 1914년 탄넨베르크에서의 극적인 승리는 이러한 관점의 전형적인 실례였고, 이러한 기억들은 당시 초급 장교들의 뇌리에 단단히 각인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심지어 독일은 다중전선으로 고통 받으면서도 결국 1917년 러시아를 무릎 꿇렸다. ‘고물 장비를 쓰고 졸렬한 지휘를 받는, 낙후된 땅의 소작농군대‘라는 러시아군에 대한 편견은 그렇게 완전히 굳어졌으리라.



한편 같은 전쟁의 서부전선에서는 독일군이 패배를 맛보았고, 따라서 독일의 앞길을 가로막는 진정한 장애물은 서부에 존재한다는 잘못된 결론이 도출됐다.


그렇게 1941년이 되었다. 프랑스는 패배했고, 영국은 고립되었다. 소련 연방은 독일과 사실상 홀로 마주하고 있었다.



소련의 국력에 대한 객관적 평가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독일 장군들이 붉은 군대를 과소평가 하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고, 난관들이 산더미처럼 쌓이기 시작하자 1차 대전의 기억들이 다시금 독일 장군들을 지배했다. 1914년 9월, 독일군이 결국 서부전선에서 방어로 전환하면서 이후 4년간 이어진 참호전의 악몽이 시작되었다.



연합군이 ‘마른 강의 기적’이라고 부른 이 사건으로 인해 1914년 신속하게 승리를 쟁취한다는 독일군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당시 마른 전투에서 직접 싸웠던 구데리안을 포함한 많은 후대 독일 장군들에게, 이때 실패한 이유는 지나치게 야심적인 전략 목표나 연합군이 우세한 전장 상태 때문이 아니었다.



당시 독일군이 실패한 유일한 이유는 과도한 조심성 탓에 파리로 밀고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방법을 동원해 어떻게든 결정적인 승리의 성취에 매달렸다면, 그들은 결국 승리했을 것이었다. 이 어긋난 교훈은 2차 대전의 초기 전역에서 정말 증명되는 것처럼 보였다.



곧 공세주의가 독일 장군들을 사로잡았고 결국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이들은 독일군을 한계 이상까지 밀어붙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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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역사적 맥락은 할더와 그의 장군들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에 대해 잘 설명해준다. 그러나 이것들이 그들의 실수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이 소위 ‘전격전의 대가’들은 전략적인 면에서 ‘전격전’의 근본적인 토대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들의 공세와 전공이 절정에 달해있던 시기조차도.



이것은 절대 가벼운 실수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고려해보면 당시의 독일 장군들이 그들 스스로의 성공 공식과 그 한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기는 했는가 의문이 떠오르게 된다.



물론 사상적, 인종적 편견이 부채질한 과도한 자신감은 바르바로사 작전의 최종 결정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이것은 유일한 이유가 되기에는 부족하다.



결국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명백한 장군들의 실패에 있다.



독일 장군들은 역동적인 기동을 유지하는 한 제한적인 작전적 목표는 얼마든지 달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폴란드와 프랑스, 발칸반도의 경우에는 이정도만 해도 전략 목표까지 쟁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련은 달랐다. 물론 개전 초 그들의 공식은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성공조차도 전략 목표를 달성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심지어 스몰렌스크 전투를 통해 독일의 공세전력과 소련의 방어전력 사이의 관계가 역전된 이후조차도, 장군들은 모스크바를 향한 또 다른 대공세를 제안할 뿐이었다.



그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으며 이제 그러한 종류의 대작전에 필요한 근본적인 토대까지 완전히 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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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국방군의 문제는 그들이 작전적 사고에 매몰되어 이를 심지어 전략보다도 우선시했다는 것이다.



작전 요소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독일군 내부에서조차 지적되고 있던 오점이었다.



전임 육군참모총장 루트비히 베크는 젊은 장교들이 전략적 맥락으로 작전을 평가하는 방법을 배우기보단, 무기체계의 효율 극대화에만 몰두하고 있다며 불평을 늘어놓은 바 있다.



결국 독일군은 지나친 작전 중심 사고방식으로 인해 현재 스스로의 힘으로 수행 가능한 임무와 불가능한 임무를 판단하는 능력이 거세되었고,



어떻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명확한 이해 없이 전략적으로 무의미한 전투들을 그저 계속할 뿐이었다.



장군들은 점령할 다음 도시와 섬멸할 다음 소련군과 같은 당장 당면한 과제들에만 집중했다. 이런 편협한 시각은 심지어 1943년 여름까지도 이어졌다.



그들이 마침내 전쟁에서 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스탈린그라드에서 재난이 일어난 뒤였고, 그제야 군 내부에서 히틀러를 제거하려는 공모가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1941년 여름, 독일의 전략적 상황이 점점 절망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장군은 거의 아무도 없었다.



결국 장군들은 지나치게 근시안적이었다. 그들은 소련군의 1941년 겨울 역공세가 남아있는 모든 환상을 박살낸 뒤에야 당면한 현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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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독일군을 이끈 사람들은 전문적 관점에서 볼 때 작전적으로는 유능했으나 전략적으로는 무능했다.



극소수의 일부를 제외한 히틀러의 장군들 대부분은 전선 후방에서 벌어진 절멸전쟁에 직,간접적으로 협조했고, 결국 붉은 군대와의 전쟁에 있어서 무능했다.



오늘날 많은 독일 장군들이 소위 ‘명장’으로 여러 매체와 과도하게 무비판적인 역사서들을 통해 칭송받고 있다.



그러나 1941년 독일군 최고 지휘관들은 ‘보헤미아 상병’의 그릇된 군사적, 이념적 목표 대부분을 함께 공유하고 있었다.



그들의 전쟁은 곧 전략적 수렁과 대량학살로 얼룩졌지만, 양심의 가책을 느껴 스스로 사임한 장군은 단 한명도 없었다.



그들은 결국 진실로 히틀러의 군대였다.












참을수가 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