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대통령 Syngman Rhee는 대한민국 육군 총사령관으로, 밑에는 국방장관 신성모, 육군 참모총장은 채병덕이었음.
남한 군대는 북한과 마찬가지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군정에서부터 시작했는데,
38선 이남의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한 후 그들을 일본으로 송환하고 한국인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미군의 목적이었다.
1946년 1월 조선 국방 경비대가 인가,설치되었으나 이 조직은 너무 천천히 형성되어 1년 후에도 총원이 5,000명에 불과했음.
그러나 1947년 4월에는 두 배가 되었고 그 해 7월에는 15,000명으로 증가함.
1948년 8월 대한민국 육군으로 승급. 그 후 몇 달 동안 급속도로 성장하여 1949년 1월까지 60,000명 정도의 병력을 보유함.
1949년 3월 대한민국은 육군 65,000명, 해안 경비대 4,000명, 경찰 45,000명으로 총 병력은 약 114,000명임.
미국은 M1 소총과 60mm,81mm 박격포를 포함한 표준 보병 무기와 물자를 약 50,000명 가량의 육군 병력에 지급해줌.
예비군 치장 물자로 알려진 M1 개런드
1949년 6월 말, 미군이 철수하고, 482명의 미 고문단이 남아 한국군의 고문역을 수행함.
1949년 7월 1일, 승인된 500명의 병력으로 설립된 미 육군 장교와 사병으로 구성된 이 소규모 그룹을 주한미군 군사 고문단(KMAG)이라고 불렀음.
"대한민국 국군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대한민국 정부에 조언하는 것"이 KMAG의 주요 임무였음.
KMAG는 무초 대사가 관리하는 주한미국대표부(AMIK)의 일부였으나 군사적 문제에 관해서는 육군부에 직접 보고할 수 있는 권한 있어, 무초 대사와 상의한 후에, 극동 사령부 최고 사령관 맥아더 장군에게 군사적 문제 보고가 가능했음.
'그 장군'
1950년 4월 한국 정부는 국내 치안 임무를 맡고 있던 국군과 교대할 전투 경찰 대대를 편성, 총 21개 대대를 만들 계획이었으나,
겨우 1개 대대만 1950년 4월 10일 영월에서 석탄 발전소, 석탄 광산 및 주변의 중요 자원을 전쟁 중에도 확보하기 위해 활성화됨.
1950년 6월까지 대한민국 국군의 총원은 육군, 94,808명, 해안 경비대, 6,145명, 공군 1,865명, 경찰 48,273명이었고,
약 한 달쯤 후 한국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육군은 약 65,000명의 전투원 및 33,000명의 본부 및 지원 병력으로 구성된 약 98,000명의 병력을 보유했었음.
1950년 6월 대한민국 육군의 전투 부대는 8개 사단(1, 2, 3, 5, 6, 7, 8, 수도사단)으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그들 중 5개, 1, 2, 6, 7 사단 및 수도 사단은 3개 연대를 보유, 3, 8사단은 2개의 연대를 보유함.
5사단은 2개 연대+1개 대대로 구성됨.
1, 6, 7, 수도 사단만이 병력을 10,000명 가까이 채우고 있었음.
*당시 인민군이 약 135000명이니 머릿수가 크게 떨어진 편은 아님.
한국 전쟁 개전 직전 38선 근처 배치도 *나토 심볼 기준
1950년 초여름, 대한민국 육군 정예 1, 7, 6, 8 사단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명명 순서대로 38선을 따라 배치되어있었고,
전선의 최서단에 있는 1사단 너머 옹진 반도에는 수도 사단의 17연대가 있었다. 다른 4개 사단은 내륙에 흩어져 있었고,
그 중 3개 사단은 반게릴라 활동과 소규모 부대 전술 훈련에 참여했다.
수도 사단 본부는 서울에, 2사단은 대전 인근 청주, 3사단은 대구에, 5사단은 광주에 있었다.
일반적으로 사용된 M2A1 105M 곡사포 *포방패가 있고 포신이 길다.
M3 105MM 곡사포 *포방패가 없고 포신이 짧다.
분계선을 따라 한국 사단은 대부분 미국 M1 소총, .30 구경 카빈, 60mm 및 81mm 박격포를 장비했고,
2.36인치 로켓 발사기(바주카), 37-mm 대전차포 및 105mm M3 곡사포(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 보병포 중대에서 사용한 단포신형).
이 곡사포는 유효 사거리가 105mm의 12,500야드(약 11km)에 비해 7,250야드,약 6.5KM(최대 사거리 8,200야드, 약 7.5KM)에 불과했음.
곡사포 대대가 5 대대 있었는데 각 대대는 일반적으로 본부 및 서비스 중대와 각각 5문으로 구성된 3개의 발사 포대로 구성됨.
1, 2, 6, 7, 8 사단에 각각 곡사포 대대가 있었음.
6 번째 대대를 육성 도중에 전쟁이 터짐.
1950년 6월 15일에 보유한 91개의 곡사포 중 89개가 사용 가능했다고 기록됨.
4.2인치 박격포(107mm) *아프다
한국군에는 탱크도, 중포도, 4.2인치 박격포나, 무반동총, 전투기, 폭격기도 없었음.
대신 동부 및 남부의 산악 게릴라와 싸우는 사단들은 대량의 일본군 99식 소총을 포함하여 다양한 소화기를 보유하고 있었음.
퍼싱의 경호원들이 인민사생팬의 접근을 제지하고 있다
1949년 10월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은 189대의 M26 퍼싱 전차를 요청했지만,
KMAG의 대행은 KMAG 참모가 한국의 지형, 도로 및 교량의 상태가 효율적인 전차 작전에 적합하지 않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고 대답함.
동시에 KMAG 장교는 무초 대사에게 한국군의 장비가 국경을 유지하기에 충분하지 않고, 북한 포병 사거리가 한국군 105mm 사거리보다 수천 야드나 더 길어 대포병사격 걱정 없이 한국군 진지를 마음대로 포격할 수 있단 사실을 지적함.
1950년 6월 대한민국 육군은 중장비로 27대의 장갑차, 105mm 곡사포, 60, 81mm박격포. 그리고 약 140문의 대전차포, 약 1,900문의 2.36인치 바주카포를 포함하여 700문 이상의 각종 포를 보유했었다.
1950년 6월에는 약 830대의 2 1/2톤 트럭(두돈반)과 1,300대의 1/4톤 트럭(지프)으로 나누어 수송용으로 약 2,100대의 사용 가능한 미 육군 차량을 보유했다. 유지 보수는 낮은 중요도에 머물렀음.
딘 E. 헤스 소령의 P-51 머스탱,
엔진 카울에 한국어로 "By Faith I Fly"를 적은 머스탱으로 유명, 유럽 전선에선 라틴어였다고.
*공군 웹툰 바우트-원에 나오는 그 사람
1950년 6월 대한민국 공군은 12대의 연락기와 10대의 AT6(고등훈련기)로 구성된 단일 비행 그룹으로 구성됨.
한국 공군의 KMAG 고문인 Dean E. Hess 소령은 그의 통제 하에 약 10대의 구형 F-51(머스탱)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아직 전투 임무를 수행할 자격을 갖춘 한국인 조종사가 없었음.
이 전투기들은 1950년 6월 26일 대한민국 공군에 인도됨.
없는 돈 탈탈 털어 산 백두산함. *북괴 특수부대 600명이 탄 수송함을 지옥으로 보내면서 돈값을 톡톡히 했다.
6월 25일 한국 해군은 최근 미국에서 중고로 구매한 백두산급 초계함(PC701 백두산), 한국 귀국 도중 하와이에서 구입한 3척의 다른 유사한 초계정, 1척의 LST와 15척의 전 미국 소해함, 10척의 전 일본 기뢰부설함, 그외 기타 잡배로 구성되어 있었음.
1950년 6월, 한국군이 보유한 포병 및 박격포 탄약 재고는 불과 며칠 분밖에 되지 않았고,
육군 보유 병기 15%와 보유 차량 35%가 사용 불능 상태로, 원래 미국이 제공한 6개월 치 부품이 거의 소진된 상태.
KMAG 국장의 보고서에 따르면, 육군의 훈련 상황은 대다수 부대가 중대 수준의 소규모 부대 훈련을 마치고 대대급 훈련에 참여했다고 한다.
요약하면, 1950년 6월의 북한군은 여러 면에서 한국군보다 분명히 우월했음.
인민군은 85mm를 탑재한 150대의 우수한 중형 전차를 보유했지만 국군에는 탱크가 없었음.
포병전력으로 122mm 곡사포, 76mm 자주포, 76mm 사단포로서 3가지 유형의 포를 보유하고 있었음.
최대 사거리가 14,000야드(약13km) 이상인 사단포로 최대 사거리가 약 8,200야드인 M3 곡사포를 능가했으며, 3배 정도 더 많은 포를 보유함.
북한은 작은 전술 공군을 보유하고 있었고 남한은 없었음.
북한의 공격 진형은 89,000명의 병력이 남한 사단의 약 65,000명을 상대, 또한 국경 경비대에 18,600명의 훈련병을 추가로 배치, 3개 예비 사단에 23,000명의 부분 훈련 병력을 추가 배치함.
이에 비해 한국에는 약 45000명의 경찰이 있었지만 전술적 작전 투입을 위한 훈련이나 무장을 하지 않은 상태였음.
양측의 소규모 해안 경비대나 해군은 서로를 상쇄하지만, 둘 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음.
여러 측면에서 북한군의 상대적 우월성을 침공 전에는 미군 당국이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았었고, 북한으로부터 공격을 받으면 한국군이 침입자들을 격퇴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 여겼던 KMAG의 사령관인 William L. Roberts 준장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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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전쟁전 준비 상태에 대해 알아봤고 다음편부터 본격적인 전쟁의 시작임.
지도 직접 만드는거 좀 빡세네
저놈의 콘파이프
정성 들어간 정보글 개추
개추
이게 왜 문학?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