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연재글인 조선 사신단, 요우커처럼 청나라 바늘을 사들였다.(링크) 에서는 조선이 언제부터 중국의 바늘을 사들였는지, 어디서 샀는지, 혹시 사기당한건 아닌지.. 설명해 봤습니다.
하지만 대체 청나라 바늘이 왜 조선 바늘보다 매우 저렴했는지, 대체 그 먼 거리를 배도 아니고 마차도 아니고 말을 끌고 와서 운송비가 꽤나 들 것임에도 조선 바늘보다 우수한 가격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는지는 다 설명 못드렸습니다.
그럼 청나라 바늘은 왜 그리 저렴하고, 조선 바늘은 뭐때문에 상대가 되지 못했던 걸까요?
명말청초, 눈부시게 성장한 중국의 상품화폐경제와 수공업
명나라는 건국초기에는 황폐해진 농업생산을 회복하고, 무너진 관영수공업 체계를 복구하고자 했습니다. 이갑제(里甲制)로 촌락공동체를 편성하고 이를 지주인 이장(里長)과 갑수(甲首)를 두어 조세와 부역의 징수, 치안유지등을 담당시키고 이노인을 두어 제한적인 사법권, 교화, 권농, 상호부조를 담당합니다. 조선의 향리나 아전과도 유사해보입니다.
이 시스템은 농업 중심적으로서 상품화폐경제보다는 농업생산을 발전시키고 백성들이 자급자족할 수 있는 현물경제체제를 지향했다고 평가되기도 합니다. 조선의 무본억말(務本抑末)이 떠오르실 겁니다.
그러나, 명나라 중기부터 시작된 은(銀) 중심의 화폐경제의 발달, 그리고 점진적으로 현물납 형태였던 부세(賦稅)가 은납형태로 점차 전환되면서 자급자족적인 향토경제는 화폐경제와 시장에 노출됩니다. 이는 공납제가 대동법으로 대체되면서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는 조선 후기를 생각하시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명나라 화가 구영(仇英)이 그린 강남 쑤저우를 묘사한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이러한 경제적 변화는 수공업에도 크게 영향을 미칩니다. 중국의 전통적인 관영수공업은 명나라 시기 빠르게 민영수공업으로 점차 전환되어가며, 부세의 은납화에 대처하기 위해 많은 농민들은 가내수공업이나 상품작물 재배에 힘쓰게 됩니다. 은을 구하는게 자급자족적인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힘드니까요.
사실 남송의 경제적 발전이 눈부셨다고 하지만 송나라는 관영수공업 위주의 국가통제경제였던 반면에, 중국의 민영수공업과 민간경제의 본격적 발전은 명나라 시기에 꽃피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 상공업의 발전은 명말청초 시기에 고용노동자를 대량 고용하는 공장제 수공업에 가까운 수준으로 나아갔다고 평가되기도 하죠.
그렇다면 청나라와 조선 간 무역이 17세기 공식화되고 빠르게 확대되던 시기, 청나라의 바늘은 어떤 방식으로 생산되었을까요? 커다란 공방에 고용노동자들이 모여서 산업자본가로 전환된 대상인들의 자본투자 하에 바늘이 대량생산되고 있었을까요?
사실, 명나라 말기나 그 이후 청나라 시대의 중국 수공업은 분명히 상당히 발전된 것은 사실이긴 하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산업자본에 의한 공장에 고용노동자가 고용되어 체계적인 생산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명나라나 청나라가 경제적이나 기술 측면에서 동아시아 최첨단을 달렸다고 해도 말이죠.
대표적으로 눈부시게 발전한 방직업의 경우 농촌의 농민들의 가내수공업이 짠 면직물이나 견직물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중국 상인들은 이를 수집해서 판매하는 과정에서의 거래이익에 주로 의존하며, 상대적으로 협상력이 약한 가내수공업자들은 저렴한 가격에 이를 넘겨주게 됩니다.
----단원풍속도첩의 조선시대 베틀, 국립중앙박물관 참조. 조선의 베틀이 일정 이상 발전하지 못한건 무엇때문일까요?----
----천공개물에 나오는 대형베틀 "花機", 명나라나 청나라 견직업이 항상 조선을 압도했던건 단순히 인건비가 아니라 직조기의 크기나 구조측면에서 질적 우위가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청나라 상인들은 경사(經絲, 세로 방향의 실), 위사(緯絲, 가로방향의 실)와 같은 원료를 가내수공업자 가정인 기호(機戶)에 공급하여 이들이 가공한 견직물을 거두어 들인 후에 임금(工價)를 지급하는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도시에서의 고용노동을 통한 공장제 수공업의 기여는 염색과 같이 제한적인 역할에 그쳤습니다.
명나라나 청나라 상업자본이 산업자본으로 거듭나지 못하고 소농 가내수공업자들을 유통독점과 고리대금으로 착취했던건 아마도 당시 상인들이 정부와 결탁해 소금거래와 같은 특권을 독점하는 과정에서 성장하는 것처럼 권력을 통한 독점과 배타적 성격으로 인해 제대로된 시장경쟁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상인이 근본적으로 사악해서 통제해야 한다는 관점은 상인에 대한 국가통제나 독점권의 보장으로 이어지고 오히려 폐해를 만들기 쉽죠. 조선 전기의 공납제도의 고집스러운 유지는 방납업자의 폐해로 이어졌고 조선 후기에도 유사한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국가권력의 시장경제 통제가 아이러니하게도 상인의 착취적 행태를 오히려 조장한다는게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명나라에서 청나라까지 민간영역에서 상업자본이 산업에 투자되면서 부분적으로 산업자본의 면모를 보여주기 시작한 것도 사실입니다.
진상(晉商, 산서성 상인)이나 휘상(徽商, 안휘지역 상인)과 같은 대표적인 상인들은 광업과 제철, 도자기산업에 대규모 자본을 투자해서 규모가 큰 경우 1,000명 이상의 노동자를 고용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대상에 철사나 바늘 역시 존재했을까요?
그럼 17~18세기 청나라에서 바늘이 만들어지는 방식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산서성 대양(大陽)의 바늘은 어떻게 생산되는가?
조선을 가격경쟁력으로 압도한 청나라 바늘이 대체 어떻게 생산되었나.. 라고 생각하면 다들 무엇을 상상할까요?
----공장에 다닥다닥 앉은 노동자들이 묵묵히 작업하고 있는 1930년대 공장 사진----
공장에 고용된 노동자들이 촘촘하게 앉아서 열심히 작업을 하는 광경을 상상하실지도 모릅니다. 저렴한 노동력, 분업화된 작업공정, 노동자를 감시하고 작업과정을 감독하는 관리자... 뭐 이런거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예상과 다르게 청나라 전역에 팔려나갔다는 산서성 대양의 바늘은 전형적인 가내수공업 방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대양 수제바늘의 마지막 후계자 페이샹난이 바늘을 망치로 두들기고 있다.----
산서성 택주 대양의 수제 바늘제작은 거의 맥이 끊겼지만, 배씨(裴氏) 가문은 대대로 이어진 바늘제작 전통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현재는 대양진(大陽鎮)에서 이 기술을 알고 있는 사람은 6~7명의 노인 외에는 없다고 합니다. 배씨 가문의 8대 계승자인 페이샹난(裴向南)은 사실 본업은 의사고, 쉬는 날에나 관광객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바늘을 만듭니다.
대양의 바늘제작 전통은 명나라로 거슬러 올라가며 배모(裴某)가 시조로 알려졌습니다. 페이샹난은 아마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배모(裴某)의 후예인걸까요? 그가 남경에서 바늘을 만드는 법을 배워서 고향 대양으로 돌아와 현지의 철재를 사용해 바늘을 만들자 고향사람들이 이를 따르기 시작해 300여 가호 이상이 바늘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노년의 장인 리샹루(李雙爐)가 바늘을 열처리하고 있다.----
대양의 바늘제작 방식은 시작 시기나 지금이나 규모 자체는 영세하고 가정 내에서 가족단위로 이루어집니다. 바늘을 가공하고 열처리해서 만들죠. 물론 지금 남아있는 영락한 수준이 대양 전체가 바늘산업에 종사하던 시점과 완전히 동일하진 않겠지만, 대양의 바늘생산이 가내수공업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 것은 확실합니다.
생산단위가 가내수공업에 그쳤다면, 어떻게 생산성으로 조선 바늘을 압도할 수 있었던걸까요?
----지금은 관광지가 되어버린 대양의 옛마을(大阳古镇)----
대양(大陽)의 바늘생산은 대양진 시가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지금 산서성 진청시에 남아있는 옛마을(大阳古镇)은 바늘생산으로 번영한 흔적이라 할 수 있겠죠.
대양 서쪽 마을의 침옹묘(針翁廟) 비문에 의하면 일종의 바늘협동조합인 침행(針行)의 수가 서쪽 마을 중심지에는 39개, 상촌 10개, 중촌 5개, 하촌 9개, 남장 8개, 하동 3개, 만리 3개, 사촌 1개, 장장 1개, 조장 1개에 달했으며, 침행이 아닌 개인 수공업자 가호만 23개로 서쪽 마을에만 100여개의 가호가 바늘 생산에 참여했습니다. 동쪽 마을은 더 많아서 2~300개 가호에 달했다고 하네요.
즉 각각의 생산단위는 가호 단위로 영세한 편이지만, 전체 생산규모는 300~400 가호에 달하며 바늘생산과 관련해서 대양진의 거의 모든 가호가 생산에 참여하였고 일대 마을들도 합류하였습니다. 1가호당 5명만 쳐도 최소 1500~2000명이 바늘생산에 참여한 셈이죠. 침행의 수공업자 규모가 더 크다면 인원은 더 많아집니다.
이렇게 대양에 밀집된 바늘생산단지는 가내수공업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기여하는 또다른 중요한 요소는 바로 대양 인근의 제철산업입니다.
산서성은 중국의 대표적인 철광석과 석탄의 매장지로서 춘추전국시대부터 시작된 중국 제철산업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양이 위치한 택주(澤州), 즉 현재의 진청시(晋城市)는 철광석과 석탄이 대량으로 매장되어 있어서 제철산업의 중심지 중 하나였죠. 솔직히 이렇게 말하면 이곳이 어딘지 알기 어렵죠.
-----택주 대양진이 위치한 현재의 산서성 진청시 위치----
삼국지 병주(幷州)라고 하면 더 이해하기 쉬울까요? 전통적으로 이 지역은 인_구에 비해서 농지가 부족해서, 광산과 제철업이 흥했습니다. 리히토펜 남작은 1869~1870년 대양 인근에서 중국 곳곳으로 대량의 선철(Pig Iron)을 공급하는 제철소들과 막대한 무연탄을 생산하는 탄광들을 목격했습니다.
----명나라 시대 천공개물(天工開物)에 묘사된 선철 생산과 탈탄처리 과정, 리히토펜이 목격한 연철로는 이렇게 젓는 방식의 탈탄처리를 지칭하는 것 같다.----
----1958년에 촬영된 산서성의 전통적인 연철로(Finery Hearth), 녹아있는 선철에 공기를 주입하면서 쇠막대로 휘저어 탈탄처리를 한다. 고대로부터 이어진 초강법(炒鋼法)은 아마 이런 영세한 형태로 청나라 시기까지 지속되었을 것이다.----
그가 방문한 대양 남쪽에 위치한 남촌(南村)에는 수백 개의 주조소와 젓는 방식으로 탈탄처리를 하는 연철로(Puddelöfen)와 정련로(Frischfeuern)가 존재했습니다. 여기서 사용되는 대량의 선철(Pig Iron)은 대양의 시가지 서쪽의 제철소에서 생산되었습니다.
바늘제작에 소요되는 철재는 이 근방의 철광과 탄광에서 공급되며 번성하는 제철산업을 통해 공급됩니다. 탄소 및 슬래그 함량이 매우 높은 선철(Pig Iron)은 연철로와 정련로에서 탈탄처리를 거쳐 바늘제작에 필요한 연철을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바늘의 열처리에 필요한 연료는 인근의 풍부하고 저렴한 무연탄이 활용되었겠죠.
산서성 대양 일대의 대규모의 제철산업과 철광, 탄광은 규모의 경제를 통해 바늘제작의 원재료비를 대폭 줄일 수 있게 도와주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천혜의 조건과 대륙의 물량만이 청나라 바늘의 경쟁력은 아닙니다.
리히토펜 남작이 목격한 대양 남서쪽에 있는 남촌(南村)에서는 철재를 사용해 철사를 뽑는 공방과 철못 제조소가 존재했습니다. 대양의 시가지에서도 철사 제작작업이 진행되었죠. 이는 19세기 중후반에 대양에서 바늘 생산에 필요한 철사의 제작이 바늘제작과 함께 이루어지지 않고 분업화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 저기 촌락에 흩어져 있거나 시가지에 존재하는 소수의 수공업자 가정이 자체적으로 철사를 뽑고, 바늘도 만드는 모든 공정을 집안에서 영세한 방식으로 바늘을 만든다면 생산성은 제한됩니다. 하지만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시가지에 모여서 바늘제작에 주력한다면 분업화로 이어지는건 자연스러운 일일 겁니다.
----북경의 침조묘 사당 수리에 대한 비석에 표기된 사합하조(四合下條), 철사 생산업자를 지칭한다. ----
이전 연재글에서 소개한 1779년 북경의 속수침조유선옹묘비기(續修針祖劉仙翁廟碑記)의 기증자 목록에는 사합하조(四合下條)라는 문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철사제작을 하는 업자들을 지칭하는 표현이라고 합니다.
북경에 설치된 산서성 대양 출신 바늘 관련 상인들이 상호부조 및 제사를 통해 네트워크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당을 건축하는데 철사 제작업자들이 참여했다면, 대양 지역의 바늘생산에 철사제작업자들이 나름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천공개물에서 묘사된 DrawPlate를 통해 철사를 뽑는 삽화----
이러한 분업화는 물론 대양의 옛 시가지에 일종의 바늘생산단지가 구축된 것이 중요한 원인이겠지만, 대양의 바늘제작이 단순히 제조에 그치지 않고 북경의 바늘유통에 직접 진출할 정도로 상업자본의 참여가 이루어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북경의 침조묘 건립에 기여한 이들 중 1순위로 비문에 기록된 괴산호(魁山號)는 산서성 택주의 상점 이름이며 1762년 택주현 남촌진 서욕촌(澤州縣南村鎮西峪村)의 보집로신전비기(補葺爐神殿碑記)의 비석에도 1위 기여자로 3천문을 기부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괴산호와 같이 북경의 바늘유통을 주도했을 가능성이 있는 상인들이 이런 역할을 수행했을 겁니다.
산업화 이전에 발생한 이러한 상업자본의 산업분야로의 진출방식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선대제(先貸制, Putting Out System)입니다.
선대제란 각각의 영세한 수공업자들에게 자본과 유통망을 가진 상인이 생산에 필요한 원료를 공급하고, 수공업자들이 제품을 만들어 상인에게 납품하면 상인은 수공업자에게 임금을 지불하는 것을 말합니다. 유럽에서도 산업화 이전까지 선대제 수공업이 주류를 구성했습니다.
상업자본이자 바늘유통업자인 침행(針行)의 상인이 철사를 제작한 수공업자들에게서 철사를 구매하고 석탄이나 공구등을 공급하면 바늘의 가공과 열처리가 분산된 각 영세한 가내 수공업자들의 가족에 의해 이루어지고, 생산된 바늘은 침행의 상인들이 독점적으로 유통하게 되는거죠. 침행의 상인들은 가내 수공업자들에게 바늘의 가공비를 지급하게 됩니다.
위쪽에서 소개한 청나라 비단의 가내수공업과 상인들의 원료제공 및 독점적 유통과 유사하게 바늘의 제작과 유통이 이루어졌을 것임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은 어떻게 청나라 바늘의 생산성을 개선했을까요?
상업자본인 침행(針行)은 각 개별 영세한 가내 수공업자들과 달리 탄광이나 제철소에서 석탄과 연철을 대량으로 구매할 수 있습니다. 이는 침행의 협상력을 증가시켜 보다 저렴하게 원자재를 구매하고 원자재의 품질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왔을 겁니다.
----선대제 수공업에서 상업자본은 우월한 협상력을 가진다. 정책주간지 공감의 "이슈를 품은 역사 이야기, <메이커의 시대>" 참조----
침행(針行)의 우월한 협상력은 철사와 바늘을 제작하는 수공업자를 대상으로도 발휘될 겁니다. 청나라의 비단 상인들이 그랬듯이 원재료의 공급과 유통을 독점하는 대양의 바늘 상인들은 수공업자들에게 지급할 품삯(工價)을 후려칠 수 있었겠죠. 또한 유통을 담당하는 입장에서 일정 이상의 품질을 달성하지 않은 바늘은 납품을 거절하고 품삯을 깎았을 겁니다.
리히토펜 남작은 대양의 바늘 수공업자들의 작업여건에 대해 기록을 남겼습니다.
----청나라 동전 동치통보(仝治通寶)---
바늘은 엄청난 노력과 정성에 의해 만들어진다. 바늘의 가격은 100개에 20페니히(Pfennigen, 아마도 청나라 동전)에 불과하며 사람들은 간신히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Ferdinand von Richthofen's Tagebucher aus china
이러한 과정을 통해 청나라 바늘의 제조원가는 절감되고, 품질은 개선됩니다. 모두가 행복하진 않겠지만요.
청나라 바늘의 강력한 가격경쟁력은 이러한 산서성의 광공업 기반과 조선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의 대규모 바늘생산지의 형성, 그리고 생산성을 개선시키는 상업자본의 참여에 의한 분업화와 착취적 지배구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조선 사신단이 열심히 바늘을 구매한 방균점(邦均店)의 바늘의 생산여건이나 방식은 대양과 유사했을까요?
----베이징 동쪽에 있는 방균점과 남동쪽의 탕산시의 거리는 77km 정도
명나라 시기 산해관 일대인 현재의 진황다오시(秦皇岛市)의 루룽현(卢龙县) 일대에 대규모 철광이 개발되어 있었고, 현재의 탕산시(唐山市)는 명나라 시절부터 탄광의 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적어도 조선보다는 유리했을 가능성이 크겠지만 확실히는 알 수 없습니다.
자 이렇게 청나라 바늘이 저렴했던 이유는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선의 바늘이 더 비싸야 할 이유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조선도 이 시기쯤 오면 선대제 수공업 뿐만 아니라 공장제 수공업도 등장했다고 이야기되기도 하니까요.
조선의 바늘이 청나라보다 더 저렴하게 생산되지 못한 원인은 대체 뭘까요?
조선의 제철산업의 장애물 : "공납제"와 "국영화"
먼저 조선의 철광과 제철산업의 상황부터 고려해볼까요?
고려는 민간인에 의한 철광의 개발과 생산을 금지하지 않는 대신 일정한 철물을 공납하는 방안을 사용했지만, 조선은 건국 직전에 정권을 장악한 시점부터 관용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을 우선해 광산을 국가가 통제하고자 시도했습니다. 조정의 가용 역량이 제한되어 완전히 가능한 일은 아니었지만요.
기본적으로 조선 전기의 철광채굴 및 제철은 각 고을에 공납제를 기반으로 조정에 바칠 철을 할당하는 염철법(鹽鐵法)과 국가가 직접 통제하는 철장(鐵場)을 설치해 농한기에 농민을 동원해 채굴 및 제철에 투입하는 철장도회제(鐵場都會制)로 진행됩니다. 주로 생산량이 풍부한 곳은 국가가 직접 통제하고, 그 이외의 지역에서는 일정한 철을 공납하는 방식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조선 농민은 농사만 지을수가 없습니다. 철도 채굴해서 바치거나 제철작업에 동원되어야 합니다. 김홍도 단원풍속도첩의 농민들, 국립중앙박물관 참조---
철물(鐵物)을 취련(吹鍊)하는 것은 중요한 일인데, 근년 이래로 서울과 지방의 용도(用度)가 많아져서 백성들의 조판(措辦)이 해마다 정지되지 않으니 내가 매우 염려하고 있다. 그것을 호조(戶曹)로 하여금 서울과 지방의 철물(鐵物)의 실제 수량과 해마다 바쳐서 쓰는 수량을 상고하여 살펴보고, 혹은 수년(數年)이든지, 혹은 1, 2년이든지 취련(吹鍊)을 정지시키도록 하고, 1년 동안 정지할 수 없다면 혹은 봄이든지 혹은 가을이든지 한 차례를 정지시키는 것도 또한 좋을 것이다. 봄철에는 농사를 방해하여 백성을 해롭게 하니, 더욱 이를 정지시켜야 할 것이다.
문종실록 2년 2월 13일 1452년
양자는 장단점이 있는데, 공납으로 철물을 바치도록 하면 농민들은 철을 직접 캐거나 사서 바쳐야 하니까 힘들고, 농한기에 철광과 제철에 강제로 동원되는 것도 짜증나긴 마찬가지였겠죠.
전자는 공납을 할당 감독하는 향리 및 아전과 방납업자들이 날뛰고, 후자는 철장을 감독하도록 임시로 지방에서 관찰사에 의해 선임된 감치관(監冶官)들이 농민을 착취해서 폐단이 많았습니다. 15세기 내내 이렇게 해야한다 저렇게 해야한다 논란이 많았죠.
1492년(성종 23년)에 결국 이 제도들은 각읍채납제(各邑採納制)로 대체됩니다. 철광을 보유한 군현에 한정해 철을 공납하도록 하는 제도죠. 이전보단 나아졌을런지 모르지만 이 제도 역시 농민들에게 부담을 주는건 마찬가지였고, 국가통제경제는 민간경제에 패배하는 법입니다. 16세기 후반에는 각읍채납제도 결국 붕괴, 민영 철장(鐵匠) 및 수철장(水鐵匠)을 통한 공납의 대납이 일반화되고 점차 조선 조정도 필요한 철을 이들에게서 구매하기 시작합니다.
----현대의 님비현상과는 달리, 인근에 철광이 발견되는건 조선 농민에게는 생계의 위기였을런지도 모릅니다.----
공납이나 국가의 직접적 통제에 의존하는 광공업 구조에서는 철광의 개발과 제철산업이 빨리 발전하기 어렵습니다. 철광을 개발하면 주변 농민들은 고된 부역에 동원되거나, 철을 공납으로 바쳐야 하는 부담이 증가할 테니까요. 당장은 국가가 편하고 저렴하게 철을 구할 수 있었겠지만요.
중국 산서성에서 광업과 제철, 바늘제조업이 발전한건 그걸로 일대 주민들이 수입을 얻을 수 있고 농업보다 메리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이를 합법적인 노동동원이나 강제수취의 대상으로 삼는 순간 철광의 개발이나 제철산업을 육성하게 하는 유인요소가 사라지는 셈이죠.
---전설 속 하나라의 우(禹) 임금이 9주를 나누어 공물을 바치라고 해서 조선의 농민들은 대동법이 시작되기까지 고생꽤나 했습니다.----
토질에 따라 공부(貢賦)를 정하는 것은 고금의 아름다운 법입니다. 우(禹)임금이 9주(九州)를 나누어 그 공부(貢賦)에 등급을 둔 것은 대개 지방의 토질에 알맞은 것에 따라 거두자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조정에서도 토질에 따라 공부(貢賦)를 거두는데, 그 제도는 오래됩니다.
태종실록 13년 11월 5일(1413년)
조선의 철광 및 제철산업의 발달은 국가가 산업을 직접 통제하고, 유학의 세계관에 기반한 임토작공(任土作貢)의 원칙을 고수하려는 조선 건국세력의 노력에 의해 지연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공물을 대납하는 방납업자는 고려시대에도 이미 있었을 정도였으니까요.
무본억말(務本抑末)을 위해서 전업 광부가 증가하고 제철산업이 발전하기보다는 농민이 농업을 영위하면서 농한기에만 잠깐 채굴하거나 제철에 임해서 국가가 필요한 철을 바치도록 하는게 아름답게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농민들은 좋아하지 않았겠지만요.
물론 국가에 의한 통제는 필연적으로 민간경제에 의해 대체될 수밖에 없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국가통제를 추구하는 경향은 왜란과 호란, 그리고 대동법의 도입 이후 비교적 약화됩니다만 조선의 민영화 광산의 개발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18세기 후반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1651년(효종 2년)에 조선 조정은 상인자본을 광산에 투자하는 것을 유도하고 세금을 거두기 위한 설점수세법(設店收稅法)을 도입하려 하였으나 완전히 성공하진 못했습니다. 17세기 조선에서 광산의 개발에서 민간의 역할이 확대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관영산업의 틀을 벗어나려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호란 이후 비대해진 중앙의 오군영과 지방군영들이 무기의 생산을 명분으로 해서 자체 재정조달을 위해 앞다투어 광산개발에 뛰어들었거든요. 이는 조선후기 광업 발전에 기여하긴 했지만 동시에 이를 방해하기도 했습니다.
---정조시대 화성원행반차도의 훈련도감 보병 대열, 조선후기 군영들은 재정을 자체조달하는 거대한 경제단위였다.---
훈련도감을 비롯한 중앙군영과 지방의 감영, 병영, 수영이 무기를 생산하고 자체적으로 철물을 조달하기 위해서 광산을 발견한 이를 감관(監官)에 임명해 포상을 주고 광산을 개발시키면서 주변의 농민들을 징발해서 모군(募軍)으로 삼아 부역을 통해 채광과 제철이 이루어집니다. 전문기술자인 장인의 경우에는 임금이 지급되었으나, 동원된 농민은 임금 대신 부역과 잡세의 면제가 이루어졌습니다.
군영이 철을 채광, 생산하는 철점(鐵店)은 전국 각지에 설치되었는데, 황해도 재령, 경상도 울산, 충청도 남포, 강원도 영월등 지방 각지까지 확대됩니다. 17세기 말에 가서야 군영의 관할하는 광업 체계는 부역 방식이 아니라 사적으로 생산하는 민간 광산의 점진적 허용이 이루어지기 시작해 군영이 가진 광산들이 민영화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18세기에도 대체로 광산은 호조의 관할하에 부상대고(富商大賈)들이 광산을 관리하는 별장(別將)으로 파견되어 관리하고 세금을 걷고 있었습니다. 호조는 생산시설과 자재등 모든 경비를 전담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감사와 수령의 묵인 하에 지방에서 은광업자의 불법적인 채굴이 확산되긴 하지만 여전히 호조에 의한 단속 대상이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광업의 민영화는 영조 51년(1775년)에야 별장제가 혁파되면서 18세기 후반에야 가능해지죠.
조선 후기의 광공업은 이전에 비해 무척 발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민영화가 일반적이지 않았고, 임금노동자의 고용은 17세기에야 시작됩니다. 이는 채광 및 제철산업의 기술축적과 생산성 개선을 방해했을 것입니다. 상업자본이 투입되어 광산의 운영이 발전하기 시작하는 시점은 18세기 말에야 가능해진다는거죠.
이러한 요인은 아마도 조선 내수시장에서의 원재료로서의 철의 공급량이 늘어나 가격이 떨어질 수 있도록 생산성이 개선되는 것을 지연시켰을 겁니다. 또한 중국에서 사용되던 원시적인 연철로 같은 제철기술의 발전이 조선에서 자체적으로 나타나기 어렵게 만들었겠죠.
이런 청나라와의 가격 경쟁력 열세를 더 악화시킨 또 다른 요인은 아마도 석탄일겁니다.
제철 연료로서 석탄은 조선에서 언제부터 사용되었을까?
산서성 대양의 바늘의 저렴한 원가에 있어 풍부한 석탄의 역할에 대해선 위에서 소개했습니다. 중국에서는 석탄 사용이 당나라 시기에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고 12세기 송나라 시기에는 가정용 연료로 사용할 만큼 널리 보급되었습니다. 제철에 석탄을 사용한 것 역시 매우 오래된 전통이였습니다.
유럽에서는 5세기경 영국에서 석탄을 채굴하였으며 9~10세기 독일에서 석탄의 채굴과 상품거래가 시작되고, 산업혁명의 요람인 영국에서는 1239년 뉴캐슬에서 상업적인 석탄 채굴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한반도에서는 탄맥이 꽤나 많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채굴과 활용은 조선 후기에 와서야 나타납니다.
31년 봄 정월에 모지악(毛只嶽) 아래의 땅이 불에 탔는데, 너비가 4보(步)이고 길이가 8보이며, 깊이가 5척이었다. 10월 15일에 이르러서야 불이 꺼졌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평왕 31년(609년) 1월
한반도에서 석탄의 존재를 추측할 수 있는 최초의 자료는 삼국시대에 등장합니다. 이 위치는 아마도 경북 포항의 갈탄 매장지역이라고 추측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후로도 석탄의 사용을 추측할만한 자료는 거의 찾기 어렵습니다.
----고려시대 침몰선인 태안 마도 1호선 내부와 주변에서 발견된 석탄----
태안 마도해역 해저에서 인양된 13세기 고려시대 마도 1호선의 내부와 주변에서 49.5kg의 석탄이 발견되었습니다. 5cm 내외의 작은 덩어리부터 30cm 내외의 석탄 덩어리가 존재했습니다. 마도 1호선은 목간 및 죽찰을 통해 고려선박이란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석탄들은 개경으로 운송되는 대상이었거나, 또는 선체 하부에 설치된 화덕에서 조리용 연료로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장존의 "고려시대 선체출토 석탄의 재료학적 특성 및 국산 석탄과의 비교 연구"에서는 이 석탄의 분석결과 포항 인근 장기지역의 갈탄과 유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바 있었고, 이는 고려시대에 석탄이 부분적으로나마 사용되고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의 석탄이 연료로서, 특히 제철연료로서 사용하였음을 추정할만한 사료나 이외의 발굴결과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본청에서 만드는 군기(軍器)는 북영(北營) 및 인경궁(仁慶宮)에 국(局)을 개설하고 만드는데, 탄석(炭石)을 계속 대기가 어렵습니다.
승정원일기, 인조 3년(1625년) 11월 14일
실록에서 탄석(炭石)이란 표현이 무기제작용으로 소요되는 연료를 표기하는 경우가 나타나긴 하지만 이는 석탄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동시기 미석(米石)이란 표현은 쌀섬이란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이죠. 탄석(炭石)은 숯을 가마니에 넣은 1섬 단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시대 최초의 석탄에 대한 문헌기록은 1590년(선조 23년)에 등장합니다. 평양관찰사 윤두수가 편찬한 "평양지(平壤志)"에 따르면 "평양성 동쪽 10리 지역 문수봉에 석탄소가 있고, 정동 10리 예미현 및 동북쪽 30리 고방산 등지에 모두 석탄이 난다. 불이 붙어도 연기가 나지 않으므로 무연탄이라고 한다."고 이야기하죠. 이는 석탄이 일부 지역에서는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러한 석탄의 채굴과 사용은 일반화되지 않았습니다.
평양부 동쪽 삼십리의 미륵현에 검은흙이 있는데, 도사(都事) 허관(許灌)이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석탄(石炭)이다. 우리나라는 석탄을 사용할 줄 모르니 한탄스럽다."
속평양지(續平壤誌) 윤유(尹游) 1730년)
온돌방 아래 흙 화로를 놓았으니 부리가 좁아 겨우 다관을 놓을 정도였으며, 석탄(石炭)을 피웠으니 석탄이라 하는 것은 멀지 않은 산에서 나는데, 처음 땅에서 파내면 검은 흙 같다가 땅 밖에 나오면, 굳어 돌과 같으니, 불을 피우면 오래 사그러지지 아니하고, 물을 뿌리면 더욱 잘 피니, 음식 만들 때나 온돌에 불 넣을 때 이것을 쓰는 곳이 많으니 매우 중요하고, 타고 남은 것을 물에 축여 나무로 틀을 만들어 벽돌 모양같이 박아 내어 도로 피우면 나무 숯보다 화기가 좋으니, 심양부터는 이것이 아니면 불 때기 어렵더라.
무오연행록 1798년(정조22년) 12월 4일
매탄(煤炭)은 일명 석탄(石炭)이라 하고 일명 오금석(烏金石), 석묵(石墨), 철탄(鐵炭)、초석(焦石)이라고도 한다.
(생략)
우리 동방에서는 옛부터 알려진 적이 없어서 모두 그것이 뭔지를 모르고 다만 들어봤을 따름이다. 경기(畿甸) 양근(楊根, 현재 양평군)에 소설산곡(小雪山谷)에 석탄이 있고, 북쪽에서는 단천(端川), 회령(會寧)、온성(穩城)、종성(鍾城)、경성(鏡城)등의 땅에도 있다.
(생략)
우리 동방은 사물을 연구하는 것이 서툴러서 천하가 일용하는 물건에 있어서 홀로 놔두고 모두 사용하지 않으며, 그 사용하는 방법을 연구하지 않는다. 어찌 애석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오주연문장전산고 매탄변증설(煤炭辨證說)
즉 조선에서의 석탄 사용은 아마도 일부 지역에서 영세한 규모로 채집되고 사용되는데 그쳤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중국에서 사용하는 석탄(石炭)과 한반도 내 일부 지역에서 이것이 채집되고 있는 것을 소수는 알고는 있었지만 널리 보급되어 사용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격적인 석탄의 상업적 채굴은 개항 이후인 1885년 평안감사가 평양 인근의 양단탄전에 대한 개발권을 빌려주고 임차료를 받아 국고수입으로 삼은 것이 최초이며, 근대적 석탄개발의 시도는 1896년 러시아인 니시첸스키가 함경도 경성 및 경원의 석탄채굴권을 획득한 것이지만 실패로 끝나고 실재 채굴은 20세기로 넘어가 평양에서 1903년에야 시작됩니다.
막대한 연료가 소모되는 제철산업에 필요한 석탄의 상업적 채굴이 19세기 후반에도 시작되지 못했다는 것은 제철연료가 전적으로 목탄에 의존함을 의미합니다. 조선 후기 화전으로 인해 삼림파괴가 가속화된 것을 고려할 때 조선의 제철과정에서의 연료비가 시간이 갈수록 높아지고 철의 대량생산을 방해했을 것임을 추측할 수 있죠.
석탄의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은 건 조선에서 바늘에 사용되는 연철의 원재료비 뿐만 아니라, 바늘의 열처리에 필요한 연료의 가격도 올려놓았을 겁니다.
---메이지 시대 1877년에 출판된 일본의 석탄 채굴 목판화 大日本物産図会 同国石炭山之図---
중국보다는 훨씬 늦지만 일본도 에도시대인 17세기 후반에 가정용 연료로 소규모의 석탄 사용이 시작되고, 1721년 야나가와번에서 현재의 큐슈 오무타시 히라노산(平野山)에서 석탄탄광의 개발이 진행되는 등 개항 이전에 석탄의 상업적 채굴이 시작되었습니다. 다만 제철연료로의 사용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일반적이지는 않았습니다. 목탄보다 질이 낮아 철기의 품질을 떨어뜨렸다는 기록만 남아있다고 하네요.
조선에서 석탄의 보급이 늦어진 것은 조선의 광산 개발에 대한 국가통제 정책의 영향이 아닐까 싶습니다. 현지 주민들이 연료용으로 채집하는 수준을 넘어선 상업적인 광산개발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으니까요.
다만 이것은 원재료비의 문제일 뿐, 가공비용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 바늘은 원재료가 엄청나게 많이 필요한 것은 아니므로, 가공비용의 비중이 클 수밖에 없으니까요. 당시 바늘의 제작에서 재료비 비중에 대한 자료를 구할 수 없지만, 18세기 말 영국을 기준으로 할 경우 바늘의 원재료비는 30%에 불과했습니다. 동력기계를 사용한 결과라는걸 고려해야겠지만요.
그렇다면 조선 후기 수공업 수준은 바늘 생산의 가공비용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빅토다 빅토
빅토다 빅토
관료가 경제를 망친다
이 시리즈 책으로 언제 나옴?
중국 쟤네들은 산업혁명때 영국 면직제품보다 사람 손으로 만든 면직제품이 더 쌌다며
바로 그거였네.. 중국의 마법 ㅋㅋㅋㅋ
역시 인력이 기계보다 싸다니까
그리고 중국인들이 공장돌려가면서 찍어낸 제품은.....
고맙다
저렇게 상업이 발전해도 결국 나라 ㅈ된거 보면 상업전통 차이로 일본이 근대화에 유리했다는 소리는 역시 일뽕 헛소리가 맞다.
선대제 수공업 동123양에서 가장 발전하게 에도막부임, 이자율도 가장 낮고 안정적이였음
그럼 빅3 식 조선 공업화는 불가능했단건가 - dc App
가능합니다. 외부와의 교류를 하면 생각보다 기술도입이 생각보다 엄청 빠르게 진행됩니다. 다만 기존의 상업자본이나 산업의 성격에 따라 적응속도는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 조선의 기존 상업자본과 산업은 개항 이후에 급격하게 몰락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일본의 전통 상업자본은 상대적으로 더 잘 적응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경우는 매판이라 해서 외국인 자본의 대리인 역할을 하던 이들이 자본을 축적해 산업자본으로 성공하고 이를 통해 외국 수입품을 대체해 나가는 것을 보면 아예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소개하겠지만 청나라 바늘산업은 개항 후에 순간에 몰락하고 일본 바늘산업은 그보다 빠르게 적응해서 대응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근데 조선은 왜 공업 발전을 억제한거? 진짜 유학 사상 때문에 발전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거임?
무본억말이란 사상적 기반이 영향을 미친건 확실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국가에 필요한 자원이나 제품을 대가를 지급해서 구매하기 보다는 "노동력"을 수취해서 만드는 방식을 사용하는데 이 과정에서 국가와 수공업자 간에 예속적인 관계가 형성됩니다. 국가는 세금을 늘리지 않아도 저렴하게 국가의 수요를 충족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하면 수공업자가 착취당하면서 발전의욕을 감소시키고 비효율이 발생하죠. 공업 발전을 막으려는 굳센 신념과 정책의 결과라기 보다는 당시 조선의 불충분한 경제적 발전 단계, 조선 지도층의 철학적 사고방식이 얽힌 문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냥 조선 자체가 공산주의의 ABC인 집산주의라 그런거임
조선을 승계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왜 그꼬라지인지알겠다