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별동대나 돌격대장 임무는 전사할 위험성은 굉장히 높았고 김유신의 친족 젊은이들 또한 이 과정에서 상당수가 전사했다. 황산벌 전투에서 소수 병력을 이끌고 돌격하여 죽은 반굴은 김유신의 조카였고, 마찬가지로 죽은 관창 또한 김유신과 가까운 친족 관계(설명이 복잡하므로 관창 문서 참고)였다. 하지만 이 두 젊은이의 사례는 당시 신라에서 결코 '특별한 상황'이 아니었다.
신라가 본격적으로 팽창을 시작한 진흥왕대 이래 관창과 반굴 같은 사례는 정말 수두룩하게 나온다. 원광에게 세속오계를 청해받은 두 젊은이, 귀산과 추항만 해도 아막성에서 백제군에 맞서 싸우다 죽었다. 611년 가잠 성주 찬덕은 백제의 공격을 받아 양식이 다 떨어져 시체를 파먹고, 오줌을 마셔가며 이듬해까지 악착같이 버티다 도저히 지킬 수 없게 되자 귀신이 되어서라도 성을 되찾겠다며 자결했다. 찬덕의 아들 해론은 618년 아버지가 전사한 가잠성 수복전에 참전해 기꺼이 선봉에 서서 싸우다 전사했다. 642년 대야성주 김품석의 부하였던 죽죽과 용석은 군량고가 불타고, 성주가 자결한 상황에서 끝까지 싸우다 죽었다. 647년 백제가 무산, 감물, 동잠 3성을 공격해 왔을 때 구원에 나선 김유신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부하 비령자에게 돌격대장 임무를 부여했다. 기꺼이 명에 따른 비령자는 전사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본 비령자의 아들 거진은 비령자에게 자신을 부탁받은 노비 합절이 출정을 말리자 그의 팔을 자르고서까지 적진에 돌격해 싸우다 죽었고, 뒤이어 노비인 합절까지 적진으로 뛰어들어 전사했다. 세사람의 희생으로 신라군은 승리를 거뒀고 김유신은 그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냈다.
이때의 신라에선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전장의 고혼이 되는 것조차 드문 일이 아니었다. 또한 하류층, 사회적으로 천시받은 노비까지 적진에 뛰어들어 싸우길 마다하지 않았고 전사하면 칭송을 받았다. 이런 기록들은 신라 사회가 장기간 백제, 고구려와 양면전쟁을 강요받으며 극도로 상무적인 기풍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이처럼 무수히 많은 신라 장정들의 목숨을 내놓은 분투로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을 이겨내고 삼국간 쟁투에서 승리자가 된 신라였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신라의 영웅 김유신의 아들이 패배하고도 살아 돌아온 것이다. 이 상황에서 원술을 내치지 않는다면 김유신은 주변 사람들은 물론이고 신라와 그를 위해 싸운 장병들, 더 나아가 백성들 전체를 볼 낯이 없어진다. 좀 과장하자면 김유신과 그 가문의 명예 문제를 넘어 신라 사회 전체의 불신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심각한 사안으로 볼 수도 있다. 위에서 언급된 수많은 신라의 장정들이 김유신과 신라 지휘부의 명령에 초개처럼 목숨을 버리는 사회적 풍토를 가능케 했었던 것은 '신라인은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국가와 사회를 위해 전장에서 죽을 각오가 되어있어야 한다' 라는 사회적 합의가 강철 규율처럼 자리잡아있었기 때문이다. 전투에서 패하는 건 죄가 아닐 수 있어도 패배하고 살아 돌아오는 것은 이유불문하고 사형당해도 할 말이 없는 큰 죄였다. 이러니 최고 지휘권자의 아들이 살아돌아온 것 자체가 사회적 규율에 큰 균열을 낼 수도 있는 중대사안이었던 것이다.
당시 김유신은 단순한 '높으신 분' 수준이 아니라 신라 그 자체를 상징할 수도 있는 노익장이었다.[1] 또한 김유신 본인이 가야계라는 출생의 한계를 실력으로 극복하고 출세한 인물이었기에, 골품제 하의 신라에선 여전히 그를 질투하고 흠 잡으려는 자들 역시 상당했을 것이니 정치적 입지를 유지하기 위해 무뚝뚝하고 엄격한 태도를 보였다고 볼 수도 있다.
김유신 역시 역사에 일일이 기록되지는 않았더라도, 탈영하거나 함부로 퇴각하는 부하들을 처벌한 적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원술의 처지를 이해하고 넘어간다면 설사 원술의 상황이 정말로 그럴만한 상황이었다고 해도, 타인의 눈에는 자신의 아들이라 특별히 봐줬다고 흉보일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당시의 군인 대부분이 자원 입대한 게 아니라 오늘날처럼 징병제로 오는 경우가 대다수였기 때문에, 군기를 잡기 위해서 수뇌부인 김유신으로서는 도망가면 어떻게 되는지 봐라는 의도로 장병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그를 쫓아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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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는 고구려 신라 백제 전부 수백년간 상시 전쟁상태다 보니 진짜 엄청나게 살벌했던거 같음
화랑들이 평민1도 아니고 진짜 귀족자제들인데도 급박하면 그냥 던지는 소모품취급임
밥먹을때도 언제든 뛰처나갈 수 있는 자세로 먹었다고 전해질 정도이니
귀족은 뭐 별것도 아니지 왕 본인도 전투자원인 시대니까
김유신 동생 김흠순. 나당전쟁때 당에 화전양면전술 수행하러 목숨걸고 사신으로 감. 김흠순은 풀려났는데 같이간 진골재상은 죽음. 김흔순 손자이자 황산벌에서 죽은 반굴 아들 김영윤. 보덕국 반란 진압하러가서 전세가 불리한데 퇴각안하고 끝까지 싸우다 전사. 그냥 최고위층들이 목숨을 안아꼈음. 진골 지휘관들이 도망안가고 싸우다 너무 많이 죽어서 나당전쟁때는 설오유, 시득 같은 6두품들이 수만단위 병력 이끄는 지휘관이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