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는 민주체제를 부정하는 독재체제를 수립했슴에도 불구하고 독일국민들의 엄청난 지지를 받았던 걸 잘 알고 있을거다.
하지만 히틀러 본인이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능력 좋은 관료가 있었다. 그 이름은 얄마르 샤흐트
히틀러의 절대권력을 가능하게 한 '수권법'
샤흐트는 세계대공황 상황에서도 독일을 번영으로 이끌었고 이로인해 독일국민들은 나치와 히틀러를 절대적으로 추종하게 만들었다.
샤흐트가 어떻게 나치 독일을 도왔고 어떻게 토사구팽 당했는지가 주 이야기가 될 것이다.
1. 극심한 배상금에 고통에, 자해를 선택하는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 후 독일경제는 완전히 붕괴된다. 그런 상황에서 프랑스는 배상금을 제대로 갚지 못한다는 이유로 독일핵심 공업지역인 ‘루르 지방’을 점령한다.
당시 독일인들은 이 사건으로 자존심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지만, 당시 독일총리 였던 빌헬름 쿠노는 '루르 지역의 공장정지'와 같은 소극적인 저항 말고는 다른 대책이 없었다.
이에 독일은 자해공갈을 선택했다. 즉 독일 경제를 아예 만신창이 로 만들어서 승전국이 독일에게 아무것도 뺏어갈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로 한 것
이 자해사건이 독일의 천문학적인 인플레이션이라고 불리는 마르크 휴지화로 불리는 '하이퍼인플레이션' 이었다.
2. 패전국 독일은 어떻게 경제를 회복시킬 수 있었는가?
감당하기 어려운 경제적인 압박을 지속할 경우, 자해를 감행하여 ‘승전국’에게 한 푼의 배상금도 상환하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준 독일은 이제 ‘마르크화’ 부터 정상화 시켜야 했다.
이 미션 임파서블에 가까운 임무를 위해 ‘얄마르 샤흐트’ 라는 인물이 총 책임자로 임명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취한 첫 조치가 ‘렌텐마르크’의 도입이었다.
즉 기존의 1조 마르크를 1렌텐마르크로 교환하게 하였다.
새로운 화폐의 도입과 함께 지옥과 같았던 독일의 인플레이션이 멈추면서 마르크화는 신용을 회복한다.
또한 독일에 공산혁명이 발생하면 안된다고 생각한 미국의 원조와 독일을 너무 자극하면 프랑스와 영국도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깨달음의 결과였다.
라이히스 마르크
이렇게 마르크 가치가 안정이 되자, ‘샤흐트’는 금본위제인 ‘라이히스 마르크’를 도입한다.
3. 독일의 선택 ‘식민지 대신 화학’
당시 영국과 프랑스가 식민지에서 원료를 확보하였던 반면 독일은 제 1차 세계대전 전 부터 보유했던 화학기술을 이용하여
해외에서 원료를 수입하지 않고서도 화학기술 만으로 원재료를 만들어ㆍ우수한 공업품을 생산하여 해외에 판매하기 시작하였다.(화학비료와 합성고무 등)
독일은 '식민지 대신 화학' 이라는 구호로 모든 재원을 국내에 투자했다.
거기다가 독일의 마르크화가 저평가 된 상태였기에, 독일제품은 엄청나게 수출이 잘 되었다.
거기다가 포드 등 미국의 대기업들은, 인구가 가장 많은 독일을 유럽의 전초기지로 선택하여 엄청난 투자를 하였다.
4. 경제사령관 샤흐트가 배상금 문제를 해결하다.
독일경제를 정상궤도에 놓은 경제사령관 ‘샤흐트’ 는 당시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갈등을 이용하여 독일의 배상금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당시 영국과 미국은 프랑스가 독일의 루르지방을 점령한 행위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의 극단적 반발이 행여나 공산혁명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미르 샤흐트가 급기야, 독일의 배상금 문제도 해결을 한다.
샤흐트는 영국은행 총재인 몬터규 노만에게, 독일이 배상금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했다.
샤흐트는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한 노력으로, 배상금을 대폭으로 줄일 수 있었고 심지어 상환도 59년에 걸쳐 천천히 지불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후, 독일은 유럽에서 유일하게 V자 경제성장을 이룩하며 엄청난 경제호황기를 맞이하게 된다.
미국의 독일에 대한 대규모 투자와 마르크화의 안정, 그리고 전쟁 배상금 리스크 감소로 인한 결과였다.
5. 독일의 경제부흥의 기적을 이룩한 샤흐트 히틀러와 손을 잡다.
1920년대 믿을 수 없는 호황기를 경험했지만, 독일 역시 1929년세계 대공황 사태에 직면한다. 수출에 경제를 의존하던 독일은 다시 실업자가 넘쳐나게 되었다.
독일경제 사령관 샤흐트는 이 때 나치의 히틀러와 연대를 한다. 샤흐트가 히틀러와 함께한 이유는 힌덴부르크에 이어서 독일 대통령이 되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샤흐트는 독일의 은행가와 재계인사들을 히틀러와 연결시켜주었고, 나치당의 자금유치에도 기여를 한다.
급기야 1932년 정재계 인물들에게 히틀러를 독일총리로 임명하라는 탄원서를 내도록 선동했고 결국 1933년 히틀러는 합법적으로 독일총리에 임명이 된다.
독일의 자본가들은 '경제불황에서 공산혁명을 막을 방법' 은 파시즘 성향의 히틀러 밖에는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1933년 샤흐트는 독일중앙은행(라이히스방크) 총재 뿐 아니라 경제장관직도 겸임하면서, 독일의 실질적인 경제 대통령이 되어 경제에 대한 모든 전권을 쥐게된다.
하지만 샤흐트는 시장경제의 신봉자였기에 히틀러와 마찰이 생겼는데 나치가 사기업에 대해 간섭을 하자 그것을 막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6. 독일식 뉴딜정책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독일 역시 뉴딜정책을 실시하는데, 인프라 건설(즉 도로, 항만, 댐 같은) 뿐 아니라 군비증강으로 유효수요를 창출해 경제문제를 해결한다.
즉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활약한 나치독일의 탱크와 비행기는 ‘독일식 뉴딜정책’의 결과물 이었다.
특히 히틀러가 재무장 선언 후, 독일의 군사지출이 많아지자 독일경제는 다시 살아났다. 샤흐트는 위와 같은 독일식 뉴딜정책을 위한 자금 확보를 위해 ‘매포-벡셀 채권’을 도입한다.
7. 나치독일의 군비자금이 된 매포-벡셀 채권
나치는 ‘아우토반 같은 토목공사나 탱크나 비행기 같은 무기’를 생산하기 위한 자금으로 ‘매포-벡셀 채권’(이하 매포 어음)을 발행했다.
즉 나치는 기업에게 건축인프라 공사와 군사무기를 만들게 하면서, 화폐인 마르크를 지급하는 대신 ‘매포어음’ 을 지급하였다.
독일정부는 이 ‘매포어음’ 에 언제든지 정부가 어음을 사들여야 한다는 의무조항을 명시했고, 독일 중앙은행(라이히스방크)이 이에대한 연대보증을 하면서 ‘신용도’를 높였다.
화폐가 아닌 채권(매포어음)을 기업에게 지급 했으니,독일중앙은행은 화폐를 굳이 더 찍어내야 할 필요가 없었기에 인플레이션도 발생하지 않았다
매포어음은 신용도 확실한데 이자율까지 좋았기 때문에, 독일의 기업들과 국민들은 굳이 매포어음을 마르크로 환매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매포어음 덕분에 히틀러는 엄청난 인기를 얻게된다.
이렇게 샤흐트가 발행한 매포어음이 시장에서 활발히 유통되면서, 독일은 다른나라들과 달리 대공황은 커녕 ‘인플레이션 없는 경제호황’을 또다시 누리게 되었다.
당연히 나치와 히틀러에 대한 독일 국민들의 인기는 폭발적일 수 밖에 없었고, 매포어음은 히틀러의 독재정권 수립에 엄청난 기여를 하게된다 .
8. 매포어음이 한계에 이르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생하다.
하지만 이 매포어음이 204억 마르크가 발행이 되면서 한계점에 도달하게 된다. 즉 독일경제는 나홀로 호황을 구가했지만 ‘인플레이션에 대한 불안감’이 독일에 불어닥친다.
매포어음을 더이상 발행할 수 없게되자, 나치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다.
결국 독일인들 사이에서 이러한 걱정이 가중되면서 인플레이션은 피할 길이 없었고, 결국 1938년에 ‘매포어음 발행’은 중지 되게된다.
1939년 샤흐트는 히틀러에게 군사비를 더 지출하면 독일에 심각한 인플레가 닥칠것이라 경고하면서, 전쟁을 반대하자 샤흐트는 경제장관직에서 해임되어 토사구팽을 당한다.
당연히 '독일연방 대통령'을 꿈꾸었던 샤흐트의 야망도 물건너 가게 되었다.
경제공황을 극복한 공로로 독일을 장악하는 나치, 그러나 샤흐트는 토사구팽 당하고...
나치는 매포어음을 더 이상 발행할 수 없었기에, 독일경제를 살릴 방법으로 전쟁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결정을 한다.
9. 제2차 세계대전과 샤흐트
나치독일은 프랑스를 점령했지만, 대 소련전의 패배와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인한 미국의 참전으로 수세에 몰린다. 이에 1944년 7월 20일에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히틀러를 암살하려 한다.
그러나 히틀러 암살은 실패했고, 뜬금없이 샤흐트는 암살사건 관련자들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체포가 된다. 그리고 샤흐트는 '강제수용소에 수감' 되는 신세가 된다.
나치독일이 패망한 뒤 샤흐트는 나치독일을 위한 경제정책을 수립했다는 죄목으로 전범이 되었고, 전범 재판소에서 5년 형을 선고 받았다.
하지만 1년 후 가석방 되었고, 그 후 독일 뒤셀도르프 은행의 임원으로서 다른 개발도상국의 경제고문으로 활동을 했다. 그리고 1970년에 뮌헨에서 93세에 사망한다.
샤흐트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 하나로 나치에 동조하다 배신을 당했기에, 비록 나치에 부역한 인사였지만
전 후에는 나치를 극도로 혐오하여 '찢어죽일 놈들이라고 욕 하였다’ 고 전해진다.
샤흐트 뉘렌베르크에서 무죄받은거 아니냐
5년의 노동형 받은거 맞고 형기 덜 채우고 가석방 됨
잘 읽었음 2차대전 발발은 경제쪽 맥락이 가장 설명이 들어맞는 듯. 근데 바이마르의 하이퍼인플레가 의도적이라는 내용의 출처가 있음? 그건 처음 들어서
프랑스의 루르 공업 지역 점령이 영국과 미국이 찬성하지 않은 프랑스 독단이였고 제조업 기반을 잃은 독일이 할 수 있는거라고는 돈 찍는거 말고는 없었거든 - dc App
역시... 여기서도 유럽빌런 엘랑이 등장하는구나.
그것 말고도 정부 예산 확보한다고 찍은 것도 잇엇을걸
Alan White and Eric Hadley, Germany 1918-1949 (1990) p.807 에 따르면 루르 점령 당시 바이마르 정부는 노동자에게 총파업을 부추겼는데 그럼에도 기존 모든 노동자의 급여를 돈을 찍어서 주는 식으로 마구 통화량을 늘렸음. 실제로 1922년까지는 물가가 약 40배 올랐는데 루르 파업 이후 1922년 말-1923년 말 한 해에만 10억배가 오름.
호이독일하면서 계속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