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8월 15일 금요일 아침,


하인리히 히믈러는 민스크 외곽에서 유대인과 저항 세력에 대한 처형을 지켜봤다.

그 광경은 분명히 비슷한 시기 라트비아의 리아파에 모레 언덕에서 행해졌던 이 처형과 유사 했을 것이다.

이날 처형이 끝난 후 친위대 소속 에리히 본덴 바흐질레스키 장군이 히믈러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저건 100명 밖에 안 됩니다."

"100명? 그게 무슨 뜻인가?"

"우리 병사들의 눈을 좀 보십시요. 계속 이런 식으로 해야 합니까?

다들 신경과민이 되든지 괴물이 되고 말겁니다."






1941년 여름 나치는 소련 전역에서 여성과 아이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바흐질레스키 장군은 이런 방법에 문제가 있다고 여겼다.

이후 히믈러는 희생자들이 아닌 살인자들을 위한 더 좋은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1941년 9월 나치의 소련 점령지.

얼마후 친위대 산하 치안유지과학협회의 알베르토 휘트먼 박사가 동유럽을 방문했다.

휘트먼은 독일내에 일산화탄소로 장애아 살해를 담당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사실 독일에서 멀리 떨어진 동유럽에 일산화탄소를 보내는 일은 비용면에서 만만찮은 일이었다.

그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일단 휘트먼은 트럭에 폭발물을 실고 소련으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나치 지휘관 바트로네바가 민스크레인하우스에 마련된 나치 본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폭발물은 충분히 가져왔는가?"

"250킬로그램을 요청하셨는데 450킬로그램을 가져왔습니다. 혹시 모르니까요."

"잘했네."

"구덩이가 폭발되는 순간 정적이 감돌았습니다.

조각난 시체들이 사방으로 날아갔습니다.

다음날 시체 조각들을 다시 수거해서 다시 구덩이 속으로 집어넣었습니다.

나무위까지 날아간 시체는 수거할 수도 없었지요."

이후 휘트먼과 나치는 새로운 학살 방법을 찾기 위해 새로운 실험을 시도했다.

그해 초기 바트로네바가 경험했던 방법에서 얻은 실험이 있었다.

베를린의 파티에 참석했던 네바가 술에 취해 돌아오다가 시동을 켜 놓은 채 차에서 잠이 들었다.

당시 네바는 배기가스통의 일산화탄소 때문에 죽을 뻔 했었다고 한다.

네바의 경험을 들은 동료들은 소련에서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실험 장면을 촬영한 화면이다.






소련의 병원에서 끌어간 환자들이 들어간 방에는

자동차와 화물 트럭의 배기가스 파이프가 연결되어 있었다.

이 실험으로 인해 성인 안락사 프로그램보다 적은 비용으로 사람들을 살해할 수 있는 방법이 개발되었다.




비슷한 시기 동유럽에서도 이와 같은 가스 실험이 진행되었고

아우슈비츠 수용소 전문가들도 새로운 방법을 찾아냈다.

회스가 수용소를 비운 사이, 그의 부관이었던 칼 프리츠

아우슈비츠 역사의 이정표가 될 만한 실험을 생각 해낸 것이다.

당시 수용소는 일을 할 수 없는 소련인 포로들을 총으로 사살하고 있었다.







그때 칼 프리츠가 새로운 방법을 고안 해내게 되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는 옷이나 담요에 이나 해충이 생기면 시아나수소산결정체로 소독을 했다.


그 제품의 이름은 자이클론 B였다.




얼마후 수용소로 돌아온 회스도 그 실험에 대해 알게 되었다.


"독가스 처형에 대해 보고하겠습니다."



"프리츠가 독가스를 사용한 처형에 대해 보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들어온 소련군 포로들에게도 그 방법을 썼습니다."


- 루돌프 회스



그날 회스는 기쁜 마음으로 아내와 네 아이들이 있는 수용소내 사택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솔직히 독가스 실험을 알게 된 후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항상 총살형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우리가 피의 숙청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대해 안심이 되었지요."


- 루돌프 회스



내용 출처 - BBC, 아우슈비츠 1부 비극의 시작







https://mega.nz/folder/0XsAwY5Z#Lp-1GGfb2jxGrLPtQ4IwC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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